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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토모히마카오치사] 마음 두드리기 15.txt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7.09 23:25:07
조회 521 추천 28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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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 편 들 모 음.


 15. 마음 나눠보기.

 


 공공연한 우스갯소리였지만, 하나사키가와에는 두 여신이 존재했다. 각각 시간을 관장하고, 공간을 관장하는 1학년과 2학년, 두 여신들. 이른바 포X몬의 디아루가와 펄기아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밴드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같은 밴드, 한 명은 보컬 한 명은 드럼이었다. 


 두 여신의 정체는 각각, 한명은 하나사키가와의 이공간이라고 불리는 츠루마키 코코로. 또 다른 한 명은 주변과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고 일컬어지는 마츠바라 카논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실제로 공간을 절단한다거나, 시간을 포효시킬만한 힘도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마츠바라 카논 같은 경우엔 행동이 느릿하다. 말을 자주 더듬고 속도도 느릿느릿했다. 그래서 카논이 말을 할 때엔, 그녀가 한 문장을 다 뗄 떼까지 꾹 참고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흡사 나무늘보를 연상케 할 만큼 느릿느릿했지만, 사실 카논의 성격은 느긋하다기보다는 내성적인 것에 가까웠다. 평소 실수를 자주 하는 그녀였기에, 그걸 줄이기 위해 일부로 느리게 행동하는 면도 있었다. 본인 나름대로 필사적인 노력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북이처럼 행동하는 카논을 바라보며 쑥덕이기 시작했다. 


 ‘마츠바라 씨 주변의 시간은 좀 느리게 흐르네.’ 라든지, ‘마츠바라 씨에겐 깨지는 물건 금지.’ 라는 소심한 카논에겐 조금은 짓궂은 말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시라사기 치사토는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냐?’ 라고 말했지만, 카논은 그러한 자신을 바꾸고 싶었다. 


 대부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그녀의 일상. 그럼에도 바꾸지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시라사기 치사토와의 하굣길이었다.


 바다를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치사토는 언제나 자신의 속도에 맞춰주었다. 가끔은 길을 자주 잃어버리는 자신을 위해 길잡이까지 자처해주었다. 카논은 치사토가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마음 구석에서 미안함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카논은 하나사키가와의 교문을 나서는 하굣길만큼은, 항상 그러한 속도감을 유지하길 바랐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조금은 용기가 생긴 카논. 그녀가 가진 자그마한 욕심이었다.


 “아, 치사토 선배! 제 말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화가 난 듯, 그러나 어딘가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가 카논의 귓가를 때렸다. 안절부절 흔들림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논은 하네오카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뒤돌아보았다. 치사토를 보고 선배라고 했으니, 카논에게도 물론 후배일 것이다. 


 키가 꽤 많이 큰 게, 하급생보단 상급생을 떠올리게 했지만 말이다.  


 항상 느긋함의 절정이었던 치사토와의 하굣길은, 요즈음엔 그저 빠르기만 하다. 하네오카의 후배를 따돌리기 위해서였을까. 그녀의 발소리엔 점점 속도감이 붙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 찢어진다고 하던가. 카논도 치사토를 따라가기 위해 익숙지 않은 경보를 하듯 발을 재빠르게 놀렸다. 그러나 그녀들의 발소리 뒤로, 감정이 듬뿍 담긴 발소리가 계속해서 따라왔다. 성난 발소리는 존재감을 표현하듯,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후.”


 코너를 한 번 돌아도 뒤에서 계속 쫑알대는 토모에가, 치사토는 살짝 질려버렸다. 벌써 이러기를 며칠 째였다. 하네오카서 하교한 토모에가 하나사키가와서 나온 치사토를 뒤따라, 다시 하네오카로 오는 게 며칠 째란 말이다. 


 물론 그 이유는 명확하고도 분명했기에, 그래서 치사토는 더 확실히 그녀를 끊어내려 했다.  


 “토모에.”


 하네오카로 가는, 그리고 카논을 보낼 길목을 눈앞에 두고, 치사토는 인도의 가운데에 딱 멈춰 섰다.  


 “귀와 머리가 달려 있다면, 좀 쓰는 게 어떻겠니?”


 스쳐 지나간 가을바람 탓에, 치사토는 잠시 흩날리려하는 저의 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슬며시 보이는 눈동자에선 서로의 감정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치사토는 외면해버렸다.  


 “널 그리 멍청한 후배로는 안 봤는데, 혹시 설교가 필요한 걸까?”


 “차라리 진짜 설교라도 좋으니 저랑 얘기 좀 합시다. 네?”


 토모에가 그리 말하면서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눈가는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한 쪽만 올라간 입 꼬리는 완벽한 썩은 미소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어딘가 풀 곳이 마땅히 없었다. 


 “토모에.”


 치사토는 다시 토모에의 이름을 입술에 담았다. 새삼 생각하는 거지만, 토모에란 울림은 꽤 기분 좋게 들리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듣고 있어요.”


 귀가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토모에는 반항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금 토모에는 상당히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하루 이틀 정도만 잘 구슬리면 치사토 선배도 못 이긴 척 다시 배역을 허락해줄 거라 생각했건만, 선배의 마음은 아직도 요지부동이었다. 


 “듣고 있었다면, 그냥 돌아가렴. 난 할 말 없으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반대에 봉착할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럼 카논, 내일 봐.”


 햇살은 아직도 눈부시다. 치사토는 카논에게 외마디 인사를 남긴 채, 그런 햇볕 너머로 사라졌다. 저 멀리 보이는 하네오카의 건물이 오늘따라 더욱 높게만 보였다.

 

 “저기....”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려, 눈치만 보던 카논이 슬그머니 토모에의 옆으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리고 슬픈 예상은 절대 빗나가지 않아서, 이내 토모에는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아오! 저 싸가지를 콱, 그냥!”


 토모에는 화를 이기지 못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치사토에게까지 들리게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치사토는 돌아보기는커녕, 하네오카의 입구로 쏙 들어갔다. 마치 저보고 보라는 것처럼, 얄미운 몸놀림이었다. 


 벌써 네 번째 퇴짜였다. 


 제갈량도 세 번이면 알아줬고, 참을 인도 세 번까지, 네 번째는 끝장이라고 그랬거늘. 새삼 열이 받아 토모에는 발을 구르다 못해, 옆에 있는 전봇대를 한번 차려했다. 그러자 옆에선 “히익!” 하고 웬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모에의 눈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아직 노을로 물들지 않는 하늘빛이 저를 바라보며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후에에...”


 겁에 질린 목소리 또한, 내버렸다. 

 


 

  -


 치사토는 가방을 뒤져 고이 접어두었던 대본을 꺼내두었다. 출연분량만 정리해둔 터라, 이전과는 많이 얇아진 대본. 그럼에도 등장인물 역은 수정된 게 없어, 여전히 파리스의 이름 옆에는 ‘우다가와 토모에’ 라는 이름이 있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과 저의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럼에도 그 이름 일곱 자는 쉬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그 이름의 주인마저 떠오르게 했다.


 “아아, 줄리엣. 오늘도 찾아왔는가, 나의 줄리엣.”


 “여전히 진지함이라곤 엿 바꿔 먹은 모습이구나, 카오루.”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치사토는 대본을 말아 다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오늘 대사는 완벽하게 숙지해두었으니, 굳이 더 볼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그동안 미뤄왔던 장면을 하는 날이야, 알고는 있는 거지?”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결말부는 모두 최종 리허설과 실제 상연으로 미뤄두었지만, 일단 카오루와 치사토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을 맞춰보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꼭 맞춰보아야 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하필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이라, 쉬이 뺄 수도 없는 장면이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 참으로 덧없구나....”


 카오루는 이미 완벽히 로미오에 물들었는지, 그냥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은근히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치사토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됐어.”


 치사토는 그렇게 말하고 카오루에게서 등을 돌렸다. 카오루의 화법에 제법 익숙해진 치사토였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렇게 됐다. 그런 자신이 조금 싫어졌다. 

 

 “야, 세타. 준비는 된 거지?”


 공부 덕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부장이 하품을 곁들이며 말했다. 반면 그녀의 옆에 있던 마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파리스.’ 이번 1막의 마지막 부분이자, 원본이 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손꼽히는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이번 장면을 위해, 또 두 사람의 감정이입을 위해, 연기와 연출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체육관에 들여왔다. 


 “부장과 함께 한다면, 이 세타 카오루 항상 최선의 연기를...”


 “오바는.”


 부장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카오루의 말을 끊었다. 옆에 있던 마야도 그러한 만담에 익숙한 느낌이었다. 카오루도 쾌활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몸을 한번 풀고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시라사기 씨, 일단 그냥 감정선만 확인한다는 느낌으로.... 알고 계시죠?”


 “네.”


 치사토의 대답에 부장이 살짝 웃어 보였다. 하네오카 연극부라는 이름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부장은 게스트 배우 대우에 대해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다. 치사토의 이름값이 워낙 센 것도 있었지만 마야가 생각하기에는, 이번 장면 하나를 위해 체육관 출입을 엄금한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대우였다. 심지어 이번 연습이 최종 리허설도 아니었으니까.


 “그럼 바로 시작해주세요. 마야, 너도 잘 보고 있고.”


 “네, 넷!”


 갑작스런 부름에 마야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부장이 대본뭉치를 둘둘 말아, 그대로 마야의 등을 툭, 툭 쳤다. 


 “어깨 딱 펴고, 긴장 딱 펴고. 내년부턴 네가 여기 앉아야 되니까.” 


 부장의 말에 살짝 비뚤어진 안경을 마야는 다시 고쳐 썼다. 직접 천명까지 받아 두근거리는 마음은, 간신히 속에 집어삼켰다.  

 

 카오루는 무대 위를 걸었다. 아직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무대였건만, 그녀의 발걸음은 무게감을 가진 채, 관객석까지 울려왔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시선을 한번 보여주고는, 이내 무대의 가운데를 향하는 카오루.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정인을 기다리고 있던 치사토. 


 카오루는 살며시 휘장을 걷는 시늉을 하며 치사토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와는 다른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을 잡았다. 치사토의 떨림이 저에게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천하고 천한 이 손으로 감히 이 거룩한 성당을 더럽혔소. 하지만 마음을 넓게 쓰시어 얼굴 붉힌 순례자의 고상한 죄로 여겨주시오. 그리고 부디 그 죄의 처벌로 성자께 점잖게 키스하여 그 추한 흔적을 씻고자 하오.”


 카오루는 은은히 웃어 보이며,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용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치사토도 줄리엣이 되어, 카오루를 휘장 안으로 이끌었다. 


 “착한 순례자님. 당신의 말은 이처럼 공손한 손에 너무나도 욕이 되어요. 성자상도 순례자가 만져 보는 손이 있고, 성자의 손과 순례자의 손을 맞닿는 것 또한 서로의 키스가 되지요.”


 그렇게 말하며, 치사토는 카오루를 올려다보았다. 손은 맞닿다 못해, 깍지까지 낀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성자나 순례자도 입술은 있지 않소?”


 카오루가 치사토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윽하다 못해, 고혹적인 시선으로. 


 “순례자님의 말도 맞지만, 그것은 기도에 써야 하는 입술이지요.”


 치사토도 살짝 눈으로 웃어 보이며 답을 주었다. 눈을 마주치자, 카오루 또한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을 안 해도, 서로의 호흡은 맞아 들어갔다.  


 “성자님, 그러면 손으로 하는 키스를 부디 입술로 하게 해주오. 입술로 손의 일을 하여, 기도를 허락해주시오. 내가 품은 신앙이 절망으로 변하지 않게.”


 카오루가 조금 더 손을 꽉 잡아왔다. 죄악감에 조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감정이 일은 것일까. 아마도, 전자겠지. 


 “그렇게 말해도 성자의 마음은 동하지 않네요. 비록 당신의 바람을 들어주는 일은 있다고 해도.”


 카오루를 놀리듯, 치사토는 새침데기처럼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저의 입술은 허락한다는 발칙함. 그게 치사토답다면 치사토다웠다.  


 “그렇다면 동하지 말고 계시오. 그저, 그저 내 바람만 들어주시오. 이렇게 당신의 입술로, 내 죄를 씻어주시오.”


 카오루의 얼굴이 점점 치사토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치사토는 한 번 더 고개를 뒤로 뺐다. 숨기지 못한 장난기가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 제 입술이 순례자님의 죄를 짊어질까요?”


 줄리엣과 완벽히 동화됐는지, 연인에게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치사토는 말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아아, 이 얼마나 달콤한 꾸짖음인가! 우리, 우리의 죄를 서로 나눕시다. 한 사람이 짊어지는 것이 아닌, 서로의 죄를 같이 나눕시다.”


 그녀의 말에, 마침내 치사토도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례자님은 키스에도 이유를 붙이는군요.” 


 그리고 달뜬 얼굴들은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손에 손을 꽉 잡고, 은은히 퍼지는 기척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물론 다른 그녀 또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제각기의 향기가 지척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이 맞닿으려는 찰나. 


 “됐습니다.”


 부장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오루와 치사토도 눈을 떴다. 역할에서 쉬이 빠져 나올 수 없었는지, 카오루는 여전히 고요한 시선으로 치사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사토는 그러한 시선에서 벗어나, 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장도 무대 위의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옆에 있던 마야를 향해 살짝 속삭였다. 


 “키스 부분에서... 그냥 막을 끝내버리는 것도 한번 고려해보자.”


 “네?”


 부장의 갑작스런 말에 마야가 되물었다. 그러나 부장은 어깨만 한번 으쓱이고는, 대본을 들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저기요!”


 치사토의 목소리가 막 자리를 떠나려는 부장의 뒷모습을 붙잡았다. 부장이 다시 뒤를 돌아, 무대 위를 보았다. 치사토의 눈빛이 저를 꽉 옭아맸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요?”


 “아뇨, 아뇨! 두 분의 연기에 오히려 제가 다 압도 당한 걸요.”


 치사토의 물음에 부장은 고개와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치사토의 연기는 거의 무결점에 가까웠다. 동 나이대의 또래 배우들 중에는 지금 무대 위의 두 사람이 제일 앞서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짜 최고였고, 다 좋았는데....” 


 그래도 어디까지나, ‘거의’라는 점이었지만. 


 “본 상연 때는 조금 더 편히 표정을 지어주셨으면 해요. 물론 저 개인적인 감상이지만요.”


 부장의 말을 듣고, 치사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자존심이 확 상해버렸다. 연기로 지적을 받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했는데. 


 “아, 맞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던 부장은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무대 위의 두 사람과 의자를 치우고 있던 마야의 시선이 모두 부장에게로 쏟아졌다. 


 “근데 시라사기 씨, 혹시 그... 파리스 백작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부장의 물음에 치사토의 표정과 카오루의 표정 그리고 마야의 표정이 한꺼번에 변했다. 세 사람 모두 제각기 다른 표정을 띄웠다는 게 웃음 포인트였다.  


 “그게 무슨?”


 순간 부장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치사토는 다시 되물어보았다.


 “아, 그게... 전 그때 그 오디션을 못 봤잖아요. 근데 세타 말로는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다고 해서, 저도 좀 확인하고 싶은데....”


 부장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부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던 치사토의 고개가 잔뜩 분노를 담은 채, 카오루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카오루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손은 번쩍 든 채였다.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제가 뭐 잘못했나요?”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부장은 볼멘소리로 툭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카오루!”


 체육관의 뒤편에서 치사토는 거칠게 소리를 내질렀다.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카오루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모르쇠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치사토도 카오루 본인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치사토는 발을 몇 번이나 구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치사토의 스케줄이 많았던 게 결국 화근이 됐다. 최근에도 줄리엣 일로 하네오카를 자주 오긴 했지만, 파리스의 대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파리스 백작이 줄리엣을 짝사랑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장면이 겹치는 일은 의외로 별로 없어 파리스의 대역을 순전히 카오루의 판단에 맡겨둔 게 문제가 된 듯 했다.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연극부에서도 파리스 백작의 대타를 구하긴 했었다.”


 토모에가 연기의 일로 찾아왔을 때, 연극부내에서도 막 오디션을 하고 있던 차였다. 갑작스런 오디션이었지만, 카오루의 말이었기에 부원들도 순순히 따르긴 했다. 그렇지만.


 “그러나 연극부 내에서 파리스 백작은 그냥 토모에 쨩이 맡는 걸로 결국 합의가 되었지. 역시 그런 연기를 직접 목도한 이상, 저가 맡겠다는 귀인은 쉬이 나오지 않을 터...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카오루의 뜻을, 결국 치사토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의 감정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게 도리어 독이 된 걸까.

  

 “혹시 토모에 쨩이랑 싸웠나, 치사토.”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치사토를 카오루가 한 번 더 뒤흔들었다. 그 질문에 치사토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무거운 침묵이 가벼운 긍정보다 더욱 확실한 답을 줄 때도 있는 법이다.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군.”


 치사토의 차가운 말에 카오루는 씁쓸히 대답했다. 그저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카오루. 그런 그녀의 옆에서, 치사토도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문화제까지 남은 기간은 약 2주 가량. 대타를 구하기도 애매하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토모에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준다는 보장도 없다.  


 흡사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해 마지않는 상황. 난 토모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그녀에게 파리스 백작 역할을 주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젠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에 안개가 낀 채, 답답함이 그저 혈관을 타고 올라올 뿐이다. 


 “있지, 카오루.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좋아해?”


 치사토는 카오루의 옆에 앉았다. 오늘은 유독 구름이 많았지만, 가을하늘은 그 사이 사이서, 새파란 푸름을 내뿜고 있었다.


 “원전을 말하는 것인지, 이번 극본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원전이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물어보았지만, 치사토는 이미 카오루의 답을 알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자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셰익스피어였으니까.


 “아아, 좋아한단다. 사랑해마지 않는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사랑을 이뤄나간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비극적이기에 로맨틱한 이야기지.”


 “난 이 이야기가 싫어.”


 그렇기에 치사토는 카오루의 대답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연기를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존경할 위치에 있는 셰익스피어. 그럼에도 나는 그가 싫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미웠었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네. 제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저 제멋대로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나눌 때에, 원전에서 그들의 나이는 불과 10대 초반이었다. 로테에게 사랑을 느낀 베르테르조차 20대 초중반이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사토는 항상 그들이 제멋대로라고 느꼈다.  


 “사랑을 이루는 건, 분명 멋진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취해, 너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여.” 


 결코 폭주해선 안 된다. 모든 걸 놓고 도망치기에는, 이제 내가 짊어진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건 비극적인 사랑이 아냐. 평범한 민폐일 뿐이야.”


 그래서 시라사기 치사토는 단언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눴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냥 주변에 끼친 민폐였다며, 마음속에 담아왔던 것을 꺼냈다. 


 조금 속 좁은, 그러한 투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가서, 이젠 줄리엣을 연기하는 방법조차 잘 모르겠어. 그래서 오늘 그런 말을 들었겠지.”


 부장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본 상연 때는 조금 더 편히 표정을 지어주라고 했던 그 말. 반대로 말하면 너 지금 너무나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그 말. 


 “줄리엣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이름에도, 가문에도, 사정에도, 전혀 말이야.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 


 시라사기 치사토라는 이름의 지명도, 아이돌 밴드 파스텔 팔렛트, 그리고 우다가와 토모에라는 짊어진 것들이 있었다.


 “나랑은 달라.”


 그래서 시라사기 치사토는 줄리엣이 될 수 없다. 


 “치사토....”


 카오루가 안타까운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번엔 치사토가 슬쩍 카오루의 손을 잡아왔다. 허공을 바라보며 허망한 눈으로 그녀는 어떠한 대사를 읊었다. 


 “이름이 무슨 상관인가요?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한들, 그 달콤한 향기는 변하지 않아요.” 


 2막 2장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밀회를 하는 장면이었다. 


 “로미오, 그대 역시 로미오란 이름이 아니라 하여도 그대의 미덕은 그대로일 게 아니어요? 로미오. 부디 그 이름을 버리고, 나를 취하세요. 당신의 이름과 가문 모두를 버리고, 이 몸을 고스란히 가져가세요.”


 저의 로미오를 바라보지도 않고, 줄리엣은 그렇게 대사를 끝마쳤다. 하지만 로미오는 줄리엣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 말대로 당신을 갖겠소. 나를 사랑한다고만 말해준다면, 신 앞에서 다시 이름을 받은 것과 같이, 이제부터 로미오란 이름과 몬터규란 가문 모두를 버리겠소.”


  붉어지기 시작한 태양빛이 로미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이 쓸데없이 진지해, 치사토는 저도 모르게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곳에서도, 세타 카오루는 역시 세타 카오루였다. 


 “장미가, 만약 장미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장미 향기가 아닌 전혀 다른 향기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어.”


 치맛자락을 손으로 툭, 툭 털고 치사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 카오루에게, 치사토는 뒤를 돌아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진하게 걸었다. 


 “줄리엣같이 천진난만한 여주인공이 되기엔, 난 너무 현실적이야.”


 그렇게 말하곤, 그녀는 여울져가는 석양빛 너머로 떠나가려 했다. 


 “치사토.”


 그러나 카오루가 치사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그녀의 발걸음도 멈췄다.  


 “좀 더 마음 가는대로 연기하는 게 어떻겠나?”


 세타 카오루는 그렇게 말했다.


 “내 마음 가는대로?”


 치사토가 다시 되물었다. ‘마음 가는대로.’라, 지금의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 지금 그대는 줄리엣을 연기하는 시라사기 치사토를 연기하고 있다. 혹여나 힘을 너무 준 게 아닐까?”


 신예 배우가 배역에 먹혀버리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세타 카오루 본인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왕자님 가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을 종종 듣곤 했었다. 


 “그래, 기분 전환을 위해 하네오카 교내 데이트를 해보지 않겠는가? 내 기꺼이 에스코트하지, 줄리엣.”


 카오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사토의 옆에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바라건대 오랜 친구에게 저가 힘을 줄 수 있길 빌며.  


 “감당할 수 있겠어?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히마리 쨩이라면 마음이 넓어 괜찮다.”


 데이트란 말이 신경 쓰였던 걸까, 치사토는 카오루에게 우에하라 히마리의 존재를 언급했다. 그러나 카오루는 호기롭게 웃어 보이며 그녀의 말에 답을 주었다.  


 “카오루.”


 그러나 치사토는 다시 카오루의 이름을 불렀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어.”


 웃는 기색이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치사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조금 갑작스럽다고도 느껴질 그녀의 목소리에, 카오루도 치사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조금 놀랐다. 


 “무대에 한해서라면, 언제든지.”


 카오루는 적당히 대답해주지 않고, 좀 더 진솔하게 답을 주었다. 데이트는 안 되더라도, 무대에 관한 일에 상담까진 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세타 카오루는 그렇게 답했다.  


 “그렇겠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카오루와 치사토는 키 차이가 조금 나서, 그녀가 그녀를 바라볼 때엔 항상 얼굴을 아래로 향할 때가 많았다. 치사토의 경우엔 눈썹을 보면 대부분의 표정을 알 수가 있어서, 카오루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눈가에 눈길을 많이 주곤 했다.


 “넌 정말, 천성배우구나.”


 그러나 오늘은 그녀의 표정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그게 뭔가 이상해서, 카오루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저와 멀어져가는 치사토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를 죄악감이 들었다. 그녀에게가 아니라, 저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사람에게. 


 “다음에 보자, 카오루.” 


 그런 카오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사토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전혀 다음에 볼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카오루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하네오카의 아기고양이들이 모두 모이는 그 무대 위에서, 하네오카의 왕자님 세타 카오루의 가면을 벗겨버리겠노라고.


 그러고 보면 토모에가 왜 연기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치사토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개같다고 느낄 때부터 생각하긴 했는데.... 역시 닮았구나. 두 사람.

 

 그래도... 역시 그건 안 돼. 그 애, 상처 입을 거야. 

 



 띠리링, 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늘 그렇듯 소속사의 문자인가 하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문자의 주인은 소속사 사람이 아니라, 최근 더 자주 연락이 오는 사람의 문자였다. 사실 이 사람과는 말을 튼 지도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 다더니.”


 문자를 확인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은 치사토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발걸음이 가벼워지려다가, 역시 다시 무거워졌다. 


 방금 했던 말은 취소. 토모에, 개가 아니라 호랑이였구나. 


 -


 마음에 들다가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 이번 편. 


 7월 완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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