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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다는 것

운영자 2020.03.23 10:05:01
조회 121 추천 1 댓글 0
내가 나가는 동창 모임이 있다. 거기서 한 친구가 거의 대부분을 얘기하고 있다. 서로 정담을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그의 일방적인 강연장 같기도 했다. 강연 내용을 듣고 있으면 은근히 짜증이 났다. 거의 다 골프에 관한 얘기였다. 영국 속담에 모인 사람 중에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그 얘기는 하지 말라는 게 있다. 골프를 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자리가 따분하기만 하다. 그 다음으로 흔한 대화 소재는 정치문제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공통으로 씹는 술안주쯤 되는 것 같았다. 국민모두가 정치평론가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모임에 참석해서 인내를 가지고 얘기들을 듣는다. 그래도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추억을 같이 공유해 온 귀한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라도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대화 소재가 없는 우리들의 내면은 내남없이 마른 강바닥처럼 메말라 있었다. 고교동창끼리 하는 종교모임이 있다. 몇 명이 모여 기도를 하고 믿음을 나누는 자리였다. 서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이면서 삶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부터 형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세상의 교회가 모임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기성교회의 틀에 익숙한 친구는 목사가 된 동창에게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학교 시절을 연상하고 이름을 부르고 막말하던 나는 머쓱해졌다. 모임의 시간 대부분을 목사직에 있는 친구의 설교가 차지했다. 나는 목사인 친구의 설교를 인내하면서 들었다. 친구들의 아픈 실패의 체험을 듣고 감동을 받았었는데 어느새 그 내용이 신학으로 바뀌고 말았다. 원만하게 모임을 진행하려면 주류가 이끄는 대로 참을성 있게 들어야 했다. 삼십년 동안 변호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토해내는 많은 얘기들을 듣는 게 나의 일이었다. 범죄인들이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얘기들을 들어야 했다.

더러 다른 모임에 나가면 판에 박힌 형식적인 인사말이나 자기 자랑들을 끝없이 참고 들어야 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모르고 자신의 속에 있는 내용물들을 끝없이 토해낸다. 언어의 설사증에 걸린 사람들은 소화되지 않은 것들까지 다 뱉어낸다. 그 토사물 속에는 자기자랑 남에 대한 비난, 시기 질투 등 온갖 것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들어있다. 생각 없이 뱉어내는 그런 소리들은 말이 아니었다. 말은 침묵의 체로 여과한 후에 조심스럽게 조금씩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며칠 전 뇌성마비의 여인이 법률상담을 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 왔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는 손과 몸이 비틀어져 있고 목까지 뒤로 젖혀져 있었다.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십여 년 전 그녀가 타고 가던 봉고트럭이 ‘덜컹’ 하는 순간 목이 꺾여 전신마비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녀를 데리고 온 자원봉사자가 옆에서 통역을 했다. 뇌성마비의 여성은 말 한마디를 한다는 게 정말 힘든 것 같았다. 온몸의 힘을 다 짜내어 한마디 한마디 간신히 속에서 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침묵하면서 두 시간 동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짜내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휠체어 뒤에 예수님이 서 계시면서 말을 잘 들어 주라고 하시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휠체어 뒤로 젖혀진 그녀의 얼굴에서 통곡이 터졌다. 몸 깊은 곳에서 끓으면서 나오는 울음이었다. 그 울음은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로 느끼는 막막한 벽이 얼마나 두꺼운 것인지 조금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관찰하곤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단순히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드물고 값진 선물일 수 있다. 그런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연습이 필요하다. 잘 듣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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