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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38 - 핵심 위원과의 논쟁

운영자 2019.11.25 11:15:19
조회 238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138


핵심 위원과의 논쟁


위원들 가운데 박연철 변호사가 있었다. 재야의 온화한 지도자 역할을 해온 사람이었다. 광주서중을 나온 그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 시위군중을 따라 갔다가 광주시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본 것들을 ‘시민의 날들’이라는 제목의 글로 남겨 광주 5·18기록관에 기증했다.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재야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회원으로 30년간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쓰고 있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고 사법연수원 시절을 함께 했다. 짙고 검은 눈썹에 조용한 성격을 가진 그는 후배들로부터 존경 받고 있었다. 그의 활동은 깊은 뿌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번은 운동권 출신 여당대표가 그를 보자 선배라고 깍듯이 호칭하면서 까무러칠 듯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법조인끼리의 등산모임이 끝난 후 청계산 자락의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물을 내려다보며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엄(嚴) 변호사는 말이야. 능력도 있고 자질도 있는데 딱 한 가지가 빠졌어.”

그 뒤는 말을 아꼈다. 의미하는 게 뭔지 막연하게 느껴졌다. 나의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이 약하다는 의미 같았다. 그의 화두는 ‘민족자주독립정신’이었다. 대법원의 추천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의 핵심위원이 됐었다. 나는 친일로 통보된 사람들의 변호인이 되어 그와 마주하게 됐다. 그는 위원들 사이에 영향력이 강하다는 평가였다. 소송에서도 그가 뒤에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지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공식적으로 그가 나의 면회를 거절할 사유는 없어졌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그리고 동종(同種)의 변호사 신분으로 돌아갔다.

오후 2시의 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날 나는 교대역 부근의 빌딩 7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어서 오시오.”

개량한복을 입은 박 선배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길게 자란 백발이 목까지 내려왔고 눈썹에도 흰털 몇 올이 나 있었다. 

“형님, 아니 언제 이렇게 머리에 서리가 내렸죠?”

내가 물었다. 

“좀 아팠더니 이제 노인이 됐어.”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 보였다.

“이제 다 끝난 일이지만 허심탄회하게 논쟁을 하러 왔어요.”

“무엇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죠. 그동안 변호사로서 직업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공격했지만 이제 마음을 열고 뒤풀이를 해보고 싶습니다. 선입견 없이 위원회에 흐르는 사상이나 형님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시다면 뭐 좋죠. 잠깐만.”

그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쌓여 있는 자료 쪽으로 시선을 돌려 뭔가 찾고 있었다. 위원회에 있을 때의 자료들인 것 같았다. 그가 프린트된 서류철 한 권을 꺼내와 앞에 놓았다.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탁자 위에 놓고 조용히 나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이건 나의 입장과 소견에 대한 논고를 작성해서 위원회에 제출한 논고문이야. 애산학보에도 게재했어. 이번의 친일반민족행위 판정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서 다시 이러지 말자는 교훈을 남기기 위한 거지. 1949년도 같이 위원회가 생존자를 형사 처벌하기 위한 건 아니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한일합방 무렵부터 우리 민족을 가지고 논 일본의 고도의 통치기술을 보고 혀를 둘렀어. 한번 얘기 들어볼래? 나도 모르고 있었던 게 많아.”

“그게 어떤 거였는데요?”

“구한말 의병 토벌 당시부터 조선인 출신 밀정을 조직적으로 대량으로 키웠지. 밀정들이 정찰대까지 조직해서 의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의병을 진압하게 했지. 경찰권이 넘어간 때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인 순사들을 임명해 움직이게 했어. 최동섭이란 인물은 경찰계급인 경부로 있으면서 신돌석부대의 의병을 신문하고 투항을 종용했었지. 김광현이라는 인물은 순사로 있으면서 의병장 김현봉을 체포했어. 일본인들은 합병 전에 자기네를 지지하는 조선인 단체를 만들어 합병과 일본의 통치를 지지하게 했지. 일진회(一進會)는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할 것을 주장했지. 합병에 가까워서는 對국민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순종 황제에게 합병하자는 상소를 했지. 그러자 그 의견을 따르는 여러 단체가 지지여론에 합류한 거야.”

일본 당국자 자신도 합방 때 국내에서 반대여론이 크지 않은 걸 보고 놀랐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가 설명을 계속했다.

“합방 이후 일진회는 의병 진압을 강구하라는 선언서를 작성해서 발표했지. 의병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고종황제의 퇴위를 지지하고 이완용(李完用) 내각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어. 일진회는 자위단을 만들어 의병을 수색하고 경계하는 활동을 했지. 합병 후에도 여러 친일 조선인단체가 생겼어.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주장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했지.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같은 단체는 단군(檀君)과 일본의 시조신(始祖神)이 남매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신궁제도를 도입하자고 했어. 조선인 전직(前職)관료나 귀족 대지주 실업가들은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를 만들어 일본 통치의 현실을 지지했지. 동시에 지능적인 대규모 회유책이 있었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하고 귀족제도를 만들어 독립성이 강한 지방의 봉건 영주들을 귀족에 편입시켰지. 귀족제도가 어떻게 좋았는지 반발이 없었어.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황실과 대신을 귀족으로 만들어 체제 내로 끌어안은 거야. 그들에게 토지, 임야의 불하에 특권을 주고 자제교육을 위해 별도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작위를 세습하도록 해 주었지. 조직적으로 구한말 기득권층을 그대로 보호해 줬더구만. 구한말의 관리도 그대로 등용하는 정책을 수행했지. 조선인 관료 출신들의 항일(抗日)행위를 방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친일관료를 양성하는 거였지. 일제 초기 조선인 고위 관료들은 이전의 관직에 해당하는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적 신분을 보장받은 경우가 많아. 일제는 민중과 직접 접촉하는 도지사, 군수에는 조선인을 기용했지. 군수는 거의 다 조선인이었어. 일제는 조선에 민의(民意)를 반영하는 것처럼 꾸밀 필요가 있었어. 중추원(中樞院)을 만들어 대한제국 말기의 고위관료들을 임명했지. 

그뿐 아니야. 일제는 조선사회의 엘리트였던 유림(儒林)을 회유했어. 성균관 대신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해서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유교의 충효 이념을 유지시켰지. 일본 학자들이 경학원에 와서 ‘조선왕실이 일본 천황을 모시는 것과 조선이 중국 황제를 이중군주로 모시던 것의 차이가 없다’는 강연을 하기도 했어. 중국보다 과학과 경제가 발전한 일본 쪽과 친한 게 현실적 이익이 많다는 논리였지.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유림들이 스스로 일본 국왕을 칭송하는 시문(詩文)을 지어 바치기도 했지. 일제 당국은 양반들의 지위도 보전해 줬어. 더 파격적인 건 일찍 일본에 주소를 둔 조선인에게는 특별한 법적지위도 보장해 줬지. 1925년 이후에는 참정권을 줬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일본의 관료나 지방관료로 활동할 수 있었어. 박춘금(朴春琴)이란 인물은 1932년 일본 중의원선거에서 당선돼 일본의회 의원이 되고 이어서 1937년 총선거에 당선되어 9년간 의원을 했지. 그는 일본 의회에서 조선의 참정권운동, 징병제 실시를 주장했어.”

한일합방 후 3·1운동까지 사회가 조용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들었다. 그의 유연한 설명은 계속됐다.

“일제는 하층계급도 회유했지. 먼저 조선에서 승려들은 그동안 천민으로 취급되어 도성 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었지. 일제는 승려들의 그런 제한들을 다 풀어버리고 오히려 대접했어. 조선 불교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시대적 억압과 천대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신분으로 상승한 거야. 일본의 불교가 왕성한 면이 있잖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불교를 단일조직으로 만들어 힘을 몰아주었지. 조선 불교 조계종이 건설되고 종정(宗正)의 유시가 전국 사찰에 가도록 했지. 그 대가로 많은 사찰은 출전군인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법회를 열기도 하고 일본 불교와의 연합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어. 조선에서 천시받던 백정이나 기생들도 단체들을 만들게 해서 지원해 줬어. 백정이 공무원, 특히 경찰이나 헌병이 된 경우도 많지.”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게 저항을 막는 고도의 통치 같았다.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로 옮겨가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신흥무관학교도 세우고 말이죠. 그런 독립투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일제는 합방 후 조선인 밀정을 더 많이 키웠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일본 외무성에서도 외곽단체와 밀정을 많이 길렀어. 밀정들은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체포, 재만(在滿) 조선인 사회의 동향파악을 담당했지. 간도의 경우 조선인의 인구비율이 8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조선인이 많았어. 총독부는 처음에는 이 지역에 조선인 경찰을 배치해서 항일운동을 막았지. 간도파출소에서는 일본을 배척하는 조선인을 체포하기 위해 감찰과와 경무과의 직원을 조선인으로 배치했어. 

선우갑이란 인물은 조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 경시청 소속 고등계 형사로 근무하면서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당시 그들의 검거를 주도했어. 그리고 중국 상해와 미주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을 정탐해서 보고하는 활동을 했지.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대구를 시작으로 그 진압을 위한 조선인 단체들이 만들어졌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걸 탄압하기 위해 군·면(郡面) 단위로 조직한 자제단(自制團)이 독립운동을 방해했지. 김기억은 순사보로 재직하면서 3·1운동 관련자를 체포했지. 

1919년 이후에 만주는 일본 외무성 소속 경찰이 활동하게 되지. 조선인 경찰은 일본 외무성에 소속되면서 조선인 거주지역의 정보활동을 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체포하는 일을 했지. 일본인 출신은 조선인 지역에서 눈에 띄니까 조선인 출신 경찰이 활동을 한 거야. 또 조선인 경찰 출신을 만주의 각 현에 책임자로 두고 무장조직을 만들어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게 했지. 조선인 경찰을 통해 조선인을 통제한 거지. 경찰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그 다음으로는 친일반민족적인 단체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통제했어. 화북(華北)지역의 협려회(協勵會),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지역의 계림회(鷄林會)는 일제에 협조하는 조선인 단체였지. 

배정자(裵貞子)는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밀정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동경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일본 총리대신, 외무대신, 조선총독에게 보고했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관계가 깊은 밀정의 거물이었지. 박용환(朴容煥)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항일독립세력의 활동과 한인들의 동정을 보고하는 밀정노릇을 했지. 선우순은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 회장을 하면서 사이토 총독에게 여러 가지 정탐보고뿐 아니라 12년간 중추원 참의를 했었지. 이희간(李喜侃)은 조선총독부의 밀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와해공작과 독립지사 회유공작을 하고 그 대가로 공작금과 사업이권을 받은 사람이지.”

“어떻게 그런 비밀공작을 알았지요?”

“일제의 공문서나 훈포상 기록에서 밀정의 정확한 신분과 행위를 알 수 있었어. 각종 경찰관계 문서나 회고록 일기에도 그런 사실이 남아 있더구만. 우리 민족 자체에 부끄러운 사람이 많아. 그래서 이 기회에 그 진상을 규명해 두자는 거지.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말이야.”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했죠?”

“귀족이 되거나 중추원참의로 임명된 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로 봤지. 그 다음은 헌병, 경찰, 군인, 관료 등 여러 분야가 되겠지. 친일반민족행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세부적으로 21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 분야별로 심층적으로 분석했지. 일제강점기 전 분야에 걸쳐 체계적으로 했어. 범주로 나누면 구한말 매국행위, 항일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탄압한 행위, 일제 통치기구에 참여한 행위, 경제나 문화침탈에 협력한 행위, 대륙침략에 협력한 행위로 나눌 수 있겠지. 이번에는 좀더 소급해서 구한말 의병운동이 벌어질 때 의병 탄압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했어. 자체 인력으로 부족한 경우 전문연구가의 도움을 받았지. 위원회는 나름대로 치밀한 자료조사와 검증 그리고 엄격한 심의과정을 통해 1007명의 친일반민족행위의 사실을 확정했어.”

“일제 하에서 헌병이나 경찰, 군인, 관료, 판검사를 그 체제에 협조하는 첨병으로 봤겠군요.”

“당연히 그렇지. 조선인 헌병의 경우는 1908년 조선인 헌병 보조원 제도가 생긴 후 연평균 4500명 정도가 채용됐었지. 그 사람들은 의병투쟁과 3·1운동 당시 시위군중을 직접 탄압했지. 친일파의 전형이야. 그런데 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아. 위원회는 자료가 없으면 친일반민족행위로 지정하지 못했어. 아쉬운 점이었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는 1910년 합병 때 무관학교가 없어지니까 자진해서 일본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된 사람이 있더구만. 또 일본에 유학한 초기 유학생 중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 장교가 된 경우도 있고 조선의 왕족이 일본 황실의 관례에 따라 일본의 무관이 된 경우도 있고 말이야. 그렇지만 일제는 1927년까지 조선인의 육사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어. 조선인으로서 육사에 입학해 졸업한 경우는 1933년 이후에 나타났지.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의 경우 전쟁에 참여한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며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더라구. 받아들이지 않았지. 

판검사의 경우 구한말 의병운동 재판에 법관으로 참여한 인물들, 3·1운동 관련재판에 참여한 판사들,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사건을 심리하거나 신간회(新幹會) 사건 같은 민족운동에 관련된 재판을 한 판검사들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거지. 그렇게 사법분야에서 32명에 대해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했어. 단순히 판검사를 지낸 것만으로 친일 행위자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이의신청이 들어왔는데 그런 주장도 수용하지 않았지. 일제의 통치기구에 편입된 경우는 구조적, 조직적, 계속적으로 친일반민족 행위에 가담할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는 거로 위원회가 봤지. 판사가 그런 거야. 판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도구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할 경우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대열에 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 누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재판을 했는지는 우연한 사정에 불과한 거겠지. 그 행적이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숨은 반민족 행위가 분명히 존재할 거야. 

행정관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가 관직생활을 하는 것은 시대적 특수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그것만으로는 친일파로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어. 또 ‘관료생활을 했더라도 적극적 친일행위를 한 건 없고 오히려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건국 과정에 많은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학력자로서의 관직생활을 시대적 특수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출세하고 싶은 야망일 수 있겠지. 단순한 공무원으로서의 행동도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다고 본 거야. 물론 그후 그분들이 건국 과정이나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있었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위원회가 하는 건 역사적 진상규명이니까 그 일부의 행위 자체만 본 거지.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처벌됐는데 왜 또 하느냐’고 이의한 경우도 있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라는 거지. 우리는 그냥 진상규명일 뿐이니까 그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어. 조사대상자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지나사변공적조서(支那事變功績調書) 같은 포상을 받은 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했지.”

“그 외에도 강한 반발이 있었을 텐데요?” 

“중추원 참의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거나 지역사회에서 명망에 의해 부득이했다거나 중추원 참의로서 구체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의제기를 한 경우도 있어. 그래서 제외시킨 경우도 적지 않아. 일제 때 한동리(韓東履) 변호사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에 관련된 인물의 공판에서 변호인으로 활동한 점을 고려해서 중추원 참의라도 친일반민족행위대상에서 제외시켰지. 장도(張燾)라는 변호사도 충추원 참의로 임명됐는데 105인 사건을 변호하고 사회주의자들의 공판에 변호인으로 참여한 사실을 고려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지. 그외 기간이 아주 짧은 경우도 제외시킨 경우가 있지.”

“왜 사회주의자를 변론했다고 제외시키죠?”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거든.” 

각 분야별로 어떻게 친일이 결정됐는지 알아보고 싶어 물었다.

“경제 분야는 어땠어요?”

“예를 들면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사장과 주주, 국방헌금을 내고 포상을 받은 경우,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구성된 산업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경우, 동양척식회사나 식산은행 같은 국책회사에 근무한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 그 사람들이 강연이나 글을 쓴 경우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로 봤지. 엄 변호사가 맡았던 김연수(金秊洙) 회장이 그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평가였지. 그분은 1941년 5월 칙임관대우를 받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됐지. 대기업 회장으로 거액의 국방비, 군위문금, 임전보국단 사업비를 지원하고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 이사로 참여했지.”

“그 배경에 하나하나 불가피한 사연을 써서 제출했었는데?”

“엄 변호사가 김씨가에 대해 주장한 글도 봤었어. 시대적 상황에서 사업가로서 불가피한 면이 있더구만.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연수의 형인 김성수(金性洙)는 작위(爵位)까지 거절했는데 기업가인 동생은 일제당국이 주는 벼슬을 다 받았더구만. 이상해. 그리고 일제시대 재벌회장의 위치에 있으면 패망의 정보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위치였는데 왜 그랬는지 몰라. 고창 김씨가뿐만 아니라 경주 최부자집도 형은 민족주의자인데 동생은 아니야. 참 희한한 현상이야. 김씨가의 형인 김성수는 많은 실적이 있는데 일제 말 친일의 글을 쓴 것 때문에 문제가 됐지. 엄 변호사, 당신이 말하는 어쩔 수 없다는 시대적 상황론도 있지만 그 시대를 유리알 같이 깨끗이 사시다가 간 분들도 있어. 그걸 알아야 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어도 관직을 거절한 분도 있고, 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도 완강히 거부하기도 했지. 그런 분들과 ‘시대적 논리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을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위원회는 김연수 회장이 기업인으로서 특출한 자질과 역량을 가졌지만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회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서로를 활용하는 상관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본 거지. 무엇보다도 그 시절 일본회사도 얻기 힘든 금융권의 대규모 자본대출과 특혜적인 건설자재의 배급 같은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일제시대 그렇게 지조를 지킨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송진우(宋鎭禹)나 백관수(白寬洙), 조병옥(趙炳玉) 같은 분들은 전시 총동원기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지.”

“사업가에게 그분들처럼 충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곤란한 게 아닐까요? 저는 좀더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입장에 대한 인식을 위원회에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집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친일행위지만 1930년대 전시(戰時)에 일본 경축일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하는 걸 우리는 비난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의 논문들을 많이 읽었어요. 역사학계는 일제 말기의 상황을 위원회와는 전혀 다르게 보고 있고 그게 정설이던데 말입니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 지도자들이 일제의 협력요구를 거절할 자유가 정말 있었을까? 당시의 실상을 무시하고 위원회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건 아니었던가요?

저는 김연수 회장만한 민족기업인이자 경제 분야의 독립운동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과 문화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했고 말이죠. 민족에게 현실적으로 그만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회사의 이익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제에 대한 협력이 크지 않았을까라고 위원회는 의문을 품었어. 그가 지원한 만주의 동광학원(東光學院)도 엄 변호사는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한 거라고 썼지만 원래는 친일단체인 재만흥아협회(在滿興亞協會)가 설립한 대표적인 친일교육기관이라고 하더구만. 거기에 돈을 내고 학교를 부설했다고 해도 전적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어.”

“김연수 회장이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한 사람은 틀림없어요. 일제시대 해외 이승만 대통령에게 간 돈도, 해방 후 김구 선생에게 간 돈도 다 출처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동아일보를 세우고 고려대를 만든 사람 아닙니까? 이런 점이 깊이 확인되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게 아니잖아? 만약 그런 증거가 현출(現出)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독립운동을 했다는 데는 여러 얘기들이 있었어. 일제시대 고등과 사찰계 주임으로 항일 운동가를 탄압한 사람이 있어. 그 후손이 지금 교육계에서 활동하고 있지. 후손들은 할아버지가 경찰 고등과 사찰계 주임이었지만 애국지사를 보호하고 주요애국인사가 결성한 비밀단체에 가입했다는 거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도 않았어. 후손이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선대(先代)에 이어 후대(後代)까지 위선 속에 살고 있는 거지. 그 후손이 교육계의 유력인사로 활동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런 행동이야말로 우리가 청산해야 할 비겁한 태도들인 것 같아. 

실제로 반민족 행위자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이 모두 全인격적으로 일관되게 민족을 배반한 건 아니야. 양면성이 있지. 그들의 행동의 중심이 민족진영에 있는데도 일제와의 접촉 국면에서 허물어진 부분이 있어. 해방 후 그 사람들은 그런 허물어졌던 부분을 슬쩍 감췄고 사회적으로도 슬그머니 넘어가줘 버린 거야. 그들의 애국적 활동만 부각되고 이율배반적이고 동요하던 심성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거야. 애국자로 알려진 그들의 숨긴 친일행위를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그 기억만은 없애지 못하지. 그게 떠오를 때 사람들이 겪는 배신감은 증폭되는 거야. 그들의 애국심이 허상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 민족자존의 정체성은 왜소한 게 되어버리지. 그런 기만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나라한 조명이 필요한 거야. 아무리 독립운동을 해도 친일반민족행위 자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거잖아?”

“김연수의 경우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잖아요?”

“위원회에서 그건 형사 재판이고 그 기록들은 지인(知人)들의 말이라 증거로서의 신빙성이 없다고 봤지. 또 당시 친일파의 득세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건 반민법 폐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과대평가해서 특별재판소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생각이 여러 방면에서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위원회의 전반적인 평가기준을 알고 싶어 다른 분야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체제를 지원하는 다른 분야는 언론이나 문학 같아 물었다.

“언론 분야는 어땠어요?”

“자발적인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많더구만. 친일성향 신문 잡지의 핵심간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지. 언론매체에 다수의 글을 기고한 언론인도 포함되고. 매일신보의 편집인이었던 이상협(李相協)이나 주필이었던 서춘(徐椿) 등이 그 대표지. 조선일보를 만든 방응모(方應謨) 씨도 잡지 <조광(朝光)>의 발행인이었고, 장지연(張志淵) 같은 사람도 매일신보에 다수의 친일 글을 발표했지.”

“이상협이나 서춘의 삶을 보면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그들은 우리 민족지인 동아일보를 만들고 그 신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영웅이었던 사람 아닌가요?” 

“위원회에서 논란이 있었어. 그렇지만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고 매일 발행됐다는 점에서 편집 및 발행인의 직무를 수행한 것만으로도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로 했지. 잡지 <조광(朝光)>을 발행한 방응모에 대해서 일부 이견이 있었어. 일제치하에서 조선일보사를 경영하면서 민족의 계몽에 힘쓴 점을 고려하면 친일 논설 몇 개와 방송 강연을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거지. 그렇지만 1940년 이후의 <조광>의 지면내용을 보면 일제에 협력이 너무 컸다는 점 때문에 대상자로 선정됐어. 지난번에 조선일보 측에서 이의신청에서 주장한 논리를 보면 기묘한 내용이더구만. ‘글을 그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

“문학 분야는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구한말 애국 계몽적 문예활동은 한일합병을 전후로 자취를 감추었지. 친일적인 신소설류의 문학이 들어오기 시작했지. 점차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같은 서구문예사조가 일본을 통해 대량 유입됐지. 식민지 자본주의 시대라 그런지 계급적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문단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게 됐지. 좌익적 관점에 선 프로문학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결성하면서 계급과 민족을 아우르는 운동역량을 발휘해 갔지. 1930년대에 들어 카프 소속 문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민족운동으로서의 역량은 발휘하기 힘들었지. 현실비판적인 작품은 발을 못 붙이게 된 거야. 그후에 순수문학이나 주지(主知)주의, 모더니즘 같은 여러 사조가 전개됐는데 문학적 기교가 성숙되고 새로운 기법이 등장했지. 그런 경향은 일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상황에 부응한 면이 있지. 중일(中日)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체제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친일문학이 필요하게 됐어. 

1939년에 온 문단이 동원된 행사가 마련되는데 ‘북지황군위문사절단(北支皇軍慰問使節團)’ 파견행사였어. 김동인(金東仁) 등 문단대표가 급행열차로 한 달 동안 북지(北支)전선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돌아왔지. 그 행위로 조선 문단은 조선의 황민화와 전쟁동원을 위해 전력(全力)을 다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하게 된 셈이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외곽단체로서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을 이끌었지. 문인들이 집필행위나 강연으로 대동아공영권이나 전쟁을 찬양하게 했어. 그때 동원된 사람들이 김동인, 노천명, 백철, 유진오, 서정주, 이광수, 정비석, 주요한, 채만식 같은 사람들이지.”

“내가 변호한 김동인은 그런 외형적인 것과는 다른 것 같던데?”

그는 이미 나나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 박사가 제출한 이의신청 사유는 다 봤을 것이 틀림없었다.

“김동인의 경우 상황논리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을 위원회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봤지. 그리고 북지황군위문에서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걸 사유로 했었잖아? 그런데 그 이유는 질병 때문이었고 김동인의 역사소설은 민족의식과 관계가 없다는 게 객관적인 평이었어. 김동인이 천황모독죄로 구속된 것도 그 아들의 주장과 실제가 달랐고 석방된 이후에 친일행적이 다대(多大)하다고 위원회는 봤지.”

또 다른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장지연 같은 분은 어떻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죠? 을사늑약 당시 그걸 통탄하는 논설을 써서 고교시절 우리의 심금을 울린 애국지사 아닌가? 그는 아관파천(俄館播遷)시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를 썼고, 그후 대한 자강회의 활동도 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고양시키는 논설을 쓰기도 했죠. 한일합방 후에도 경남일보의 주필로서 저항의 글들을 쓴 걸로 아는데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장지연은 그후에 일제에 대항하는 투지를 잃어버렸어. 그리고 일제의 새로운 정치를 수용하고 찬양하는 기색을 보였지. 1915년 쓴 글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물산공진회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게 있지. 또 1918년 1월1일 쓴 글 중에서 ‘여러 사업들이 활발히 일어나니 다투어 자본 투자함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신청하는 게 많아 사회를 새롭게 하니 그 이름 기록하기도 어렵네’라고 쓴 문장이 있어. 

장지연은 1919년 3월21일과 26일 마산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걸 듣고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 장지연은 말년에 술에 빠져 살다가 병을 얻어 1921년 10월2일 쓸쓸하게 사망했어.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과 그 내용이 적극성은 없다는 의견이 갈리다가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을 하기도 했어.”

“이광수(李光洙)는 어떻게 생각해요?”

“최남선(崔南善)이나 이광수 같은 사람은 일제의 군대기술을 배워 건국하면 한국군 창설에 도움이 됐을 거라는 이론이야. 그 사람들이 과연 일본의 패전을 예측했을까? 당시로서는 못 했을 거야. 그렇다면 결과를 가지고 만들어 낸 가짜 이유가 되는 거지. 궁색한 변명이라고 봤지. 민족혼을 떠난 이광수의 현란하고 교묘한 필봉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지워질 수 없는 좌절과 상흔을 남긴 거지. 병력동원을 위해 방자하기까지 한 필봉을 휘둘렀지.”

“종교 분야는 어땠어요?”

“일제는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고 다른 종교를 하위에 두고 통제하고 탄압하는 시스템이었지. 종교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한 정책이었어. 신사(神社)참배가 강요되면서 장로교나 감리교의 경우 신사참배 결의를 주도하거나 신사참배를 공인하는 입장으로 나갔지. 종교보국이라는 입장에서 교리를 변경하고 조직을 개편한 거야. 구세군의 경우 지원병 모집을 교단 차원에서 주도한 것도 있지. 천주교의 물질적·정신적 협력도 있었고. 종교 지도층 인사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에 참여하는 건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중대한 피해를 입힌 행위라고 위원회는 봤지. 교파의 핵심간부는 개인적 차원에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어. 기고나 강연으로 교단을 변질시킨 종교단체의 간부들을 위원회는 일제 협력자로 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들어가야만 친일의 딱지를 벗어날 수 있나? 교회 존립을 위해서 했는데도?”

“노기남(盧基南) 주교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위원회는 천주교의 수장(首長)으로 교회를 변질시키고 일제의 침략에 협력했다고 봤지. 종교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해? 현실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순교의 피를 먹으면서 신앙은 자라가는 게 아닐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초 천주학쟁이들이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일제시대 때 이 나라 교회가 세워진 거 아닐까?” 

“사회단체나 학술 분야의 친일협력은 어떻게 다뤘죠?”

“일제 말 전시(戰時)체제에서 다수의 조선인 지식인이 조선과 일본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기고를 하거나 저작물을 만든 경우가 있었지. 또 강연 형태로 이데올로기적 언술을 생산 유포하는 활동도 있었고. 한국과 일본의 동화주의를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어. 그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본 거지. 사실 구한말부터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계몽운동가 출신인 정운복(鄭雲復)은 일본과의 합병에 의한 근대화를 구한말부터 주장했고 합병이 된 이후 경성일보의 주필을 맡아 일본과 조선의 융화논리를 펼쳤던 인물이지. 

총독부의 주요 외곽단체도 친일반민족행위의 대상에 포함시켰어. 조선연극협회, 조선미술가협회, 조선음악협회 같은 것이지. 통치기구의 의도에 따라 활동한 면이 있으니까. 식민사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도 포함시켰어.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가한 사람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어. 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가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수립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 그 위원이었던 최남선(崔南善) 등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

그 외 일본어를 상용하고 조선어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경우나 사찰주지로 사찰건물과 불상을 일본인에게 팔아먹은 사람도 문화유산을 반출한 경우로 보아 친일반민족행위로 판단했지.”

“조선사편수회는 학술기관이 아니었나요?”

“위원회는 학술기관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궁극적으로 민족문화의 파괴 말살을 지향한다고 보았지.”

“연극 영화 분야는 어땠어요?”

“연극과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 분야로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라는 점에서 영향력이 큰 매체라고 봤지. 당시는 문맹률이 높았고 연극과 영화는 대중에게 친숙한 공연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극분야는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어. 파급효과나 선전효과가 컸기 때문이지. 당시 벌써 유학파 영화감독이 나타나고 있었어. 일제 외곽단체인 조선영화인 협회의 간부, 극작, 연출, 평론, 제작, 연기, 강연을 통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 그런데 배우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어. 연극과 영화는 한 편을 제작하는 데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동원되는데 그 책임의 소재를 어느 분야까지 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논의됐지. 배우의 경우는 단순한 전문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어. 또 조사대상자로 어떤 기준으로 선정할 것인가 모호하다는 이의제기도 있었지. 그에 반해서 배우가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에서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남녀 배우 한 명씩 선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게 설득력을 얻어 두 인물이 대상자가 됐지.” 

“음악이나 무용, 야담을 해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람이 있던데?”

“일제시대 음악의 경우는 서양의 클래식이 유입되고, 대중음악이 근대문화로 형성되던 시기지. 무용의 경우도 신무용이라는 장르가 최승희(崔承喜)를 통해 자리잡게 되고 말이야. 야담은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재담을 하는 장르고. 대중예술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이나 파급력을 고려해서 엄정한 잣대로 판단하자는 의견이 있었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경우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 학병(學兵) 지원장의 음악을 작곡, 작사, 노래, 연주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지. 축하공연을 했거나 징병제도를 선전한 야담가도 그 대상이 됐지. 이의신청도 있었어. 순수한 작곡은 가사를 가지고 하는 2차적인 행위인데 그게 어떻게 친일일 수 있느냐는 거였지. 

위원회는 내용이 되는 작사와 형식이 되는 작곡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지되는 가수가 각각 유기적으로 총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등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어. 위원회는 대중 가수 중 노골적인 군국가요를 부른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지. 다만 실내악단은 순수음악단체인데 그걸 어떻게 친일단체로 보느냐는 거였지. 그런 경우는 친일반민족행위에서 제외시켜 주기도 했어.” 

“미술 분야는 어땠어요?”

“총독부 당국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지원하면서 외곽단체로 만들었지. 그리고 전쟁을 선전하는 전람회를 개최하게 했어. 체제선전의 대규모 전람회를 연 거지. 고급미술에 대해서는 감동을 느끼게 하고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이미지 반복효과를 통해 정책을 전달할 수 있는 선전기능을 하도록 한 거지. 조선미술가협회의 간부가 친일반민족행위의 대상으로 올랐지. 구체적으로 김은호(金殷鎬) 화백은 금비녀를 헌납하는 그림을 그리고, 이상범(李象範)은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무사기원을 그린 그림, 김기창(金基昶)은 해군 지원병을 잡지의 표지화로 그렸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림 자체가 표현하고 있는 대상 내지 주제와 정책의 도구로서 미술의 성격 작품의 제작배경과 용도, 영향력에 주목해서 결정했지. 김은호 화백의 경우 작품수가 적은데 친일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가 그린 그림의 상징성을 중시해서 친일반민족행위로 위원회가 결정했지.”

“교육 분야는 어땠어요?”

“일제시대 관공립 학교장은 조선총독부 고등관료급이야. 그 사람들 중에 훈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대상이었지. 그리고 교육자로 각종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강연을 한 사람들도 포함시켰어. 민족을 교육하는 지도층 인물들은 일제의 전쟁 협력에 책임이 있다고 위원회는 봤어.”

“전시체제에 협력행위는 학교장의 입장에서 학교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잖아. 기고 행위도 정말 자의에 의해 했는지도 의문이고?”

“그런 사유는 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 다만 현상윤(玄相允)의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적극성 주도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하지 않았고 박마리아도 활동횟수나 행위가 미약해서 제외시켰어. 중일(中日)전쟁 후 여성교육자들 사이에 일체주의(一菜主義)라는 생활개선 운동이 있었어. 생활을 개선하자는 거였지. 논란이 있었는데 생활개선 운동을 통해 전쟁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친일반민족행위로 보자는 의견도 강했지.”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기준을 알 것 같았다. 사적인 자리인 만큼 허심탄회하게 몇 가지를 묻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시절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잘 생각해 봐. 일제시대를 살던 분들도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했던 분들이야. 친일에 대해 이 시대에 한 번 정리하고 가자는 게 위원회의 뜻이란 말이야.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행위라고 해서 비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국민과 후세의 국민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시할 수 없게 되지. 결국 시대적 상황이라는 변명을 받아들일 경우 진상규명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당시 우리 민족의 상당수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어도 일제에 협력을 거부했어. 대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친일청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잖아? 해방 후는 처벌이 목적이었지만 이번은 어떤 부끄러운 친일을 했는지 그 진상을 규명해 두자는 거지. 당사자가 다 죽었는데 형사처벌은 이미 의미가 없지. 

이번의 조사는 개인의 다양한 행위 중에 특정행위만을 보자는 거였지. 행위자 개념보다는 ‘행위’ 개념으로 접근했어. 대상자를 全인격적인 반민족행위자로 매도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지. 어느 한 시절의 특정한 행위가 반민족적이었다는 것만 판정하고 전인격적인 판단은 유보하는 거야. 그렇게 청산해야 할 건 친일문제만 아니야. 사실 한국전쟁기의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이나 박정희 독재정권의 인권탄압도 앞으로 문제로 삼아야 할 거야.”

“어린 시절 배고파 빵 하나 훔쳐 먹은 걸 너는 절도행위를 했다면서 나중에 아무리 다른 좋은 선행을 했어도, 네가 했던 절도행위 자체는 맞지 않느냐며 기록에 남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한 걸까요? 한 인간을 평가하려면 그 삶 전체를 봐야지 특정한 시점의 하나의 행위만 평가하면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러면 일진회처럼 망국을 주도하고 독립운동가 가족을 고문하고 일본에 충성해서 고등관료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지식인으로서 변절해서 청년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사실들을 모두 못 본 체 넘기자는 거야? 특히 지식인들은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사람들을 분열시켜 독립의지를 꺾었는데도? 특정시점의 행위고 나중에 잘했으니까 그런 건 덮어두자고 해야 하나? 해방된 한국은 그런 유산을 청산했어야 해. 그 사람들이 계속 잘먹고 잘살면 이건 정의가 아니잖아? 그걸 청산해야 병든 과거와 단절이 되는 거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했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해방 후 많은 시간이 갔는데 어떻게 하겠어? 주로 그 시대의 문헌자료를 이용해 조사할 수밖에 없었지. 당시 간행된 신문 잡지나 문서 재판기록을 검토했어. 조선귀족이나 중추원 관련자의 전체 명단은 지금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관동군에 포섭되어 직업적 밀정으로 기밀비를 받은 게 문서에 남아 있는 경우도 발견되더구만. 만주 보민회(保民會) 조사원이나 간도협조회 특별공작대 대원명단이 그거야. 국내외에서 자료를 수집했는데 관련 자료를 거의 망라했다고 봐도 돼. 관련 자료를 위원회에서 한 곳으로 집약한 거야. 그 자료가 앞으로 연구와 조사에 더 기여할 거야. 

아쉬웠던 건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인물의 명단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는 거지. 또 친일반민족행위의 정황이 명확한 경찰이나 군인의 탄압행위의 경우에도 문서상의 입증자료를 찾기가 어려웠어. 그 때문에 간혹 일반에 널리 친일파로 알려진 경우에도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 위원회는 기본 자료를 조사하고 학계의 연구성과를 두루 수집했지. 위원회는 역사적 연구도 병행했어. 지금까지의 일제 강점기의 연구는 독립운동사와 근대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많은 걸 알게 된 면이 있어.”

“이번의 처리는 너무 정치적이 아닐까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그 시절 뭘 했는데요? 존재했나요?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위해 단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시민을 위한 국가나 민족은 아닐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도 보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정서적인 움직임이 있는 건 인정해. 그렇지만 그런 정서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활동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위원회의 목표는 개인 대 개인을 비교해서 이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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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6 국수 가게 할아버지 운영자 22.11.14 101 1
2805 시신을 기증하는 분들 운영자 22.11.14 92 1
2804 펄벅이 말한 한국인의 마음 [1] 운영자 22.11.07 168 1
2803 검은 안대 운영자 22.11.07 114 1
2802 아름다운 마무리 운영자 22.11.07 109 1
2801 매일 매일이 인생 운영자 22.11.07 120 1
2800 남은 고난 운영자 22.11.07 113 2
2799 특별한게 좋은건가 운영자 22.11.07 99 1
2798 욕망을 능력 범위 안에 운영자 22.11.07 98 1
2797 의식의 닻줄 운영자 22.11.07 90 1
2796 순간순간의 일이 수행이죠 운영자 22.10.31 114 1
2795 너는 너, 나는 나 운영자 22.10.31 113 1
2794 자기 몫이 있다 운영자 22.10.31 1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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