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기동기갑부대 소속 대위 송하나입니다. 오늘부로 오버워치로 발령받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어려.
그게 앙겔라가 아이에게 가진 첫인상이었다.
아이는 씩씩하게 말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할 때마다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모습이 정말 앳되어 보였다. 마침내 앙겔라의 앞에 다다른 아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송하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의무관인 앙겔라 치글러예요. 편하게 박사라고 부르세요. 잘 부탁해요.”
“아……”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나지막한 감탄을 터뜨리며 앙겔라를 올려다보았다. 앙겔라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아이가 눈이 동그래져선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
“네, 네. 박사님, 잘 부탁드려요.”
“그래요.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거나 하면 의무실로 찾아와요. 전 항상 거기 있으니까요.”
“네! 꼭, 꼭 그럴게요.”
의무실에 찾아오지 않는 일이 더 좋을 텐데, 아이는 꼭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어린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버워치의 일원으로서 아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앙겔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
아이는 순조롭게 오버워치에 적응했다.
밝고 쾌활하며 친화력 높은 아이의 성격 덕이었다. 첫 만남 이후 이튿날부터 줄기차게 의무실을 들락날락거리며 하루 일과에 대해 쏟아내듯 이야기하는 아이의 말을 듣다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말상대가 필요한 거겠거니 여겼던 앙겔라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눈치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앙겔라를 볼 때면 아이는 항상 함박웃음을 지었고, 눈에는 앙겔라를 향한 애정이 듬뿍 들어있었으니까.
“제가 있던 육군에선 죄다 아저씨들밖에 없었어요. 계급 때문에 저한테 존댓말은 하는데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투가 다 드러나잖아요. 제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그걸 모르겠어요?”
아이가 전에 몸담고 있던 군대에 대해 이야기하며 씩씩댔다. 그러다가 앙겔라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그런데 오버워치에 왔더니 저한테 존중하는 말 해주시고, 친절하고, 상냥하신 박사님이 있잖아요. 오버워치에 와서 정말 좋아요.”
앙겔라의 존재만으로 행복하다는 듯 웃는 아이에게 앙겔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웃을 수밖에. 아이가 직접 마음을 드러내기 전까지 앙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이는 매일같이 앙겔라를 찾아와 종달새처럼 떠들다 돌아가곤 했다. 매일 의무실에 처박혀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만 하던 앙겔라에게 있어 아이의 존재는 일상의 즐거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의 온몸에서 앙겔라에 대한 호의가 뿜어져 나오더라도, 앙겔라는 아이를 도저히 연애 상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무려 18살이나 어린, 게다가 여자아이.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아이가 왜 저를 이토록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앙겔라가 아이에게 내놓을 답은 하나뿐이었다. 앙겔라는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답을 해야만 하는 날이 최대한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박사님, 저 박사님이 좋아요!”
여느 날처럼 의무실을 찾은 아이에게 커피를 타서 내밀자, 머그컵을 받아들며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장난하는 것처럼 마음을 드러낼 모양이었다. 앙겔라도 그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하나 양은 너무 어린걸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침울해하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아, 제가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았을걸. 그렇죠, 박사님?”
“…그래요,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요.”
사실은 '조금' 가지고는 택도 없을 나이차였다. 하지만 앙겔라는 아이가 상처받을까봐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아이는 씩 웃고는 기지 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마음을 접었으면 좋겠는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높은 목소리를 들으며 앙겔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앙겔라를 향한 아이의 열렬한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앙겔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
“박사님, 좋아해요!”
아이는 매일같이 노래하듯 그런 말을 했다. 가벼운 말처럼 들렸지만 매번 하는 그 말에는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에 대한 앙겔라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미안해요, 하나 양은 너무 어려요. 그러면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 웃었지만,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상처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다가오는 아이의 한결같은 태도는 호감이 갈 만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는 앙겔라에 비해 너무나도 어렸다.
동양인 특유의 어리게 보이는 외모에, 만 19세라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가 저를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앙겔라는 꼭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저 좋은 아이구나 하는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은 가질 수가 없었다.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의 고백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꺾일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아이의 마음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아이가 앙겔라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가끔은 앙겔라를 쳐다보기만 해도 아이의 얼굴은 물론, 코끝까지 붉어지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순수한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플 정도였지만, 그래도 앙겔라의 답은 흔들리지 않았다. 연인으로 삼기엔 아이는 너무 어렸다.
아이가 오버워치에 온 지 10개월이 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웬만해선 다치는 일이 없는 아이가 크게 다쳐서 의무실에 실려 왔다. 같이 임무를 나갔던 앙겔라는 의무실 침대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아이에게 나노주사를 주입하고 링거를 맞혔다. 신체 회복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카두세우스의 지팡이를 사용하고도 아이의 상처는 다 낫지 못한 상태였다.
의식을 잃은 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앙겔라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메카를 자폭시킨 후 아이는 안전하게 엄호를 받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옴닉이 부상병을 치료하던 앙겔라의 주위에 나타났고, 그것을 발견한 아이가 몸을 던져 미처 피하지 못한 앙겔라 대신 다친 것이었다.
저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몸까지 내던질 정도로 아이의 마음이 깊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앙겔라는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또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한 앙겔라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며 한결같은 태도로 다가오는 아이에 대해 좋은 감정이 싹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연애 감정으로 자라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아이는 너무나도 어렸다.
한참 동안 아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윽고 아이가 정신을 차렸다. 약에 취해 몽롱한 눈빛으로 앙겔라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사님, 안 다쳤어요?”
정신이 들고 하는 첫마디가 앙겔라의 안부라니. 앙겔라는 입술을 사려물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하나 양 덕분에요.”
“아, 다행이다…….”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와 단 둘이 있는 의무실에 조용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아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가는 것을 보니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앙겔라가 아이를 살피는 동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가 말했다.
“박사님, 정말 저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 양.”
“지금 이런 걸 묻는 건 비겁한 일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박사님이 저를 다 낫게 해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부상에 대한 건 생각하지 말고 한번만 더 생각해주세요. 저는 정말 안 되는 거예요?”
앙겔라를 향하는 아이의 눈빛이 사뭇 간절하기까지 했다. 절절한 눈빛을 받자 마음 한켠이 쓰라렸다. 앙겔라는 뭐라고 대답해야 아이가 가장 덜 상처받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아이를 거절할 이유는 너무 어리다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양이 저를 좋게 생각해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하나 양은 너무 어려요. …저는 하나 양을 좋은 친구 이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그게 박사님의 대답이에요?”
“……네.”
저 때문에 입은 부상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가 막 정신을 차린 아이에게 하는 말 치고는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면 이렇게 끊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감정이 한 때의 것이라는 걸 자각하는 날이 오겠지. 앙겔라는 그렇게 믿는 수밖엔 없었다.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얕은 숨만 쉬어댔다. 초침이 다섯 바퀴는 족히 돌았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이가 감정을 다스린, 그러나 물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쉽네. 제가 나이가 10살만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끝까지 앙겔라를 배려해서 장난스레 말을 거는 아이에게, 앙겔라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카두세우스의 지팡이와 나노머신주사 덕에 아이의 부상은 이주일 만에 완치되었다. 그리고 완치 판정을 받은 다음 날, 아이는 10개월 만에 보는 오버워치 정복차림으로 앙겔라를 찾아왔다.
“박사님, 저 아시아 지부로 발령받았어요.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이가 동양식으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앙겔라는 입술만 달싹였다. 2주 전의 고백 이후로, 아이는 10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입에 담곤 했던 좋아한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앙겔라는 아이가 마음 정리를 하는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아이와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앙겔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이에게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아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고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니까 저보다 더 예쁘고 멋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허리를 곧게 편 아이의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앙겔라는 눈을 꾹 감았다 천천히 뜨며 가슴 속에서 맴도는 것과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하나 양도 잘 지내요. 항상 몸조심 하고, 다치지 말고요.”
“…이 말을 듣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네요. 네, 박사님 말씀 잘 들을게요. 전 항상 박사님 말은 잘 들었잖아요.”
태연스레 하는 말과는 다르게 아이의 눈동자는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앙겔라는 10개월 동안 제게 진심을 다 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것뿐이라는 사실에 속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아이도 그것을 헤아린 듯, 어설프게 입가에 웃음을 그리고서 마지막 말을 건넸다.
“'박사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언제나 박사님이 무사하길 기도할게요.”
“…고마워요. 저도 하나 양이 항상 건강하게 잘 지내길 기도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이는 자못 씩씩하게 말하고서 등을 돌렸다. 오버워치에 왔을 때와 별 차이 없는 작은 체격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앙겔라는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았다.
그저 아이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바랐다.
***
“본부로 발령받은 지휘부 소속 소령 송하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앙겔라는 제 앞으로 내며진 손을 바라보며 잠깐 감상에 잠겼다. 7년 전에는 저보다 작았던 손이 지금은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손목에 살짝 도두라진 힘줄이 묘하게 섹시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다, 제 생각에 제가 놀란 앙겔라는 생각을 털어버리며 손을 맞잡았다. 아이의 손아귀는 부드러웠던 7년 전과는 달리 몹시 단단했다.
“…오랜만이네요, 하나 양.”
“네, 7년만이죠.”
앙겔라에게 있어 아이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언제나 제게 친절하던, 밝고 건강한 아이. 그러나 아이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감상에 젖어 반가이 미소지은 앙겔라에 비해, 아이는 담담히 대답했다.
앙겔라는 새삼 아이를 살펴보았다. 열아홉 살 때의 발랄한 이미지는 더 이상 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볼살이 빠져 턱선이 갸름해졌고, 눈매는 깊어졌으며, 무엇보다도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차분하고 어딘가 사색에 잠겨있는 듯한 깊은 느낌이 묻어나왔다.
시선의 높이가 엇비슷해진 아이가 앙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보일 듯 말듯 아주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림과도 같은 미소에 앙겔라는 부주의하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분명 저보다 한참은 어린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7년 만에 재회한 아이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앙겔라는 제 심장이 다소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외모와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고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 대한 조소도 같이 흘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해도, 아이는 앙겔라보다 무려 18살이나 어린 아이였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가 높낮이 변화가 거의 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았다.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이는 지난 나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이에 대해서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있는 앙겔라는 다소 섭섭했지만, 아이의 태도에 맞춰 담담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주한 아이의 모습에서는 열아홉 살의 어린 모습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7년 전에 함께 한 동료잖아. 다른 사람들 대하듯 그렇게 대하면 돼.
앙겔라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등을 돌린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7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옴닉과의 전쟁은 정리되는 추세에 접어들었고, 특히 아시아에서는 대부분의 사태가 진압되었다. 그 선봉에 서서 대대적인 활약을 벌인 아이는 빠르게 승진했고, 그 결과 오버워치 지휘부 소속으로 본부에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오버워치에서 오랜 기간 중역으로 일한 앙겔라와 지휘부 소속인 아이가 자주 마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를 대하듯 아이를 대하자는 생각과는 달리, 앙겔라는 아이를 볼 때마다 자꾸 과거의 모습을 겹쳐보게 됐다.
그러나 항상 밝게 웃으며 듣기 좋은 높은 목소리로 종알대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눈앞에 있는 아이는 감정이 절제된 눈동자에 보일락 말락 한 엷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항상 중구난방으로 신변잡기에 대해 떠들어대던 과거와는 다르게, 7년 만에 재회한 아이는 회의 때마다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조리에 맞는 제 의견을 내놓았다. 너무나도 낯선 모습에 앙겔라는 매번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앙겔라는 보는 눈빛도 예전과는 크나큰 차이였다. 무덤덤한, 속을 읽을 수 없는 단단한 눈동자는 더 이상 앙겔라를 보며 애정으로 일렁이지 않았다. 앙겔라는 아이를 보며 자꾸만 과거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그렇게 행동하게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작전 회의 때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밖의 장소에선 도통 아이와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앙겔라를 오버워치의 주요인사, 딱 그만큼으로 대했다. 말을 건네지 않으면 입을 여는 일이 없었고, 작전 회의 중에는 온건한 앙겔라의 의견을 날카롭게 반박하며 효율적이지만 다소 공격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앙겔라는 정말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7년 전엔 아이는 앙겔라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었다. 앙겔라에겐 그런 아이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어리기도 했거니와 그만큼 얼굴에 생각하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고, 눈동자는 설렘과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아이에게선 그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앙겔라는 등 뒤의 기둥에 기대어 선 채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말 그대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으로 홀로그램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각 부대를 맡은 요원들이 다 자리를 비우고 현재 남아있는 사람은 앙겔라와 아이, 둘 뿐이었다.
앙겔라는 지도를 눈으로 훑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제가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은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아이에게 시선이 갔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살랑대는 아이에게선 성숙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서 앙겔라는 흠칫 놀랐다.
“박사님은…….”
재회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앙겔라에게 먼저 말을 건 적 없는 아이가 입을 열었단 사실에 채 놀라기도 전에,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앙겔라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아이의 눈동자는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아련해보였다. 평소의 날카로운 눈매가 허물어지고 부드럽게 휘어있었다. 나지막한 아이의 목소리에 앙겔라의 가슴이 다소 빠르게 뛰는데, 아이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박사님을 정말로 좋아했는데……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박사님을 곤란하게 했었죠. 죄송해요.”
마지막 한 마디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이가 죄송해야 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 시절의 아이는 앙겔라에게 한없이 착하게 굴었고, 앙겔라는 그런 아이를 어린 친구로서 많이 좋아했었다. 그런 상대에게서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마음 한 구석에서 섭섭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앙겔라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무마시킬 겸 부러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좋아했으면, 그럼 지금은 어떤 데요?”
아이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에 앙겔라는 목이 말라오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스물여섯의 아이에게는 웃음 짓는 것만으로 상대를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듣고 싶으세요?”
아이가 몸을 돌려 앙겔라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눈동자에 담긴 앙겔라의 모습이 뚜렷해져갔다. 앙겔라는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호한 감정이 서린 아이의 얼굴에선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마침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아이가 앙겔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박사님을 잊기 전에는 안 돌아오려고 했어요.”
나직한 아이의 목소리에 등골에 쭉 소름이 달렸다. 앙겔라가 흠칫하는 사이 아이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7년만에 본부로 발령이 났네요.”
앙겔라는 아이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방금 한 발언이 앙겔라를 아직 좋아한다는 건지,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쏭달쏭한 아이의 속뜻을 짚어내려 했지만, 앙겔라는 제대로 사고하기가 힘들었다. 심장은 점점 크게 뛰어오고, 겹치듯 다가선 아이에게서 나는 향기에 아찔한 느낌마저 들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앙겔라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입술과 볼 사이 그 어딘가에 따뜻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살짝 닿았던 것 같았다. 반짝 눈을 뜨자, 아이는 눈을 감기 전과 똑같은 거리에서 앙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앙겔라가 방금 전에 느낀 감촉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긴가민가하는데 아이는 그저 엷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빠른 속도로 맥이 박동하는 것을 느끼며 앙겔라는 입술만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겨우 볼 뽀뽀의 유무에 이렇게 흔들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앙겔라는 천천히 호흡하며 아이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아이는 그런 앙겔라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에 앙겔라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그 다음날부터 앙겔라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아이가 매일 의무실에 찾아와서 커피를 한 잔씩 하고 가게 된 것이었다.
아이는 매일 오후 3시에 찾아와서 30분간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아이 때문에 앙겔라는 점차 그 시간을 비워두게 되었다. 3시가 되면 아이가 의무실에 들어서는 나날이 반복되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아이가 찾아오는 것만큼은 예전과 같았지만, 대화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7년 전의 아이는 앙겔라에게 제 일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 항상 안달이 나 있었다. 식당 밥이 맛이 없다는 이야기부터 레나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졌다는 이야기까지,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뭐든지 일단 말하고 보았다. 앙겔라는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별 뜻 없는 잡담을 끝까지 들어주곤 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아이는 오버워치 내 중요 사안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다거나, 지휘부 내에서의 정보를 공유한다거나 하는 대화만 할 뿐이었다.
공적인 대화를 사적인 분위기에서 하니, 앙겔라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 내용만 보면 본부에서 회의할 때 해도 될 것 같은데, 아이의 눈빛이나 태도는 전에 비해 담을 조금 더 허물어낸 듯 했다. 눈빛이나 어조나 행동에서 가끔씩은 아련함이 묻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퍽 다정한 것 같기도 했다. 앙겔라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헷갈리기 시작하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거기에 이야기 할 때의 거리도 너무 가까웠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거리에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앙겔라는 가끔씩 너무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아이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보이는 아련한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릴 때면 아이가 아직도 앙겔라를 좋아하는 건지 의심스럽다가도, 말끔한 태도로 오버워치 이야기를 꺼낼 때면 제 착각이겠거니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조금씩 다가오는 듯한 태도에 자꾸 변죽만 울려대니 더 헷갈리기만 했다.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제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올바른 시선으로 앙겔라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보면 마음이 흐트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돌격부대 편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아스라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서 그동안 일절 꺼내지 않던 옛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면 박사님이 철야로 밤을 새다가 피곤해서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잠드셨을 때, 조용히 그 얼굴을 들여다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적이 있었냐며 가볍게 받아치려 했지만, 앙겔라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 시절의 아이는 앙겔라를 너무나도 좋아했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아이가 눈앞의 아이와 설핏 겹쳐지는 것 같아서 앙겔라는 조금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겉모습은 스물여섯 살의 아이인데, 왠지 그 속은 열아홉 살의 아이 같게 느껴졌다. 그 묘한 간극에 자꾸만 맥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 때랑 지금이랑 박사님은 변한 게 없으세요.”
“그…런가요.”
“네, 그래요.”
묘한 어조로 아이가 그렇게 확답했다. 앙겔라가 변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떨까. 문득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물어봐서 어쩔 거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앙겔라를 좋아한다고 하면 받아들이기라도 할 셈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이와의 나이차는 여전한데, 왜 자꾸 이렇게 흔들리는 기분이 드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무실 분위기도 마찬가지고요. 편안하네요.”
“…의무실은 웬만해선 바뀔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하나 양이 편하게 느낀다니 다행이에요.”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입가를 끌어올려 살짝 미소했다. 앙겔라는 재회한 이후 굳어 있던 아이의 분위기가 점점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오후의 일이었다.
*
앙겔라는 진료차트를 훑어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3시 12분. 혹시 시계가 잘못됐나 싶어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지만 시간은 똑같았다.
책상 한 켠에 준비해 둔 커피 두 잔을 바라보며 앙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릴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아이는 시간을 어길 성격이 아닌데, 이상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됐지만 의무실을 비워둘 수가 없었다.
앙겔라는 휴대폰을 꺼내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문자를 보내놓고 초조하게 의무실 안을 서성였다. 결국 3시 30분이 넘도록 아이는 오지 않았다. 퇴근 이후에 아이를 찾으러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 되었다. 앙겔라는 가운을 벗어두고 코트를 걸친 후 의무실을 나섰다. 아이가 의무실에 오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 자연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기지 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아이에 대해 물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술집에서 아이가 레나와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앙겔라는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는데다가, 제 또래의 사람과 술을 마시느라 의무실에 오지 않았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 상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일 오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저보다 18살이나 많은 사람과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노는 게 더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앙겔라에게 답장도 주지 않는 것은 솔직히 서운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곱씹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심정인 건지. 앙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씻고 나서 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시선은 자꾸 휴대폰으로 향했다. 하지만 자정이 다 될 때까지도,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앙겔라는 서운한 마음을 다독이며 애써 잠에 들었다.
이튿날, 아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오후 3시 정각에 의무실에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평소와 똑같이 인사하며 엷게 웃는 아이는 그 직후 얼마 후에 있을 옴닉 소탕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심 어제 일에 대해서 사과라도 할 줄 알았던 앙겔라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앙겔라가 먼저 나서서 어제는 왜 오지 않았냐고 따지기도 뭣했다. 약간 불편한 속을 다스리며 아이와 대화를 하는데, 아이의 태도가 평소와는 약간 달랐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주 웃어주고, 말투도 그제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았다. 앙겔라는 아이가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구나, 싶어 앙겔라는 그저 실소를 흘렸다.
아이는 그 뒤로 한동안 꼬박꼬박 3시가 되면 의무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앙겔라는 여느 때처럼 커피 두 잔을 준비했다가 아이와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항상 아프고 지친 사람들만 대하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이가 찾아오니 솔직히 기꺼웠다. 거기에 아이의 태도는 재회 당시보다 훨씬 풀어져 있었으며, 간간이 나누는 열아홉 살 때의 이야기는 당시 아이 덕에 즐겁게 지냈던 좋은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가끔씩 아이의 묘한 태도에 심장이 덜컥할 때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3시가 한참 넘었는데도 아이가 또 나타나지 않았다. 앙겔라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과 노느라 의무실에 못 오겠거니 생각하려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걱정이 됐다. 불안으로 얼룩지려는 마음을 다독이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곧바로 술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거기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안도가 되는 한편, 앙겔라는 곧 아이가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가까이 앉은 레나에게 즐겁게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이 꼭 열아홉 살의 아이 같았다. 재회한 이후 제게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밝은 얼굴과 입에 걸린 커다란 웃음을 보는 순간 앙겔라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쩐지 불쾌한 감정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앙겔라는 등을 돌려 숙소로 향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열아홉 살의 아이는 당시에도 레나와 친하게 지냈었다. 아이가 하는 신변잡기 중에 레나에 관한 내용이 꼭 들어있었던 것을 떠올리자,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술집에서 본 아이와 젊은 레나를 보니 어쩐지 가슴이 좀 쓰린 것도 같았다. 뭔가 짜증이 나는 것 같은데, 이 부정적인 감정을 어디다 풀 데도 없었다. 애초에 아이와 앙겔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며, 3시에 보자고 따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이어진 생각은, 늦은 밤이 되어 잠을 자려 침대 위에 몸을 뉘였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아이가 신이 나서 레나에게 밝게 웃으며 말을 걸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맞은편에 앉아 같이 웃던 레나의 젊음이 부러운 것도 같고, 앙겔라에게는 그렇게 웃어주지 않는 아이가 조금 야속한 것도 같았다. 그러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속만 상하고 말았다.
결국 그 날은 늦은 새벽이 될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다음날, 당연하게도 앙겔라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한데다 어제의 광경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기분이 정말 별로였다. 오늘은 아이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3시가 되자마자 문이 열리며 아이가 의무실로 들어섰다.
“박사님, 저 왔어요.”
아이는 앙겔라와는 반대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앙겔라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읽고 있던 논문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신경 쓰지 않겠다는 제스쳐였으나 아이는 굴하지 않고 내방용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시야 안에 들어오는 노란 상자에 앙겔라는 결국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죠?”
“커피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사온 치즈 케이크예요. 맛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
“피로할 때는 단 게 좋잖아요. 박사님 생각해서 사 온 거니까 한번 드셔보세요.”
말도 안 했는데 앙겔라의 상태를 바로 눈치 챈 아이의 눈썰미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 피로의 원흉이 저러니까 조금 얄밉기도 했다. 앙겔라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멈칫 했다. 아이는 마치 열아홉 살의 그 때처럼 순한 눈에 애정을 가득 담아 앙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7년 만에 보는 눈빛에 앙겔라는 명치끝이 살살 간지럽혀지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어제부터 가슴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앉은 안 좋은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의무실에는 포크가 없어요, 하나 양.”
“그럴 줄 알고 제가 챙겨왔어요. 여기요.”
아이가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동봉된 앙증맞은 포크를 내밀었다. 포크 끝에 달린 토끼 모양의 캐릭터가 꼭 아이 같아서, 앙겔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이가 햇살처럼 따라 웃었다.
케이크는 아이의 말대로 쌉싸름한 커피와 잘 어울렸다. 앙겔라가 케이크를 조금 잘라먹는 모습을, 아이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단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달달한 시선에 속이 자꾸 간질간질 거려서 앙겔라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조금 힘이 들 정도였다. 앙겔라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한결 편한 마음으로 아이와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그러나 그런 편안한 나날은 얼마 되지 않아 또 어그러졌다. 아이는 며칠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앙겔라는 그 때마다 아이가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겠거니 생각했다. 실제로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로 확인한 바가 그랬다. 덤덤히 생각하려 해도 조금씩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의무실에 들르지 않은 그 다음날이면, 아이는 앙겔라에게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굴곤 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박사님 손은 여전히 예쁘네요.”
아이가 비어있는 앙겔라의 왼손을 잡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은 거리에서 손을 잡자오자 앙겔라는 절로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그리운 눈빛으로 앙겔라의 손을 감싸더니 싱긋 웃으며 왼손을 잡아 손가락 하나하나 잡아 섬세히 폈다. 그리고는 그 손을 제 오른손과 마주하게 했다.
“보세요, 박사님. 그 동안 저 손도 커졌어요. 박사님보다 좀 더 큰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도 같네요.”
“그렇죠? 손이 커지니 사격 연습할 때 훨씬 편해지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통통 튀는 어릴 적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조근조근 말하는 목소리는 묘하게 계속 귀기울여 듣고 싶어지는 마음을 들게 했다. 가끔씩은 귓가에 확 꽂혀드는 목소리에 등골에 찌르르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평범치 않은 반응이라 여기면서도 앙겔라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손가락 마디도 여전히 얇으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가 손을 살짝 틀어서 앙겔라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어 넣고 아주 천천히 파고들었다. 목덜미의 솜털마저 바짝 일어설 것 같은 느낌에 앙겔라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설적이기까지 한 그 움직임에 비해, 앙겔라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는 순하기 그지없었다.
앙겔라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며 고마워요, 하고 대답했다. 아이의 행동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앙겔라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면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또 레나에게 그러는 것처럼 밝게 구는 건 아니니까 대체 이건 뭔가 싶었다. 신경 쓰지 말자고 아무리 스스로를 타일러도, 절로 아이를 향하는 눈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이는 양 입가를 똑같이 들어 올리며 예쁘게 웃어주었다. 다정한 그 웃음에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렸다. 중독되는 것만 같았다.
3시 26분.
앙겔라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머그컵을 치웠다. 오늘도 아이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앙겔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길들여진 여우마냥 아이가 오기 1시간 전부터 두근거리며 아이의 방문을 기다리게 된 스스로가 조금 비참한 것 같았다. 동시에 아이의 티 없이 밝은 웃음을 마주하고 있을 레나가 부럽기도 했다.
만약 7년 전 아이를 받아들여주었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웃음을 보고 있을 사람은 앙겔라가 되었을 터였다.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앙겔라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허탈하기만 한 일이었다. 매일 3시에 찾아와 30분씩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 아무 사이도 아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만 싶어 하는 제 자신이 싫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정말이지 인정하기 싫지만 레나에 대한 질투마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고개를 휘휘 젓고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 의무실 자동문이 푸슉,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열리며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본 앙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7년 만에 보는 전투복을 입은 아이가 얼굴에 작은 생채기를 달고서 문가에 서 있었다. 허벅지 쪽에 전투복이 살짝 찢어져 있고, 조그만 상처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 양, 이게 무슨…….”
“임무 나갔다가 총알에 스쳤어요. 박사님, 치료해 주실래요?”
“아, 그래야죠. 침대 위에 잠깐 앉아 있어요.”
앙겔라는 부랴부랴 소독약을 꺼냈다. 지휘부로 갔으니 아이가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별 거 아닌 상처인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도 심장이 쿵쿵 뛰면서 갖은 걱정이 몰려들었다. 아프지는 않을지, 더 다친 곳은 없는지 물으려다 앙겔라는 곧 난감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의 전투복은 일체형이었기에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서는 전투복을 벗어야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앙겔라는 그런 변화를 외면하려 애쓰면서 입을 열었다.
“하나 양, 소독하기 위해서는 전투복을 벗어야 해요. 커튼치고 벗을래요?”
그러자 아이는 대답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전투복을 벗기 시작했다. 앙겔라는 화급히 고개를 돌리고서 의무실 문을 잠갔다. 아이가 벗고 있는 동안 누군가 들어와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돌아서는 앙겔라의 몸이 멈칫했다.
아이는 앙겔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느린 속도로 전투복을 벗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쇄골이 드러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둔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땐 앙겔라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앙겔라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의료행위였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자고 몇 번을 중얼거려도, 그러나 심장은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쿵쿵거렸다.
눈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하얀 살결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결국 앙겔라는 눈을 감아버렸다. 보지 않아야 지금 느끼는 이상한 감각들이 멈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 아이가 전투복을 벗는 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크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앙겔라는 빨리 소독하고 지팡이로 치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이 심란한 마음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 앙겔라의 코에 훅하니 아찔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박사님. 저 보세요.”
낮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왔다. 순간 등골이 짜르르해서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아이가 하얀 피부와 뚜렷하게 대조되는 검은 속옷을 입고서 앙겔라와 거의 붙다시피 한 거리에서 서 있었다. 아찔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했다. 7년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성숙한 스물여섯 살 아이의 몸이 앙겔라에게 살며시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앙겔라가 당황하는 사이, 아이가 길게 쭉 뻗은 팔을 들어 올려 앙겔라의 가슴께에 있는 가운 깃을 살짝 잡았다. 시선이 절로 아이의 손을 따라갔다. 그 끝에 있는 아이의 가슴을 보고 귓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려댔다.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이었으나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가 가운 깃을 잡고 살살 뒤로 벗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목을 감싸듯 올라온 아이의 두 팔이 목덜미에 닿을 듯 말듯 하며 야릇한 감각을 안겨다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운을 벗기는 아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가슴이 맞닿으며 부드러운 감각에 전율이 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숨결이 맞닿았고, 아이의 두 팔은 어느새 앙겔라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마주하는 두 눈동자 속에서 앙겔라의 달아오른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툭, 가운 자락이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아이의 팔이 아주 작은 힘으로 앙겔라의 목을 끌어당겼다.
앙겔라는 의무실 침대 커튼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어, 급한 손길로 서둘러 커튼을 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아이의 품을 파고들었다. 목을 감싸안는 아이의 나지막한 웃음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절로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앙겔라는 마침내 이성을 내려놓기로 했다.
끝.
이후 엉망진창(21금)으로 뿅뿅 했습니다.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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