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연재글에서 현물을 조세로 수취하는 공납제도가 고려와 조선의 시장경제 발전을 어떻게 지연시켰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 제도를 유지했는지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풀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죠. 국가가 필요한 현물을 직접 수취한다고 해서,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가 없어지지 않는데 시장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는거죠.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경우, 중앙집권화된 현물수취와 부역제도를 활용해 기득권층의 민간수요를 충족시키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다고 소개한바 있습니다. 바로 선물경제(膳物經濟, Gift Economy)죠.
대체 선물경제가 뭘까요?
선물경제(膳物經濟, Gift Economy)란 재화를 선물함으로서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는 경제를 말합니다. 필요한 재화를 서로가 교환하하는 물물교환이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가격에 따라 거래하는 시장경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제죠.

----북미 북서부 해안 원주민들이 축제에서 선물을 증정하는 포틀래치 축제를 묘사한 그림, 선물경제의 좋은 사례중 하나다.----
생일선물 주는거하고 뭐가 다르냐고 물으신다면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는 일반적인 방법, 즉 경제생활의 기초가 될 정도로 중요한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주로 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사회,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남태평양 원주민들에게서 동일가치의 거래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 받음으로서 수요를 충족하는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바 있습니다.
아니 고대부터 국가를 만들고 관료제와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켜온 고려와 조선에 무슨 원시 부족사회의 선물교환 경제가 있었냐고 물으실 수 있을겁니다. 맞습니다.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긴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는 이런 부족사회와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기득권층이 시장에서 재화를 거래를 통해 구하기보다 17세기까지 선물이라는 명목하에 필요한 수요의 상당부분을 만족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친인척이나 인적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서로간의 예물을 주고받는 수준을 떠나서 자신의 농지나 녹봉보다 더 많은 양을 선물에 의존했다면 선물경제라고 불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이 선물경제가 한반도에서 시작된걸까요?
한반도에서 선물경제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고대부터 중세까지 한반도에서 시장은 수도에나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지역간, 지역내 교역은 도보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행상(行商)이나 배를 사용하는 선상(船商)의 방문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졌겠죠.
이러한 요인으로 선물경제가 발달했다면 언제부터였을까요? 학계에서 선물경제의 존재를 확인한건 16~17세기 조선의 일기 자료를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 선물은 한국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선물경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선물이 민간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사료는 고려시대부터 등장합니다.
이자겸은 풍채[風貌]가 단정하고 거동이 온화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겼다.(생략)
사방에서 선물[饋遺]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인물(人物) 1123년경 기록
윤종양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고 선물[饋遺]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
고려사 열전, 윤인첨(尹鱗瞻, 1110~1176)
이미 고려 전기부터 권력자들이 선물을 무상으로 받는다(饋遺)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은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받는 일반적인 뇌물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선물은 권력자에게만 제공되는것은 아니며, 보다 일반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기득권층은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고려 중기 이후 관료의 물적기반이었던 전시과와 녹봉이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심화됩니다. 현직 또는 전직 관료들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혜택보다는 친인척, 동료, 친구들로부터 주고받는 선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된 원인이 되었겠죠.
무신정권기의 문신이었던 이규보(1168~1241)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공식적 사료 이외에 고려중기의 시대적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인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겼습니다. 오치훈의 "이규보를 통해 본 고려 관인의 경제생활"은 그의 문집을 조사해 고려시대 관인의 경제생활에서 선물의 중요성을 탐색해나갑니다.
여기에는 그가 받은 다수의 선물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죠. 특히 이규보가 이자겸과 같은 강력한 권력자가 아니었고, 그가 하급관료 시절이나 파직당했을때의 기록들은 선물이 당시 지식인층의 경제생활에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누비옷, 영릉 참봉 한준민 일가묘 출토, 뉴시스 기사 참조----
이제 이처럼 곤궁하다 보니, 집에 한 섬의 양식도 없어, 굶은 입에 늘 침만 흘리면서 부질없이 꾸르륵거리는 배만 어루만지네. 구월에 서리오자 하늘은 높은데 하룻밤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니 홑이불은 쇠보다 더 차가워 몸은 언 자라처럼 움츠러드네.
갑자기 한 장 서신을 받으니 나에게 갖고 싶은 물건을 보내왔구나. 썰렁한 부엌에 저녁밥 지으니 파란 연기가 이제야 집에서 솟고 엷은 옷 속에 솜 놓아 입으니 겨울날 따뜻한 볕 등에 진 듯 어진이의 마음이 하도 고마워 감사하는 눈물이 줄줄 흐르네
동국이상국집 10권, 古律詩, 문 선로(文禪老)가 쌀과 솜을 보내준 것에 사례하다
이규보가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 야옹(野翁)이란 인물이 홍시 1000개를 보냈다는 기록을 비롯해 그는 그의 문집에 많은 이들이 보내온 다양한 선물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는 1207년 40세가 되어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하급관료이거나 무직상태였을 때에도 쌀, 의류, 육류와 같은 다양한 생필품을 주변에서 선물로 받아서 생계에 보탰습니다.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그는 숯, 맷돌, 미나리, 능금과 참외, 비단, 복숭아, 술, 먹이나 부채등의 선물을 받았고, 몽골과의 전쟁 시기로 생활이 피폐해졌을때 당대의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최우(崔瑀)로부터 쌀을 선물받아 생계를 유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가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후 4년간 총 26건의 선물로 차(茶), 귤, 꿩, 복숭아, 술, 채소, 홍시, 곶감, 쌀등 다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관직의 유무나 고하와 완전히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만, 고려시대 기득권층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고, 이는 14세기 여말선초 시기까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규보뿐만 아니라 여말선초 시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색(李穡) 역시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이규보와 유사하게 수많은 선물기록을 남기고 있죠.

----영해(寧海)는 경북 영덕을 말한다. 영덕군 해안에서 말리는 과메기들, 월간 중앙 참조----
단양의 소식이 근래에 드물었는데, 갑자기 말린 생선을 얻으니 성의가 작지 않네
목은시고 12권, 영해(寧海) 김 좌윤(金左尹)의 서신을 받다.
동쪽 바다는 하도 커서 가이없고, 말린 고기는 바늘같이 가는데, 천리 먼 길을 부쳐왔기에 깊이 싼 봉함을 뜯고 보니 밥을 도와 맛을 냄은 물론이요. 시를 쓰매 읊조림도 안 막혀라
목은시고 13권, 말린 작은 물고기를 보내 준 김 삼사(金三司)에게 사례하다.
고려 전기부터 고려가 망하기 직전까지 고려의 관인이나 지식인층에게 있어서 경제생활에서 선물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게다가 이 자료는 일기가 아닌 시(詩)라는걸 고려하면 실제 받았던 선물의 수량이나 횟수는 훨씬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17세기까지 선물경제는 이규보나 이색과 같은 대표적인 문인이 아니라도 재지사족들에게 비교적 일반적이었습니다. 사족의 가계경제에서 자급자족하는 부분을 제외한 상품수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시장에서 대가를 치르는 거래 위주로 전환되는 건 18세기가 되어서였죠.
고려나 조선의 기득권층이 필요한 민간수요를 서로간의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서 충족하는건 시장경제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보는 근대중심적인 관점(Moderno-Centrism)으로 보면 원시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근대주의(Post-modernism)는 이런 관점에 도전하죠.
수요를 시장에서 충족하던 선물로 충족하던 충족하기만 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시장경제가 무슨 완벽한 이상적 답안이라고 보는 건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불과합니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은 뒤로 하고..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가 어떻게 상공업 발달을 지연시켰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므로 거기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사실 인류학자들이 관측한 부족사회의 선물경제하고,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는 굉장히 다릅니다.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수취제도 없이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거든요.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물경제는 불공정한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물경제의 특징 : 지방재정의 사적 이용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가 기득권층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농장이나, 고기잡는 어량(漁梁)에서 나오거나 직접, 또는 노비를 사역해서 나온 물품을 서로 간에 선물함으로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有無相通)하는 것이었다면 불공정하다고 할 수 없겠죠.
오히려 이런 선물의 주고받음은 지배계층내 바람직한 인적관계를 형성해서 서로간의 분쟁을 줄이는 사회적인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근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없는 걸 받고, 내가 남는 걸 너한테 선물한다고 하면 굳이 선물로 수요를 충족하는 것 보다 직접적으로 교환하거나 가격을 매겨 매매하는게 효율적입니다. 선물 주는 사람이 내가 필요한 걸 준다는 보장이 없고, 내가 선물한 이후 꼭 선물을 되돌려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필요할 때 필요한 걸 못 구하면 얼마나 짜증나고 불편하겠습니까?
즉 사회가 발전할 수록 보다 수요를 충족하기에 보다 용이한 거래를 하게되고, 직접 거래하면 불편하니까, 이 거래를 매개하는 유통업자, 상인이 출현하고 정기적으로 시장을 열어서 거래를 보다 쉽고 광범위하게 할 수 있도록 변화합니다.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분업화와 시장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거죠.
선물경제가 사회가 발전한 후 유지되지 않고 교역과 거래로 전환되기 쉬운 건 이 때문이겠죠?
하지만 부족사회보다 훨씬 발전한 고려와 조선에서 선물경제가 장기간 유지된 건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층은 단순히 자기가 남는 걸 선물하는게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수취된 현물을 서로 선물함으로서 각자의 수요를 충족하는 방법을 사용했거든요.
즉 선물경제의 구조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남을 만큼의 이익이 고려와 조선 기득권층에게 존재했다는 겁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나라에서 수취한 나라의 재화를 가지고 기득권층끼리 주고 받으면서 필요한 것을 획득 할 수 있거든요. 언젠가 답례를 해야하니 공짜는 아니지만 매우 저렴하죠!
이런 면에서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부족사회의 선물경제와 달리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는 국가권력에 의한 재분배경제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고려와 조선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을 살펴봅시다.
매월(每月)의 상선(常膳)과 별선(別膳)을 바칠 때 피폐한 백성들로부터 과도하게 거두어들여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라.
고려사, 충렬왕 11년, 1285년 3월 19일
구제(舊制)에 외관(外官)은 예(例)에 따라 삭선(朔膳)을 바치는 것 외에 모두 별선(別膳)이 없었는데, 지금의 대소관(大小官)은 별선이라고 이름하면서 민에게서 땅에서 나오는 것[土宜]과 술, 고기 등의 물건을 거두어 권귀에게 보내어 먹도록 하니 그 폐단이 매우 심합니다.
고려사, 형법1, 공민왕 11년, 1362년 6월
고려 후기의 사료들에서는 지방에서 왕실에 바치는 식료품인 진선(進膳)을 수취할 때 지방관들이 추가로 별도로 거두어서 이를 사적인 선물(私膳)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는 식료품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민으로부터 능라(綾羅)를 거두어[賦] 저장하는 곳으로 갑방(甲坊)이라고 불렀다. 공납으로 바치는 양을 채우고 남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모두 유수(留守)가 되면 사사로이 소유하고자 하였다.
고려사, 권단(權㫜, 1228년 ~ 1311년) 열전
공물로 바치는 직물의 경우에도 조정에 바치는 것 이외에 추가적으로 거두어서 지방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각종 특산물인 공물의 수취 기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내내 불명확했고, 추가적인 수취와 사적인 이용이 발생하기 쉬웠습니다.
즉 고려와 조선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인 선물은 지방관들에 의해 피지배층에게 수취된 공물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제주도 감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감귤 공납은 제주도민을 괴롭혔다.----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동국이상국집 2권, 제주 태수(濟州太守) 최안(崔安)이 동정귤(洞庭橘)을 보내왔기에, 시로 사례하다
숯 조금 보내 준다면, 천금보다 더 값지리. 생전에 그 은공 못 갚으면 죽어서도 잊지 않으리라.
동국이상국집 7권, 춘주수(春州守) 강 장원(姜壯元) 힐(頡) 에게 숯을 빌면서 희롱삼아 주다
이규보 역시 제주도에 지방관으로 가 있던 최안(崔安)에게 공물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귤을 선물받거나, 또는 현재의 춘천(春州)에 지방관으로 있던 친구에게 숯을 선물로 보내달라 요청하는 시를 남겼죠.
이렇게 지방관이 해당 지역에서 수취한 공물의 일부를 선물로 중앙의 고관이나 인적관계를 형성한 다른 사족에게 보내는 행위는 고려시대에 이미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변성아의 "고려말 李穡이 받은 선물의 특징"에서는 목은시고를 조사하여 이색이 각지의 지방관으로부터 57건의 선물을 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이색이 친인척이나 승려들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많았습니다. 특히 이색은 지방관들에게 수산물을 많이 선물로 받아서 이색이 받은 수산물 중 74%는 지방관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미역, 전복, 붕어, 김, 말린 생선, 은어, 문어등 종류도 매우 다양했죠.

----말린 전복, 이색이 받은 수산물은 아마 대부분 말리거나 염장해서 운송되었을겁니다.----
이색이 생활하던 고려 말기에는 소금과 생선은 행상(行商)이 짊어지거나 말에 실어서 유통하는 대표적인 품목이었습니다. 피지배층들은 이런 행상을 통해서 해산물을 구했지만, 이색과 같은 사족층들은 지방관들이 보내주는 선물을 통해 이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지방관의 선물은 어떻게 수령자에게 배송되었을까요?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노경륜(盧景綸)이 역에서 내선(內膳, 왕의 식사용 특산물)을 도성까지 수송하는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사선(私膳)이 거의 반이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1년, 1275년 11월
각 도의 안렴사가 별함과 함께 백성을 침어(侵漁)하고 사사로이 선물[私膳]이라 하여 역(驛)에 전달하여 실어 나르고 있으니 그 폐단이 심히 크다.
고려사, 형법1, 충렬왕 24년, 1298년 1월
지방관은 왕실에 바치는 식품을 올릴 때 자신의 사적인 선물을 공적인 운송체계인 역참을 사용해 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참만 사용되었을까요?

----마도 1호선의 항로와 침몰지점, 차가운 물속에서 다시 태어난 고려의 생활 참조 https://www.koreanart21.com ----
1208년 침몰한 마도 1호선은 2009년에 발굴되었습니다. 마도1호선의 죽간을 통해 당시 배에서 대량의 곡물과 건어물, 메주, 젓갈류를 수송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마도 1호선에는 이와 함께 836점의 비교적 저렴한 생활자기를 싣고 있었죠.

----1208년경 침몰한 마도 1호선의 죽간, 최낭중 댁에 보내는 고등어 젓갈 항아리라고 적혀있다.----
마도 1호선을 포함해 마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1~3호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죽간을 통해 확인된 것은 발송자들이 주로 지방의 향리들이고, 수취자가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중세사 연구자 박종진 교수는 마도1호선이 개인화물을 운송하는 선박으로 조운선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마도 1호선의 잔존 선체----
다만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지방관들은 개경의 권력자에게 선물을 보낼 때 공적인 운송체계를 활용했습니다. 박종진 교수는 마도1호선에 실린 화물이 지방의 향리들이 중앙 무관들에게 보낸 지대나 선물,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는데, 고려시대 선물이 역참을 통해 운송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운선도 사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즉 마도 1호선의 죽간을 통해 볼 수 있는 곡물이나 젓갈, 자기들은 이규보나 이색이 받았던 지방관으로부터의 선물과 유사한 성격이고, 조운선인 마도 1호선을 통해 운송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말 이색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교주도, 동북면, 서북면에서 지방관들이 보낸 수산물 선물을 받았습니다. 유통망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조운 및 역참체계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선물을 이색에게 전달하는건 운송비 문제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방관들이 보내는 선물은 역참과 조운망, 즉 공적인 운송망을 통해서 중앙의 고관이나 각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운송비 부담 없이 무료로 보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역참에서 무급으로 봉사하는 역졸(驛卒)과 조운선의 선원인 수수(水手)나 조졸(漕卒)들의 부담을 증가시켰을 겁니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임정(林整)은 성품이 본래 거칠고 사나운데, 도필(刀筆)로 출신(出身)하여 외람하게 재상(宰相)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생략)
전곡을 조운하는 이외에 무릇 해산물(海産物)·어곽(魚藿)·포해(脯醢)·죽목(竹木) 등물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무겁게 실어다가 공사처(公私處)에 널리 뇌물을 행하여 사사로이 은혜[私恩]를 샀으니...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21일(1403년)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집니다. 지방관이나 지방군 지휘관은 조운선을 사용해서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여 사적으로 서울로 보내서 중앙조정의 세력자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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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언(右正言) 우계번(禹繼蕃)이 아뢰기를, "충청도 감사가 사사로이 증여하였고 수가한 조관들이 모두 안연히 이를 받았으므로 문초(問招)하기를 명하셨다가 곧 석방하셨으니, 장차 어떻게 징계되겠습니까. 다시 추문(推問)하여 죄를 매기기를 원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예전 예이니 죄줄 수 없다. 더군다나 대신으로서 간범(干犯)된 자가 많은데, 이런 자질구레한 허물을 모두 죄주면 이것은 조정(朝廷)에 있는 사람을 죄다 바꾸게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4월 7일(1443년
지방관이 지방재정을 유용하여 중앙조정의 관료나 권력자에게 선물하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관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재정의 유용 자체는 폐단과 관행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존재했고, 때로는 탄핵의 대상이 되지만 때로는 관행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공사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애매함이야말로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가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선물의 증여가 한양에 거주하는 전현직 관료나 세력가에게만 한정된다면 선물경제, 즉 민간수요를 선물을 통해 충족한다고 보기보다는 제한적인 뇌물의 존재에 불과하겠죠. 이색(李穡)과 같은 경우는 고려 말기 성리학의 대부격인 인물이고 대부분의 신진사대부는 그와 학맥으로 얽혀있을 정도였으니 이런 전국적인 선물 증여가 가능했을 겁니다. 조선시대 일부 고위 관료들만이 이색과 같이 전국에서 선물을 받을 수 있었겠죠.
일부 권력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족층들도 선물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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