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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인생

운영자 2022.09.12 10:18:20
조회 140 추천 1 댓글 0

어제 오후 카톡으로 책사진이 하나 왔다. 표지 뒤에 ‘지리산 수필가’라고 저자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방송국 보도국장과 사장을 지내고 퇴직한 분이었다. 그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십이년째 혼자 살고 있었다. 지난해 봄 시절인연으로 며칠간 영혼을 교류했다. 백발과 주름진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젊고 싱싱해 보였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꿈 그리고 그걸 수필로 풀어내려는 희망이 그에게 촉촉한 물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있으면 늙어도 늙지 않는가 보다. 꿈은 젊은날 현실의 고통들을 이기게 하는 힘이었다. 나락에 떨어져 있어도 꿈은 나를 그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꿈꾸는 인생이었다. 어려서는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는 마음과 부모의 꿈이 머릿속에 구겨 넣어졌다. 판검사가 되어 남들의 위에 군림하라는 것이었다. 잘살라고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주위 공부 잘하는 아이들 대부분의 장래 희망은 그런 것이었다. 대충 그 근처까지 가보았다. 그 희소성 때문에 턱없는 사회적 대접을 받아도 하는 일들은 재미없어 보였다. 나만 아니라 상당부분의 법조동료들은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시력도 약했다. 세상이 넣어 준 벼슬자리의 꿈은 껍데기만 화려한 속빈 강정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알맹이를 찾아나섰다. 문학 쪽을 넘겨다 보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 학교도서관에 놓인 문학지 속의 단편소설을 더러 읽었었다. 재능도 용기도 없어 문학의 바다에 뛰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글쓰는 사람들을 보면 무대 아래서 선망의 눈으로 가수를 보는 그런 비슷한 감정이었다고 할까. 삼십대 중반 다른 꿈을 꾸었다. 소설가나 수필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책 속에서 조선의 선비 김시습과 허균을 만났다. 과거급제와 벼슬이 인생 최고의 가치였던 그 시대 김시습은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팔도를 유랑하면서 소설과 이천 편의 시를 썼다. 허균 역시 벼슬아치라기 보다는 홍길동전과 여러 편의 수필을 쓴 문사였다. 나는 그들의 삶에 마음이 끌렸다. 나는 또 조선말 정창해라는 선비를 만나 반하기도 했다. 그는 청노새 한 마리를 타고 조선 땅을 두루 돌아다녔다. 가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글을 한 편 써서 가지고 있던 글주머니 속에 넣곤 했다. 그는 세상의 지위에 묶이고 돈에 매여 사는 인생들을 답답해했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방에 있는 그의 모습을 얼핏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선비같이 되어 보고 싶은 새로운 꿈을 꾸었다.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문학은 정결한 제단에 일단 모셔두기로 하고 밥벌이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변호사를 해보니까 거기서도 새로운 꿈이 피어올랐다. 대학 일학년 때 보았던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드넓은 바다의 작은 섬에 갇혀 있는 주인공이 아련한 눈빛으로 세상 쪽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의 꿈을 만들어냈다. 그런 사람을 자유의 땅으로 건네주는 뱃사공역할을 하는 변호사가 되면 멋있을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자유를 선언한 대법원판결 다섯만 만들면 그런대로 괜찮은 변호사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가면서 운 좋게 그 꿈은 이루어졌다. 목표한 숫자를 초과한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제단에 모셔둔 문학의 꿈을 이루어 보기로 했다. 인간의 애환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 대다보면 연민 피로가 만만치 않았다. 그 피로를 희망으로 바꾸는 작업이 글쓰기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가 살아있을 때 그를 자주 만났다. 내가 쓴 작품을 그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는 내 작품을 한줄 한줄 읽으면서 자신이 깨달은 문학을 알려주었다. 그는 내게 영국 작가 써머셋 모옴의 번역된 창작노트를 복사해서 주기도 했다. 마지막에 그는 원고지 일곱장에 또박또박 손글씨로 나의 소설에 대한 추천사를 써주면서 말했다.​

“문학계가 아주 편협한 곳입니다. 엄 변호사가 설령 잘 쓰게 된다고 해도 평가해 주는데 인색할 겁니다. 다만 나중에 ‘법정소설 나부랭이나 쓰는 놈’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대단한 칭찬이라고 여기면 될 겁니다. 상이나 평론에 연연하지 말고 소설집 열권쯤 쓰면 소설가의 인생으로 괜찮은 게 아닐까요?”​

그의 말을 마음 깊숙이에 새겨 두었다. 소설과 수필을 쓰는 게 나의 노년의 꿈을 이루는 일이 됐다. 매일 오전에는 수필을 오후에는 소설을 쓴다. 물론 조금씩 야금야금 놀이같이 쓴다. 꿈이라고 할까 희망이라고 할까 그건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행복의 조건인 것 같다. 생애의 행 불행은 그 희망이 있고 없음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닐까? 나는 요즈음 죽음까지 내게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남았을까 짐작해 본다.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죽음은 모든 꿈과 희망의 끝일까?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저 세상이 없고 이 세상이 모두 다라면 그저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런 세상에서 자기 같은 존재는 가장 불쌍한 인간일 것이라고 했다. 그건 반어법이었다. 죽음이 끝이라면 행복했던 생애도 허무 그 자체다. 예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소개한다. 인간의 영혼이 새로운 몸을 받고 천사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새롭게 영생의 꿈도 꾸어보고 있다. 그 희망이 있다면 힘들었던 생애도 오래된 흑백 영화속의 여름 풍경 같이 담담해질 것 같다. 꿈을 수시로 바꾸기도 하고 키우기도 했다. 그렇게 꿈꾸는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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