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뭐 기독교인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거나 극렬한 문자주의자가 아닌 "리버럴 기독교인" 이라면, 대충 서로 덕담이나 하고나서 헤어지면 되니까 크게 싫을 것은 없지.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버럴 기독교인들의 말에 거부감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이유가 있긴 해.

저번에 기독교인이 될락 말락하는 사람이 무갤 와서 "우주의 기원은 어차피 인간의 지식 바깥의 문제이고 따라서 우주의 기원에는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해도 반증되는 거 아니잖아? 이걸 왜 병신취급함?" 이라는 질문을 올렸었는데, 그거 답변했던 걸 다시 좀 정리해서 글을 쌈.

저 문장에 나같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저 문장은 사실 "자기가 잘 모른다고 해서 그걸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 이라고 멋대로 정의한 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병신취급하는" 문장이기 때문이야. 물론 말하는 사람 본인은 그런 부분을 의식하고 있지 못할 수는 있지만, 깊이 파고들어가보면 결국 그런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왜냐하면,

1. 우주의 기원이 뭔지 잘 모르겠다.  << 이건 분명히 '내가 잘 모르겠다' 라는 문장이야. 최첨단 우주물리학자들은 이미 우주의 기원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 물론 그 사람들의 우주 모델들이 아직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처럼 반석 위에 올라가진 않았으니까 일단은 인류 전체적으로 아직 잘 모른다는 것 까지는 인정할 수 있어.

2. 우주 이전에는 우주가 없었으니 인과율을 생각해볼 때 우주의 기원은 자연적인 것일 수는 없다. << 보통 기독교인들이 1 번에서 2 번으로 논증을 이어가지. 비슷한 논리를 이용해서 19세기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인간에게서만 태어남. 고로 첫 인간은 창조되었을 수밖에 없음' 이라고 말해왔어. 근데 알고보니 인간은 조금 더 단순한 생물에서 진화했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생물은 생물에게서만 태어남. 고로 첫 생물은 창조되었을 수밖에 없음' 이라고 아직도 말하지만 이것 역시 무생물에서 생물로 변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들이 점점 많이 나오고 있지. 마찬가지야. 시간을 길게 볼 때 인간이 인간에게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고 생물이 생물에게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듯, '모든 사건은 원인을 지님. 고로 첫 원인은 신일 수밖에 없음' 이것 역시 매우 의심스러운 논증이지. 애초에 인과율 자체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논증 자체가 무효라는 건 무갤러들이야 다 잘 아는 거니까 패스하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그런 논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저런 비약 뒤에 숨겨져 있는 '내가 잘 모르는 것은 남들도 잘 모를 거고 인류 전체가 잘 모를 거고 사실 이건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임' 이라는 오만함이야. 아니 왜 '내가 잘 모름' 이라는 문장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거임' 이라는 문장으로 점프를 하냔 말이지.

3. 그러니까 우주의 기원은 초자연적인 것이다. << 그리고 나면 기독교인들이 보통 2 번에서 3 번으로, 혹은 1 번에서 바로 3 번으로 논증을 하지. 이건 그냥 말장난이다. '우주의 기원이 뭔지 잘 모르겠다' 라는 문장을 '우주의 기원은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신비한 원인이 있다]' 라고 교묘하게 단어만 바꾼 뒤, 마치 문제가 풀린 것처럼 말하지. 자연적인 것이 우리가 인지 가능한 세계인데, 자연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인지 불가능하다는 거고.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의 답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답이다'라고 말하는 거랑 정상인들이 '이 문제의 답이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거랑 다를 게 없거든. 근데 기독교인들은 그게 다른 거라고 생각하지.

4. 근데 그 초자연적인 힘은 인격신일 수밖에 없다. <<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점프를 하고 나면 기독교 제일원인 논증(이라고 쓰고 궤변이라고 읽는다)이 완성이지. 아니 아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원인이래놓고 바로 아랫 줄에서 그 힘에는 인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해서 리버럴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이야기하는 저런 제일원인 논증을 비롯한 여러가지 초자연 운운하는 이야기들은, 자세히 뜯어보면

'난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를 정도니 인류에게 불가해한 문제다'

'그럼 이 문제를 재정의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답이 있다' 라고 부르자'

'그리고 그 초자연적인 답이 신이라고 하자'

'근데 그 신은 인격신임'

이런 구조야. 자신의 유한함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오만함, 비열함, 지적 게으름이 섞여 있는, 매우 괘씸한 궤변이지. 물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저런 괘씸한 마음가짐을 속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초자연' 에 의존하는 이야기들을 읊는 사람들은 결국 '너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어. 너는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셈인 거지. 물론 우리 모두가 진리 탐구의 길을 가는 고고한 인생을 살 수야 없지만,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해야 하지 않나? 근데 쟤들은 그게 없어. 그래서 싫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