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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44 - 민족의식으로 뭉친 회사

운영자 2019.12.03 10:08:01
조회 126 추천 0 댓글 1
친일마녀사냥


144


“민족의식으로 뭉친 회사”


각계각층에서 진정서나 탄원서가 반민특위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민족기업가 김연수(金秊洙)에 대해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다. 먼저 마라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孫基禎)을 대표로 하는 체육인들의 진정서의 내용은 이랬다.

‘김연수에 대한 체육인들의 진정서.

반민법 해당자 중에는 친일파도 있지만 환경에 따라 일본 놈들에게 강제되어 부득이 추종하던 자도 있었을 것이며, 양심상으로 우리 국가와 민족을 배반치 않고 애국심을 일으킨 동정할 만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 놈들의 입장에서는 김연수를 억지라도 내세워가지고 일을 해야 전쟁을 하루라도 할 수 있다는 간계를 부려 그에게 만주명예총영사, 중추원 참의 같은 실권 없는 직책을 부여했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경성방직 사장인 김연수는 일제와 정면 충돌한다면 사업은 안 됐을 것이고, 당시 김연수는 일제가 강제로 굴레를 씌우는 그런 직들을 거부할 힘도 없었다고 추정합니다. 먼저 김연수의 형 김성수(金性洙) 씨가 누구입니까? 콩밭에서 콩이 나고 조밭에서 조가 나는 것으로 김연수는 그 집안과 형을 따라 실질적으로는 애국자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반민특위의 조사가 소위 인민재판식으로 ‘저 놈 죽일 놈이다’, ‘일정시대 무엇 무엇을 역임했다’ 하면, ‘옳소 죽여라’ 하는 식이 안 됐으면 합니다. 

사형이 분명한 일본내각의 도조 히데키도 전범자 재판에서 3년이 걸렸습니다. 김연수가 일제가 강제적으로 주는 직책을 거부했더라면 그는 지금 애국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거부하지 못한 것 자체도 일본 놈들의 압제였다는 걸 아셨으면 합니다. 김연수는 이 사회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씨가 학창시대에 도움을 받은 것도 김연수에게서입니다. 해방 후 청년운동에도 이름을 숨긴 채 정신적·물질적으로 가장 많이 도운 사람이 김연수입니다. 

우리 마라톤인만 하더라도 마라톤 선수는 가장 빈곤한 가족의 자식들입니다. 그런 마라톤 선수들을 위해 김연수는 100만 원을 희사했습니다. 우리 마라톤인들은 그런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비루하게 그 대가로 이런 진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친일파 反민족주의자 선정에서 옥석을 잘 구별해 달라는 것입니다. 친일파 처벌의 교수대에 오른 사람 중에는 김연수같이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버리기에는 너무 애처로워 진정을 올리오니 관대한 처분을 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손기정(孫基禎), 권태하(權泰夏), 김은배( 金恩培), 서윤복(徐潤福)’

이어서 학계, 관계, 기업인들의 진정서 내용은 이렇다.

‘지금 공판이 진행 중인 반민족행위자 피의자 중에 우리 대한민국 산업부흥에 불멸의 공적을 쌓은 경성방직의 사장인 김연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우리 섬유공업 관계자들은 몇 마디 진정코자 하는 바입니다. 산업인으로서의 김연수를 논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20년간 심혈을 경주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사업체이던 경성방직 회사를 논하여야 할 것입니다. 

경성방직은 기미독립운동 당시에 김성수 씨 이하 민족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의 옷감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라는 숭고하고도 절대적인 민족적 요청에 의하여 창립된 결정체입니다. 제품의 상표도 태극성이었으며 김연수가 경영한 경성방직 계통의 종업원 중에는 일본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섞이지 않고 사장으로부터 일개 직공에 이르기까지 순연히 우리 대한동포들만으로써 경영하여 왔다는 것은 우리 민족 산업사상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과거 군정(軍政) 3년간 혼란한 사회정세하에 모든 생산 공업이 마비상태에 빠진 중에 있어서 우리 섬유공업계가 원료, 자재, 전력 등에 부족을 느끼면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하게 된 그 이면에는 과거 20여 성상에 걸친 김연수의 민족적 정신에 의한 끊임없는 지도육성의 결정으로 양성된 수천, 수만의 우리의 기술자가 각지 공장운영의 중추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참작하셔서 관대한 처분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공대학장 이승기, 공대 부학장 황영모, 공대 섬유과교수 김동일, 공대 섬유학과 교수 전풍진, 대한방직 기술협회이사장 안호준, 상공부 공업국장 유○상, 상공부 섬유과장 김규○, 조선방직주식회사 전무취체역 윤상현, 고려방직공사 업무이사 이동배, 대한방직공사 공장장 황정도, 제일방직 영등포공장장 유상룡 등’

경성방직에서 12년간 경리과 직원을 했던 김상형이 증인으로 나왔다. 38세인 그는 일제시대인 1936년에 경성방직에 입사해서 근무해 왔다.

“증인은 경성방직에서 어떤 업무를 봤나?”

재판장이 물었다. 

“처음에는 회계 그리고 나중에는 영업업무를 봤습니다. 경성방직과 만주의 남만방적을 오가면서 업무과장과 회계과장을 했기 때문에 회사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김연수 피고인의 재산과 가지고 있는 주식의 수, 김연수가 회사를 자본적으로 독점했는지 여부는 어떤가?” 

“김연수 사장님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분이었죠, 경방의 주식은 몇 주 안 가지고 계셨지만 그 가족들이 가진 것은 총 주식수의 반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내가 재정적인 지위를 묻는 취지는 김연수 피고인이 회사를 자본적으로 독점했나 안 했나를 묻는 건데.”

재판장이 다그쳤다.

“김연수 사장님은 경성방직을 자본적으로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실례를 들면 新주주에게 舊주주가 상당히 양보한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쇼와 11년 그러니까 1936년경에는 경성방직의 경영상태가 대단히 곤란했었다는데 증인은 그걸 아나?”

“제가 바로 1936년 8월경에 입사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성방직이 그때 어떻게 난관을 돌파했나?”

“당시 우리 조선 내에는 실을 뽑는 공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사를 일본에서 수입해 들여왔는데 그런 면사는 원가 자체가 고가(高價)이고 또 조선으로 들일 때 중세(重稅)를 부과했습니다. 그런 면사를 구입해서 면포를 만드는 경성방직 같은 회사는 높은 생산비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수입하는 원사로 면포를 짜는 몇 안 되는 조선 내의 방직공장은 도저히 일본회사와 경쟁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일본에서 직접 들여오는 완제품인 면포에 대해서는 면세의 특전까지 줬으니까요. 조선에 세워졌던 방직공장은 거의 일본회사에 흡수됐습니다. 당시 경성방직은 2할의 손해를 보면서도 일본 회사에 흡수당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리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 뽑는 공장을 설립하고 대규모로 공장시설을 개혁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당시 조선에 들어와 직접 방직업을 많이 했는데 일본회사들에 대한 대비책은 어땠나?”

“공장을 대규모로 증축해서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러는 한편 경비절약을 실시하고 시흥에 제2공장 설치계획으로 대응책을 강구했습니다.”

“정책적으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대자본가에게 대항하기 힘들었을 텐데?”

“경성방직은 민족기업으로서 자본, 기술, 직공이 전부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민족적 의식 하나로 똘똘 뭉쳤습니다.”

“당시 원료인 면화 할당 같은 것에서 일본인 경영자와 조선인 경영자 사이에 차별은 없었나?”

“차이가 많았죠, 1936년 중일전쟁 후 면화 통제령이 발효됐습니다. 정부에서 원료인 면화를 할당하는데, 원칙적으로는 각 회사의 생산량에 비례해서 할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경성방직은 과거 생산량을 알렸는데도 제대로 면화를 할당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회사가 아주 위험했을 텐데 어떻게 버텼나?”

“44수라는 아주 극세사(極細絲)를 뽑아 새로운 제품인 세포를 만들어 일본인 경영자들에게 대응했는데 44수라는 세사(細絲)에 대해 일본인 경영자들조차 보고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경성방직의 개발품이었습니다.”

“은행의 자금융자에서도 일본기업과 조선기업 사이에 차별이 있었을 텐데?”

“차별이 많았습니다. 우리 경리책임자나 사장님이 은행에 가면 일본회사와 합병하라고 여러 차례 권고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김연수 사장님은 거절했었죠. 일본 재벌인 대일본방직이 경성방직의 경영권을 장악할 야심을 가지고 음으로 양으로 김연수 사장님을 유혹했습니다. 대등합병을 하고 사장으로 들어오라구요. 만주에 남만방적회사를 설립할 때도 일본회사들은 같이 투자해 공동 경영하자고 했으나 김연수 사장님은 거절했죠.”

“만주에 남만방적을 설립한 동기는 뭔가?”

“시흥에 방적공장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중일전쟁이 터지니까 총독부에서는 섬유공장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주에 공장을 설치하기로 하고 만주국 정부에 허가신청을 했습니다. 그곳은 규제가 비교적 느슨했습니다. 1938년 12월경 만주정부에 허가신청서를 제출하고, 1939년 9월경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1년 가까이 허가가 지연된 원인은 뭔가?”

“당시 일본과 만주의 블록이 달라 일본 정부에 양해를 구하느라고 늦어졌습니다.”

“김연수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수락했기 때문에 허가가 난 건 아닌가?”

“저는 김연수 사장님의 만주국 명예총영사 임명과 남만방적회사의 설립허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관계가 있었다면 명예총영사로 임명하겠다고 일본 정부에서 제의할 때 사장님이 얼른 승낙하고 그 직을 받아들이셨겠죠, 그런데 사장님은 두 번이나 영사직을 거부하고 세 번째 일본 관리의 위협적인 태도에 불가항력으로 수락을 한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볼 때 저는 영사직과 남만방적회사의 허가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장인 김연수는 태극성 상표를 끝까지 사용했나? 일본관헌이 그냥 놔두지 않았을 텐데? 어떤가?”

“경기도 경찰부에서 태극성 상표의 불온성을 지적하고 사용금지 명령까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연수 사장님은 지도방침으로 ‘경성방직은 조선인만으로 조직된 민족기업이다’, ‘종업원 일동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태극혼으로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종업원들은 견고한 투쟁력으로 최후까지 태극성 상표를 썼습니다. 

제가 경리를 담당해서 알지만 김연수 사장님은 해방 후 경성방직을 사임할 때까지 전혀 월급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퇴직할 때 위로금 100만 원을 드렸는데 그것도 거절하셨습니다. 우리 경성방직의 기술자들은 현재 우리나라 방직업계를 움직이는 기술자가 되어 전국의 공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방된 한국에서 방직공장은 기술자가 없어서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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