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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지는 것들

운영자 2022.09.05 10:01:16
조회 166 추천 2 댓글 0

비가 오고 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온통 뿌연 안개로 덮여 있다. 십일호 태풍이 엊그제 밤부터 북상하고 있다고 한다. ​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치솟는 소리를 내던 닭도 조용하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방 안의 공기에 파문을 일으키며 퍼지고 있다. 이런 날은 마음 밑바닥까지 촉촉해지면서 감상적이 된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는데 문득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이 마음속으로 쳐들어온다. 양복을 만들던 기술자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늙어가고 주문하는 사람들도 적어져 갔다. 나중에는 그가 하던 가게의 간판만 옆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노인인 그가 정원에 내리는 비를 망연히 보는 표정이 허허로웠다. 비를 보는 내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의 우물 밑바닥에서 또 하나의 장면이 물방울이 되어 보글거리며 떠올랐다. 동대문 밖 벼룩시장 건너편에 있던 작은 만두 가게의 모습이었다. 지은지 백년 가까울 낡은 단층 벽돌 건물 끝에 만두가게가 있었다. 한 평 정도 되는 안은 탁자를 놓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밀가루 반죽을 놓은 작업대 옆 벽에 길게 판자를 하나 붙여 놓은 게 전부였다.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곳은 시간이 정체 된 것 같았다.

먼지 앉은 얇은 유리창을 통해 나이먹은 가게 주인의 옆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는 혼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벽 위 선반에 놓인 낡은 흑백텔레비젼의 화면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만든 찐빵과 만두로 몇 명의 가난한 노인이 한 끼를 때우는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는 그의 고달픈 삶의 휴식같아 보였다. 나는 강북으로 갈 일이 있을 때는 그 벼룩시장의 헌책방에 들려 책을 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건물 끝에 겸연쩍게 달라붙어 있던 작은 만두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핸드폰 가게가 생겼다. 평생 밀가루를 만지던 영감의 만두가게가 정지된 것 같았다. 모든 게 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날 때가 있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 나의 연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십년 저쪽 세월의 동춘써커스단의 천막이 떠오른다. 그날은 여주법원에서 오후의 재판을 마치고 겨울들판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십도 아래로 내려간 날이었다. 얼어붙은 논바닥 위에서 써커스단의 울긋불긋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써커스는 유년 시절의 황홀하던 추억 그 자체였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져글링을 하던 소녀들. 높은 공중의 줄 위가 자기 세상인양 재주를 넘던 사람들. 그리고 마음 들뜨게 하던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귀에 남아있었다. 나는 표를 사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손님은 나 하나였다.​

“관객이 단 한 명이라도 우리는 합니다.”​

그들의 철학인 것 같았다. 그들은 유일한 관객인 내게 접이식 철의자를 가져다주고 옆에 석유난로를 피웠다. 난로에서 매캐한 기름 냄새가 났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줄 위로 올라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중의 줄 위에 서니까 많이 춥네요. 먹고 산다는 게 이런 겁니다. 지금 제가 부리는 줄 타는 재주는 우리나라에서 몇 사람 가지지 못한 기술입니다. 진수가 뭔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묘기만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신 박수를 쳐주세요. 저는 박수를 먹어야 사는 재주꾼입니다.”​

공중의 줄 위에서 그는 새같이 높이 솟아올랐다가 줄에 내려앉아 바닥으로 떨어질 듯 잠기기도 했다. 한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그에게 나는 마음 가득 박수를 보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들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장인이 앉아 있던 구두방도 양복점도 보기 힘들어진다. 찐빵집도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울긋불긋한 간판을 달고 있던 극장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들을 보면 나는 말들이 풀을 뜯는 조용한 초원의 저녁이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말들의 형태를 서서히 지워가는 아련한 광경이다. 그 말들은 깜깜한 밤이 되면 밤하늘에 총총한 별빛들을 보겠지. 황혼을 맞은 인생도 비슷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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