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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승 김상협 - 만주시절의 동료

운영자 2017.01.18 15:39:45
조회 383 추천 1 댓글 0
김상협총리의 동생 김상돈회장이 생존시였다. 나는 김상돈 회장에게 형 김상협이 남만방적 경리주임시절 함께 근무하던 사람 중 살아있는 분이 없느냐고 물었었다. 김상돈회장은 경성방직의 공채1기인 박인환씨가 아직 살아있다고 알려주었다. 박인환씨는 일제 말 경성방직의 사원으로 들어가 사장까지 지냈다고 했다. 그 무렵 80대 후반인 박인환씨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잠시 퇴원했는데 잘 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김상돈 회장을 통해 간신히 만날 약속이 됐었다. 

  

2008년 쌀쌀한 바람이 불던 봄 어느 날 오전 11시 30분 경이다. 나는 명동의 롯데호텔 일층의 레스토랑 ‘페닌슐러’의 창가쪽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차량이 통행하는 큰길 건너편 일제시대 고동색 벽돌건물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약속시간 보다 조금 먼저였다. 


“안녕하세요.”

​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갈색 정장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분한 인상의 노신사가 앞에 서 있었다. 네모난 넓은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모범생 같이 유순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한 후 마주 앉았다. 그가 박인환씨였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표정으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상돈 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엄변호사와 세 사람이 함께 만나자고 그러시더라구요. 만주에 있을 때 얘기를 해 달라고 하시던데 제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집에서 먼저 몇 자 적어봤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재킷 안의 주머니에서 에이포용지에 인쇄된 서류 여섯 장을 건네주었다. 그가 경험했던 경성방직의 모습이 압축되어 담겨있었다. 대충의 골격만 들어 있었다. 그의 자세하고 생생한 소리를 듣고 싶어 물었다. 


“경성방직 입사 당시의 얘기를 해주시죠.”


그가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1943년 9월경이었어요. 학제가 변경 되서 갑자기 졸업을 하게 됐죠. 당시 저는 보성전문 법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앞으로의 진로를 걱정하고 있는데 학교에 사원모집을 한다는 방이 나붙었어요. 내용을 보니까 경성방직과 식산은행에서 각 약간 명을 채용한다는 거였죠. 당시 대학졸업생들이 제일 취직하고 싶어 하는 곳이 그 두 회사였어요. 붙은 내용을 보니까 식산은행 봉급이 경성방직보다 2원이 많았는데 일본인에게는 3원을 더 준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차별이 있는 거죠. 저는 마음이 경성방직으로 쏠렸죠. 


​그 이유는 민족기업가로 알려진 김연수 사장의 회사였기 때문이죠. 경성방직은 김연수 사장이 직접 경영하고 임직원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전원 한국 사람이었어요. 경영도 아주 견실하다는 평이었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일본의 산속 공장에서 공원으로 근무하면서 경영수업을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지원하게 되셨습니까?” 


“학교에서 추천 해줬어요. 법과대학에서 두 명 그리고 상과대학에서 두 명이 추천 되서 면접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시 을지로 입구의 허름한 이층 건물이 경성방직의 본사였어요. 순서를 기다리다가 면접장 안에 들어갔습니다. 회사 회의실인데 나무의자에 김연수사장이 앉아 계시더라구요. 사실 그때 저는 어리둥절하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먼저 옆에 있던 상무가 인적사항 같은 걸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연수 사장님이 질문을 하셨죠.”


​“뭘 물으시던가요?”


“묻기보다는 입사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겠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어떤 조건인가 하면 첫째는 우리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때 조혼의 폐가 많으니까 25세 이전에는 결혼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거였죠. 사실 그 말이 맞았습니다. 열대여섯살만 되면 장가를 들고 아이들이 막 태어났으니까요. 저는 다행히 형이 그때까지 장가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별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연수사장님은 음성이 아주 좋으셨어요. 어린애를 데리고 설명해 주듯 차근차근 알려주고 물으셨죠. 회사 내에 작업장이 열 개나 되는데 회사 사정으로 어느 부서로 배치되더라도 따르겠는지 또 입사 후 6개월 간은 각 부서에 가서 실습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지 제 의사를 물으셨어요. 저는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경성방직 사원의 초봉은 60원이었어요. 순사월급이 한 달에 20원이고 초등학교 선생이 그보다 조금 못했어요. 일반 가정에서 한 달에 15원 정도면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경성방직은 최고의 급료를 주는 기업이었죠. 일본 식산은행의 월급이 초봉으로는 최고였는데 조선인의 경우 62원이고 일본인의 경우 65원이었어요. 그 외 금융조합 정도가 월급이 좋은 편이었죠. 당시 환율은 1달러 대 1원 몇 전정도 했어요.”




기억력이 비상한 노인이었다. 


“처음 근무하실 때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가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제가 그 해 9월 28일 졸업을 하고 10월 1일 발령을 받았어요. 김연수 사장님의 생신이었죠. 먼저 영등포 방적공장에 가서 3개월간 실습을 했습니다. 실이 만들어지는 과정, 원단이 짜지는 것 등 생산 공정을 익혔죠. 


​그 다음은 사무업무를 배웠어요. 원료, 자재, 노무관계 등 전반적인 거였죠. 그렇게 회사 일을 익히면서 그 해를 보냈는데 다음해 3월 초였어요. 을지로의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가보니까 최두선 상무님이 전무가 되셔서 만주에 있는 남만방적의 책임자로 가시게 된 걸 알았죠. 저보고 ‘자네하고 같이 가고 싶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석에서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하고 준비가 필요하니까 닷새 후에 떠나겠다고 말씀드렸죠. 


​사실 그 당시 서울은 학병문제, 징용문제로 정세가 아주 불안했어요. 그에 비해 만주는 긴박감도 적고 비교적 평온한 상태여서 오히려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오후에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서 다음 날 아침 봉천역 한 정거장 쯤 전에 있는 소가둔 역에서 내렸어요. 그 무렵의 영등포 역 주변과 비슷한 정경이더라구요. 허허벌판에 전봇대가 비스듬히 서 있는 게 보이고 퇴락한 집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었죠. 제가 십년 전에 다시 소가둔을 가 본 적이 있어요. 자동차공장이 하나 세워졌을 뿐이지 역주변의 모습이 예전 거의 그대로였죠.”


그때 김상돈회장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일찍들 오셨네요.”


그가 자리에 앉았다. 은색조끼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와서 메뉴를 건네주었다. 


“엄 변호사는 뭘하겠수?”


김상돈회장이 물었다. 


“저는 안심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김상돈회장이 앞자리에 있는 박인환씨에게도 뭘 들겠냐고 물었다.


“저는 생선으로 할랍니다.”


“그럼 나도 생선으로, 그리고 술은 한 잔 안 하겠수?”


​  김상돈회장이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안 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김상돈옹이 박인환씨 쪽을 보았다.


“저도 몸이 아파서 술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작은 병으로 맥주를 하나 시켜서 입이나 축입시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돌아갔다.


“그 무렵 만주의 모습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내가 박인환 사장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시 만주사람들의 생활이 아주 비참한 걸 봤죠. 민가를 보면 집집마다 변소가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은 통보리를 배급받아 그걸 삶아요. 그리고 구석에 놔두면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죠. 보리를 그렇게 삭혀서 먹는 겁니다. 농가가 변소가 없는 건 돼지가 사람 똥을 먹고 사는 거죠. 봉천거리에는 커다란 마차가 돌아 다녔어요.


 그런데 거기 사람들 싸우는 방식이 특이했던 게 자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마부들을 보면 대개 체격이 아주 큽니다. 싸우는 방식은 말로 서로 떠드는데 아주 끈질기죠. 오늘 다 못하면 내일 싸우자는 그런 식이죠. 그러다 심해지면 몸싸움이 벌어지는 수도 있어요. 정 안되면 서로 어깨로 치고 그래요. 때리지는 않더라구요. 저는 그걸 보면서 싸우는 방식이 좋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참 만주에서 인상에 남는 건 그곳의 개들이 아주 크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때도 개를 많이 잡아먹었는데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더라구요. 왜냐하면 거기 개들이 사람을 먹는 수가 많았거든요. 


​만주의 겨울이 아주 길고 혹독하게 추운데 겨울이면 땅이 얼어서 파기가 힘든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시체를 언 땅위에 그대로 놓고 돌로 덮는 장사를 지내는 거죠. 시간이 가면서 돌이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굶은 개들이 그런 묘지를 파헤쳐서 인육을 먹죠. 그래서 만주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더라구요.”


옆에서 듣고 있던 김상돈회장이 덧붙였다. 


“나도 신경에 있는 축산학교에 다녀서 만주를 알죠. 그곳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통보리를 삶아 삭힌 걸 먹지만 보통은 젬병이라는 걸 먹어요. 조나 수수 보통 고량이라고 하죠. 그걸 빈대떡 같이 부쳐서 소금을 뿌려 먹었어요. 조금 형편이 좋으면 거기에 파와 마늘을 섞어서 먹고 그 위는 돼지고기를 넣어서 말아먹었죠. 잘 사는 집은 돼지고기로 완자를 만들어 기름에 튀겨 먹었어요. 아까 만주 농가에 변소가 없다고 했는데 저는 근로봉사로 몽고지역을 갔었는데 거기서는 사람 똥도 말려서 연료로 씁디다.” 


김상돈 회장과 박인환씨는 일제시대 경복중학교 동문이었다.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하얀 접시에 노릇노릇 구워진 스테이크가 담겨있었다. 고기즙이 알맞게 배어나와 반들거렸다. 


“남만방적 공장에서 일하던 얘기를 해 주시죠.”


내가 박인환 사장에게 물었다. 


“남만방적에 김연수 사장의 아드님인 김상협선생이 동경제국대학출신의 엘리트인데도 공장에서 경리주임을 하시는 걸 봤습니다. 겸손하고 과묵한 분이었죠. 저는 사장님의 아들이라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제가 남만방적에서 한 일은 관공서에 가서 자재나 물품들을 받아오는 일이었어요. 


​당시는 전시라 모든 물자가 통제되고 그곳도 배급제가 실시됐죠. 자재과에 배치되어서 마차를 동원해 봉천의 관공서를 다니면서 식량과 공장용품 원자재를 배당받아 가지고 오는 일이었죠. 유류나 석탄까지 전부 배급받는 실정이었어요.


 그 당시 만주에서 한국인하면 사기꾼이나 마약쟁이란 인식이 퍼져 있었어요. 한국인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죠. 사람들은 한국인 기업가가 남만방적이라는 사업을 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그러다 공장을 와 보면 그 규모에 더 눈이 휘둥그래지고 했죠. 저는 그 당시 배급품을 받아서 남만방적의 김상협 선생이 묵는 사택에 가져가기도 했어요. 그때 만주에서 가장 큰 회사는 만철이었어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만철의 사택이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어요. 일자집이었는데 단독주택으로 스무채 정도 있었어요. 우리 남만방적의 사택이 그보다 더 좋았죠.”


“당시 만주에서 남만방적의 직원으로 근무하시면서 에피소드가 없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한번은 얻어맞은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1945년 초였어요. 제가 어느 날 봉천에 나가 공장용품을 사가지고 마차로 싣고 돌아오는데 거기 있던 삼양사 직원이 자기네가 배급받은 과자도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함께 마차에 싣고 오다가 경찰관 심문에 걸렸죠. 그때 우연히도 제가 배급품에 관한 송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불법으로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이란 혐의를 받고 제가 본서로 연행이 됐습니다. 제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 전화를 걸었죠.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고 전화기를 순사에게 바꾸어 주려고 하는 데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보고 전화를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예요. 영문을 몰랐죠.” 


“왜 그랬어요?” 


“달구지에 싣고 가는 물건의 서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영수증도 송장도 중요한 게 아니고 할당된 배급물자를 찾는 것에 순사 자기는 관심이 없다는 거죠. 다만 너희 사장인 김연수나 그 아들 김상협이 다 나쁜 인간이라는 거였어요. 창씨개명도 안하고 등화관제에 협조도 안하는 비국민이라는 거죠. 그래서 화가 나서 때렸다는 겁니다. 얻어맞았지만 일본인들을 보면 나름대로 그들의 애국심이 철저한 면이 있어요.”


“같은 민족만 고용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기업의 본질은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 아닙니까?” 내가 따졌다. 


“김연수 사장님이나 그 아드님인 김상협 선생은 일반 장사꾼이 아니죠. 아무 돈이나 버는 분이 아니었어요. 벌 돈만 버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김상협 선생은 그 시절에도 빈 시간이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하신다고 했어요.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을 보시면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또 모택동과 장개석에 관한 것들을 관심 있게 연구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옆에서 지켜본 김연수사장이나 그 아들인 김상협선생은 어떤 인품이셨죠?”


“저는 말단 직원이라 어쩌다 만나 뵙는 거지, 옆에서 뵐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 회사 조직은 사장이 일반직원들 하고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어쩌다가 부르시면 만나 뵙는 거죠. 김상협 선생은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지 얘기를 천천히 하시는 스타일이었고 생각은 많이 하시는 분이었어요. 신중한 결정이니까 관계되는 사람들이 거기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실행은 즉시 하시는 성격이었습니다.”

​  그때 김상돈회장이 끼어들었다.


“엄변호사, 박사장이 식사를 하시게 좀 천천히 물어요.”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던 박인환 사장의 표정에 뭔가 나타났다.


“제가 한 번은 연초에 김연수사장님께 세배를 간 적이 있어요. 사장님은 제일 친한 친구인 김화진씨와 술을 들고 계시더라구요. 그 분은 안동 김씨의 종손이시고 유명한 민속학자이셨죠. 사장님은 저를 그 자리에 앉히시더니 술을 주시는 거예요. 큰 잔에 담은 술의 양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벽장에서 오가피 술을 꺼내다가 주셨죠. 누가 선물로 보낸 건데 가져다 마시라고 하셨어요. 가정적이고 자상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0년대 말 용인공장을 지을 때 제가 모신 적이 있어요. 거기서도 약주를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새로 만든 기숙사가 옛날 영등포공장 기숙사에 비하면 천국이구나 라고 하면서 좋아하셨죠.”


“당시 만주에 근무하시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서울로 오셨나요?”


​ “만주에서 미군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보도가 있었죠. 미군 폭격기가 매일같이 만주 상공을 맴돌았어요. 남만방적의 직원들은 모두 전전긍긍했죠.


 거기서 해방소식을 들었는데 문제는 어떻게 직원들을 데리고 철수하나였어요. 임원들은 장차 공장가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죠. 그때 김상협선생이 공장사람들을 지휘했어요. 우선 근로보국대 학생들과 한국에서 데리고 온 여공들을 귀향시켰어요.


 그 다음에 남자종업원과 직원가족들을 보냈어요. 그 무렵 만주는 치안부재 상태였어요. 주변에 사는 불량배들이 민가와 공장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치고 막 물건을 훔쳐갔죠. 그에 비해 중국의 팔로군은 수시로 공장에 왔는데 별 일이 없었어요. ​

약탈을 막기 위해 2천명 직원들이 똘똘 뭉쳤죠. 김상협선생과 임원 열다섯명이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서 경비를 담당했어요. 남녀 전 종업원과 직원가족을 무사히 귀성시키고 경비를 담당하던 최종팀이 소가둔 역에서 화물차 두량을 배정받아 제품 일부를 싣고 떠났죠. 도강허락이 나와 안동을 뒤로하고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때는 정말 감개가 무량했어요. 사리원에 와서 소련군에게 화차를 몰수당했죠.”


“화차를 몰수당한 후에 어떻게 하셨어요?”


“달구지를 구해서 짐을 옮겨 실었죠. 장단의 삼팔선을 넘어서 개성에 도착했고 거기서 남만방적의 사원이던 김진국의 고향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우리일행은 해산했습니다. 각자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 거죠. 귀국한 사원들은 경성방직 본사 사무실로 가서 귀국 후의 대책을 요구했죠. 사실은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살 길을 마련해달라고 데모를 한 거죠. 회사는 일부직원을 인천에 있는 동양방직에 취직하게 하고 퇴직금을 주는 방법으로 정리를 했죠.”


박인환 사장의 얘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경복중학교를 함께 다닌 두 분은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서로 학교 때 얘기를 나누었다. 김상돈 회장이 내게 말했다.


“일제 말 정말 우리 군사훈련 하느라고 힘들었죠. 나는 맨날 그 무거운 쇳덩이인 기관총을 메고 다니느라고 빗장뼈가 다 휘어버렸다니까요.”


그 말을 박인환씨가 받아 계속했다.


“저도 말씀을 하니까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이학년 겨울이던가 한강 남쪽 영등포 강가에서 공포탄을 쏘면서 하는 실전훈련이 있었죠. 그때 척후로 나갔었는데 하얀 모래벌판이 이어지고 꽁꽁 얼어붙은 한강이 보였죠. 또 멀리 북한산의 울퉁불퉁한 바위가 보였죠.”


김상돈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버지가 하던 경성방직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당시 먼지를 빨아들이는 기계를 설치했어도 지금 같나요? 성능이 시원치 않았죠. 섬유먼지가 뿌옇게 공중에 떠다니던 게 기억나요. 처음에 돈이 없이 힘들게 시작한 공장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사업이 제대로 일어선 후 만주 소가둔에 지은 남만방적은 달랐어요. 아버지는 최고급 설비를 갖추셨어요. 공기도 깨끗하고 기숙사 시설이나 사택도 그 시대 최고였으니까요. 영양상태가 좋았죠. 전 직원들이 말이죠. 저는 그때 신경의 축산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어떻게나 물자가 부족했는지 밤이면 추워서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더러 아버지 회사인 남만방적의 김상협형님에게 가서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자고 그랬죠. 그곳은 기숙사 유리창도 이중으로 만들어 따뜻했죠. 급식이 좋으니까 여공들도 전부 핏기가 돌았죠.”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신경의 축산학교를 다니셨어요?” ​


내가 김상돈회장에게 물었다.


“당시는 일본본토가 미국의 폭격지역에 들어갔기 때문에 위험할 때였죠. 만주가 일본보다 안전했어요. 그리고 수의사를 배출하는 축산학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징병이 면제됐어요. 일본 놈들도 군대 가지 않으려고 많이 들어와 있었죠. 그 학교의 입학경쟁율이 아주 높았죠. 조선에서 경기, 경복중학교 출신 수재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이상하게도 거기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차별하는 그런 건 없었어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큰 레스토랑은 다시 한적해졌다. ​


김상돈 옹이 앞에 있는 박인환씨를 보면서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먼저 가세요.”


팔십대 중반을 넘은 노인끼리의 마지막 인사였다. 박인환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김상돈회장과 둘만 남았다. 김상돈회장이 나를 보면서 얘기했다.


“저 박인환 사장은 정말 성실한 사람이에요. 같이 경복중학교를 다닐 때 보면 검도를 해도 한 동작 한 동작이 성실 그 자체인 것 같았어요. 저 양반은 보성전문 법과를 다녔는데 거기서도 수석을 해서 경성방직 직원으로 추천이 된 거예요. 아버지가 경성방직의 경영을 맡겼던 매제 김용완 사장은 저 양반을 자기 사위로 삼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지 못했지. 그래도 저 양반은 자기 실력으로 경성방직의 사장까지 올라갔어요.”


이제 김상돈 회장은 고인이 되셨다. 그때 만났던 박인환 사장도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 그 분들에게 직접 들었던 귀한 얘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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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 성녀와 좀비 [1] 운영자 17.03.09 103 0
945 대통령은 왕인가? 아닌가? 운영자 17.03.09 314 0
944 희망을 파는 법률사무소 운영자 17.03.09 263 0
943 내가 받은 잔만큼만 운영자 17.03.08 162 0
942 아름다운 황혼 운영자 17.03.08 174 0
941 벼락 칠 때 엎드리는 부자 운영자 17.03.08 172 0
940 삶속에 살짝 다가오는 악마들 운영자 17.03.08 220 2
939 돈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싶소 [1] 운영자 17.03.08 155 1
938 수필속의 법정스님 [1] 운영자 17.03.07 249 0
937 노년에 하고 싶은 일 운영자 17.03.07 468 2
936 혼자 먹는 밥 [1] 운영자 17.03.07 240 0
935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 운영자 17.03.07 177 0
934 촛불과 태극기 운영자 17.03.07 246 1
933 [단편소설] 김종오사건 기적 5편(완) [2] 운영자 17.02.16 227 2
932 [단편소설] 김종오사건 기적 4편 [1] 운영자 17.02.16 218 1
931 [단편소설] 김종오사건 기적 3편 운영자 17.02.16 245 0
930 [단편소설] 김종오사건 기적 2편 운영자 17.02.09 180 0
929 [단편소설] 김종오사건 기적 1편 운영자 17.02.09 3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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