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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치국

운영자 2022.08.22 10: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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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다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네 시를 알리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싱그러운 공기가 닭 우는 소리를 싣고 들어온다. 아직 어둠이 짙은 창밖을 내다 본다. 서로 마주 보며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야트막한 산자락 사이의 빈 공간을 바다와 하늘이 수평선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 아래 평화로운 동해 바닷가 마을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다. 검은 바다 저쪽 수평선 쪽에서 붉은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다. 포구로 돌아가는 고깃배들의 하얀 불빛들이 넓은 바다에 점점이 박혀있다. 고깃배들을 보면서 갑자기 어제 들었던 한 어부의 말이 떠올랐다.​

“저는 바다가 주는 만큼만 곰치를 잡아 옵니다. 그걸 경매시장에 내놓지 않고 직접 곰치국을 끓이는 집에 가져다 주죠.”​

바다가 주는 만큼만 곰치를 잡는다는 어부의 말은 살아있는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늘이 주는 재능만큼 그리고 하늘이 주는 돈만큼 받고 감사하며 만족했던가. 그렇지 못했다. 젊은 시절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기준을 잡아놓고 늘 불행에 빠져있었다. 나중에야 피라미가 상어가 되겠다는 꿈이었고 토끼가 자신을 늑대라고 스스로를 세뇌 시킨 것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

어제저녁 바닷가 허름한 식당에서 곰치국을 사 먹었다. 묵은지로 끓인 김치국에 섞인 토막 낸 곰치의 부드러운 흰 살이 보였다. 칼칼한 국물과 함께 식도로 넘어가는 곰치의 부드러움이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었다. 주인이 먹는 내 옆으로 다가와 설명했다. ​

“곰치란 놈은 깊은 바닷속에 있는 홍게를 먹고 삽니다. 잡기가 쉽지 않죠. 홍게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기간은 곰치를 구할 수 없어요. 저는 후포항까지 가서 직접 곰치를 사 옵니다. 수족관에서 묵은 곰치로 국을 끓이는 다른 집은 고기가 순두부 같이 뭉개져요. 그런데 제가 끓인 곰치국의 고기는 몽글몽글 살아있어요. 사십년 동안 곰치국을 끓여왔는데 이제 그 일을 졸업할 때가 됐어요.”​

나이 칠십이 넘어 보이는 주인의 얼굴에 일류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벽에는 곰치국의 달인이라고 방송에서 소개했던 화면이 프린트되어 붙어 있었다. 곰치국을 먹고 그 식당을 나와 바다 옆을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십년 곰치국을 끓였다는 그 주인은 먹고 살라고 하늘이 그 환경과 재주를 주었다고 생각할까. 바다가 주는 만큼만 곰치를 잡는다는 어부가 있으면 그 철학이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

어부가 툭 내뱉은 한마디는 정말 대단하다. 만선인 다른 배와 비교하지 않고 고기를 돈으로 보지도 않고 바다가 주는 만큼만 받는다고 했다. 쉽지 않다. 욕심 많은 농부는 재배하는 야채가 돈으로 보이고 나무에 달린 사과가 과일이 아니라 돈이 달린 것으로 생각한다. 어부들도 욕심의 눈 껍질을 하고 있으면 바다에서 돈을 낚아 올릴 것이다. 그런데 바다가 주는 만큼만 곰치를 받는다는 말은 정말 귀한 말이었다. 나는 하늘이 주는 작은 재능에 만족했던가. 하늘이 준 낮은 자리에 감사했던가. 하늘이 준 작은 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음속으로 이건 내가 있을 자리 할 역할이 아니야 하고 부인하며 살아온 적이 많았다. 내가 갈 자리는 따로 있다고 착각했었다. 욕심에 눈이 가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남없이 인간은 불만에 차 있고 차츰 모자라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다.​

문단의 최고 원로인 소설가가 내게 와서 이런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

“톨스토이나 토스토엡스키의 소설을 보면 나는 삼류가 아니라 사류 오류에도 미치지 못해요. 일본의 작가들을 보면 시골에 칩거하면서 문장 하나에 목숨을 걸죠. 그런데 비하면 나는 정말 허깨비 같아요.”​

그 정도면 위인줄 알았는데 그 위에 또 뭐가 있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삼류가 아니라 사류 오류라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고 살아가야죠.”​

변호사라는 직업은 만나는 사람에게서 배울 때가 많았다. 국내 최고의 자리에 오른 가수의 사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가오는 날이면 축축한 감상에 젖은 노랫말을 써서 내게 봐달라고 보내오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뉴욕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걸 보니까 나는 뉴욕의 삼류들보다도 훨씬 못한 걸 알았어요. 국내에서 남들은 나를 최고의 가수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악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엉터리라구요.”​

그 소설가나 가수는 일류가 틀림없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일류가 가지는 장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을 빨리 발견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게 상황이 주는 배움을 얻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이었다. 받아들임이라는 강의 건너편에 도달해야 평화가 올 것 같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삶은 하나의 기회고 아름다움이고 놀이다. 나는 하늘이 주는 만큼 놀고 싶다. 짙은 어둠의 수평선 저쪽에서 안개처럼 피어나는 붉음,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는 파도 그리고 흰 눈에 덮인 몽상의 세계인 겨울을 보며 즐기고 싶다. 그걸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게 아닐까. 삶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일하고 별들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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