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중세 일본에 형성된 이에(家) 문화로 인해서 일본의 중앙조정이나 막부와 같은 중앙권력이 고급 관직부터 실무 관료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일족이 세습하는 일본의 독특한 세습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혈통을 우대하는 수준이 아니라 특정 관직은 특정 일족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세습하는 구조는 중세 일본에서 재지사회의 유력자가 중앙정권에 합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그 결과 재지유력자는 중앙정권에 합류하길 희망하기보다 재지사회에서 자신의 영지를 보존, 확대하는데 골몰하게 만듭니다.
이는 재지유력자의 재지성(在地性)을 강화하고, 중앙권력의 지방통치에 순응하기보다는 반항하게 하고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실력으로 지키는 중세 일본의 무가(武家) 사회를 발전시킵니다. 한마디로 중앙집권이 어려워지죠.
히데요시나 에도막부 조차도 이러한 사회구조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에도막부의 봉건적 연방국가체제인 막번체제(幕藩体制)는 통일정권이 이러한 사회환경과 타협한 결과물입니다.
반대로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중세 한국사회에서, 재지유력자들은 빠른 속도로 재지(在地) 지향의 성격이 약화되고 중앙정권에의 합류를 선망하는 경향을 강화해 나갑니다. 조선 후기 중앙관계의 진출이 매우 어려워진 재지사족들도 관직을 얻거나 중앙정계의 재경사족과 어떻게든 친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은 여전히 강렬했습니다.
중앙권력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재지유력자의 욕구, 이를 수백년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강화해낼 수 있었던 것이 고려와 조선이 안정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반도의 재지유력자들이 이런 열망을 가졌던건 아닙니다.
신라는 한반도 사람들의 진정한 통일국가였을까?
신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기원전 57년경 박혁거세가 경주 일대의 6개 마을을 통합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이 6개 마을이 신라를 구성하는 6부(部)의 전신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라가 경주 일대의 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점량부, 한기부, 습비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이들의 씨족집단이 왕경인(王京人)을 형성했음은 확실하죠.

신라가 골품제를 통해 성골과 진골, 즉 골인(骨人)이 혈통에 기반해서 관직을 독점해온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별의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6두품 조차도 사실상 이 왕경인(王京人) 집단으로서 일반적인 신라 지배하에서 특권집단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죠.
신라의 왕경인(王京人)은 서라벌 일대의 6부에 거주하고 있는 서울 사람으로 인지되기 쉽지만, 정확히 말하면 6부에 호적을 등록하고 있는 특권집단을 말합니다.
강수(强首)는 중원경(中原京) 사량(沙梁) 사람이다. 아버지는 석체(昔諦) 나마(奈麻)였다.
삼국사기 강수 열전
중원경은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로, 신라에서 설치한 지방행정중심지인 5개의 소경(小京)입니다. 강수(强首)는 중원경에서 태어났으나 신라의 6부인 사량부 출신이고 아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11관등에 해당합니다. 강수가 8등인 사찬(沙飡)까지 오른 걸 보면 그는 6두품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왕경인은 혈통으로 계승되며,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에도 호적을 수도의 6부에 둠으로서 일반적인 사람과 구분합니다. 진골이 고위직을 독점하는게 신라의 특징이라면 혈통으로 계승되는 왕경인은 실질적으로 신라의 중앙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최소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강수의 선조는 가야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신라는 가야 병합과정에서 가야 왕족들을 진골로 흡수하고 가야인 다수를 왕경인으로 흡수합니다. 이 성장단계가 신라가 비교적 덜 폐쇄적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죠.
삼국통일 과정에서 백제나 고구려인들 중 일부도 왕경인으로 편입됩니다.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이 김씨 성을 사성받고 진골귀족이 된 것이 좋은 사례죠.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인들에 대한 왕경인 편입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통일이 완수된 이후 왕경의 인구가 포화되고 외부에서 왕경인으로의 유력자 유입은 점차 줄어듭니다. 통일국가인데 지역국가로서의 폐쇄적 성격이 오히려 강해진다는게 아니러니하죠?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수하지만, 정복된 지역의 재지유력자들이 꾸준히 중앙정권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는 차단됩니다. 지역국가로 발전한 한계로 인해 정복자인 왕경인(王京人)은 호적을 수도에 두고 지방에 거주하더라도 왕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나갑니다.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라벌의 인구 178,936호(戶)는 단순히 서라벌 일대의 거주자만이 아니라 지방으로 이주하여 소경(小京)에서 거주하는 왕경민의 호적을 합산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수가 소경에서 자랐음에도 국왕 측근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지방으로 이주한 왕경인은 여전히 특권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경에 호적(籍)을 두는 왕경인들 중 왕위계승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르는 중심집단으로 국인(國人)이라는 호칭이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을 왕경인 중 상층 유력자들을 지칭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진골의 고위관직 독점과 6두품 차별은 왕경인과 지방인 사이의 차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재지유력자는 재지사회에서의 부와 영향력이 있더라도 왕경인이 누리는 제한적인 신분상승의 기회조차도 차단되어있으니까요.
이는 나라사람(國人)이라는 표현이 신라가 지배하는 전 영역에 속하는게 아니라 지방인을 제외한 혈통으로 계승되는 서라벌에 호적을 둔 왕경인 중 상층부를 지칭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죠.
신라는 단순히 골품제를 넘어서 지역국가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통일신라 시기 재지유력자들이 중앙정권을 선망할 기회 자체를 차단했습니다. 재지유력자들은 촌락에서 신라의 지방통치를 담당하는 촌주(村主)로서 가산 경영에 주력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재지성(在地性)이 강할 수밖에 없죠.
신라 조정과 진골귀족들이 내부권력투쟁과정에서 실력과 권위를 상실하자 재지사회의 유력자들은 신라의 지방통치에서 이탈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지방에 거주하는 진골귀족이나 왕경인은 예외적인 사례인 명주(현재 강릉)의 김순식(金順式, 다만 김주원계 진골귀족인지는 확실치 않지만요.)을 제외하고는 후삼국 시대의 난세에 지역을 장악하거나 유의미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특히 신라 지방통치의 핵심인 소경(小京)에 왕경인이 다수 이주했음에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는데, 진성왕 3년(889년)의 농민 반란 이후 신라의 지배에서 먼저 이탈한 곳이 소경 위주였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궁예, 후삼국시대의 영웅이었다.----
양길(梁吉)과 궁예(弓裔)는 북원경(北原京, 원주)과 국원경(中原京, 충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들은 왕경인이나 진골 출신이 아닙니다. 금관경(金官京, 김해)에서도 김인광(金仁匡)을 몰아내고 지역을 장악한 소충자(蘇忠子), 율희(律熙)등도 왕경인으로 추측되지 않습니다.
진골귀족들을 비롯한 왕경인(王京人)들은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거주하고 있던 지방에서 이탈해서 서라벌로 돌아가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김헌창의 반란 과정에서 왕경민인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阿湌) 영충(令忠)등은 서라벌로 도망쳤고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상을 받았습니다.
농민 반란에 대처한 것은 지방의 왕경인이 아니라 재지유력자인 촌주(村主)였고, 기훤, 양길, 궁예, 견훤등 재지사회 기반은 취약하지만 무력을 갖춘 신흥세력을 보호자로서 받아들이고 지지한 것도 이제 성주(城主)나 장군등을 자칭하게 된 재지유력자들이었습니다.
지방으로 이주한 왕경민은 재지사회에 긴밀한 연고를 강화하기 보다는 호적지인 서라벌에 구심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신라 말기의 반란과정에서 진골귀족인 지방관이나 왕경인들이 지방에서 이탈해서 서라벌로 도망가버리기 쉽게 만들었죠.
이는 신라가 통일 이후 수백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왕경인과 재지유력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지 못했고, 그 결과 빠르게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신라의 폐쇄적 지배체계는 고려나 조선과 달리 실력과 권위가 약화되었을 때 빠르게 붕괴되죠. 고려는 지방의 호족들이 신라의 폐쇄적 지배체계를 파괴한 폐허 위에 세워집니다.
한반도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첫번째 혁명이었습니다.
고려도 폐쇄적인 특권집단 國人의 나라였다?
그중 왕도 개경과 인근 주현(州縣)에 밀집한 인구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그 중핵은 4000여 명의 문관과 무관, 대략 3만 명에 달한 중앙군, 그리고 그들의 가속이었다. 《고려사》는 이들을 가리켜 국인(國人)이라 불렀다....
고려는 국인과 향인을 차별했다. 지방의 향인은 거주와 직업을 속박당했다. 관청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었다. 향인이 국인으로 승격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전이었다.
반면 국인이 향인으로 내쳐지는 것은 국인에겐 가장 가혹한 형벌인데, 귀향형(歸鄕刑)이라 했다. 고려는 송의 법을 빌려 썼는데, 귀향형은 송에 없는 고려 특유의 법이었다.
이영_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6. 고려의 지배체제
이영_훈은 고려가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국인(國人)의 나라였다고 설명합니다. 고려사에서 국인(國人)은 신라시대와 달리 귀족이나 지배층의 성격보다는 고려인 전반을 일컫기도 하고, 유력자들의 여론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기도 해서 이영_훈의 국인 개념에 100% 신빙성이 있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고려가 신라와 유사하게 개경에 호적을 등록한 이를 왕경인(王京人)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일종의 특권이었다는 이영_훈의 견해는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최서천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아들은 최한용(崔韓用)으로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관직이 시중(侍中)까지 이르면서 비로소 개경[京師]에 거주하였고, 그 후손들은 왕경인(王京人)이 되었다.
1160년 최함(崔諴 : 1094~1160) 묘지명 금석문
신라와 유사하게 고려시대에도 개경에 호적(籍)을 두는 것은 모두에게 허용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경에 거주할 권한은 세습되는 것이었으며, 이영_훈의 말과 같이 죄를 지을 경우 이 권한을 박탈하기도 합니다.
임감(臨監)하면서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재물을 도둑질하거나, 임감하는 중에 재
물을 받고 법을 굽혀 적용한 관리는 도(徒)·장(杖)을 따지지 않고 직전(職田)을 거
두고 귀향(歸鄕)시킨다.
고려사 형법(刑法)지 직제(職制)
귀향형은 참형, 교수형, 유배형보다 낮은 처벌수단이며 꼭 관직을 가진 이가 아니더라도 개경에서의 거주권한이 박탈될 수 있습니다. 왕경인은 어떤 특권을 가지는지는 명확하게 정의된 바 없습니다. 신라의 경우 왕경인이 아니면 중앙관직 진출이 불가능했지만 고려는 중앙관직 진출에 지역적 제한을 두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귀향형은 고려가 신라와 달리 처음부터 매우 개방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세요. 귀향을 시킨다는건 기본적으로 수도가 고향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귀향형의 다른 명칭은 본관으로의 유배(流本貫)거든요.
고려시대에 본관(本貫)의 개념이 형성됩니다. 신라의 경우는 서라벌의 6부가 일종의 본관이라 하겠으나 실질적인 본관은 해당 씨족의 발상지의 개념으로 후삼국 시대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생겨납니다.
고려는 전국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복종시키면서 국가를 성립시켰고, 이들이 중앙으로 상경해 관료로 종사(上京從仕)하면서 고려의 초기 중앙지배층이 형성됩니다. 이들은 원래 대부분 재지기반을 가진 유력자들이 많았고 원래의 고향, 본향(本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형성 이전의 씨족사회에서 발전해나가며 혈통기반의 지역국가로 성장한 신라에 비해서, 고려는 패서호족을 중심으로 하긴 했지만 보다 폭넓은 전국적인 영역에서 지배집단을 구성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왕건의 29명에 달하는 왕비와 부인들입니다.

왕건의 후비들은 황해도 8명, 경상도 6명, 경기도 4명, 충청도 3명, 강원도 3명, 전라도 2명, 미확인 3명으로 광범위한 지역분포를 보입니다. 황해도의 패서호족 비중이 크지만 신라왕실과 달리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은 호족들이 전국적으로 분포함을 알 수 있죠.
왕건 시기의 유공호족들은 개경으로 상경해 중앙의 관료집단을 형성합니다. 이들은 신라의 왕경인과 달리 시작단계부터 전국적인 지배집단이었습니다.
왕가도(王可道)의 초명(初名)은 자림(子琳)이고, 청주(淸州) 사람으로 본래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성종(成宗)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로 임명되었다....왕가도는 얼마 뒤 사직을 청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다가, 덕종 3년(1034)에 죽었다.
고려사 왕가도(?~1034년) 열전
같은 왕경인(王京人)이라 하더라도 신라와 고려의 지배층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신라에 비해 고려가 훨씬 덜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거죠. 고려의 왕경인(王京人)의 지위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획득가능한 특권이었습니다.
또한 상경종사해 왕경인의 지위를 획득했던 관료들이 고향에 돌아가 정착하는게 나타나는 것도 고려시대에 시작됩니다. 지배층이 어떻게든 수도에 가는 것만을 희망하던 고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간 교류가 커지는 중세사회로 넘어간거죠.
고려는 통일과정에서 공을 세운 호족들을 상경시켜서 관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재지사회 지배를 위해 이 관료들 중 재지사회 영향력이 강한 이들을 연고지를 관리하는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고, 이후 지방관을 임명해 파견하면서 이원화된 지방통치 구조를 장기간 유지하게 됩니다.
신라와 달리 고려는 본향인 연고지를 재지사회에 두고 있는 호족들이 중앙관료를 구성했기 때문에 중앙과 지방간의 이질성이 더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라의 지배집단인 왕경인이 어디에 거주하던 결국 서라벌 사람이었던 반면, 고려의 지배집단은 재지사회와의 연계가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심관은 출신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도 볼 수 있겠죠.
고려의 왕경인 호적제도와 귀향형 제도는 고려의 지배층이 신라에 비해 매우 전국적이었고, 그러면서도 신라의 왕경인 제도와 같은 폐쇄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과도기적이고 다원적인 시대였던거죠.
중세 일본은 고대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천황, 귀족들의 혈통과 정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전국시대 이전까지 무가귀족들이 무가정권을 형성했던 것도 이러한 전통의 계승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반면, 중세 한국은 신라의 오랜 혈통으로 이어진 전통과 폐쇄성을 파괴하고 새로 시작했기 때문에 보다 유연하게 지방으로부터 재지유력자들을 지배체계 내에 포섭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고려 왕실은 수백년 이어진 혈통적 정당성 따윈 없었거든요.
대신 고려왕조는 꾸준히 재지유력자를 중앙정권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의 정당성을 쌓아 나갑니다.
고려 재지유력자는 어떻게 지배체제로 포섭되는가?
고려 초기의 유공호족 집단은 비교적 강한 재지세력을 갖춘 상층호족들은 상경하여 중앙관료가 되고, 남아있는 하층호족들은 재지유력자로 남아서 지방의 토성(土姓)을 형성합니다.
당연히 중앙관료화된 상층호족들은 이전 연재글의 일본의 공가귀족들처럼 점차 기득권층이 되고 관직을 독점하고 싶어하겠죠? 특히 상대적으로 고려 건국과정에서 세력이 크고 초기 왕위계승과정에서 세력을 쌓은 패서호족같은 경우 더욱 그랬을 겁니다.
고려가 중세 일본처럼 관직과 지방통치의 권한을 세습화하지 않을 수 있던 데에는 4대 왕 광종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려가 918년 건국되고 936년에 통일을 완수한 이후 22년만인 958년 고려의 4대 왕 광종은 후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쌍기의 제안에 따라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합니다.
신라에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일종의 과거제도 유사한 제도가 있었으나, 왕경인만 입학이 가능했던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의 졸업 자격시험에 가까워서 실질적으로 재지유력자를 포섭하는 수단이 될 수 없었죠.
하지만 고려의 과거제는 달랐습니다.
쌍기(雙兾)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文士)들을 높이고 중용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 없는 사람[非才]들이 지나치게 등용되어 순서를 따르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일 년[歲時]도 안 되어 갑자기 재상[卿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남북용인(南北庸人)이 다투어 청탁하고 의탁하였는데, 지혜와 재능이 있는지는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후생(後生)은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도록 덕 있는 자들은 점점 쇠락하였습니다.
고려사 최승로(崔承老, 927~989) 열전
이 과거제에 대한 최승로의 평가를 봅시다. 재능없는 사람(非才)이 등용되며, 남쪽과 북쪽의 어리석은 사람(庸人)이 의탁하고, 젊은 신진(後生)이 진급하고 기존의 공신(舊德)이 쇠락했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공신집단을 대체해 나간 이들을 쌍기처럼 귀화한 중국인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지만 이 시기에 과거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한 사람들은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기존의 패서호족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고려의 비주류 집단인 후백제 출신이 많다는거죠.
초기 과거에서 합격한 이들 중 최섬(崔暹)의 고향은 미상이지만 그의 사위 김심언(金審言)이 영광(靈光縣) 출신으로 전라도 출신으로 추측됩니다. 진긍(晉兢)은 남원 출신이며, 김책(金策)은 나주 광양 출신입니다. 백사유(白思柔)는 충남 예산 출신이고 유방헌(柳邦憲)은 전주 출신으로 조부가 후백제의 대장군이었죠.

----서희는 요나라와의 협상에서 강동6주를 찾아온걸로 유명하죠. 조선일보 뉴스속의 한국사 참조---
서희(徐熙)같은 경우는 부친이 원래 광종대의 주요 관료인 서필(徐弼)로 경기도 이천 사람입니다. 서필은 광종의 공신 숙청과 과격한 신진관료 임용에 반대했음에도 광종이 계속 중용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왕건 시기에 도필(刀筆), 하급 문서담당자로 시작했단 면에서 유공호족들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광종은 자신의 왕위승계를 후원했던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군)의 호족이자 개국공신인 박수경의 일족을 숙청합니다. 혜종, 정종, 광종을 거치면서 호족의 숙청으로 왕건 시기 삼한공신 3,200명 중 남아있는 구신이 40여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물론 시간 경과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광종은 기존의 유공호족들을 대거 제거하고 중앙조정에서 약세이던 지방세력인 전라도 출신들을 과거제를 통해 중앙조정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초기 과거제는 재지유력자를 포섭한다는 측면으로 볼 때 규모면에서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광종대 18년간 8회 시행된 문과라 할 수 있는 제술과의 급제자는 27인이며, 명경과와 잡과까지 합해도 39명에 불과합니다. 초기 과거제는 재지유력자가 중앙정계를 선망하게 할 만큼 충분한 관직을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초기부터 과거제만이 재지유력자를 중앙으로 흡수하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광종대 시위군의 강화는 이영_훈의 국인(國人) 개념과 달리 군사제도 역시 재지유력자를 중앙으로 흡수하는 수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광종(光宗)이 참소(讒訴)를 믿어 장수와 재상을 벌주고 죽임에 이르러 스스로 의심이 생겨 주군(州郡)에서 풍채 있는 자를 선발하여 들어와 시위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이 번거롭기만 하고 이로울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사 병지(兵志) 2권, 숙위
광종대 지방의 풍채있는 자(州郡有風彩者)를 선발했다는 방식은 선군(選軍)이라고 하여 이후에도 꾸준히 유지됩니다. 무신정권의 초기 권력자인 해주(海州) 출신의 정중부(鄭仲夫)도 이 제도에 따라서 중앙군으로 진출했죠.
선군(選軍)은 단순히 지방에서 힘깨나 쓰는 이라기 보다는 재지사회의 유력자로서 무재가 있는 이를 선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사한 사례로는 고려 중기의 전주 사람 고의화(高義和), 안성군(安城郡, 현재 경기도 안성)의 호장 이중선(李仲宣), 남포현(藍浦縣, 충청도 보령)의 백임지(白任至)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향리자제를 선발한 일종의 인질 개념인 기인(其人)의 경우 7~10년을 거치면 동정직(同正職)을 허락하고, 각각 15년·10년의 기간을 채우면 가직(加職)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식 관료로 임용되는게 아니라 말단인 서리(胥吏)로 임용되므로 관직인 품관으로 상급직에 오를 때 과거급제자에 비해 차별을 받았기에 하위직에 그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과거급제보다는 이런 과정을 거쳐 중앙조정의 하급직에 합류한 지방 사람이 더 많았을 겁니다.
고려 전기의 이러한 상경 방식을 통해 재지유력자가 상경해서 중앙권력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소과응시도, 송암미술관 소장 평생도(平生圖) 병풍의 한폭--
하지만 이러한 유입루트가 제공된다고 우리가 조선시대에서 볼 수 있듯이 재지사회의 사족들이 자나깨나 과거공부를 하며 관직에 오르기를 선망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재지사회에서의 중재자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하루아침에 성립된 건 아닙니다.
고려 건국 이전까지 중앙과 지방은 수백년간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지방의 유력자가 중앙에 진출하길 희망하고 그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게 과거제 좀 도입한다고 바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고려는 재지사회가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야 했습니다. 중세 한국인들도 처음에는 무척 거칠고, 제멋대로였으니까요.
한반도 재지사회는 원래 일본 못지 않게 과격했었다.
신라의 폐쇄적인 왕경민 위주의 지배체제는 신라의 지방통치가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훨씬 이전에도 지역사회가 신라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피정복민인 백제나 고구려의 유민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게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요인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지방에서 불교 종교결사인 향도(香徒)의 성장이죠.

---용봉사 마애불과 그 좌측에 보이는 명문---
799년에 조성된 충남 홍성의 "용봉사마애불조상기"에는 재지사회의 유력자인 장진(長珍)이란 사람이 향도를 결성하고 12관등에 해당하는 대사(大舍)라는 관직을 자칭하며 지역사회의 불사 조성에 후원을 하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중앙권력과 괴리된 재지사회에서 호족의 성장은 문헌과 금석문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데, 비공식적인 종교결사를 통해 형성된 이러한 지역공동체는 나말여초의 혼란시기에 자위적 성격의 지역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던 것도 신라후대의 종교결사의 영향력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기존의 군현의 치소나 거점지역에 성곽을 쌓고 성주(城主)나 장군(將軍)을 자칭하는 후삼국시대의 지방 호족은 이런 종교결사인 향도를 결성하고 지방민들의 종교행사나 사찰을 후원하며 영향력을 확장시켰을 것입니다.
이들은 난세에 이러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무력을 갖추고 지역자위공동체를 건설하여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고려에 점차 통합되기에 이릅니다.
고려는 이러한 지역자위공동체를 지배 하에 포섭하고 그 지도자들을 향리(鄕吏)로서 지방통치를 상당부분 위임하게 되죠.
노명호의 저서,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에 따르면 13세기까지도 지역자위공동체가 수성전과 유격전에 의존한 지역방어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요나라와 몽골등의 외침 상황에서 중앙군이 대패하여 전멸하더라도 국경지대부터 후방에 이르는 자위공동체에 의한 효과적인 방어전이 수행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보물 53호, 충북 예천의 개심사지 5층석탑, 높이 4.3m----
경상북도 예천에 있는 개심사지 5층석탑 명문에는 1011년에 완성된 석탑을 건설하는데 지역의 지방군인 광군(光軍) 46개 대(隊), 1150명이 동원되었고, 미륵향도(彌勒香徒)와 치향도(稚香徒)가 주도하였으며 참여한 구성원의 수가 1만명에 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이를 책임지고 지휘한 것은 향리인 호장(戶長)이었고, 임씨, 권씨등 예천 지역의 토성들이 참여했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지역사회에서 향도를 통해 대규모 공동체가 재지유력자를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으며 지방군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이는 고려전기의 지역공동체가 상당한 군사적 잠재력과 영향력을 갖춘 대규모 조직으로서 재지유력자의 영향력 하에 존재했다는걸 추측하게 해줍니다. 전쟁에서의 활약은 이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역자위공동체는 고려가 외침을 막아내는데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신라 중대 이후 형성된 공동체의 오랜 역사로 인한 독립성, 그리고 자체적으로 무장하고 자신을 지킨 경험은 중세 일본에서 볼 수 있듯이 재지사회의 폭력성으로도 이어지기 쉽습니다.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도 양주)에 당도하자 어떤 향리가 아뢰기를,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듣지 못한 척하자, 그 향리가 성을 내며 소란을 일으키고자 다른 사람을 시켜 소리쳐 말하기를, “하공진(河拱辰)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지채문(智蔡文) 열전
대표적인 것이 현종 1년(1010년) 요나라의 침공으로 피난가던 현종이 경험한 지방에서의 반발입니다. 300여년 후 홍건적 침공으로 인한 공민왕의 피난이나 조선시대 선조의 피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죠.
노명호는 현종의 피난 과정에서 지방병력의 징발이 어려웠던 원인이 물론 중앙군의 참패와 현종의 피난으로 권위가 하락된 데도 원인이 있지만 지방의 자위공동체들이 국가적 징발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이제현의 수렵도, 고려 전기 재지유력자들은 시를 짓는 선비보다는 말타고 활쏘면서 사냥도 즐기고 유사시 갑옷입고 나서는 농장주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공권력으로서의 국가의 권위와 그 필요성을 납득하는 것이 재지사회에 아직 정착되지 못했으며, 지역자위공동체들이 고려인으로서 고려를 자신의 국가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단순히 국가의 징발에 의한 반감에 의해서만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지역사회에서의 무력분쟁이나 지방통치에 대한 반발로도 나타나죠.
명종(明宗) 8년(1178년) 청주 사람들과, 청주 사람이면서 개경(開京)에 적(籍)을 두고 살다 다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돌아온 사람들을 청주인들이 거의 다 잡아 죽이자, 개경에 남아있던 나머지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원수를 갚고자, 왕의 교서(敎書)를 위조하여 결사대[死士]를 모아서 청주로 향하였다. 왕이 장군 한경뢰(韓慶賴) 등을 보내 쫓아가 멈추도록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들이 청주 사람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사망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고려사 경대승(慶大升) 열전
관성현(管城縣)의 현령(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침탈하고 황음무도하였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사랑하는 기생을 죽이고 또 그 기생의 어미와 형제까지 죽인 뒤에 홍언을 잡아가두었다.
고려사 명종(明宗) 12년(1182년) 2월 4일
어떤 남원군(南原郡) 사람이 군리(郡吏)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의 집에 가서 군리를 기둥에 묶고 그의 집에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고려사 형법지, 살상(殺傷) 1185년 8월
경주(慶州)의 이의민(李義旼)의 친족들이 이미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경주의 향리(鄕吏)들과 틈이 생겨서 싸우다가 서로 죽이는 일이 생겼는데 이의민의 친족들이 패하였다. 당시 안찰사(按察使)인 전원균(田元均)이 경주로 왔으나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방수(房守)·별장(別將)·통인(通引)이 모두 살해되었다. 전원균이 두려워서 바로 다른 고을로 도망갔다.
고려사 신종(神宗) 3년(1200년) 8월 10일
금주(金州)의 잡족인(雜族人)이 무리를 지어 난을 꾀하여 호족(豪族)들을 죽이자 호족들은 성 밖으로 도망쳐 피하였다. 그러자 이들이 무장하고 부사(副使)의 관청을 포위하였다.
고려사 신종(神宗) 3년(1200년) 8월 10일
경주(慶州)의 별초군(別抄軍)은 영주(永州)의 별초군과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달에 운문사(雲門寺)의 반적과 부인사(符仁寺)·동화사(桐華寺) 두 사찰의 승려를 끌어들여 영주를 공격하였다. 영주 사람 이극인(李克仁)과 견수(堅守) 등이 정예군을 이끌고 갑자기 성을 나와서 싸우자 경주 사람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고려사 고려사 신종(神宗) 5년(1202년) 10월
고려 역시 중세 일본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12세기 말까지 지역사회에서 사적 분쟁이 격렬하게 발생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지역자위공동체의 존재는 상황에 따라서 지역간 무력투쟁을 야기하게 만듭니다.
조선시대의 석전(石戰) 수준이 아니라 활과 무기를 들고 야전을 벌일 정도가 아니라면 지역자위공동체라고 할 수 없겠죠. 거란군이나 몽골군과 맞서 싸울 정도라면요.
하지만 고려의 지역 자위공동체는 몽골과의 항쟁까지 활약한 이후 급격하게 사라집니다.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 과정에서는 거의 활약하지 못하죠.
무신정권 이후 혼란스러운 중앙정치와 잦은 정변, 왜구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에 지역사회에서 사적 무력분쟁이나 후삼국시대에 나타나는 지역사회의 이탈이나 체제에 대한 도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서도 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후삼국 시대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죠.
설마 몽골군에게 대량학살당하다 보니 지역 자위공동체를 구성하는 유력자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고 지역자위공동체가 와해된 결과일까요?
물론 그런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기존에 지역자위공동체를 주도하던 재지유력자인 향리층이 몽골항쟁기를 거치면서 갑자기 떼거지로 사라지거나 재지사회가 파괴된건 아닙니다.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향도(香徒) 집단의 성격변화를 통해서 지역자위 공동체의 해체 과정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성 안의 부녀자들이 귀하고 천하고 늙고 어리고를 가리지 않고 향도(香徒)를 결성하여 재(齋)를 올리고 등불을 밝히며 무리지어 산에 있는 절에 가서 승려와 사통(私通)하는 자도 간혹 가다 있다. 일반 백성[齊民]의 경우에는 그 아들에게 죄를 묻고, 양반집인 경우에는 그 남편에게 죄를 묻는다.
고려사 형법지 2권 금령(禁令), 1339년 5월
12세기 이후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고려의 향도(香徒)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려 후기가 되면 향도는 재지사회의 종교결사의 성격에서 지역사회의 사회조직인 계(契)의 성격으로 점차 바뀌어나갑니다.
종교적 결사를 통해 지역 자위공동체를 구성하는 영향력을 재지유력자에게 제공하던 성격은 약화되고 향불을 피우고 연회를 열거나, 유희와 친목을 공유하는 모임의 성격으로 전환되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집니다.
향촌사회의 공동체로서 관혼상제나 농사에 상호부조하는 계(契)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죠.

---평안남도에서 전래되어온 향두계놀이, 향도(鄕徒)의 사투리인 향두에서 유래한 농사에서의 품앗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신라후기나 고려전기에 재지유력자들이 주도하던 참여자 1만명에 달하는 군현단위의 대규모 지역공동체인 향도는 부인네들의 친목, 상호부조의 성격을 가진 촌락단위의 소규모 향촌공동체로 축소됩니다. 지역자위공동체의 소멸은 향도가 재지유력자 주도에서 농민, 부녀자등 다양한 계층으로 축소, 분화해나간 결과물이죠.
재지유력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닌데도 향도의 성격이 변질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재지유력자에게 대규모 지역공동체로서의 향도의 필요성이 사라져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지역자위 공동체의 소멸은 지역 공동체가 전란으로 파괴된 결과가 아닙니다.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주도하던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서 공동체 자체의 성격이 변화된 결과죠.
이는 재지유력자들이 더 이상 지역자위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그들의 사고방식이 어느새 바뀌게 된거죠.
대체 무엇이 고려의 재지유력자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을까요?
참고자료
이종욱, "신라 왕경·왕경인 그리고 골품"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이재환, "신라 진골 연구"
이익주, "고려 전기 ‘상경(上京)’을 통해 본 개경의 위상"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연구"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3 -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한준수, "향도를 통해서 본 신라 중-하대 지방사회의 변동"
노명호,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최종석, "고려전기 築城의 특징과 治所城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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