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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창작욕이 넘치는 시험기간에 써보는 판타지백합 -중-

2대곰점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12.14 23:16:56
조회 519 추천 14 댓글 1
														

***








  앤은 정신이 들었다. '잠깐,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있었던 그 농가 안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 손에 힘을 쥐고 일어나려는데,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이 드나?"


  "윽......내가 왜....무슨 짓을 한 거야?"




  엘리자베스는 앤 밑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조금은 헬쓱해진 얼굴로, 황녀는 앤을 쓰다듬었다.




  "뭔, 내가 왜 이러지?"


  "백금기사단의 단장으로써 봄과 꽃잎의 여신 아프릴리스의 축복을 받은 몸이다. 마에 홀린 몸으로 제대로 날 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게, 깔려 있는 주제에 잘난척은..."


  "어딜."




  앤이 다시 한 번 일어나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 다리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는다. 힘을 내었던 것도 잠시, 금세 허리에 힘이 빠지더니 축 늘어지고 만다.




  "지금 너나 나나 거의 탈진한 상태다. 불 속에 놓인 버터처럼 말야.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젠장, 아까 유혹한 것도 계획한 거였냐?"


  "유혹이라. 뭐, 임기응변이란 거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는 쓰게 웃는다. 밑에 깔려 있는 자세가 충분히 불편할 텐데, 옆으로 빠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앤에게 안겨 있는다. 오히려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준다. 앤은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힘도 기분도 나지 않는다.




  "제인이랑 비비안은 어디에 있나?"


  "누가 단장 아니랄까봐 진짜...저쪽 맞은편 창고에, 무슨 풀을 가루내서 재워 놨어."


  "그럼 됐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두 여인이 알몸으로 포개어졌지만, 부끄러워하기엔 서로 너무 지친 상태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먼저 입을 연다.




  "이왕 둘 다 알몸으로 있으니, 이 참에 서로 진솔한 말이나 나눠 보자. 서로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도 하고."


  "닥쳐! 니년이랑 무슨 말을...읍"




  앨리자베스는 앤의 입을 막고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앤은 그런 그녀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내가 미웠니?"


  "......조금."


  "사춘기 도둑고양이 같으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뭍고 대답하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앨리자베스는 힘없이 웃다 이내 콜록거린다. 앤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에, 얼굴을 구겨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본다.




  "왜?"


  "몰라서 물어? 시발, 데리고 왔으면 제대로 보살펴 주던가, 다짜고짜 기사단에 처넣고는 빡센 일이나 시키고, 내가 지랄맞게 구를 때마다 그 아가씨들이 비웃는 느낌을 알아? 모르겠지! 공주님이니까!"




  험한 말을 다다다 퍼붓고서는, 또 앨리자베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공주는 내심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데리고 온 적은 없었다만?"


  "이상한 쪼가리 하나 내어주곤 니가 오라고 했잖아. 그게 데리고 온 거지 뭐야!"


  "길거리에서 재투성이로 사람들 소매치기하고 짐 털고 할 바엔 나한테 오는 게 나았을 텐데, 길거리 생활이 그렇게 좋았나?"


  "그래!" 


  "정말로?" 


  "......아니."


  "또, 제인이랑 비비안이 비웃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내가 일부러 너와 같은 방 쓰게 한 애들인데."


  "걔내는 나한테 잘 해주지만, 안에 분위기란 게 있잖아! 다른 아가씨들은 완전 글러먹은 년 취급하는데."




  말을 들어보니, 꽤나 서로간에 오해가 쌓인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이걸 풀어야 하나...'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먼저 말해둘 게 있는데, 너가 정말 날 미워했다면, 아까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15년 동안 기사수행을 하면서, 온갖 끔찍한 것들을 봤었다. 마에 홀린 사람이야 지겹도록 봤었지. 정말 날 미워했었으면 지금쯤 내 내장을 파먹고 있었을 거다."


  "우엑, 징그러."




  끔찍한 얘기를 하자, 앤은 도리질을 친다. 잠깐 분위기를 환기시킨 후에, 엘리자베스는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말을 꺼낸다.




  "앤."


  "응."


  "나는 말야...너가 좋았어."


  "......왜?"




  뜻밖의 말에 앤은 눈을 껌뻑거린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황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중앙 성문 앞 포도밭에서였지. 왠 시커먼 꼬맹이가 겁도 없이 내 짐을 뒤적거리길래, 조금 지켜보다가 깜짝 놀래켜 봤어. 물론 나도 꼬맹이었지만. 근데 자기가 기사의 짐을 털다가 걸린다면, 그것도 완전 무장한 기사한테 걸린다면 보통은 도망가지 않니? 근데 그 꼬마는 겁도 없이 꼬챙이를 들고 나한테 덤비더라고. 한주먹 거리도 안되는 게 말야. 그래도 그 배짱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내 증표를 하나 건네 줬어. 혹시 훗날에 생각이 있으면 그 증표에 적힌 사람을 찾아오라고. 그건 내가 나중에 기사단을 세우면, 그때 상징으로 쓰기 위해 만든 거였어. 지금 우리가 쓰는 거랑은 조금 다르게 됐지만."




  "내가 어설픈 솜씨로 만든 거지만, 그거 진짜 백금이었단 말야. 팔면 땅 몇 마지기는 살 수 있었지. 네가 그걸 간직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용기에 대한 상으로 준 거였으니까. 그리고 8년 뒤에, 나도 수행을 마치고 기사단을 창설했고, 그 일에 대해선 거의 잊고 있었지. 그런데 아마 애니카였나? 왠 거지가 이상한 쇳조각을 들고 와서는 단장님을 뵙겠다고 얘기한다고 보고하는데, 큭큭......그래도 많이 반가웠어."


 


  "왜 반가웠는데?"


  "당돌한 꼬맹이가 거친 애가 되서 돌아왔으니까. 그것도 있지만....." 엘리자베스는 잠깐 말을 가다듬는다.




  "잠깐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우리 단원들, 네 표현으로는 '아가씨들'. 어떻게 생각하니?"


  "뭐, 재수 없는 애들 정도? 완전 재수없는 높으신 분 딸들. 정말로 나쁜 애는 없지만......그리고 좀, 말랑한 애들."


  "사실 그 말이 맞지. 우리 단원들. 네가 보기엔 당연히 높은 귀족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높은 애들 아니야."


  "공주님 앞에서 높은 사람이 어딨어?"




  "너 아까부터 그러는데, 공주님이 아니고 황녀님이다, 바보야. 어쨌든 네 생각마냥 부티나는 애들은 아니야. 뭐 몇몇 예외도 있긴 하지만......세상에 어떤 부모가, 그것도 귀족 부모가 자기 자식을 기사단에 보내겠니? 이유는 뻔하지. 가문 내에서 지위 상속에 완전히 벗어나게 된 애들.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애들. 아니면 황족인 나한테 어떻게든 연줄을 이어보려고 억지로 보내진 애들.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 얘기를 듣고 찾아온 애들. 표면적으로는 다들 귀족가의 영애들이지." 말을 하다가 지쳤는지, 엘리제베스는 기침을 한다. 그러고는 생각을 정리하려 허공을 바라보다, 이윽고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걔내 사정을 어떻게 잘 아냐면, 나도 비슷한 처지였거든. 황족이냐 귀족이냐의 차이 정도지. 열한 번째 황녀면 황위 계승은 다른 사람 얘기나 마찬가지야. 곱게 자라다가 외교를 위한 공물 정도로 쓰여지겠지. 난 그게 싫었어." 말을 하는 엘리자베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앤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 다섯 살 때였지. 너도 읽어 봤니? 그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돌격한 바보같은 기사의 이야기. 애들 동화지만, 난 그 책을 읽고 기사를 꿈꿨어. 그리고 여덟 살때 폐하께 거의 불경스러울 정도로 졸라댄 끝에 기사 수행을 시작했고. 폐하께서야 사랑하는 막내가 그렇게 졸라대니 별 수 없었겠지. 오빠나 언니들은 미친년 정도로만 생각했을 거고. 다들 내가 정말 기사가 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엘리자베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앤은 뜻밖에 황녀를 동정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냥 초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공주님은 공주님대로 고생하셨구나.'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고, 전 대륙을 방랑하면서 온갖 괴물들과 싸웠어. 유명한 그랜드마스터들을 찾아가서 대련하고, 가르침을 받고......그렇게 수련하고 이쯤 돼었다 싶었을 때 황도로 돌아왔지. 내가 너무 싸돌아 다녔는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해 졌더라고. 무력도 재력도 유명세도 있으니 바로 기사단을 창설했지. 그리고 입단을 받았는데, 죄다 어디 귀족가의 영애들이더라. 날 백성을 굽어살피는 백마탄 기사님처럼 생각한 건지, 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쨌든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정작 단원 중에 진짜로 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애들은 없더라. 죄다 나만 보고 들어온 거지. 물론 단원들이 자발적으로 수련하고 섬겨 주는 모습, 임무를 성공하고 조금씩 강해지는 걸 볼 때마다 예쁘고 기특하지만, 정작 독해지지를 못해. 대련시간에 딱 보이지 않니? 기사의 가치는 무엇보다 승리인데, 날 이기려 시도조차 하는 사람이 없으니."




  앤은 고개를 기울이고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긴 말은 질색하는 그녀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거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데, 너가 갑자기 찾아왔지. 이건 기회다 싶었어. 단원들이 귀족 영애의 티를 벗으려면 너처럼 완전히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것 같았지. 결과는 내 생각대로 됐어. 다른 단원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조금씩 바뀌어 나갔지. 그리고 너가 발전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웠어. 대련할 때마다 이새끼 저새끼 하면서 목검을 휘두르는 게 퍽 귀엽단 말야."




  앤은 얼굴을 붉힌다. 말투 좀 고치라고 비비안한테 계속 핀잔을 들었지만, 길거리에서 붙어버린 말버릇이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그래서, 아가씨들 자극하려고 날 그렇게 굴려댔어?"


  "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이왕이면 빨리 내 곁으로 데려오고 싶었어."


  "그럼 그냥 공주님 힘으로 임명하면 되잖아." 앤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너 정말...세상엔 절차와 과정이란게 있는 거 몰라? 또 우리 단원들, 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게 말이 되니? 아가씨들 질투심 심한거야 너가 더 잘 알거고. 가뜩이나 지금도 미움 받는 애가 말이야. 잡음 없이 뒷배경도 경력도 없는 애가 최대한 빨리 진급하려면 결과로 말하는 수밖에. 너라면 충분히 해낼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잘 보여줬고."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으면서, 앤은 가슴 언저리에서 뭔가 울컥거리는 것 같았다. 눈 안쪽이 뜨끈거리고 코가 시큰거렸다.




  "그래...그래서 날 그렇게 굴려댔어? 난 말야, 너가 날 괴롭히려는 건줄 알았다고. 감히 길바닥 거지 주제에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을 해? 하면서 말야. 단원들도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 보는 마냥 쳐다보고. 그래도 너가 예전에 나한테 웃으면서 그 증표를 건네준 게 생각나서, 그 미소가 생각나서 여기 들어왔는데 무시나 당하고. 또 임무라고 주어지는 건 죄다 힘든 일밖에 없고. 응? 이번에도 그래. 결국 정탐도 나랑 내 친구들이랑만 갔잖아. 그러다가 마족한테 붙잡히고, 난 꼬드김이나 당하고, 좋아하던 사람한테 몹쓸 짓이나 하다가 지금 이 꼴로 누워있잖아. 썅......"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앤은 얼굴을 엘리자베스의 가슴에 파묻는다. 가슴팍이 뜨뜻해지는걸 느끼며, 엘리자베스는 앤의 등을 토닥여준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내 기준으로 생각했어. 너도 열여덟 소녀인데, 내가 너무 엄하게 대했구나."


  "씨......알면 됐어."




  앤의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엘리자베스는 사과한다. 앤은 부끄러운지 자기 얼굴을 황급히 가린다. 황녀는 그런 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자, 마음속 깊은 얘기는 이제 그만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하자. 세 가지 길이 있다." 엘리자베스의 말투가 단장으로 변했다.


  "세 가지?"


  "그래. 첫 번째는 그대로 있는 거다. 곧 있으면 달이 기울거고, 의식이 시작되면 넌 확실히 마족으로 변하겠지. 난 너한테 죽고, 넌 평생 마족으로 살아가거나, 조금 있다 쳐들어올 다른 기사단원에게 소멸당할거다."


  "에, 단장님이 없는데, 쳐들어 온다고?"


  "난 엘리자베스 발렌시아 벨탄 라비안느다. 두번째 계획이야 차고 넘치지." 앤에게 짧게 핀잔을 주었다. "두 번째는 내가 널 억지로 정화시키는 거다. 난 확실하게 탈진해 죽을거고, 너는 여기에 올 마물에게 죽거나, 기사단에게 구출받겠지."


  "그렇네...요." 앤의 말투도 단원으로 변했다.


  "세 번째는 너가 정화를 받아들이는 거다. 내가 체력소모가 좀 있겠지만, 둘 다 확실히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선택해."


  "내가, 선택해...요?"


  "난 부하의 의견을 경청하는 단장이니까."


  "그러면......첫번째, 아니면 두번째."




  앤이 침울하게 읊조렸다. 단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앤이 농담으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니까, 단장님한테 심한 짓 했잖아...요. 내가 살아나가도 단장님을 똑바로 못 볼 거 같아서...요."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었다.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단 말야.' 그리고 엄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물론 너가 나에게 말 못할 일을 한 건 맞다. 벌은 당연히 받아야 하고, 용서도 구해야지."


  "그렇...죠?"


  "다만, 하나는 약속하지."


  "뭔데요?"


  "널 결코, 절대로, 미워하지 않으리란 것. 맹세하마."


  "진짜...죠?" 


  "백금기사단을 수호하는 봄과 꽃잎의 신 아프릴리스가 내려주신 라비안느의 이름으로, 위대한 선조와 그분의 유산인 제국 벨탄의 이름으로, 내 피와 살을 친히 자아낸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엘리자베스의 이름으로, 내가 직접 선택한 발렌시아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연인들이 결혼식에서나 할 법한 맹세에, 앤은 웃었다. 확실히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되었다.




  "좋아요. 그럼, 세 번째로. 어떻게 하면 돼요?"


  "잘 생각했어. 잠깐 올라오렴. 이 자세로는 좀 불편해서."




  앤은 낑낑대면서 엘리자베스의 머리쪽을 향해 기어갔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앤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엘리자베스는 앤의 팔을 붙잡고는, 서로의 머리를 맞댈 수 있게 끌어당겼다. 이마와 이마, 코와 코를 서로 맞대자, 그 틈 사이로 이내 밝은 붉 같은 것이 빛나기 시작했다. 앤의 머리에 있던 뿔이, 허리에 나 있던 꼬리가,, 길게 자라난 손톱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얼음이 불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마의 흔적이 흐물거리더니 바닥에 찌꺼기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앤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앤은, 엘리자베스의 품에 안긴 채 목놓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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