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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집 4.5-2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9.10 19:18:32
조회 1910 추천 48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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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앙겔라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수술 일정을 조율하고 휴가 기간 동안 제 자리를 메꿔줄 다른 의사들의 당직을 쉬프트하기도 했다. 휴가를 가기 3일 전에는 연일 자정이 되고 나서야 가까스로 퇴근하는 나날을 보내야했다. 덕분에 앙겔라는 해운지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부산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앙겔라와 달리 많은 정보를 찾아놓은 것 같았다.

아이의 권유로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소화시키기에 좋은 산책코스를 걷는 중에, 처음으로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앙겔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한국에서 잠깐 사시다가 저 어릴 적에 이혼하시고 미국으로 돌아가셨어요. 미국에 있는 외가에선 처음부터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는 걸 반대했었대요. 그래서인지 미국 가신 이후로 엄마와의 연락이 아예 끊겨버리더라고요. 뭐, 이제 와선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덤덤히 말하는 아이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풍화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자란 환경은 도무지 마음 가댈 곳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안타까움과 서글픈 마음으로 앙겔라는 말했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얼핏 듣기로는 재혼하셨다고 하던데, 알아서 잘 사시겠죠, 뭐. 하도 어릴 때 헤어져서 그런지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또 속은 어떨지 모르는 것이었다. 앙겔라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아이는 싱긋 웃어보였다.

“박사님이랑 있으니까 정말 엄마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나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애정을 담은 눈으로 앙겔라를 보았다. 따사로운 눈길에 마음이 몽글거리는 한편, 앙겔라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은 제가 엄마 같다는 소리인가요?”
“아뇨, 아뇨! 전혀 달라요. 박사님은 따뜻한 분이지만… 엄마란 느낌은 전혀 없는걸요. 완전 달라요. 닮은 부분도 없고요.”
“다행이네요. 보호자는 좋지만, 엄마 대신이라고 하면 마음이 좀 복잡할 것 같았어요.”
“저도 박사님이 엄마라면 싫어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싫기까지 한 거예요?”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이가 손을 내저어가며 부정했다. 달아오르는 아이의 얼굴에는 다행스럽게도 마음의 상처에 대한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붉게 물드는 아이의 얼굴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자 아이가 실소를 흘렸다.

*

아이와의 즐거운 산책은 갑자기 쏟아져 내린 소나기로 인해 급하게 끝이 났다. 호텔로 돌아와 씻은 뒤, 앙겔라는 창밖을 살폈다. 그새 비가 그쳐 있었다.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느긋하게 산책을 마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아쉬워하고 있는데, 말갛게 씻은 아이가 왠지 아쉬워하는 얼굴로 샤워 룸에서 나왔다. 앙겔라는 아이가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침대 위에 앉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반 뼘은 더 자란 듯한 탐스러운 머릿결이 아이의 허리께에서 찰랑이는 게 참 보기 좋았다. 머리를 다 말린 아이가 앙겔라를 보며 물었다.

“박사님,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비는 그쳤으니 다시 나갈까요? 하나 양 가보고 싶은 곳 있어요?”
“음… 일단 낮잠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딱 보니 저를 배려한 말 같았다. 부산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저를 살피며 위하는 아이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저 아이가 즐겁게 놀 생각만을 하기를 바랐기에 뭐라고 거절해야할지 생각하게 됐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잠 좀 자다가 오후 늦게 아쿠아리움 가고 싶어요. 해수욕장은 내일 가면 되죠.”
“괜찮겠어요? 그래도 휴가인데…….”
“쉬라고 있는 휴가잖아요. 잠 좀 자고 생각하게요. 네?”

결국, 앙겔라는 귀엽게 조르는 아이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안 그래도 예쁜 아이가 예쁜 짓만 골라서 하니 정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앙겔라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선홍색 입술에 시선을 보냈다가 흠칫 놀라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애가 예쁘다고 해도 열여덟인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별 생각을 다 한다고 여기며 아이의 배려를 받아들여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1시간쯤 지났을 무렵, 앙겔라는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소리는 아이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 침대로 다가가자, 아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대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나 양? 어디 아파요?”

움찔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묻자 거짓말처럼 아이의 얼굴이 펴지더니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크기로 박사님, 하고 중얼거리고는 아이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을 꿨던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새삼 제가 아이에게 있어 안심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앙겔라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 반년 전만 해도 상처 입은 속내를 감추려 무표정을 가장하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밝아진 건지, 앙겔라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는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이 든 아이의 순한 얼굴에 평온에 깃들었다. 자는 중에도 앙겔라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미약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앙겔라는 침대 옆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아이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었다. 새근새근 온화한 숨소리가 참 정겹게 들렸다. 입가에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걸 보는 앙겔라의 입에도 따라서 미소가 피어났다.

앙겔라는 한참 동안 그렇게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거릴 때는 몹시도 귀여웠고, 그러다가 방긋 웃을 때면 정말 뭐라도 아이에게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 몰려들었다. 가끔씩 인상을 쓰며 신음할 때도 있었지만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는 작게 앙겔라를 불러댔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앙겔라는 따뜻한 물결이 부드럽게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아이를 바라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몇 시간을 보냈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

이튿날은 아이가 그토록 기대하던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헤엄을 치는 날이었다. 준비운동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향하려는 아이를 앙겔라는 불러 세웠다. 아이의 뽀얀 피부가 상할 것이 걱정이 된 탓이었다.

“하나 양, 자외선 차단제 바르고 가야죠.”
“네? 바다에 들어가 있을 건데도요?”
“그래도 발라야 해요. 오늘 햇볕이 얼마나 강한데 그래요.”

그렇게 말한 후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자외선 차단제를 건네주고 등을 돌렸을 때, 앙겔라는 자신이 묘하게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아해하는 사이에 아이의 따뜻한 손이 등에 와 닿았고,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앙겔라는 흠칫하고 말았다. 등 뒤에서 아이가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그러세요? 뭐 불편하세요?”
“…아뇨, 차단제가 차가워서 그랬어요. 계속 발라줄래요?”

둘러댄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작게 대답하고서 다시 조심스럽게 자외선 차단제를 펴바르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길이 닿는 곳곳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살짝 흥분되는 듯한 이상야릇한 감각이 뱃속에서 끓어오르자 앙겔라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이였다. 이런 반응을 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앙겔라는 진정하려 애를 썼지만, 다소 서툰 아이의 떨리는 손길에 자꾸 얼굴이 달아올랐다. 몇 년 동안이나 아무와도 만나지 않은 채 살다보니 욕구가 쌓인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애써 등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무시하려 애를 썼다.

“다, 다 됐어요.”
“고마워요, 하나 양.”

인내의 시간 끝에 드디어 아이가 손을 떼며 말했다. 앙겔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다. 뜨거워진 몸을 일초라도 빨리 바닷물에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말에 앙겔라는 일어서려던 동작을 멈춰야했다.

“저, 저기 박사님, 저도 좀 발라주세요!”

등 돌린 아이의 깨끗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등이 많이 파인 수영복은 다름 아닌 앙겔라가 고른 것이었다. 순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래쉬가드를 입으라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기에 앙겔라는 자외선 차단제를 손바닥 위에 짜 올렸다. 아이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앙겔라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맨들맨들한 아이의 피부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평범하게 바른다고 바르는 제 손길이 아이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듯 하는 것을 보고 앙겔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말로 욕구불만인 것 같았다. 당장 여름휴가만 끝나면 하다못해 이 선생과라도 데이트를 해야겠다 마음먹으며 꼼꼼하게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다.

달아올랐던 몸은 다행히도 아이와 헤엄을 치는 도중에 평소처럼 돌아왔다. 욕구 불만을 운동으로 풀어냈다고 생각하니 웃기기도 웃겼다. 나이가 몇인데 제 몸 하나 컨트롤이 안 되는지, 조금 한심스럽기도 했다.


한참을 헤엄치다 해변으로 올라섰을 때는 네 시간 가까이 지난 후였다. 아이가 건네주는 비치웨어를 입으며 앙겔라는 아이에게 물었다.

“고마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 앞에 서브웨이 있던데 거기 갈까요?”
“좋아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아이가 저를 생각해서 샌드위치를 먹자고 한 것을 눈치 챘다. 어제부터 계속 이어지는 아이의 배려에 가슴이 살짝 뛰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시장을 향해 걷던 앙겔라는 어젯밤부터 불안 불안하던 샌들이 끊어진 것을 발견했다. 아이가 그것을 보고는 앙겔라를 벤치에 앉힌 후 후다닥 뛰어서 길 건너 신발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금방 가게에서 나와 다시 앙겔라에게로 뛰어왔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앙겔라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그렇게 뛰어와요. 저 어디 안 가는데.”
“그냥, 기다리실까봐요.”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아, 샌들 예쁘네요. 얼마 줬어요?”
“얼마 안 했어요. 신겨드릴게요.”

말리기도 전에 아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앙겔라의 끊어진 샌들을 벗겼다. 제 발을 세상 둘도 없는 보물처럼 감싸 쥐며 샌들을 신겨주는 보니 다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앙겔라는 곧 아이가 제 신발 사이즈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샌들을 신겨주고 뿌듯하게 웃는 아이에게 물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
“전에 저랑 백화점 가셨을 때 구두 사셨잖아요. 그때 들어서 기억했죠.”

그 때라면 4개월이나 전의 일이었다. 세세한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아이의 성정이라면 일부러 기억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 감동 받은 것 같기도 했다.

“……하나 양은 참 세심하네요. 고마워요.”
“뭘요, 별 거 아니에요.”

앙겔라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이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쓰다듬어 주었다.

*

“박사님, 아까보다 바람이 좀 많이 불지 않아요?”

해변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그렇게 물어왔다.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태풍 온다더니 그래서인가 봐요.”
“아, 안 오기를 바랐는데. 그래도 오늘까지는 괜찮겠죠?”

앙겔라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새벽부터나 비가 온다고 하네요.”
“다행이다……. 오늘 맘껏 놀고 내일은 쉬다가 집으로 돌아가요.”

아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앙겔라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초반에는 다른 사람의 집이라 생각하는 티가 역력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진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아이와 함께 해온 6개월 동안 아이도 제게, 그리고 저도 아이에게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잔잔한 물결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앙겔라는 몇 번이고 아이의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해변으로 향했다.

곧바로 수영할 생각이 들지 않아 파라솔 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이에게 더 헤엄치고 오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앙겔라의 옆에 있고 싶다며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하는 말인 것을 알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앙겔라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바다에 시선을 주었다. 아이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신나게 헤엄을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아이도 앙겔라가 아닌 제 친구들과 놀러올 수 있었을 터였다. 딴에는 배려한다고 배려했지만, 아무래도 친한 친구들과 노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놀러왔다면 제 옆에 앉아있기보다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새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을 텐데.

저쪽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애 둘이 힐끗대며 아이를 훔쳐보는 것이 보였다. 혼자 있었으면 분명 말이라도 걸었을 텐데, 외국인인데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제가 옆에 있으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다가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고 애써 표정을 풀었다. 누구라도 한번쯤 훔쳐볼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건데, 솔직히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 헌팅이 웬 말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서 상태를 좀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앙겔라의 눈에, 아이의 얄쌍한 발가락이 들어왔다.

앙겔라보다 반 뼘은 작은 아이는 발도 자그마했다. 하얀 발끝에 자리한 잘 다듬어진 분홍빛 발톱이 쉬지 않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귀여워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한번 손을 뻗어 그 발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거릴 것 같았다. 문득, 앙겔라는 대학시절 사귀던 애인을 떠올렸다. 앙겔라의 발을 볼 때마다 입을 맞추고 싶다며 웃었던,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청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달라진 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대상이 아이라서 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의 발가락이 움직임을 딱 멈췄다. 아이를 돌아보자,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든 아이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앙겔라는 그 순수한 눈동자를 보자 제가 한 생각이 부끄러워져서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박사님, 자외선 차단제 다시 발라드릴까요?”
“네? 갑자기 웬…….”
“얼굴이 좀 빨개지셔서요. 햇볕에 타면 안 되잖아요.”
“아…….”

손등을 볼에 대어보니 따끈따끈했다. 앙겔라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이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아이의 발등에 입 맞추는 상상을 해서 그렇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어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괜찮아요. 이제 곧 해도 지는 걸요.”
“그래요? 혹시 더우세요?”
“네, 조금 그런 것도 같아요.”
“그럼 제가 음료수 사올게요.”
“아니에요, 목이 마르지는 않은 걸요.”
“제가 목이 말라서 그래요. 박사님은 포카리, 맞으시죠?”

아이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깡충 자리에서 일어서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벗어났다. 해운대 해변이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데도,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잘 빠진 뒷모습이 길 건너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앙겔라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Hello?”
“네? 누구신지…….”
“아, 한국말 할 줄 아시는 구나. 발음이 굉장히 자연스러우시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네?”
“저희는 인천에서 왔어요. 현지 분 아닌 것 같으신데, 멀리서 오셨나봐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이며 앙겔라에게 말을 걸었다. 헌팅인 모양이었다. 딱 보니 남자는 서른 초반 정도로 보였다. 앙겔라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쉬기 위해서 온 휴가인데, 다른 사람을 끼워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부드러운 거절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눈여겨봤는데, 수영을 안 하시더라고요. 혹시 수영하실 줄 모르시면 제가 좀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 수영 잘 해요. 대학 다닐 적에 전국 마스터즈 수영대회에서 준우승 한 적도 있거든요. 어떠세요?”
“저도 수영할 줄 알아요. 괜찮습니다.”
“아, 잘 됐네요. 날도 더운데 왜 수영도 안 하고 앉아만 계세요.”
“일행이 있어서요.”
“아까 그 갈색머리 아가씨 말이죠?”

이렇게 말하면 떨어져나갈 줄 알았는데, 앙겔라에게 말을 건 남자의 옆에서 비슷한 체격의 다른 남자가 성큼 다가서며 말을 받았다.

“일행이 있다니, 더 좋네죠. 우리도 둘이거든요.”
“수영이 싫으시면 시원한 술 한 잔 사드릴 테니 가시죠.”

좀 더 제대로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한 손에 파란 이온음료병을 든 채로 앙겔라만을 똑바로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금세 파라솔 밑까지 도착한 아이가 앙겔라에게 말했다.

“박사님, 우리 이제 갈까요?”
“어, 일행 오셨나보네. 우리랑 놀래요? 차 가져왔는데. 칵테일 잘하는 집 알아요. 같이 가죠.”
“저 미성년자인데요.”

아이가 톡 쏘듯 말하고 앙겔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보다 반뼘은 작은 아이인데, 어쩐지 그 행동이 듬직해보여서 앙겔라는 무심코 미소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자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앙겔라의 손목을 잡아왔다.

“그럼 어른끼리 놀러가죠.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번만 놀아 봐요. 저 매너 진짜 좋은데.”

제 입으로 저리 말하는 남자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적 없었기에 앙겔라는 별 감흥 없이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애초에 헌팅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기에 앙겔라는 낯선 손길을 피해 손목을 비틀어 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갑을 열어 명함을 꺼내더니 앙겔라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정말 제 타입이셔서 그러는데, 시간 되실 때 꼭 연락 주세요. 어디든 갈게요. 알았죠?”

끈질기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을 반으로 접은 뒤 비치웨어 주머니에 넣었다. 가면서 쓰레기통이 보이면 바로 버릴 생각이었다. 저를 살짝 잡아당기는 아이에게 웃어준 뒤, 앙겔라는 파라솔을 정리하고 반납한 뒤 호텔로 향했다.

돌아가는 내내, 아이의 기분은 좋지 못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저 혼자 눈썹이 축 처지다가 한숨을 내쉬는 게, 뭔가 고민이 생긴 것 같았다. 혹시 아까 편의점 가는 동안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물어보았지만, 아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

휴가 온 이후로 시종일관 밝았던 아이는 씻고 나온 후에도 계속 멍한 표정이었다. TV에도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기에, 앙겔라는 아이에게 산책을 권유했다. 다행히 아이는 흔쾌히 그러자며 호텔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오며 산책을 하는 동안, 아이의 기분은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가로등이 꺼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겁을 먹은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서부터는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그에 따라 앙겔라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제 손에 붙잡혀 있는 아이의 손이 불편할까봐 살짝 손을 고쳐 잡으며 손가락을 얽자,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박사님, 명함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 명함이라뇨?”
“그, 아까 해수욕장에서 박사님한테 명함 쥐어준 사람 있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앙겔라는 난데없이 명함을 언급하는 아이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아… 그거요? 버렸는데요?”

그러자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앙겔라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놀랄 일이었던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아이가 귀여워보여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버리셨어요? 주머니에 넣으셨잖아요.”
“해수욕장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니까 주머니에 넣었죠. 아까 호텔 로비 지나면서 쓰레기통 있기에 버렸어요.”

그 말에 아이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앙겔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함이 필요한 경우는 연락처가 궁금할 때 외엔 없었으므로, 아이가 그 남자의 명함을 신경 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거였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바닥을 쳤다. 앙겔라는 부러 태연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명함 필요했어요?”

그리고 아이가 대답하기 전에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의견을 덧붙였다.

“……음, 제 생각엔 하나 양이 좋아하기에는 그 남자분의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던데요.”

아이는 미성년자였다. 열 살도 넘게 차이나는 남자가 아이의 옆에 선다고 생각하자 짜증마저 나는 것 같은데, 아이가 갑자기 확 밝아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전혀 필요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제 말을 믿어달라는 듯,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앙겔라가 방금 전에 한 생각은 쓸데없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아이의 그 말 한 마디에 앙겔라의 마음은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절로 웃음을 지으려다, 아까부터 아이의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제 스스로를 알아차리고는 앙겔라는 흠칫했다. 동거인의 기분을 신경쓴다기에는 제 반응이 너무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것을 눈치 채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앙겔라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이,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스무 살 이하로 차이나는 거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스무 살이나요? 너무 개방적인 생각 아닐까요?”
“좋아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것보다는 서로의 감정이 더 중요하죠.”

앙겔라는 무심코 저와 아이의 나이차를 떠올렸다. 열여덟. 스물에는 못 미치는 나이차가 갑자기 실감이 나며 심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무슨 의미 같은 것이 녹아있는 말 같았다. 분명 별 의미 없는 말일 텐데도.

그 뒤로는 앙겔라도, 아이도 말이 없었다. 맞닿은 아이의 손에서 맥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아이는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고, 앙겔라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자꾸만 아까 아이가 한 발언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조금 곤혹스러웠다.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었다.

바람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산책로를 걸으며 앙겔라는 틈틈이 아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니, 절로 아이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자꾸만 다른 곳으로 돌렸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이리라. 가로등 아래 뽀얗게 빛나는 아이의 두 볼,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 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이어진 아이의 온갖 다정한 배려가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앙겔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실망해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제 보폭과 똑같은 걸음으로 아이가 옆에서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오후에 보았던 선이 고운 발가락이 샌들 밖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그 곡선을 보자, 해변에서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앙겔라의 가슴 속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자꾸만 더워지는 속에 입술을 깨물었을 때, 갑자기 아이가 앙겔라의 품에 안겨왔다.

앙겔라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제 품 안에 받아들였다. 기다란 아이의 속눈썹이 처연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보다 반 뼘은 작은 아이의 몸은 부드럽고 여렸으며,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순간, 시원하게 불어오던 습기 어린 바람이 멎은 것 같았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과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달달한 체향만이 앙겔라를 자극했다.

하얀 얼굴에 자리한 아이의 선홍색 입술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앙겔라는 홀린 듯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이는 마치 허락이라도 하는 양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예쁜 호선 위에 입술을 내려놓기 직전에, 마지막 남은 이성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앙겔라의 속눈썹을 스쳤고, 가까스로 얼굴을 비튼 덕에 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작게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느껴지자, 그제야 앙겔라의 정신이 조금씩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갔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자 두 볼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뜬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앙겔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의 얼굴도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앙겔라는 제가 한 일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미…미안해요. 저기, 그게, 하나 양이 너무…….”
“너무……?”

한순간 너무 예쁘게 보여서.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였다고는 할 수 없어서 앙겔라는 말을 삼켰다. 그러나 아이는 답을 구하는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하나 양 얼굴이 꼭…….”

머릿속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채로 말이 나가자 자꾸 횡설수설이 되었다. 생각하는 그대로 표현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결국 침묵하게 되었다. 아이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자니 점점 더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변명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입술까지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아이를 껴안고 입을 맞추려 했던 제 자신을 앙겔라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주하는 아이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자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앙겔라의 시선이 이리저리 허공을 배회했다. 이 순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앙겔라는 현실과 마주해야했다.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쓴 앙겔라가 말했다.

“……미안해요. 잠깐 어떻게 됐나봐요. 방금 전 일은 그냥, 잊어줄래요?”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진짜예요.”

아이가 얼른 대답했지만, 앙겔라는 조금도 괜찮지 못했다. 아이를 마주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흐른 후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애, 애들한테도 가끔씩 볼 뽀뽀 하고 그러잖아요. 괜찮아요.”

아이가 곤란해 하는 저를 위한 게 뻔히 보이는 변명을 해주었다. 앙겔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 말을 받았다.

“아, 네, 그러네요. 그런 일도 있죠. …그러네요.”

그러나 그렇게 되뇌어보아도 납득되지 않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앙겔라는 그런 마음을 털어내듯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이의 말을 중얼거렸다. 아이가 말없이 웃으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품 안의 따뜻한 감각이 아쉽게 사라졌다. 헛헛한 느낌에 앙겔라는 빈 오른손을 꾹 쥐었다 폈다.

“박사님, 바람이 찬 것 같아요. 돌아가요, 우리.”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맞잡은 손이 자꾸 떨리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자꾸만 아이의 입술이 시야에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다가도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싶어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무심결에 볼 뽀뽀를 해주고 싶은 어린 아이를 보고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앙겔라는 떠오르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사고가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또다시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입 맞췄을 때 느꼈던 보드라운 살결이 떠올라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친 것 같았다.

호텔에 도착해서 씻고 나온 뒤, 앙겔라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비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렇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가슴 속에 자리한 감정은 점점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애써 눈을 돌렸지만 명료한 머리는 앙겔라가 도피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입술을 막 짓씹으려는 찰나에 아이가 씻고 나와서 앙겔라를 보고 말했다.

“박사님, 밤도 늦었는데 불 끌까요?”
“…그래요. 잘 자요, 하나 양.”
“네, 박사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아이에게 인사를 한 뒤, 앙겔라는 침대에 누웠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어리고 착한 아이를 그런 눈으로 보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끔찍했다.

***

결국 휴가 마지막 날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새벽을 맞이했다.
앙겔라는 밤새 제 마음을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했지만, 똑같이 잠에 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은 아이가 저를 보고 말갛게 웃었을 때 심장이 크게 울리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제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한번 자각하자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더 예쁘게 보이고 다정스레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만 마주치면 밝게 미소하는 아이의 붉게 물드는 귓등이 그제야 앙겔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곧바로, 아이도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기쁨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저 혼자 아이를 좋아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가 저를 좋아하는 것도 문제였다. 아이와 앙겔라는 미성년자인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관계였다. 어떠한 수식어를 더하고 빼더라도 이 관계는 바뀔 수가 없는 명제였고, 윤리의 마지노선이었다. 앙겔라는 어떠한 식으로든 이 선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이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댈 수 있는 어른에 대한 애정의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들었다. 아이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 마음을 모르는 척, 덮기로 했다.

나이를 서른 여섯이나 먹으면 마음 숨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능할 줄 알았기에 그리 마음먹은 것이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간질간질해지고 설레는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였다.

눈치 빠른 아이는 그 날의 볼 뽀뽀를 통해 앙겔라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해버린 것 같았다. 말로는 콕 찝을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아이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졌다. 아이는 전보다 더 자주, 밝게 웃었고 눈빛이나 목소리가 훨씬 다정해졌다. 앙겔라는 아이의 그런 변화들이 솔직히 두려웠다. 아이가 애정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내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있기도 뭐하고, 거리를 두자니 아이가 불안해할 것 같고, 가까이 있자니 앙겔라의 마음이 주체를 못 할 것 같았다.

마음을 접기로 했으니 행동도 변화를 주어야 하는데, 막상 아이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생각하니 아이에게 차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앙겔라는 평소처럼 아이를 접하는 대신 야근을 늘리는 것으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회피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 외에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거란 앙겔라의 생각과는 달리, 아이에 대한 생각이 전보다 더 자주 들기 시작했다. 당장 저 멀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교복 입은 여학생만 봐도 아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연이은 야근이 앙겔라의 의도라는 것을 아이가 눈치채버린 것 같았다. 불안해하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앙겔라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앙겔라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보았다. 알림창에 짧은 메시지 내용이 그대로 떴다.

[박사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아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한눈에 메시지를 읽은 앙겔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역시, 언제까지나 이대로 문제를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앙겔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주차장 입구로 들어섰다. 생각을 하느라 운전대를 덜 돌리는 바람에 안전벨트를 풀고서야 주차표 발급기에서 표를 빼낼 수 있었다. 출근 시간이라 앞차는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아이에게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메시지를 작성하려는 앙겔라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직후, 머리에 느껴지는 통증에 앙겔라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해야 하는데.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앙겔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끝.




가벼운 접촉사고임!
안전벨트를 꼭 착용합시다!


사실 심각한 슬럼프를 겪는 중이야.
원래 속도대로라면 이틀만에 썼을 분량을 2주간 잡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뭐.
그래서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의 퀄인데, 버텨내야해서 진짜 꾸역꾸역 씀ㅠㅠ
현생이 바빠서 퇴고할 시간도 없어ㅠㅠㅠㅜ
나중에 시간나면 1순위로 고칠게 ㅠㅠ 눈 배려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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