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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따라 걸어온 길

운영자 2022.11.21 10:10:51
조회 118 추천 3 댓글 0

얼마 전 변호사회에서 내게 ‘백로상’이라는 걸 주었다. 명칭은 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라톤 선수가 삼십키로미터를 주파했을 때 받는 인증과 흡사하다고 할까. 변호사 생활 삼십년이 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 외길인생이 잘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고지식하고 모자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일까.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삼십년이 넘게 나의 의뢰인들과 심한 싸움을 해 왔다. 상습적인 강간범이 있었다. 그는 살인도 했다. 아는 목사가 부탁해서 그 사건을 맡았다. 접견실에 간 나는 그가 먼저 인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강간도 하고 살인도 했는데 그때 양심이 아프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그는 진짜 그런 것 같았다. 그에게 피해자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한 마리의 벌레였다. 판사 앞이었다면 아마도 양심이 아팠다고 거짓말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변호사에게는 조금 더 솔직한 셈이었다. 나는 말을 돌려서 그에게 다시 물었다.

“딸과 아내가 있죠? 누가 아내를 잔인하게 폭행하고 딸을 강간했다고 생각해 봐요. 그 짓을 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거야 당장 죽여버리죠. 내가 주먹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내 주먹 한 방에 뻗어서 죽어버린 사형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눈에 순간 잔인한 살기가 돌고 있었다.

“그 죽일 놈이 바로 당신 아닌가요?”

그가 순간 멈칫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상습절도범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변호사님 그 많은 도둑질을 하고 살아왔는데도 왜 나는 양심이 아프지를 않죠? 그 양심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그가 나를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도 양심이 아프다는 걸 느껴보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수십년간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하고는 범죄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검사나 판사를 놀리는 조직폭력배를 보기도 했다. 중한 밀수죄를 저지르고 모든 책임을 자재부장에게 전가해 감옥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장도 보았다. 이상했다. 껍데기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어떤 사람에게서는 쥐의 영을 느꼈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뱀의 영을 느꼈다. 나는 삼십년이 넘게 시궁창에서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관념적으로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를 들어주고 그들의 애환과 함께 하는 직업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면이 많았다. 젊은 시절 나는 앞길을 정할 명석함과 힘이 없었다. 방황하는 양과 같이 겨우 눈 앞을 살펴볼 뿐 요원한 일은 몰랐다.

법의 세계로 들어가 보니 싫었다. 변호도 하기 싫고 악마와 싸우는 검사도 피곤해 보였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면서 징역형을 선고해 보니까 판사의 일은 더더구나 싫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굳이 내가 자청해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였다. 모의사건 기록을 읽고 자판기에서 물건이 튀어나오듯 획일적인 판결의 결론이 나와야 점수가 나왔다. 대부분이 유죄로 보는 것을 나 혼자 무죄로 판단한 적이 있었다. 싸이클이 다른 나는 현실에 있어서 법조인의 자질이 없다는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삼십년이 넘게 이 길을 걸어왔다. 며칠 전 산책길에서 사십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뜬금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법대가 아니라 해양대학을 나와 선장을 하거나 아니면 스님이 되어 깊은 산속 암자에서 사는 게 더 맞았을지도 몰라.”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서 나를 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으면 더 행복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뭐였지? 나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고 걸어왔어도 스스로 그 걸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에 처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일을 포기해야만 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분은 내가 법정에서 본 진실과 느낌을 글로 써 보라고 했다. 돈을 보지 말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라고 했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라고 했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모는 길로 걸어왔다. 알아채지 못했어도 순간순간 그분의 지도가 있었다. 나는 내 운명을 지배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다가왔지만 결국은 이게 나의 천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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