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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깊은 산 속 옹달샘 근처에서 호랑이나 늑대들을 때려잡으며 산중왕 행세를 하던 구미호 아리는 너무나도 심심하였다. 한 밤 중에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를 도와주며 간간히 마을 구경을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간 단 한명도 찾아오지 않아 심심해 죽을 지경이던 아리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목숨만은 살려달라 외치는 보따리 장수를 안내할 수 있었다.

구미호로 둔갑하여 보따리 장수를 등에 태운채 정신없이 마을로 내려온 까닭은 이 때문이다.

"도착하였다."

"아이구! 정말 고맙습니다, 나으리! 시방 꼼짝없이 산속에서 얼어죽거나 호랑이 밥이 될 뻔했습니다요.."

"이 산의 짐승들은 함부러 사람을 해치는 법이 없으니 안심하거라."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도움을 주셔서 정말 고맙.. 지금 뭐 하시는거여요?"

"왜? 옷 갈아입는거 처음보느냐?"

"그, 그게 아니어라.. 마을 입구에서 이러시믄 시방 쇤네는 눈 둘 곳을 못 찾겠구만요.."

"어차피 한밤 중이라 너와 나 둘 뿐인데 뭘 그리 당황하는게냐? 같은 여자끼리."

"예, 예?!"

"네가 아무리 남장을 하고, 말투를 바꾸고, 목소리를 깔고다닌다 하여 구미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언제부터 알고계셨어요?"

"알 것 없다. 어서 가자꾸나."

"어, 어딜 가시려구요?"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주막에 들러야겠지? 앞장서거라."

"예? 저랑 동행하신다구요?"

"떼어먹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마라, 대신 오늘 술은 네가 사거라."

"술을 하시겠다구요?"

"그럼 내가 통행세도 안받고 공짜로 태워준줄 알았느냐? 어서 가자."

아리는 온갖 근엄한 척은 다 해보지만 오랜만의 술안상에 들떠서 좌우로 움직이는 꼬리를 감추지는 못 했다.

때문에 자기 앞의 보따리 소녀에게 팔짱을 끼며 시선을 차단하는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