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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순간 하고 싶은 것

운영자 2022.05.23 10:00:05
조회 189 추천 1 댓글 0

화면 속에 호스피스 병동이 나오고 있었다. 담당 의사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편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침상에 앉은 한 노인이 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아침 회진을 도는 의사가 막걸리를 따라주고 있다. 그 녹화화면을 보면서 담당의사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어르신은 평소에 술을 아주 좋아하시던 분이셨어요. 죽기 전에 술 한잔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치료가 업무인 의사가 술을 줘도 좋은가? 하고 잠시 망설였죠. 외국 호스피스병동의 사례를 찾아봤어요. 환자에게 와인을 준 경우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아침 회진을 돌 때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드렸어요. 그걸 드시면 얼굴이 환해 지시더라구요.”

의사가 말하는 주안점은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였다. 바둑을 좋아하던 사람은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친구와 한판 대국을 벌이고 싶어했다고 했다. 평소 산책길에 들리던 단골 까페에 들어가 향기로운 커피 한잔을 여유 있게 마시는 게 소망이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한없이 반복될 것 같은 진부해 보이는 일상이 즐거움이고 마지막 소망이 되는 것 같았다. 화면에 생글생글 웃는 모습의 납작한 얼굴의 노인이 떠올랐다. 담당의사가 그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이 노인도 이미 돌아가셨어요. 평생 연극계에 계시던 희곡작가셨어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오셔서 담당의인 제게 부탁하시는 말씀이 희곡을 가르치는 작은 모임이 있는데 거기 가서 계속 가르쳐도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라고 했죠. 이따금씩 평상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밖으로 나가 강의를 하신 날은 그분의 얼굴에 기쁨이 넘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힘이 빠져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었죠.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이 병실로 찾아왔어요. 침대에서 강의하면서 그분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가셨죠.”

하던 일을 마지막까지 하는 게 그에게 행복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가 소송을 맡았던 시인이 떠올랐다. 소년시절 자동차 정비공이었던 그는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다. 밥을 얻기 위해 방송국 작가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지구별에 여행을 온 어린 왕자 같은 시인이었다. 가난과 고독이 그의 동반자인 것 같았다. 그는 갑작스레 암이라는 죽음의 초대장을 받고도 병상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침대 매트리스 아래 끼워둔 그의 노트와 연필을 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다. 죽고 나서도 혼자였다. 그의 장례식에 소송담당변호사였던 나와 그의 옛친구 몇 명이 참석했을 뿐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죽음을 선고받으면 할 일을 지금 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존재다. 나는 요즈음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기차를 타고 찾아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밥 한끼라도 꼭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죽음을 앞두고 언제 푸른 바다를 보았지? 별은 언제 보았을까 하는 후회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그냥 실행하고 있다. 매일 동해바다의 호젓한 해변가를 걷는다. 고운 모래밭에 하얀 거품을 내며 스며드는 파도를 본다.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영롱한 별들이 떠있는 하늘을 본다.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를 마신다. 밤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들의 불빛을 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직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꼭 써야 할 법률서류들을 한 밤중에 조금씩 만든다. 점점 글들이 희미해지고 겹쳐져 보이지 않는다. 칠십년을 사용한 몸의 나사가 헐거워지고 붉은 녹물이 흘러나오는게 당연하다. 모든 걸 받아들임이 깨달음 아닐까. 아주 안보일 때까지는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내가 사십여년 하던 변호사의 일을 그만둘 의사가 없다. 달리던 기차가 종착역에 가까우면 속도를 줄이듯 일의 분량은 조절하다가 글자가 안보일 때 쯤 소리 없이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 호스피스 병동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평소에 하던 작은 일들이 즐거움으로 다시 탄생하는 걸 알았다. 진부한 일상이 삶의 본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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