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다과회 시간에 와 주었네. 아리사? 미리 아리사 몫도 준비해 놓으라고 메이드에게 말 해 놓았었는데, 다행이구나. "
" 네, 카스미 아가씨랑 얘기하는 건 언제든 즐거우니까요. "
" 그래도 아리사도 그전까진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바빴다고 들었는데, 내가 너무 오래 잡아두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구나... "
" 아아... 신경 쓰지 마세요. 이 지역에선 매상이 꽤나 나와서, 굳이 힘들게 다른 마을로 옮겨 다닐 필요 없이 당분간 머무르기로 했어요. "
" 그게 정말이니? 정말 다행이구나! 혹시 여기서 지내면서 아리사의 일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렴! 아버님께 말씀 드려서,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어. "
" 아하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
' 이거 완전 미친 아가씨구만... 영주님이 나랑 너랑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걸 아시면, 그날로 내 팔다리는 다 분질러질 거라고. '
생글생글 웃는 아가씨를 앞에 두고 고급 다과회용 찻잔에 담긴 차를 홀짝인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약간 허브 향이 강한, 그냥 보리차 느낌? 이런 게 뭐가 맛있다고 먹는 건지... 카스미 아가씨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머금고, 금빛 장식이 달린 접시에 담긴 디저트용 쿠키를 먹는다. 솔직히 쿠키 같은 건 그냥 손으로 바로 집어 먹으면 안되나 싶지만, 손에 쿠키 부스러기를 묻히는 건 귀족의 예절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행여나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를까 나도 어깨 너머로 배운 아가씨의 다과회 예절을 따라해서 우아하게 디저트를 즐긴다. 답답해서 죽을 맛이야... 뭐,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내가 조금 예의 없이 굴어도 이 아가씨에 한해서는 별 일도 없겠지만.
" 오늘도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온 거지? "
" 네. 아가씨가 좋아하실 만한 물건으로 골라서 가져 왔어요. 아가씨가 별에 관심이 많다고 하시니까, 몇 년 전에 제가 어렵게 해외에서 공수해 온 마법 아이템이 생각나서요. 이게 있으면... 먼 곳에 있는 풍경이라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답니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별의 고동소리...? 인가? 그걸 찾는데도 도움이 될 물건임에 틀림 없다구요? "
" 어머나.... 정말이야! 저기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에 그려진 우리 가문의 문양도 똑똑히 보이는구나! 이게 있다면 별의 반짝임도, 눈앞에서...? "
별보다 초롱초롱 빛나는 아가씨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아니지, 정신 차리자, 아리사! 이건 비즈니스야.
저 깃발까지 정도의 거리면 몰라도, 저런 조악한 도구로 별이 선명하게 보일 리가 없다. 사실 나도 장사 생초보 시절에 비슷한 사기를 당해서 산 물건인데, 너무 비싸게 산 데다가 팔아먹을 데도 없어서 계속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나한테는 이런 물건들이 꽤 있었는데, 이런 애물단지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처분하기에는 이 순진한 아가씨가 딱 좋다는 걸 어느 순간 알아버리고 말았다. 예의상 몇 번 참가해주던 이 다과회에 내가 먼저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다. 뭐, 또래 친구랑 얘기해 본 경험이 그다지 없는 나로서는 아가씨와의 만남이 나름 재밌기도 하다. 물론 아가씨가 얘기하는 별의 고동소리니 뭐니 하는 걸 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말이다.
" 아리사, 정말 고맙단다! 너와 만나고 나서 내 일상이 새로운 반짝거림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해진 느낌이야. 나 아리사가 정말 좋아! "
저렇게 순수한 아가씨에게 사기를 치려니까 조금 마음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귀족 걱정하는 것보다 쓸데없는 건 없다. 어차피 이 아가씨 돈도 아니고, 당장 이 근방 영지민들의 세금으로 이렇게 내 세 끼 식사보다 비싼 디저트를 즐기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는 요 아가씨한테 이 정도 돈을 뜯어내는 것 정도면 의적이지, 암!
" 아하하... 으, 부끄러우니까 좋다는 말은 그만 하세요... 그런 것보다, 물건 대금은... "
" 후후, 부끄러워하는 아리사도 정말이지 귀엽구나... 물건 대금은 메이드장에게 받아가렴. 아마 부르는 대로 줄 거란다. "
으... 그나저나 자꾸 귀엽다는 소리를 하는 게 괘씸해서, 오늘은 평소보다 금화 3개 정도 더 올려 받아야겠어. 요 아가씨가 자꾸 나를 놀려먹으려고 한단 말이야! 그렇게 싫은 건 아니지만...
" 아아~ 늘 감사합니다. 그럼 아가씨, 저는 일이 바빠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 버, 벌써 가려는 거니...? 저번에 본 신기한 유성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다음에도 언제든 와서 말 상대가 되어주렴! "
아하하! 의적 아리사, 오늘도 한 건 해결!
내가 잡은 올해 최고의 호구, 카스미 아가씨는 이 근방의 영주님이 애지중지 기른 외동딸이다. 세금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사건의 재판 및 처벌까지, 나라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이런 변방 동네는 하나의 작은 왕국이나 마찬가지다. 토야마 가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그날 중으로 보따리를 싸서 영지 밖으로 야반도주를 하는 게 유일한 살 길이라는 말이 돌 정도다. 그러니까 카스미 아가씨는 흔히 말하는 귀족 아가씨.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판 대금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떠돌이 행상인인 나도 이런 변두리 동네는 피하고 싶다. 외부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행여나 영주 쪽 인간들에게 잘못 찍혔다가는 물건은 고사하고 몸이라도 성히 나가면 다행이니까. 말이 좋아 행상인이지, 나는 사실 허가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 장사하는 불법 잡상인일 뿐이다. 영주 입장에선 자기에게 들어와야 할 돈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해충이나 다름 없겠지.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우리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건, 한 달 전쯤의 사건 덕분이다.
*
" 뭐야, 이건... "
한밤중에 숲 속을 가로지르던 중, 무언가 크게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야생 동물? 아니면 도적들? 물건이 든 수레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소리가 난 장소를 슬쩍 엿보니 거기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주저앉아 있었다. 이런 숲 속에 이브닝 드레스라니,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다...
" 저기요, 여기서 뭐 하세요? "
" 으읏....! 다, 다가오지 말아라! 나, 나에게는 값 나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 당신 뭐라는 거야... 소리가 들려서 와 봤더니 당신이 여기에 주저앉아 있었잖아. "
" 나쁜 도적 무리가 아니었던 거니...? 하긴, 너처럼 작고 예쁜 여자아이가 도적일 리가 없겠구나... 미안해. "
" 쵸맛!! 예, 예쁘다니 무슨... 잠깐만, 당신 발목이... "
내 말에 그녀도 발목을 보더니, 꽤나 놀랐는지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다. 의사가 아닌 내가 봐도 한눈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으니까. 저 위에 언덕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면서 접지른 모양이다.
" 아, 아으읏... 아파.... 우, 움직일 수가 없구나.... 이제, 어, 어떻게 해야....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
옷차림이며, 말투 하며... 꽤 곱게 자란 어딘가의 아가씨인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사히 돌려 보내주면 사례로 한몫 챙길 수 있는 거 아니야? 돈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는 내가 이런 이벤트를 놓칠 순 없지!
" 아가씨, 집이 어디야? 내가 데려다 줄게. "
" 정말...?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이 숲 속에서 길을 잃어서, 너무 무서웠는데 너 같이 착한 아이를 만나서 다행이야... "
" 자꾸 애 취급을... 됐고, 아가씨 이름이나, 살던 곳이 대충 어딘지나 말해 봐. "
" 나는 토야마 카스미야. 토야마 가... 라고 하면 알겠니? "
" 켁..... 토토토토토야마??? "
아가씨의 귀여운 얼굴이 갸웃, 하고 기울어진다. 땡 잡았다...! 내가 아는 그 토야마 맞지??
" ....토야마 아가씨, 얼른 제 수레에 타세요. 오늘 중으로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
행여라도 누가 먼저 업어갈까, 아가씨를 얼른 들쳐 메고 내 수레에 태운다. 으, 앉아 있어서 몰랐는데 나보다 키가 컸잖아... 애 취급 할만 하네.
" 후후, 부를 때는 카스미로 괜찮아. 어머나, 말도 없는 수레...? 무거울 텐데... 직접 끌고 가려는 거니? "
" 아- 아가씨보다 더 무거운 짐도 매번 끌고 다녔어요. 그나저나 토야마 가의 아가씨가 한밤중에 숲 속엔 왜... 곰이라도 만나면 어쩌시려고요. "
" 그게... 성 안은 좀처럼 별이 보이지 않아서, 아버님 몰래 성을 빠져나오는 상인 분의 수레에 타서 마을을 나왔어. 어느 쪽 방향으로 가야 내가 보려는 별이 잘 보이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님의 감시를 피하려면 그것밖엔 없었거든...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수레에서 굴러 떨어져서.... 흑흑....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 숲 속이었고.... 별자리를 보면서 방향이라도 파악하려다가, 그만 아래의 비탈길을 못 보고... 으흑... 흑.... "
" 아... 대충 알겠어요. 그렇게 대책 없게 나가시면 어떻게 돌아오시려고... 참. "
조금 나사 빠진 아가씨인 모양이다... 그래도 집에서는 나름 아끼는 모양이니까, 데려다 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
예상대로, 영주님은 반색을 하며 기뻐하셨다. 내가 떠돌이 행상인이라고 밝히자 살짝 탐탁지 않은 듯 얼굴을 찌푸리셨지만, 그래도 다른 데도 아닌 토야마 가문에서 은인 대접을 허투루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몇 달은 장사를 쉬고 놀아도 될 정도의 사례금과, 마을 안에서라면 특별히 어디서든 장사를 해도 된다는 허가증까지 받았다. 드디어 떠돌이 행상 신세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귀여운 아가씨에게 매일매일 다과회에서 초초초비싼 차랑 과자도 얻어 먹고, 아가씨랑 얘기만 조금 잘 하면 이렇게 꽁돈도 굴러 들어오잖아? 아~ 역시 사람은 남을 돕고 살아야 되는 거라니까? 큭큭.
*
그날 밤, 여관 숙소에서 오늘 메이드장에게 받은 금화를 짤랑이며 세고 있을 때였다.
우당탕!!!
" 뭐, 뭐야!! 당신 뭐냐고!! 여기 내가 돈 내고 잡은 방인데 난데없이 방 문을 부수고!! "
" ...... "
" 너, 너 내가 어린 여자라고 만만해보이면 잘 못 건드렸어! 내가 누구랑 친한지 알아? 토야마 카스미 아가씨라고 들어는 봤나, 어? "
" 이런 파렴치한... 너 같은 도둑년이 아가씨의 이름을 대면서 기세등등한 꼴이라니, 지금 영주님께선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시다! "
그 말을 끝으로 목덜미에 둔탁한 충격이 이어지고, 이내 의식이 암전된 듯 끊겼다.
*
촤아악-!
" 으, 아으으.... "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세례에 정신을 차렸다.
" 여...기는. "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걸린 횃불만이 음산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지하실. 몸을 움직여보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팔다리가 전부 결박되어서는, 철제 의자에 꼼짝도 못하게 붙들려 있다.
" 누군가 했더니, 네년이.... "
지하실 전체에 울리는 무거운 저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고개를 살며시 들어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토야마 가의 가주이자 이 근방을 다스리는 영주님.
" 영주님....? 이건 대체....? "
" 아직도 파렴치하게 발뺌을 하려고 하다니!!! 이런 근본 없는 사기꾼 도둑년 같으니!!! "
" 켈록... 켁..... 카흑..... 윽..... "
굵은 손아귀가 내 목을 강하게 누른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이 아프다.
" 아.... 으.... 하아.... 하.... "
목을 강하게 조르던 손아귀가 풀리고, 겨우 정신을 차린다.
" 오갈 데 없이 떠돌던 년을, 내 딸을 구해준 것이 기특해서 돈도 쥐어주고, 마을에 정착해서 장사도 할 수 있도록 자리도 만들어줬거늘, 뭐가 부족하다고 내 딸에게 또 접근해서 그 쓰레기같은 잡동사니들을 팔아치운 것이냐! "
"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아가씨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
" 오늘 네놈이 팔아먹은 그 잡동사니 때문에, 그걸 가지고 놀던 내 딸이 깨진 유리에 크게 베였다! 메이드장을 문책해보니 바로 네년의 짓이라더군. "
다쳤다고...? 카스미 아가씨가...? 내가 판 물건 때문에...?
" 아, 아가씨가 많이 다치셨습니까!? 혹시 상태를 볼 수 있을까요!? "
" 닥쳐라!! 뭐가 아쉬워서 또 내 딸에게 상처를 주려고... 역시 너희같은 근본 없는 족속들을 내 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은혜를 모르는 짐승같은 놈들... "
" 죄송합니다, 영주님.... 천 번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카스미 아가씨의 얼굴을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아가씨와 얼굴을 마주보고...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 사과가 끝나면 다시는 카스미 아가씨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
" 너희같이 근본 없는 족속들을 애초에 내 딸에게 가까이 두는 것이 아니었다...! 내 딸의 얼굴을 볼 생각을 아직도 하는 것을 보니, 평생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두 눈을 뽑아 주마. 오늘의 태양이, 네가 본 마지막 햇빛이 될 것이야! "
영주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빨갛게 달구어진 집게를 든 남자가 나를 향해서 저벅저벅 걸어 온다.
카스미 아가씨... 나 때문에 많이 다친 걸까? 나처럼 이기적인 년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굵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서워. 저 집게가 눈을 뽑아내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카스미 아가씨 생각이 자꾸만 난다. 나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으셨을 거야... 아가씨가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워.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지 무서워... 한 번 만이라도, 아가씨의 얼굴을 다시 보고 용서를 빌고 싶어... 그마저도 아가씨에겐 민폐겠지만. 그동안 아가씨를 가지고 논 거나 마찬가지인 내 얼굴을 다시 보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날 미워하고 있겠지.
불구가 되는 것보다도, 아가씨가 날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나는 그냥 아가씨를 호구로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카스미 아가씨에게 미움 받게 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그녀가 나에게 어느새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을 배신한 파렴치한 년이다. 차라리, 저 집게가 내 눈을 뽑아낼 때 쇼크로 죽어 버렸으면...
" 아리사!!! "
그 때,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지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쳐들고, 눈에 들어온 것은...
" 아버님!!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요, 아리사는 제 목숨을 구한 은인이에요! "
" 카스미! 이 녀석은 너에게 그 동안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건을 판 사기꾼이다! 애초에 너에게 접근한 것도 돈이 목적이었을 거야. 게다가 이 년이 판 물건 때문에 팔까지 다치지 않았느냐! "
과연, 아가씨의 백옥같은 팔이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 그건 아리사의 물건에 제 나름대로의 값을 매긴, 정당한 거래에요. 그리고 내년이면 저도 성년이에요. 저와 아리사의 사이에.. 차, 참견하지 말아주세요!! "
" 뭐, 뭣이...! 참견?? 그렇게 나한테 살갑게 굴던 내 딸이, 나에게 차, 참견이라니.... 허, 허.... "
" 뭐 하고 있어요, 얼른 이거 푸세요! "
앙칼진 카스미의 지시에 집게를 든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내 결박을 푼다. 이제야 공기가 폐 끝까지 들어차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대로 카스미 아가씨에게 업히다시피 해서 끌려 나간다.
*
" 불편한 데는 없니, 아리사? 잠옷이 내가 쓰던 옷 밖엔 없어서... "
나는 지금 아가씨들이나 입을 법한, 가슴께가 조금 꽉 끼는 네글리제에 가운을 걸치고, 아까 묵던 여관 방만큼이나 커다란 침대에 눕혀져 있다. 그리고 옆에는 카스미 아가씨가 비슷한 차림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오고 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마치 인형놀이라도 하듯 옷을 벗기시더니 같이 목욕탕에 끌려 들어가서는... 으, 카스미 아가씨의 알몸은 정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정말 아가씨라는 느낌...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내내 눈을 질끈 감다시피 했다.
" ...아가씨. 정말 죄송...읍, "
"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
아가씨께서 예쁘게 웃으시더니, 내 입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막는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카스미 아가씨의 향기가 확, 하고 느껴진다.
" 아리사가 파는 물건이 그렇게 엄청난 물건이 아닌 건 알고 있었어. "
" ...... "
" 그래도, 자랑스럽게 주머니에서 물건을 주섬주섬 꺼낼 때의 아리사나,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의 아리사나, 지금처럼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힐 때의 아리사나... 모두 정말 좋아해. 나, 아리사를 정말 좋아하니까... 금화 몇 닢 정도로 아리사를 내 곁에 둘 수 있는 건 오히려 나한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단다.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말렴. "
" 아가씨... "
" 금화를 잃게 되는 것보다도, 팔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도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아리사를 잃어 버리는 거야... 그날 숲 속에서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전처럼 자주 하늘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단다. 아리사와 같이 있을 때면 별을 바라볼 때보다 훨씬 두근거리거든. 봐... 이렇게. "
그런 말을 하시면서 내 손을 끌어 아가씨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셨다. 아가씨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그대로 나에게 전해진다. 내 얼굴에 화악 오르는 열기가 부끄러워서, 괜히 아가씨로부터 얼굴을 돌린다.
" 정말, 아가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자꾸 그런 식이면 저같이 나쁜 사람한테 또 속으실거에요... "
" 후후, 걱정되니? 그럼 아리사가 평생 내 곁에 있어주면 되겠다. "
" 뭐, 뭐라구요...? "
"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아리사가 내 곁에서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우후후. "
그러면서 네글리제의 가슴 안쪽을 내게 살짝 들춰 보인다... 이 사람, 순수한 거 다 연기 아니야...? 뭐가 이렇게 요망해...?
" 아, 우으... 알았다구요... "
" 정말이니? 아리사, 나 아리사가 정말 좋아! 평생 곁에 있어주기로 한 약속, 이번엔 거짓말 하면 안 된다? "
강아지처럼 나에게 안겨드는 아가씨를 살며시 껴안아 본다. 따뜻한 아가씨의 살결이 닿는 게 기분 좋아서, 영영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카스미 아가씨, 이제 가정 교습 받으실 시간입니다, "
" 에에... 아리사,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정원에서 기르는 토끼라도 보러 가지 않겠니? 요새 새끼를 낳았는데, 아기 토끼들이 무척 귀여워! "
" 안 됩 니 다 ! 영주님께서 카스미 아가씨의 관리를 저에게 일임하셨으니까, 땡떙이 치게 둘 순 없습니다! "
아가씨의 강력한 주장 덕분에 나는 카스미 아가씨의 전속 메이드로서 토야마 가에 고용되었다. 처음엔 당연히 나를 믿지 못하셨지만,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비글같은 딸을 내가 의외로 잘 다룬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나를 점점 믿어주시는 모양이다.
" 아리사, 너무 엄격해! 그 시절 나한테 사기 치던 귀여운 아리사가 그립구나... "
" 그, 그 얘기는 금지라고 했잖아요!! "
" 후후, ' 카슈미 아가씨~ 이 마법 아이템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먼 곳에 있는 별이라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
" 야!! 토야마 카스미!!! 내 성대모사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얼른 수업 들으러 가라고, 이 바보 아가씨야!! "
" 어머, 그렇게 말 편하게 하래도 말을 안 듣더니 이제야 말을 놓는구나? 후후,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겠네? "
그런 소리를 하며 정원으로 도망가는 아가씨. 아무래도, 오늘 수업도 그른 모양이다.
*
와우... 이거 뭔데 이렇게 길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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