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이상한 시인 선배

운영자 2021.06.28 09:53:35
조회 204 추천 2 댓글 0

이상한 시인 선배




까칠한 성격의 이상한 고등학교 일 년 선배가 있었다. 고교시절 학교에서 ‘시와 문학의 밤’이라는 행사가 열릴 때면 그는 마치 자기 세상이라도 만난 듯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하얀얼굴에 짙고 검은 눈썹을 한 귀공자 타입의 그는 그의 시낭송을 들으러 오는 여학생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정결 상태로 보고 다녔다. 일년 후배인 내가 교복을 삐딱하게 입고 있으면 그걸 지적하면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부터 그는 시인이었다. 그의 많은 시가 여러 문학지에 실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연히 그와 같은 법과대학을 나오게 됐다. 대학시절도 별로 가깝진 않았던 것 같다. 내게 그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귀족풍이었고 잔소리를 하는 선배로 보였다. 대학졸업을 하고 삼십년 가량 그를 보지 못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임원으로 활동한다는 소리만 바람결에 전해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그로부터 점심을 같이 한번 먹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특별히 만나야 할 일도 직업적 연관성도 없었다. 나는 그가 약속한 호텔 중식당으로 갔다. 그는 중화요리 코스를 시켜서 나를 잘 대접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불러서 밥을 사주고 싶은 사람 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하고 있어. 고교 일 년 후배인 엄변호사가 그 안에 들어있어.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거야.”

고맙다고 말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죽을 병이라도 걸렸나 은근히 걱정이 됐다. 그는 ‘날개’라는 시를 쓴 이상같이 훌륭한 시인이었다. 김소월 같은 시인들은 일찍 죽었는데 그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바람처럼 시간이 흘렀다. 근 이십년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신문을 통해 그가 회사를 퇴직하고도 남쪽의 바닷가 거대한 제방을 쌓는 큰 공기업의 사장으로 갔다는 보도를 보기도 했다. 며칠 전 목사로 지내다가 몸이 아파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는 대학 동기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때였다. 그는 시인인 선배와 같은 대기업에서 근무를 할 때 잠시 알고 지냈다고 했다. 학연으로는 다 같은 대학교 출신이었다.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대기업에 다니다 갑자기 사표를 내고 나와 신학교를 가게 됐지. 열정이 충만할 때라 밤도 낮도 없이 몇 백권의 신학서적을 보는 땐데 돈이 없어서 그 책들을 살 수가 없더라구. 때마침 같은 회사에 다니던 그 선배가 교보문고 전무로 일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 직장에 있을 때 그 선배의 시가 사보에 여러번 실렸고 그래서 알고 있었거든. 전화를 걸어서 책을 보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느냐고 교보문고 전무가 된 그 선배에게 물었지. 그랬더니 도와주겠다고 대답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필요한 신학서적 목록을 만들어 봤지. 외국서적 번역서적 이백권 가량이 되는 거야. 값으로 치면 꽤 되는 거지. 염치불구하고 그걸 보냈어. 그랬더니 그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야 한 두권이면 몰라도 나도 책 장사인데 이걸 다 공짜로 달라면 너무하잖아?’하고 말하는 거야. 맞는 소리지 뭐. 그런데 며칠후에 책이 몇박스 배달이 된 거야. 내가 만든 목록표대로 책을 구해서 그 선배가 다 보내준 거야. 그걸 열심히 읽고 공부해서 신학대학 졸업할 때 수석을 했었어.”

내가 예전에 그 선배한테 밥을 얻어먹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곧 죽을 듯이 말하면서 밥을 사줬는데 오래도 살면서 좋은 일을 하네. 하여튼 좋은 사람이네.”

그 선배한테서 많은 걸 배웠다. 정신적 양식인 책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어야 했다. 얼마 전 출판사에서 책을 사서 전국의 도서관에 보낸 적이 있었다. 저의를 의심하면서 시큰둥 하는 곳도 많았다. 허기진 사람에게 밥을 주고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물을 주듯이 선행도 조금은 까탈을 부려가며 그렇게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밥을 사주고 싶은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해 가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데 그들이 응해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라 죽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할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즐겼다. 예수님이 하신 최후의 만찬처럼 나도 더 이상 늦기 전에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밥 한 번 사고 죽었으면 좋겠다.

추천 비추천

2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경제관념 부족해서 돈 막 쓸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13 - -
3351 좋은 사람의 기준을 깨달았다 [1] 운영자 24.05.13 22 1
3350 너도 도둑이지만 윗놈들이 더 도둑이야 운영자 24.05.13 17 0
3349 국무총리와 도둑 누가 거짓말을 했을까. 운영자 24.05.13 14 0
3348 도둑계의 전설 운영자 24.05.13 15 1
3347 바꿔 먹읍시다 운영자 24.05.13 14 0
3346 반갑지 않은 소명 운영자 24.05.13 15 0
3345 대도 사건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운영자 24.05.13 12 0
3344 재판을 흥미성 보도자료로 만듭니다. 운영자 24.05.06 51 1
3343 부자들의 비밀금고 운영자 24.05.06 54 1
3342 죄 값 이상을 강요할 권리가 있나? 운영자 24.05.06 39 0
3341 입을 틀어막히는 분노 운영자 24.05.06 40 0
3340 변호사로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운영자 24.05.06 45 0
3339 도둑 일기 운영자 24.05.06 45 1
3338 숯불 나르는 청년의 외침 운영자 24.05.06 42 1
3337 당신은 꽂히면 바로 내 지르는 사람이야 운영자 24.04.29 73 1
3336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세요 운영자 24.04.29 55 1
3335 도대체 저의가 뭡니까? 운영자 24.04.29 61 1
3334 기억 사진첩 속 어떤 재판광경 운영자 24.04.29 53 1
3333 내가 체험한 언론의 색깔 운영자 24.04.29 58 1
3332 변호사란 직업의 숨은 고뇌 운영자 24.04.29 60 1
3331 저세상으로 가는 법 운영자 24.04.29 65 1
3330 인권변호사의 첫걸음 운영자 24.04.22 87 1
3329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 운영자 24.04.22 76 1
3328 죄수가 전하는 사회정의 운영자 24.04.22 86 1
3327 이민자의 슬픔 운영자 24.04.22 87 1
3326 강도에게 성질을 냈었다. 운영자 24.04.22 78 1
3325 외국의 감옥 운영자 24.04.22 81 1
3324 벗꽃 잎 같이 진 친구 운영자 24.04.15 111 1
3323 조용한 기적 운영자 24.04.15 115 2
3322 감옥은 좋은 독서실 운영자 24.04.15 92 1
3321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운영자 24.04.15 90 1
3320 미녀 탈랜트의 숨겨진 사랑 운영자 24.04.15 113 1
3319 두 건달의 독백 운영자 24.04.15 96 1
3318 명품이 갑옷인가 운영자 24.04.15 85 1
3317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운영자 24.04.15 91 1
3316 오랜 꿈 운영자 24.04.08 109 2
3315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운영자 24.04.08 120 1
3314 나이 값 [1] 운영자 24.04.08 172 1
3313 검은 은혜 [1] 운영자 24.04.08 167 3
3312 실버타운은 반은 천국 반은 지옥 [1] 운영자 24.04.08 175 2
3311 늙어서 만난 친구 운영자 24.04.08 101 1
3310 그들을 이어주는 끈 [1] 운영자 24.04.01 294 2
3309 그가 노숙자가 됐다 [1] 운영자 24.04.01 190 3
3308 밥벌이를 졸업하려고 한다 [1] 운영자 24.04.01 195 2
3307 허망한 부자 [1] 운영자 24.04.01 214 2
3306 죽은 소설가가 말을 걸었다. [1] 운영자 24.04.01 195 2
3305 개인의 신비체험 [2] 운영자 24.04.01 197 2
3304 나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1] 운영자 24.04.01 186 2
3303 노인의 집짓기 [1] 운영자 24.04.01 185 1
3302 똑똑한 노인 [1] 운영자 24.03.25 223 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