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통합링크] 아렌델행 횡단열차
[통합 ebook] 아렌델행 횡단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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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잊혀진 바다에 얼음이 흐드러졌다. 』
책의 서두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미로처럼 꼬인 코로나의 후미진 골목에 있는 어느 허름한 책방에서 엘사는 가려운 눈을 연신 비비며 그 책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묽은 등불을 받은 부연 먼지가 어스름에 물든 별처럼 뭉클하게 눈에 새어든다. 어둑한 빛의 틈새 사이로 실눈을 뜨고 읽히지 않는 외국어를 노려보자니 자꾸만 눈물이 시야를 가려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좁쌀 같은 벌레가 기어 다니고 테두리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책은 서던 제도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책의 이름은 생태학이었다.
『 그 꽃을 처음으로 발견한 스승님께서 내게 처음으로 내리신 가르침은 이것이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을 이슈마엘(Ishmael)이라 칭하라.”
나는 그것이 도망자이자 개척자인 내게 퍽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
읽던 페이지 틈에 손가락을 끼우고 엘사는 두꺼운 책의 겉면을 살폈다. 단지 주변이 어두운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에 닳아 맨들맨들해진 양장본 표지는 글씨가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제목뿐 아니라 저자조차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던 낱말은 저자의 이름이 Ish로 시작한다는 것뿐이었다.
『 일 년 중 밤이 가장 짧은 날에 만개하는 꽃이 있었다. 』
묵직한 두께 사이 엘사가 필요한 단락은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낑낑거리며 책을 펼쳐 필요한 부분을 마저 읽고는 엘사는 만족스럽게 책을 밀어 덮었다. 손으로 책을 천천히 쓸어 표면에 붙은 벌레와 시간의 두께만큼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곤 제목을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읽었다. 그녀가 읽은 단락에는 정령과 마법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골자에서 엘사는 왜 책의 제목이 그렇게 붙여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생태학.
『 다크 씨의 수면에서 웅크리고 있다 태양이 가장 긴 날에 기지개를 편다는 그 꽃은, 노덜드라의 하늘이 우울에 잠기고 눈물을 흘리자 모두 해수에 얼어붙어 죽고 말았다. 』
노덜드라가 안개 속에 파묻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났으므로 어쩌면 자신이 꽃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혀 엘사는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겼다.
『 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신화와 전설의 벽화에 스며 버렸노라고 사람들은 수십 년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솔스타드의 연금술사들이 자신들의 은닉처에 운명을 속이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말이다. 』
책은 연금술의 성지라고 흔히들 일컬어지던 솔스타드에서 십여 년 전쯤에 쓰인 것이었다. 혀를 굴려 그 영롱한 이름을, 성난 시간의 물살이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씻어간 후에도 그 이름이 영원히 머릿속에 남도록, 엘사는 연거푸 작은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 작은 꽃 하나에 많은 이들의 삶이 붉게 얼룩졌다. 육지에도, 호수에도, 바다에도 에메랄드 벽개를 닮은 꽃은 핏빛 불행을 몰고 다녔다. 』
창백한 숨이 근심을 말끔히 씻어 내리도록 엘사는 새하얀 입술을 벌려 바람을 크게 들이켰다. 먼지로 얼룩진 대기에 가슴이 깨끗해질 리 없건만 엘사는 자꾸만 바랄 수 없는 꿈을 그리고 있었다. 후드를 덮고 단잠에 빠져 있는 브루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문득 그리움에 사무쳐 그녀는 책장에 몸을 기댔다. 책장이 힘없이 기우뚱거리며 설진이 모래알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우리가 이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꿈결에 고로롱거리는 브루니의 울음소리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엘사, 네가 찍어야 하는 건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야.
모든 것이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이정표는 모두 하나의 작은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꼭 감으면 이 여정의 종장이 선할까 하여 엘사는, 꽃봉오리를 닮은 입술 사이로 차디찬 입김을 흘리며 두 눈을 감싸 쥐고 책장 아래로 털썩 미끄러졌다. 해바라기를 꼭 닮은 한 소녀와, 소녀의 어깨를 감싸 쥔 풍채 좋은 사내와, 이젠 점차 희미해져 어렴풋한 실루엣만 남은 사람들과 외로운 바다를 낀 성을 떠올렸다. 그리움을 폭 끌어안고 잃어버린 이름들과 아직 잃지 않은 이름들을 되뇌어보았다. 자신을 향해 핏대를 세우는 군중의 공포를 떠올려보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너무 그립고 그리워 그 붉은 응어리가 눈으로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끝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헌책방 깊숙한 암흑 속으로 시선을 돌리다 엘사는 굳은 결심을 딛고 일어섰다. 조그만 빛 알갱이 하나 허용하지 않는 암흑에 파묻힌 소녀 하나가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카산드라였다.
정령의 직위를 버리고 아렌델을 떠나 로윰에서 지낸 1년간 엘사는 그저 하염없이 수심에 빠져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때부터였을까, 혹은 공허한 그리움이 사무치고 사무치다 못해 먼발치에서나마 안나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한 때부터였을까. 낯선 땅에 그녀는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했고, 항상 어디론가 떠도는 열차처럼 절박함에 쫓겨 돌아다녔다. 이제 운명이 종착지에 무사히 이르도록 이끄는 것만 남았다. 그녀는 열차에 오를 기관사를 찾고 있었다.
엘사는 자신이 생각보다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산드라 또한 그러함을 확신했다. 비록 피폐해지고 닳을 대로 닳은 모습일지라도, 지금은 깊고 어둑한 곳에서 뜨겁고 무거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굳은 심지를 딛고 일어설 사람임을 믿었다.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고이 꽂아 두고 그녀는 어두컴컴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나침반과 지도를 쥔 이상 그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설령 두렵더라도 두렵지 않노라며 스스로에게 연거푸 최면을 걸어야만 했다. 그게 이 험악한 세상속에서 위태롭게나마 한 발짝씩 나아갈 작은 위안이었으니까.
『 신비로운 힘을 품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꽃, 조금만 힘을 주면 산산이 깨질 것 같은 꽃,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힘과 가능성을 품은 꽃. 일 년 중 가장 따뜻한 날에 봉오리를 활짝 벌려, 햇살을 환히 머금고 구슬픈 눈물로 녹아내리는 꽃. 』
날카로운 비명이 검은 공간을 중심에서부터 깨트리고 있었다. 바스러진 자수정처럼 흩어지는 낱말들을 끌어안고 엘사는 칠흑 속으로 달렸다. 수억 개의 별들이 쇄도하는 이 공간 속에서 외로이 남아 괴로워하는 소녀를 향해, 결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가냘픈 발걸음일지언정 있는 힘껏 끈질기게 놀렸다.
『 사람들은 그 꽃을 얼음꽃이라 불렀다. 』
세상 만물이 창백한 아름다움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이름은 얼음꽃이었다.

얼음꽃
(1)
1. 카산드라 / 발데로스 산장(Vardaros)
매일 밤 목석같은 침대에 누워 카산드라는 이따금씩 지금껏 있었던 모든 일들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저 수십여 장에 기억을 모두 담으려 했던 엘사의 그림과는 달리 삶은 수억 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냇물처럼 결을 따라 줄지어 고르게 흘러야 할 세월은 거친 바위와 자갈에 부딪히며 와류가 되어 뇌리에 수많은 상처를 새기곤 했다. 갓 만든 종이처럼 날 선 삶의 편린은 서슬 퍼런 후회로 젖어 있었다.
커다란 욕심 없이 라푼젤의 시녀로 남아 있었던 시절도 어쩌면 썩 나쁘진 않았다. 감히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엉뚱한 행언으로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라푼젤이나, 매사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유진이 있었지만 카산드라는 자신의 길을 찾겠답시고 세상으로 나섰을 때보다 코로나 왕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오히려 더 행복했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선드랍과 문스톤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검은 돌을 따라 떠난 여행에서 비롯됐다. 넓은 세상보다 작은 삶이 주는 온기를 카산드라는 여전히 좀체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슴은 소박한 일상에서 더 큰 온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짙푸른 과거의 흔적을 거슬러 오르며 카산드라는 자신이 거스르지 못하는 물결이 있음을 깨달았다. 운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코 다시는 넘을 수 없는 폭포 아래로 떨어진 꼴이었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라푼젤을 배신하고 문스톤을 잡았을 때도 그랬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코로나를 파괴한 것도 그러했으며,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코로나를 떠나 버린 것이나 한스의 의뢰를 받고 성급하게 열차에 오른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모든 정황을 깨닫고 일을 바로잡으려 들었을 땐 이미 그녀는 삶의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엘사를 처음 만난 그 열차처럼 운명은 미지의 구렁텅이로 처박히고 있었다.
섬광이 작렬하는 무저갱 위에서 그녀를 비웃는 세상 모든 이들을 노려보며, 억세고 질긴 손을 뻗어 카산드라는 악착같이 낭떠러지에 매달려 버텼다. 그러나 끝도 없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불가항력 앞에서 그녀는 비단 한계가 뚜렷한 사람에 불과했다. 말인즉슨, 그녀에겐 영원토록 그 힘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이 모든 건 나 때문이야.
이곳이 정녕 현실인가, 혹은 몽환의 세계인가. 현실이라면 미몽과 이곳의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저 눈을 뜨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면 꿈 역시 그러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저런 망상이 뇌를 어지럽히노라면 카산드라는 한참을 뒤척이다 별이 산맥 너머로 수줍게 모습을 감추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곤 했다.
엘사는 아직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신....... 당신은 누구죠?”
카산드라는 차라리 이곳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수없이 많았다. 손에 실체를 그러쥐려 하면 자그마한 형상조차 남기지 않고 비눗방울로 톡 흩어지는 그런 꿈 말이다. 자신을 향해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는 엘사를 보노라면 카산드라는 가슴이 미어져 터질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엘사가, 언제나처럼 아릿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따스한 말을 건넬 것만 같았으니까. 힘을 잃고 삶의 벼랑 끝에 몰려 위태롭게 비틀거릴 때, 모든 게 괜찮노라고, 새계의 끝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체스판의 지평이 머지않았노라고 힘을 북돋아줄 것만 같았으니까. 삶의 크나큰 버팀목이었던, 나침반이었던 그녀를 잃어버린 지금. 그녀의 항해도 크게 비틀거리며 표류하고 있었다.
“카산드라예요.”
“카산드라라고요?”
엘사는 크게 도리질 치며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나는....... 나는 노덜드라에 있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크리스토프, 이곳은 어디죠? 이 사람은 누구고요? 브루니는? 게일은? 녹크는? 왜 제가 여기 있죠?”
잃어버린 기억의 자취를 좇기라도 하듯 커다란 눈알이 허공을 허망하게 헤집는다.
“안나, 안나는요? 크리스토프, 안나는 아렌델에 혼자 있어요?”
크리스토프는 그만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에 가둬진 기류가 삽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기장에 적힌 과거의 엘사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엘사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산드라는, 행여나 동백꽃처럼 여린 그 입술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말이 틔어 나올까 가슴을 졸였다. 실낱같은 기대는 실망으로 미끄러졌고, 카산드라는 이제 엘사의 방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비극으로 점철된 이 삶이 카산드라는 너무나 버거웠다.
이 세상에 빌어먹을 신이 있다면 왜 이토록 그의 피조물에게 무참한 장난을 저지르는지 부르짖고 싶었다. 목 놓아 따지고 싶었다. 장난질은 이쯤 했으면 되었지 않냐고, 우릴 그냥 내버려두라고. 수많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의뢰를 수행하기 전 은십자가나 묵주를 만지작거리곤 했지만 카산드라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만큼이나 타인을 믿지 못했다. 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진 피츠허버트가 막시무스를 타고 산장에 온 지도 하루가 흘렀다.
“캐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것보다, 이게 얼마만이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도톰한 입술을 수차례 달싹이다 카산드라는 자그맣게 대꾸했다. 할 말을 고르느라 그랬던 것이 아니라, 5년의 세월이 마치 높고 두꺼운 둑처럼 모든 말을 가둬 버린 탓이었다.
“그래, 피츠허버트. 안녕.”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유진은 퍽 당황한 모양새였다. 크리스토프가 얼른 수습에 나섰다.
“유진, 밤새 달려오느라 고생 많았어. 식사는 아직이지? 어떤 것 좀 먹을래? 호밀빵이나 치즈, 딸기잼도 있고, 양이 얼마 되진 않지만 소시지도 있어.”
뺨을 떨떠름하게 긁다 유진은 어물어물 대꾸했다. 당혹스런 시선이 카산드라의 뒤통수에 한참 머물렀다.
“빵이랑 버터, 반숙 달걀 하나면 충분해. 혹시 여기 브뢰첸 있나? 크리스토프 자넨 아침으로 뭘 먹는진 모르겠지만, 난 주로 아침으로 브뢰첸을 먹는데, 소화가 잘 돼서 하루를 시작하기엔 그만한 게 없더라고. 오다 보니 양계장도 있던데, 산장 주인이 키우는 닭인가?”
“뭐, 그렇지.”
“한두개 정도 빼먹는다고 티가 나진 않겠지? 반숙 달걀도 하나 곁들이고 싶은데, 혹시 산장 주인이 달걀에 대해 언질 준 거 있어?”
“하루에 인당 하나씩. 난 달걀 잘 안 먹으니 자네 두 개 먹어. 커피 마시겠어?”
“이 산장에 커피라니 듣던 중 반가운 얘기인데? 아니, 시시껄렁한 아침식사 얘기나 나눌 게 아니라, 크리스토프 자네 몸은 좀 괜찮아? 열차가 산맥에서 전복됐다는 얘기를 듣고 식겁했지 뭐야.”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 우선 앉아서 식사부터 하지 그래.”
밤새 먼 길을 달려오느라 유진의 눈은 피로로 검게 깎여 있었다. 입매를 꺾어 어색한 미소를 흘리곤 카산드라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협탁 위에 놓인 오르골이 작게 손짓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런 것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침대 끝에 걸터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목소리를 흘려 보내다 카산드라는 그만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여 버렸다. 유진이 부엉이를 시켜 보낸 쪽지의 내용이 머릿속에 왱왱 메아리친다. 운명이 아가리를 벌려 그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심연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 엘사 / 발데로스 산장(Vardaros)
창문으로 새어드는 푸른 어스름이 기나긴 밤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차가운 여명이 고원 너머 산장 깊숙이까지 적시고 있음에도 엘사는 여전히 새벽이 끝났다는 기분을 좀처럼 느끼질 못했다. 몸을 짓누르는 이불의 무게를 느끼며 엘사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노란색 아침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손을 벌려 쥐었다 펴고, 발가락을 엄지에서부터 소지까지 피아노를 치듯 부드럽게 움직여 보았다. 뻐근한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다 피부에서 옅은 감각이 조각나 부서지기에 이른다.
엘사는 자신의 뺨을 세게 한 번 꼬집었다. 하얀 뺨을 검지와 엄지로 꽉 짓누르고 잡아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밤이 끝났다는 게 실감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여전히 이곳이 꿈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무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살갗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사는 자신이 감각을 잃어버린 연유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잃어버린 게 감각뿐만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깨어난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세상만사가 낯선 갓난아기처럼,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자기만의 세계에 잠겨 이불에 푹 파묻혀 누워 있었다.
불투명한 세상을 밝힐 첫 번째 등불은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흔적을 찾는 데 있었다.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집어 마치 어린아이가 낱말퍼즐을 하듯 처음부터 차분히 맞춰 보았다. 시간과 뚜렷이 연결되지 않는 기억이 대부분이었고, 때문에 생각의 책장을 정리함에 있어서 그녀는 연도보다는 인과관계에 더욱 집중했다.
강렬한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꽤나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프리즘처럼 찬란한 몸을 일으키는 얼음성과 험한 산을 올라 자신을 설득하러 온 안나가 가장 먼저 눈앞에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엘사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어 기억의 흔적을 덜어내려 애썼다.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를 잃은 슬픔조차 홀로 삭여야 했던 검은 방이 이어 펼쳐졌다. 새어나가는 자아가 이토록 간절함에도 덜어내고픈 기억이 있다는 건 무척이나 이상한 심리였다. 가벼운 파문이 이불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이불에 올린 손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엘사는 손을 꽉 맞잡고 몸을 웅크렸다. 작은 떨림에 불과했건만 그녀는 그 진동이 마치 온몸을 뒤흔드는 거센 지진처럼 느껴졌다.
엘사는 막 어제 저녁에 지루한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기나긴 꿈의 희롱에서 막 벗어났을 때 산장에는 어둠이 커튼처럼 짙게 드리워 있었다. 어스름을 타고 번지는 등불을 바라보다 엘사는 침대 위로 드리운 그림자로 눈길을 옮겼다. 크리스토프와 바리안에 이어, 웬 처음 보는 낯선 소녀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산드라예요.”
자신을 향해 불쑥 내민 손을 하염없이 응시하다 엘사는 소녀의 얼굴로 망연한 시선을 던졌다. 붉게 달아오른 소녀의 눈가에는 옅은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는 소녀라고 생각했지만 엘사는 그녀를 도통 어디에서 보았는지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이제 막 눈을 뜬 갓난아기처럼 엘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밤이슬처럼 맺힌 눈물로 하여금 엘사는 소녀와 자신 사이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힘없이 미소 짓는 소녀를 바리안이 부축하여 데리고 나갔다. 엘사는 결국 그녀의 손을 잡지 못했다.
엉거주춤 뒤척이며 상체를 일으키자 몸을 덮었던 이불이 아래쪽으로 툭 미끄러졌다. 어질러진 머릿속에서 엘사는 마침내 마지막 기억을 찾아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뾰족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민중의 분노였다. 마법을 두려워하던 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마법을 찬양하던 자들도 돌변하여 날카로운 창날을 그녀에게 겨누는 장면이었다. 사서로서 일이 끝났건만 엘사는 아려오는 마음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다. 잃었으면 하는 고통을 잃지 못한 것 또한 오래된 업보인 것일까, 마법을 쉽게 얻고 포기한 데 대한 대가인가.
샛노란 빛이 산장 구석구석을 따스한 빛으로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엘사는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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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붕이들 안녕안녕.
이것저것 준비하고 그동안 여문대회에다 현생에다 정신이 없었더니 어느덧 10월이 다 되어버렸네.
예전에 프갤라디오에서 인터뷰(...)를 할 때 시즌2는 엘탄절 전에 쓰겠다고 했었는데 진짜 그 꼴이 나고 말았네. 횡단열차 첫연재가 5월중순이었으니 시간 참 빠르다.
사실 전체적인 플롯이랑 집필은 9월초에 어느정도 해뒀었는데 스토리도 전체적으로 갈아엎고 완성도를 높이다 보니 많이 늦었어.
시즌2를 잘 쓸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많은 사람들이 봐 줄지도 사실 조금 의문이 들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써볼게.
삽화는 저번이랑 같은 분이 담당해주셨어. 닉언을 하기엔 조심스러우니 여문대회 제출작이랑 횡단열차 삽화 담당해주신 분이라고만 말해둘게.
사실 이분이 2002때부터 계속 삽화를 맡아주셔서 너무 죄송한데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또 죄송한 부탁을 드리게 됐다....... 하나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ㅠㅠ 이 자리를 빌어, 그리고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에는 연재와 동시에 삽화가 올라갈 예정이고 삽화는 총 다섯 장이 실릴 거야.
연재는 일주일에 많으면 2회, 적으면 1회 올릴 거고 월, 목 생각중인데 삽화 일정이나 내 개인 일정에 따라 좀 유동적으로 연재할 생각!
마무리가 잘 되면 이번에도 제본공구를 할 계획인.....데....... 살 사람이 있으려나.......
횡단열차는 18만자 가까이 되는 분량이었는데 얼음꽃은 20~24만자 사이로 잡고있어. 엘탄절에도 아마 마무리가 안 될 거 같은데 몇 달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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