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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38~39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08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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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그 바`람은 저녁을 알리는 빗소리가 시작될 즈음에 또 다시 한나를 찾아왔다. 처음 이두나와 얘기했을 때 찾아온 바`람은 그저 일시적인 자연 현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 묻어있는 감정들을 절제할수록 바`람은 더욱 길게 한나의 손에 머물렀다. 보이지 않는 줄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어쩔 땐 두꺼운 줄로 변해 손에 가득 들려있으면서도 얇게 줄어들어 코인롤링을 하듯 한나의 손가락 사이를 흘렀다.


설명할 수 없는 이현상에 한나는 유령을 조우한 것처럼 무서워했지만, 한편으론 작은 햄스터가 조잘거리며 손바닥을 타고 다니는 귀여움을 느꼈다. 대신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어쩔 땐 바`람의 세기가 커지면서도 어쩔 때는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복면들은 그저 환기를 시켜둔 바`람이 비에 섞여 거세졌다고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복면들은 이번엔 기름진 냄새가 나는 빵과 수프를 주었다. 빵 속에는 매콤한 고기가 들어있었고, 베어 물을 때마다 땀이 삐질삐질 이마에 맺혔다. 그 때마다 이마 주변으로 바`람이 휘날려 열을 식혀주었다.

마치 바`람을 부리는 요정이 한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빵을 다 먹은 한나는 이고르에게 부탁해서 알아낸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신 다음,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를 들고 이두나가 있는 '새장'으로 향했다. 새장 앞에 선 한나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섯 번 일정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바`람은 양 쪽으로 땋은 한나의 머리를 파닥파닥 휘두르고 있었다.

"이두...아윽..나"

오른쪽 갈래가 한나의 콧잔등을 쳤고, 한나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한나?"
"저 왔어요. 밥 드셔야죠."

조용한 발걸음이 문 너머로 가까워졌다. 한나는 익숙하게 문 밑의 입구에 수프 접시를 밀어넣었다.

"비가 오고 있네요."

숟가락이 달그락거리고 호록거리며 수프를 먹는 이두나의 소리를 들으며 한나가 말했다.

"한나는 비 좋아해요?"

이두나가 물었다. 한나는 비라는 개념만 알 뿐이지 실제로 맞이한 적은 없었다. 그저 씻을 때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처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구태여 저택을 나가지 않아서 깊은 의미를 두진 않았다.

"나쁘진 않아요."

굳이 부정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일정한 리듬으로 심신을 안정케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복면들이 말한 이 '저택'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였던 푸른 풀밭과 숲은 보기만 해도 격양된 마음이 가라앉을 만큼 품어 있는 냄새가 한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저택에는 이두나, 한나, 그리고 복면들만 있는 듯 했다. 실제로 한나는 관에서 깨어난 직후에 이 사람들을 제외하곤 다른 이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저택은 조용함의 배경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저택 주변을 감싼 돌담 위에 간격을 두고 설치된 전등들이 어두운 들판을 약하게나마 비추었다. 조금은 스산한 분위기가 저택을 흐르는 것 같았다. 풀밭과 숲은 어두워야 할 텐데, 이상하게 한나는 나무들의 개수가 보일 만큼 어둠 속의 사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눈을 연신 비벼 보아도 바`람만이 한나의 머리를 흔들고 지나갈 뿐, 이상하리만큼 뚜렷한 암순응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 아픈가요?"

숟가락 소리가 잠시 멈추고 이두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까 제 이름을 부르다 만 것 같아서요. 가시라도 밟았나요?"

"아...어... 네."

한나는 거짓말을 했다. 이젠 '이름이 없어요.'라는 것보다 더 말하기 힘든 사실은 '바`람이 자꾸 제 몸에 달라붙어요.'였다.

"제가 봐드리고 싶은데, 문 밖으론 나갈 수가 없네요."

"이건 금방 빼고 치료하면 돼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바`람은 이번에 문에 기대고 앉은 한나의 바짓께를 후루룩 훑었다.

"적에게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걱정해 주셨으니 당연히 감사해야죠. 그것이 적이든 아군이든 말이예요."

"크리스마스 정전처럼요?"

"그건 뭐예요?"

한나가 묻자, 방 안에서 그릇 놓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 아래 입구에서 반쯤 남은 수프 접시가 나왔다. 아주 잠깐, 한나는 이두나의 손가락들을 보았다. 상처로 얼룩진 손가락들을 보자 마음이 찔렸다. 아마 방을 나가려고 여기저기 뒤져보았을 것이었다. 한나는 그 갈색머리 스칼렛이 아니었다면, 복면들 몰래 이두나를 풀어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보이지 않았지만 이두나의 처절한 노력은 손가락으로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100년 전에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 기간 중의 성탄절에 서로를 적대하던 국가 간 최전방의 병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휴전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같이 운동을 하고, 대화를 하거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해요. 마치 한나와 저처럼 말이예요."


조금은 밝아진 목소리였지만, 한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좋아해요, 한나?"

갑작스런 질문에 한나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뭐냐고 묻는다면 한나는 '모른다'에 가까웠다. 설레는 이름이지만 정확히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보내는데, 이두나 당신은 어떻게 보냈는데요?"

"저도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제 일을 하면서 지냈어요. 가족은 예전에 모두 잃어버리니 명절의 존재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졌거든요."

이두나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한나는 잠시 잦아든 바`람 속에서 이두나의 탄식을 들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어요. 방금 한 말은 잊어 줘요."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는 저도 모르게 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요?"

이두나가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한나는 보여주기 싫은 것을 보여진 것 같아 부끄러워했다.

"가시 때문에..."

"천둥 아닌가요?"

"아니예요."

"제 아이들도 천둥을 무서워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저와 남편이 있는 침실로 베개를 가지고 들어오곤 했어요. 사랑스럽고, 아담한 아이들이었는데...지금은 제 곁엔 단 한 사람도 없네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시련은 이두나에겐 가혹했다. 가족을 잃고 행사라는 것도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살아오다 스칼렛이란 여자에게 휘말려 저택의 독방에 감금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것이 한나가 이두나에게 내린 감상이었다. 바`람은 한나의 눈가에 머물렀다. 한나는 이두나에 대한 동정 반 바람 반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사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두나에 대한 적의는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적이 아닌 친구, 아니 더 나아가 친구 이상의 관계를 한나는 느끼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두나를 보듬으며 위로하면서 자신의 신세도 한탄하고 싶었다. 기억 속 햇살 같은 아이를 찾지 못해 슬픔과 증오로 점쳐진 한나의 인생도 이두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비극적인 인생에 걸음마를 막 떼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제 곁엔 당신이 있네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스칼렛을 죽이지 말아요."

"이두나, 제발."

"스칼렛은 좋은 사람이예요, 한나."

이두나의 모든 말을 들어주고 싶은 한나였다. 하지만 스칼렛을 죽이란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화를 부르는 트리거였고, 자연스럽게 몸엔 힘이 들어갔다. 복면들은 그 여자를 잡으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두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한나에게 좋은 보상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예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속한 아톤에선 사람에 대한 인체 실험도 하고 있어요. 유전자를 이용해 부모 얼굴도 모르게 배양시켜 태어나게 만드는 실험도 하고 있는데..."

실험, 한나는 그 실험이란 단어에 주목했다. 저택으로 오기 전 한나는 이유도 없이 생겨나 유리창으로 도배된 밀실에 던져졌으며, 깨어 있는 동안 손에 고인 돼지의 피는 마르던 적이 없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겪었기에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이 실험인지 고문인지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한나 당신도 아이들처럼 조작당했을지도 몰라요."

"전 아이가 아니예요."

"겉이 어른이어도 마음은 어린아이일 수도 있죠."

이두나는 단순히 자신의 주장을 감성이 섞인 조잡한 근거로 뒷받침한다고 생각할 뻔한 한나였다. 한나는 자신이 아주 잠깐, 어린아이였던 순간을 기억했다. 이상한 액체를 주입당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기괴하게 신체들은 커져갔다. 기억 속에선 '급격한 성장'이 상식이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두나의 '실험'은 한나에게 역겨움으로 다가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증오가 조작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한나의 진짜 가족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 아이가 존재하지 않고 허상으로 기억된 아이라면?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없을 거라고요."

한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기억들마저 없다면, 한나는 살아있다는 목적 자체가 부정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돌아갈 곳도 없을 수도 있다. 죽는 것보다 두려운 건, 여지껏 믿어온 것들이 부정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약해진 바`람은 수프에 잠긴 숟가락을 흔들며 젓고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수프를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게 쌓여진 댐이 수벽에 박힌 대못 하나로 요동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두나와 얘기하기 힘들었다. 감정은 고조되고, 눈 앞은 흐려졌다. 이두나가 무어라 말하는 것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나는 방탄복 파우치에서 구급낭을 꺼내 연고와 반창고를 찾았다. 그리고 문 밑으로 밀어넣음과 동시에 일어나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들리는 희미한 울림은 한나의 약들을 받고 당황한 이두나의 두드림이리라. 그러나 한나는 지금 상태로 이두나와 더 얘기할 것이 없었다. 나누면  나눌수록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온 한나는 그만 변기에 먹었던 빵을 모두 토해냈다. 익숙한 담즙의 역하고 쌉싸름한 맛이 혀로 올라왔다.


한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모든 것을 게워냈다. 결국 핏기 섞인 액이 변깃물에 섞이고 나서야 한나는 구토를 멈추고 다리가 풀린 듯 변기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생각했다. 앨리스? 제시카? 줄리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네 이름이 뭐니?'

한나는 기억 속의 아이에게 묻는다. 아이는 눈부신 미소를 헤실헤실 지을 뿐 작은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일이 없었다. 겨우 몇 글자, 그것만 알면 되는 것을 그 아이는 마치 응석을 부리듯 입꼬리만 씰룩거린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눈물이 낡은 풍선에 물을 채운 것처럼 줄줄 새어나와 방탄복 위로 뚝뚝 떨어졌다. 바`람은 한나의 입가에 남은 토사물을 닦아주었다. 이제 바`람은 귀여운 것이 아니라 역겹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대체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데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보면 이것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란 것도 이젠 체감했다.

"제발 꺼져."



어째서 머무는 건가. 왜 간지럽히는 건가. 누가 이런 정신나간 장난을 몸에다 놓은 것인가. 한나는 텅 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다가갔다. 거울 속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푸른 눈을 가진 괴물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며 돼지와 인형만 죽인 정신나간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스칼렛이 거울 속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였을 때, 다시 그녀는 울며 수도꼭지를 돌려 손에 물을 받아 마신다. 저 복면들의 친절이 거짓인 건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뭐든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면 복면들이 수상히 여길 것이고, 한나는 그들 모두를 죽이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한나는 그 갈색머리 스칼렛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여자라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죽여도 될 것이었다. 한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물던 바람은 그녀의 바`람대로 조금씩 옅어졌다. 화장실 창문 밖에서 번개가 치며 한나의 창백한 피부를 들춰낸다. 이윽고 다가오는 천둥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스칼렛이 거울 속에서 한나를 잡아먹으려고 히히히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한나도 그 괴물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 허리를 굽히며 깔깔깔 웃었다.










110.


"오, 다행이 사이즈가 잘 맞는 것 같군요. 얘들아, 움직임은 어떠니?"


"잘 움직여!"

"움직일 순 있어요...."


산소 마스크를 쓴 구스만은 마치 하수구에서 정화 작업을 벌이다 온 배관공 같았다. 비행을 한 지 거의 4시간이 지나갔을 무렵, 안나는 아이들과 함께 서버번 밖으로 나와 구스만이 구비한 점프 슈트를 아이들에게 입혔다. 멜리사가 원래 입고 있던 점프 슈트는 군데군데 헤져 있어서 새로운 점프 슈트를 입힐 수밖에 없었다. 멜리사는 손쉽게 입은 반면, 엘사는 처음 입어보는 검고 무거운 옷을 갑갑해했다. 산소 마스크와 헬멧까지 씌우자, 마치 박쥐를 의인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흥. 무섭지!"

헬멧을 입을 멜리사가 엘사를 향해 두 팔을 펼쳐 올려 잡아먹는 시늉을 했다. 엘사는 조금 놀랐지만 어기적거리며 뒷걸음질 쳤을 뿐이었다.

"엘사, 조금만 참아주렴, 뛰어 내리고 몇 분 동안만 더 입으면 그 땐 마스크를 벗어도 돼.

"이 옷은요...?"

엘사가 팔을 허우적거렸다. 안나는 랫서판다 내지 개미핥기가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기분을 느끼며 엘사를 안아 들었다.

"밖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어서 벗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꼬마 아가씨."

엘사는 안나의 품 안에서 마치 딱딱한 막대기처럼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었다. 움직이면 더 답답해질 것이기에 차라리 가만히 있기를 택한 것 같았다. 안나가 옆구리를 톡톡 두드리자 엘사는 간지러운듯 몸을 꼬았다. 엘사를 내려놓은 안나도 점프 슈트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백팩을 멜리사에게 매게 했다. 멜리사가 그 무거운 백팩을 짊어질 순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엘사와 멜리사를 벨트로 고정시키고, 안나와 같이 고공 강하를 하면서 낙하산을 편다면 조금은 위험해도 지상으로 무리 없이 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멜리사는 안나의 의중을 파악한 듯 별 말 없이 백팩을 맸고, 멜리사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이 마스크 너머로 들렸다.

"멜리사, 조금만 참아주렴. 금방 끝날 거야."

"사탕 10개 더 주는 거야. 언니가 약속했어."

"15개 줄게, 고마워. 우리 동생."

안나가 멜리사의 헬멧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렸다. 멜리사는 백팩을 들고 거북이처럼 천천히 주변을 돌았다. 안나와 두 동생이 쓴 헬멧에는 이어컴이 내장되어 있어 통신이 가능했다. 헬멧을 쓴 안나는 이어컴을 작동시켰다.

[아, 아, 들리니? 엘사? 멜리사?]

엘사와 멜리사가 붕 뜬 안나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나는 헬멧 양쪽 귀 부분을 두드렸고,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땅에 닿을 때까진 이걸로 통신할 거야. 잘 들리지?]

[응!]

[네...]

통신까지 완벽한 것을 확인한 안나는 구스만의 뒷주머니에 휴대전화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지금 당장 메가라에게 전화할 필요는 없었다. 섣불리 전화했다간 이두나를 만나기 전에 되려 자신이 잡힐수 있기에 저택에 다다랐을 때 전화를 하여 휘하 팀을 호출시키는 것이 가장 정석적이면서도 합리적이었다.

"다 입으셨습니까? 리트리버 씨?"

세 사람이 옷을 다 입으면서 대기를 하던 구스만이 다가왔다. 그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카키 그레이 색 군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점퍼 주머니로 그의 모토로라제 휴대전화가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구스만 씨. 이제 무장하고 낙하산만 챙기면 될 것 같아요."

"그린라이트가 울리면 가급적 빨리 내리셔야 폴 타바에서 이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유의해 두세요. 특히 당신은 두 꼬맹이들까지 데리고 있으니 안전에 더욱 유의하셔야 합니다."

"네, 명심할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나가 고개를 숙였고, 구스만은 만족한 듯이 몸을 돌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안나는 재빨리 구스만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들키지 않게 뽑아 가져왔다. 장비와 수송기까지 대절해준 구스만에겐 미안했지만, 당텍의 핫라인은 당텍 직통으로만 통신 가능한 부류였기에 메가라와 전화하려면 추적을 당하든 당하지 않든 민간 전화기는 꼭 필요했다. 

"음? 내 전화기 어딨지? 리트리버 씨, 제 전화기 못 보셨습니까?"

"예? 못 봤는데요?"

구스만이 주머니가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안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의 휴대전화는 이미 꺼진 채로 완충된 당텍의 핫라인과 함께 안나의 방수 파우치 속에 잠들어 있었다.

"허 참, 어딘가 또 두고 온 모양입니다. 휴대폰 좀 찾고 올테니까 여기서 대기해 주십쇼. 아직 그린라이트까진 5분 정도 남았으니까요."

구스만이 투덜거리며 군수품 물자더미 사이로 모습을 감췄고, 안나는 들킬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려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엘사와 눈이 마주쳐 그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엘사는 프흣 웃으며 안나에게 뒤뚱뒤뚱 다가와 목에 손을 가져갔고, 차가운 느낌과 함께 기침은 금방 가라앉았다.

[방금 그건 모른 척 해야 해. 쉿(shh).]

[셴장.(shhhit.)]

[아니, 쉿이야.]


어차피 엘사는 자신이 한 말의 뜻이 그저 조용히 하는 표시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나중에 재미(fun)와 제길(fuck) 같이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화를 불러 일으키는 오해가 없도록 단단히 발음을 교정시켜야겠다고 안나는 멜리사에게 뒤뚱뒤뚱 걸어가는 엘사를 보며 생각했다. 안나는 플레이트 캐리어의 파우치에 m&p, mp5의 탄창이 잘 수납되었는지를 체크하고 서버번에서 두 총을 꺼냈다.


Mk18은 매력적인 소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져온다는 행동은 안나의 실수였다. 세 총을 가져간다면 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총기가 하나 더 생기지만 기동성이 떨어지고 캐리어 파우치의 탄창들의 위치를  헷갈릴 가능성도 있었다. 서버번 째로 나중에 필립스에게 부탁해 CIA로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한 안나였다. MP5를 슬링으로 앞에 맨 안나는 m&p를 바닥에 내려 놓고 낙하산을 매었다. 끈 조정까지 마친 안나는 총대를 줄여 왼쪽 어깨에 m&p를 매었다. 낙하산이 펴질 때 줄이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개머리판을 접고 총구를 밑으로 향하게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이 수송기에서 더 이상할 건 없었다. 안나는 엘사와 멜리사의 복장을 다시 점검하려 두 동생이 있는 유압 레프트 레버 쪽으로 다가갔다.


[엘사, 멜리사, 거기서 뭐하니?]

[...언니.]

엘사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난 안 들리는데, 엘사, 그냥 천둥 치는 소리 아니야?]

멜리사가 맞받아 쳤다. 하지만 엘사는 두 손을 모으며 불안한듯 멜리사와 안나의 주변을 배회했다.

[엘사, 언니 생각에는 하늘에서 뛰어 내리는게 불안해서 그런 거 같아. 지금 밖에서 천둥이 치고 있어. 무서운 건 당연해. 무서우면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법이란다?]

안나가 몸을 숙여 엘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코팅된 바이저 안으로 푸른 빛으로 발광하는 엘사의 눈이 희미하게 보였고, 그 눈에는 두려움 한 방울과 불안함 두 방울이 섞여 있었다.

[천둥이 아닌 거 같아요. 잠깐만요....]

엘사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두 손을 뻗었다. 주변의 공기에서 눈과 얼음이 생기더니 이내 바닥에는 모텔에서 보았던 것처럼 디오라마가 만들어졌다. 세 사람이 디오라마를 보는 모습과 군수품 물자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며 휴대폰을 찾는 구스만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잖니, 엘사. 그냥 불안해서....]

[이게 아니예요.]

엘사는 디오라마를 향해 양 손을 한 바퀴 돌렸다. 수송기 내부를 나타낸 디오라마는 퍼석 소리를 내며 부서지더니, 이내 서로 엉겨붙어 새로운 디오라마를 만들어 냈다. 엘사가 새로 만들어낸 디오라마는 날고 있는 수송기 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아.]

안나는 엘사와 멜리사를 안아 서버번 앞쪽으로 데려갔다. 안나가 디오라마에서 본 것이 확실하다면, 안나는 MP5를 들어야 했다. 그녀가 본 것은 수송기 램프에 붙어 C-4로 추정되는 부착물을 붙이고 있는 비행 슈트를 입은 적들을 나타낸 인형들이었다. 그리고 엘사의 디오라마는 그들이 다음에 할 행동을 아주 잘 구현했다. 몇초 뒤, 굉음과 함께 램프가 폭발했다. 거센 바람이 수송기 내부로 쏟아들어왔다.

[엘사, 멜리사, 타이어 뒤로 몸을 숨겨야 해. 알았지?]

[나쁜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들은 이미 다 따돌렸잖아요.]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아.]

안나는 MP5의 탄창을 뽑아 잔탄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조정간을 3점사로 맞춤과 동시에 수송기의 벽을 두 원통이 치고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구스만과 승무원들이 사라진 램프로 벌어진 창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 감아!]

안나가 엘사와 멜리사에게 외치며 눈을 감았다. 팡 소리와 함께 터진 것은 섬광탄이었다. 안나는 서버번에서 고개를 내밀지 않고 mp5만을 내밀어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진입했다.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로 보아 아무도 맞지 않은 듯 했다. 소음기에서 나오는 듯한 팝콘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적들이 승무원을 적으로 인식하고 쏜 것이었다. 중국? 러시아? 디오라마는 거기까지 자세히 구현되어 있지 않았고,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져 온통 하얗고 푸른 색들로 이뤄져 있었다. 승무원들도 베레타 권총과 스콜피온 기관단총으로 적들에게 총알을 흩뿌렸다. 적들이 주춤한 사이, 안나는 mp5를 다시 매고 cz권총을 뽑아들어 car 자세를 취해 서버번 뒤쪽 출구를 겨냥했다. 아주 잠깐 보였던 적들의 헬멧은 러시아도, 중국 쪽에서 쓰이는 것이 아닌 미군 규격이었다. 그리고 CIA 내에서도 미군 규격의 헬멧을 쓴 SAD가 다수 분포해 있었다.



리마1은 아니었고,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는 적어도 미국의 우방국은 아니었다. 그런 즉슨, 지금 안나를 쫓아올 적들은 리마1의 백업 팀 밖에 없었다. 시간을 끌어달라는 안나의 제안을 식스가 수용했지만, 그가 말주변과 백업 팀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공중에서 자신들을 하이재킹하려는 괴한들을 보고 증명되었다. 안나는 적들이 승무원들에게 사격을 가하는 틈을 타 서버번의 밑을 통해 적들의 발 개수를 파악했다. 8개, 블랙라인보다 5명 적은 숫자였지만, 적은 수이니 만큼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었다.


안나는 숨을 죽이고 서버번 밑으로 적들 중 가장 가까운 발을 향해 cz권총을 발사했다. 두 발이 적의 군화를 궤뚫었고, 적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짐과 동시에 안나는 적의 AR을 든 팔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3명이 남았지만 이제 적들은 방금 전 쓰러진 아군으로 인해 안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수류탄을 던지면 어디로 굴러가 터질지도 모르고, 연막탄을 던진다 한들 저들이 고스트라면 안나에게도 불리한 물건이 되었다. 안나는 그러다 문득, 엘사와 멜리사를 내려다 보았다. 두 아이를 타이어 앞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 안나는 이 아이들의 능력이 필요했다.



[멜리사, 멜리사.]

[으으응.]

[혹시 얼음판 한 번만 해줄 수 있니? 모텔처럼 말이야.]

[그거면 돼?]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멜리사는 알았다는 듯 한 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시 뒤, 멜리사의 손에서 얼음판이 피어나 출구 끝까지 퍼져나갔다. 이제 적들은 쉽게 접근하려 들지 못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비행기의 진동과 겹쳐 쉽게 미끄러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엘사, 혹시 눈`바람을 만들어 줄 수 있니?]

[에?]

엘사가 안나를 올려다 보았다. 안나는 엘사의 헬멧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조금 힘들긴 한데... 해볼게요.]

엘사에게 눈`바람을 만들게 하려는 이유는 적들을 출구 밖으로 날려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적들이 날아서 왔다는 건 적어도 낙하산 등의 장비를 따로 구비해 두었을 것이다. 낙하산은 그들의 등에 가방처럼 매어져 있을 것이고, 샐리맨더는 미국 회사였다.

그러니 시야를 흐리게 해 뒤를 노려 낙하산을 손상시켜 지상 추적도 방해시키면 그만이었다. 안나와 두 동생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승무원과 적들이 싸워야 할 이유는 사라진다. 모텔보다 난이도는 몇 허들 이상 높았지만, 가만히 있다간 안나의 머리에 5.56mm 탄환이 벌집처럼 박힐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얼음과 눈보라로 가득 찬 기내를 아연실색하며 쳐다보는 승무원이 있었다. 안나는 잠시 마스크를 내렸다.

"구스만! 사격 멈춰요!"

눈보라 소리에 들릴지 의문이었지만, 안나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량으로 구스만에게 외쳤다. 구스만과 승무원들은 그 광경에 당황하면서도 안나의 말을 용케 들을 수 있었고, 총구를 내리는 대신 군수품 물자에 몸을 숨겼다. 안나는 다시 산소마스크를 쓴 다음 cz권총을 기울여 들었다. 서버번 뒤쪽으로  눈보라는 움직였고, 적들의 시야는 이제 흐릿해졌을 터였다. 안나는 엘사를 지나 조심스럽게 움직여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적의 AR을 회수했다.

적이 안나의 발목을 잡으려 하자, 안나는 그 손을 군화로 밟았다.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지만 안나는 무시하고 새로 얻은 AR을 살펴보았다. 서버번에 둔 것과 동일한 사양의 Mk18이었다. 안나는 장전바를 당겨 약실이 장전된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모습을 내민 두 번째 적의 가슴팍을 향해 전자동으로 난사했다. 대여섯 발이 적에게 박힌 것을 확인한 안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세 번째 적의 등 뒤 낙하산에 세 발을 발사했다. 적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을 확인한 안나는 CZ 권총으로 바꿔들어 적의 양쪽 어깨에 각각 한 발씩 발사했다. 등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고, 안나는 다시 돌아 가슴팍에 맞은 적의 AR을 사격해 사격 불능에 빠지게 만들었다. 

적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안나는 다시 권총을 들어 이번엔 적의 팔꿈치를 향해 가늠쇠를 겨누었다. 하지만 안나의 중심은 난기류에 휘말린 기체가 흔들려 크게 무너졌고, 그만 얼음판에 미끄러져 램프 끝으로 굴러가고 말았다.

[언니! 괜찮아?]

[앙나 언니이!]

이어컴에서 엘사와 멜리사의 다급히 안나에게 외쳤다. 안나는 램프에서 밖으로 사출되기 직전 끝부분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들고 있던 cz 권총은 바람에 날아가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손에 힘을 조금이라도 뺀다면 안나는 그대로 구름에 삼켜질 것이었다. 실제로 안나의 두 다리는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종잇장처럼 허공에 팔락거리고 있었다.

안나는 팔을 굽혀 램프 파편들을 사다리 오르는 것처럼 하나 씩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날아온 총알이 안나의 오른손 가까이에 나 있는 파편에 맞았다. 구스만과 승무원이 쏜 것은 아닐 터였다. 눈바람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들은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를 향해 권총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라클라바를 쓴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가 안나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씨발.'

안나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근거리에서 총알이 풍향을 고려하더라도 안나의 머리에 직격으로 맞는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안나는 다시 팔을 내려 파편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지만 파편 속으로 머리를 감춰는 게 살아남을 승산이 더 컸다. 그 때, 눈바`람을 뚫고 나온 얼음 조각이 바라클라바의 왼쪽 다리를 뚫고 지나갔고, 바라클라바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사격 자세는 무너졌지만 그는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비틀어 나간 총알은 안나의 오른 어깨에 직격했다. 얼음 깨는 송곳으로 찍혔을 때와 비슷한 고통이 전해졌고, 안나는 그만 파편을 잡고 있는 오른손을 펴 버렸다. 홀로 몸 전체를 감당해야 할 왼손은 점점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겨우 몇 초 뒤면 안나는 동생들과 타의적인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앙나 언니!]

하지만 운명은 안나의 앞날을 거칠게 희롱했다. 안나의 주변으로 생긴 눈`바람이 안나를 들어올렸고, 안나는 눈`바람에 걸려 둥둥 뜬 채로 수송기 내부로 끌려 들어왔다.

[언니, 괜찮...또...]

엘사가 후다닥 달려와 안나의 어깨를 살폈다. 검은색이라 드러나지 않았지만 안나의 오른 어깨는 이미 축축해진 상태였다. 엘사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안나에게 안겼다. 디오라마, 눈바람, 그리고 눈바람. 세 번의 능력 발현은 엘사를 기절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걸 알면서도 엘사는 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손에서 피어난 눈송이들이 안나의 어깨를 적셨다.

통증이 간 것을 확인한 안나는 뒤따라 달려온 멜리사에게 엘사를 맡겼고, 슬링에 걸려있는 Mk18을 들어 바라클라바를 제압하려고 겨눴다. 하지만 바라클라바는 안나가 겨누려는 곳에 없었고, 오로지 안나가 제압했던 세 사람만이 플랫폼에 쓰러져 끙끙대고 있었다


"서버번 뒤에 있어요!"


물자 더미에서 겨우 눈가만 내민 구스만이 외쳤다. 안나는 mk18을 겨누며 서버번의 뒤쪽으로 향했다. 촉박한 쪽은 안나였다. 이제 곧 그린라이트가 될 것이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최대한 저 기괴한 바라클라바를 제압해야 했다. 서버번의 뒤로 거의 다다른 안나는 총구를 곧바로 돌리지 않았다. 슬링을 맨 채로 총구를 잡혔다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분명했다. 안나는 슬링을 풀고 총구를 천천히 돌려 뒤쪽을 바라보려 했다.


안나의 예상대로 바라클라바는 총구를 잡아 틀었고, 동시에 손을 놓은 안나는 바라클라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바라클라바의 남은 한 손에 들린 권총이 안나의 목을 향했고, 안나는 주먹으로 상대의 손목을 쳐냈다. 지근거리에서 터진 총구의 화염이 바이저로 가려진 안나의 얼굴에 따뜻하게 적셨다.

총알은 서버번에 탄흔을 남겼고, 안나는 트루돈을 꺼내 상대의 발목을 내리찍으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는 안나의 복부에 발길질을 했다. 넘어지면 끝장이었다. 안나는 터져나오려는 울음과 비명을 참으며 트루돈을 역수로 쥐어 피가 흐르는 적의 왼다리를 베었다. 상대의 입에서 끄윽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이내 그는 자세를 고쳐잡고 안나의 얼굴을 권총으로 내리쳤다.

강화유리라 부서지지 않았지만 충격이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상대의 완력으로 이루어진 권총은 망치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흐려진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번엔 상대의 주먹이 안나의 목을 가격했다. 눈 앞에 번개가 떨어진 것처럼 세상이 한 순간 밝아지다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야갸 확보되지 않아 안나는 닥치는대로 트루돈을 휘둘렀지만, 베이는 감각은 없었다.

다시 시계가 돌아왔을 때, 상대의 옆구리와 어깨에 철근같은 얼음 막대기들이 꽃혀 반대편까지 관통해 있었다. 상대는 다시 또 찾아온 이 얼음들이 무엇인지 의아하다가 그만 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대의 손에서 힘 없이 권총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안나는 그 권총을 집어 들었다. Mk.25 권총에 레이저 사이트와 리플렉스 사이트가 달려 있었다. 상대가 안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권총으로 죽여달라는 것처럼 그의 고통에 찬 숨소리가 헬멧을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엘사, 엘사?]

[네...에...]

[부탁이야. 이 사람 좀 치료해 줄 수 있겠니?]

[그...사...람...은...]

[제발, 한 번만. 언니가 부탁할게.]

안나는 상대의 파우치에서 Mk권총의 탄창들을 뽑아 cz권총의 것과 교환하며 두 동생들에게 향했다. 상대는 자신을 쏘려고 했던 그 울프독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는 게 의아했다. 그의 몰골은 마치 작살로 몸이 뚫려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축 쳐져 있었고, 그대로 놔둔다면 폼페이의 석화상처럼 죽을 것 같았다.

'그..냥..죽여...'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몸 속 깊이 뚫린 내장들이 뒤틀렸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플랫폼에 누워 신음하는 대원 중 하나가 절망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죽음이란 물감도 섞여 있었다. 눈은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기절에 가깝게 쓰러질 것이었다. 그는 대원들과 자신의 몸뚱아리가 쓰레기처럼 수송기 밖으로 버려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런 그가 눈을 돌리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울프독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그의 옆구리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설탕과도 같은 눈가루들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몸 속 깊숙이 전해지는 차가움은 이미 꽂혀진 얼음과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얼음의 이물감과 고통은 사라졌다. 상처가 있는 부위엔 간지러움만이 남았다. 그를 치료하던 아이는 곧 쓰러졌고, 다른 아이가 그 아이를 부축했다. 부축한 아이의 등에는 자신같은 대원들이 매고 다닐 백팩이 있었다. 그것을 의아해 하던 그를 울프독이 발로 툭툭 찼다. 그녀가 산소마스크를 잠시 벗고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리마1에게 전해! 언어능력 좀 키우라고!"

생뚱맞은 소리를 한 울프독은 다시 산소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벨트를 꺼내 아이들의 점프 슈트에 달린 벨트와 연결했다.

"뭐하는 거야!"

"여기서 나갈거야.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의 물음에 울프독은 한껏 외치는 투로 답했다. 그녀는 회수한 Mk권총을 그를 향해 겨눴다.

"저 사람들 미국 회사 소속이니 호위 잘 해. 그리고 당신 부하들은 죽을 정도는 아니니 치료 잘 하고!"

말을 마친 울프독이 그의 등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세 번 당겼다. 충격으로 고꾸라진 그는 울프독이 굳이 등을 쏜 이유가 낙하산을 손상시키기 위함이란걸 깨달았다.

"그린라이트!"

안쪽에서 방금 전까지 팀원들에게 총을 난사한 미국회사 직원 중 하나가 외쳤다. 그가 다시 폭파시킨 출구로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아이를 안아 들고 창공으로 몸을 날린 울프독이 있었다. 그 무모한 짓들을 벌이고 유유히 사라진 그 알파킬러를 헌터킬러인 그는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대원들의 몸 상태를 살폈다. 권총으로 맞은 부위들은 모두 깔끔하게 통과된 상태라 부상 치료에 차질이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구급낭에서 붕대와 지혈제 주사들을 꺼내 대원들을 치료하려 하자, 승무원들이 경계하면서도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와 함께 대원들을 치료했다.

"저 사람이 뛰어내린 그린라이트, 어딜 말하는 겁니까?"

"그걸 말해줘야 합니까?"

산소마스크를 쓴 항공 점퍼 사내가 말했다.

"당신들이 추적할 수도..."

"어차피 낙하산은 모두 찢어지고 뚫려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해주세요."

"우크라이나. 그것만  알아두쇼."

그래도 딴에는 수송기 램프를 부수고 침투했던 그들이 무서웠는지 항공점퍼 사내는 자존심을 지키는 선에서 그에게 대략적인 위치만을 말했다. 그는 방탄복에 달린 무전 송신 버튼을 눌렀다.

"블랙퀸, 입감 바란다. 블랙퀸?"

[양호하다, 알파 3-6, 울프독은 어떻게 되었지?]

3-6는 블랙퀸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놓쳤습니다. 지금 저와 제 팀원들이 겪은 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는군요."

[무슨일이 있는데, 말해 봐.]

블랙퀸의 목소리는 진지한 어투가 아니었다. 블랙퀸은 수송기 내부에서 얼음과 눈보라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울프독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 정체가 뭡니까."

치데르티 모텔에서 식스가 말해주었을 때, 그저 단순히 추운 날씨에 모텔 내 수도관이 터져 그대로 얼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긴장은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3-6는 그저 식스의 목격담을 당연한 자연 현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알파3가 겪은 이 기현상은 상식 밖을 넘는 경험이었다.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어.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이야.]

"대원들한테 거짓말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 이상한 현상,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당신들보다 정보를 많이 알고 있지 않아. 상부에서 기밀 처리로 지시하라 했으니까 그리 알아둬. 지금 어디 있지?]

"진입했던 C-17 안에서 승무원들의 협조 하에 대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3-6, 당신의 상태는 어떻지?]

"어떻냐고요? 말 잘하셨습니다. 이상한 얼음 송곳들이 제 몸을 저주 인형마냥 쑤셔박더니만, 왠 땅꼬마가 다친 곳에 이상한 가루를 만들어 뿌려 치료하더군요. 씨발, 마약이 애들 손에서 나온답니까?"

3-6의 욕설 섞인 고성에 대원들을 응급처치하던 승무원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3-6는 메마른 침을 삼키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우린 애초에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요."

[....3-6,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일단 자네들 선에서도 울프독을 못 잡았어. 맞지?]

블랙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3-6는 블랙퀸 자신들을 가지고 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이 지금 본 것은 절대 누설해선 안 될 기밀 사항들이야. 이미 국장들도 기밀 취급 절차를 밟으라고 지시했어. 미리 말해 뒀어야 했는데 미안해. 당신들에게 거액의 추가 보너스가 있을 거야.]

"...그게 입막음으로 되겠습니까? 여기 승무원들도 다 봤을 겁니다."

[그 사람들의 입을 막게 해줄 사람을 알고 있어. 그건 걱정하지 마. 3-6, 당신은 당신과 팀원들 입단속만 잘 시키면 돼. 울프독은 어디로 사라졌지?]

3-6는 메가라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3-6는 이상한 힘을 가진 아이가 뿌려두고 남은 눈가루를 손가락으로 묻혀 코에 가져갔다. 신경을 지배하는 마약이 아니라 그저 우유와 설탕이 섞인 향이 풍겼다.

"우크라이나입니다. 이자들이 자세히 말하진 않더군요. 대책이 있으십니까? 저흰 우크라이나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힘든 판입니다."

손가락에 묻어있고 바닥에 쌓여있던 눈가루들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많이는 없지만... 현장 특수 요원들이 소수 포진되어 있어. 연락이 오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당신들은 쉬고 있어.]



일방적으로 통신이 끊겼다. 3-6는 주머니에서 꺼낸 시가 케이스에서 하나를 집어 끝에 라이터로 불을 피우려고 했지만, 눈과 비바`람에 젖어서인지 점화가 되지 않았다. 라이터를 등 뒤 하늘로 던진 그는 맥없이 서버번 범퍼에 기대어 구름 속으로 사라진 제정신 아닌 킬러와 아이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의문을 남기기엔 살아왔던 상식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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