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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 하는 노인들

운영자 2022.09.19 11:20:20
조회 328 추천 0 댓글 0

내가 묵는 실버타운 근처의 바닷가를 산책하다 보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모래사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볼 때가 있다. 돈을 받고 하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노인들의 수고로 해변은 항상 깨끗하다. 서울 나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는 한 때 토끼를 풀어놓고 키운 적이 있다. 매일 먹을 것을 들고 공원으로 찾아오는 토끼할아버지가 있었다. 짖꿎은 아이들을 피해 덩굴 아래 피해 있던 토끼가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그 바지 아래로 반갑게 뛰어갔다. 노인은 토끼에게 비닐봉지에 담아온 고구마 조각을 꺼내 주면서 등을 쓸어 주는 모습이었다. 공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토끼들이 노인을 보면 반가워하면서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토끼들의 목자였다. 토끼가 개들에게 물리거나 길고양이의 공격을 받으면 분노하기도 했다. 내가 있는 실버타운의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분이 있다. 나보다 세 살 아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법적으로 그도 노인이다. 그는 온몸을 꼼꼼하게 닦아준다. 앉혀놓고 머리도 감겨주고 손으로 얼굴에 비누를 칠하고 손바닥으로 세수도 시켜준다. 그는 잠시도 쉬는 법이 없는 것 같다. 산더미 같이 빨아놓은 수건을 차곡차곡 접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면 목욕탕 구석에서 밥을 빨리 먹고는 빈 시간을 이용해 밖으로 나가 잔디도 깍고 쓰레기도 치우고 밭을 가꾸기도 했다. 한번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가 도를 닦는 방법은 노동이라고 했다. 노동이 기도라고 했다. 그는 민족종교를 믿는 도인이라고 했다. 일반 종교에서 신도라고 부르는 걸 거기서는 도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젊은 날 영국작가 써머셋 모옴이 쓴 ‘면도날’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하버드대학을 나온 주인공은 뉴욕에서 택시기사가 됐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에게 택시는 수도사들의 지팡이나 탁발을 하는 그릇 비슷한 도구라고 했다. 때를 미는 노인도 사람들의 때를 밀어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는 건 아닐까. ​

서울의 목욕탕에서 건성으로 때를 미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상처 난 자존심이 표정에서 보일 때도 있었다. 믿음이라는 것도 그랬다. ​

건성으로 교회에 출석만 하면서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영혼에 깊은 심지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내가 목욕탕에 가서 그를 보고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

“그래 일을 하면서 도통을 했습니까?”​

놀리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가 믿는 민족종교는 ‘도통군자’가 되는 게 목표인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그가 잠시 신중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도통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그리고 완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내가 맡은 작은 일을 부지런히 할 뿐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가슴속에서 ‘쿵’하고 둔중한 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었다. 큰일만 하려는 사람은 결국 아무 일도 못할 수 있다. 완전만을 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진실로 위대한 일면은 작은 일에 성실한 게 아닐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일을 할 때 하늘에 계신 그분이 함께 하면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건 아닐까. 손발을 놀리어 이마에 땀을 흘리게 되면 하늘은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 정직한 일은 어떤 것이든 고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그분께 맡기고 열심히 일한다면 하나님과 우주가 그를 도와 열매를 맺는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기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했다. 나도 글을 쓸 때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생활 주변에서 본 진리를 간단명료한 글로 엮어 블로그에 올린다. 큰 걸 쓰려고 하지 않는다. 작은 것으로도 족하다. 불완전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면. 환난이나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작은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글을 성실하게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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