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치가야! 이치가야 아리사, 맞지!? "
서둘러 교문에 들어서는 아리사를 멈춰 세운 것은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작년 아리사의 담임 선생님이 서 있었다.
" 아, 선생님... "
" 그래, 선생님이야. 정말 잘 생각했어, 이치가야. 아, 곧 1교시니까 얼른 따라오렴. "
" 에, 선생님...? 아니, 잠시만요! "
아리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선생님은 아리사의 손목을 잡아 채어서는 어딘가로 바쁘게 향했다. 에이, 모르겠다. 선생님이 부르신 건데, 이 정도면 지각 사유로 충분하겠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리사도 선생님을 따라갈 뿐이었다.
학교 정원을 지나서, 길다랗게 이어진 1층 복도를 지난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층으로 향했다.
" 저기, 선생님!! "
" 아리사? "
" 여긴, 1학년 교실인데요...? "
" 그래, 맞아. 앞으론 혼자 다녀야 할 테니까 잘 기억해 두렴. 이치가야한테는 문제 없겠지만. "
문 앞까지 배웅해주신 선생님은 다시 바쁘게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마치 문을 어떻게 열 줄 모르는 사람처럼, 아리사는 하염없이 교실 문과 그 위에 걸린 현판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1-A ]
작년 아리사의 반. 선생님은 왜 날 여기에 데려다 주신 걸까. 심부름일까, 아니면 학생회에서 후배들한테 뭔가 전달해야 할 사항이라도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곧 1교시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반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리사는 왜인지 작년 자기 반 문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또 시작이다. 이 기묘한 느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잡념을 떨쳐 버리려고 애쓰던 아리사는 이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 아하하, 응, 응~! 그거 진짜 재밌지~! "
문 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아리사의 머리를 한 대 세게 치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리사는 그대로 뒤를 돌아 미닫이문을 벌컥 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리사는 훨씬 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웬만큼 둔한 사람이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두 명도 아닌 반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의 시선이 자기에게 일순간 꽂혔다 다시 제각각 흩어졌다. 대체 뭘까. 문을 너무 큰 소리로 연 탓일까. 그런 것보다 카스미는, 카스미는 어디 있지? 아이들이 제일 많이 모여있는 쪽 한 가운데에서 갈색 뿔 머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카스미와 눈이 맞았다.
하지만 늘 활기차게 해 주던 아침 인사나 내심 기대했던 오늘 아침의 해프닝에 관한 사과의 말 같은 건 없었다. 눈이 마주친 카스미는 인사라도 하려는 듯 잠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아리사의 눈을 피해 버리고 주변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님이 한 번도 가르치지 않은 내용이 서술형 마지막 문제로 나왔을 때만큼 당황스러웠다. 카스미가 저런 표정을 나한테 지은 적이 있었던가? 아까 아침에 소리 지르고 전화 맘대로 끊어서 삐졌다 이거니 지금? 그건 네가 잘못한 거고, 애초에 기다린 사람은 나잖아 토야마 카스미. 이건 누가 봐도 네가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황당한 느낌에 아리사는 자기가 문을 연 순간부터 계속 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는 사실조차 순간 잊어버릴 정도였다.
계속 문가로 꽂히는 시선이 기분 나빠진 아리사는 얼른 자기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 뒤쪽 창가 자리. 맨 뒷자리라 선생님들의 눈도 좀처럼 닿지 않는데다 수업 시간에 카스미랑 간간히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어서 아리사가 좋아하는 자리였다. 카스미랑 눈을 마주치기 싫다기보다는, 자기가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금세 예쁘게 웃어주는 카스미때문에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방금 전의 눈 마주침이 아리사는 카스미한테 대놓고 욕을 들은 것보다 더(물론 카스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아는 카스미는 눈이 마주쳤을 때 생글생글 바보같이 웃어주는 앤데, 오늘은 대체 뭐냐고. 기묘한 느낌에 머리마저 아파지려고 했다.
아리사의 자리에는 이미 가방이 놓여 있었다.
잠깐 머리가 멍해진 아리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다. 여긴 1학년 교실이고, 1교시가 예정에 없던 이동수업이라면 분명 자리가 바뀌었겠지. 그러니까 칠판에 이동 수업 자리 표가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자리 안내표 같은 건 없었다. 슬슬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계속 엉키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아리사의 시선은 다시 다른 아이들과 도란도란 떠들고 있는 카스미에게 향했다. 풀면 아시아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깃든, 복잡하게 엉킨 매듭을 칼로 잘라내어 쉽게 풀었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일화가 생각났다. 그 일화처럼, 집요하게 들러 붙는 이 기묘함을 떨쳐 내려면 카스미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아리사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카스미와의 얘기가 잘 풀리면 모든 것이 비로소 원래 자리를 찾아갈 것만 같았다.
" 으흠, 흠... 야, 카스미. "
소란스럽던 카스미네 그룹이 순간 조용해지고, 그 가운데에 앉아 있는 카스미가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는 나를 쳐다 봤다.
" 으, 응. 아리사... 오랜만이야. 학교 나왔구나..? "
" 뭐가 오랜만이야, 주말에도 봤으면서. 그리고 너 때문에 지각할 뻔 했던 거 알지? 으휴, 진짜... 근데, 왜 다들 오늘은 여기로 등교한... "
하던 얘기도 멈춘 채로 아리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카스미 주변의 아이들한테 시선이 옮겨 갔기 때문이었다. 얘네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카스미 옆에서 떠들던 아이들은, 죄다 1학년 때 아리사와 같은 반인 아이들이었다. 반이 갈라져서 이제는 거의 서먹해져버린 친구들도 많았다.
" 아리사...? "
말을 하다 끊어버린 아리사를 쳐다보며 카스미가 걱정스러운 듯 조심히 한 마디를 꺼냈다. 그것마저 아리사는 듣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뜨고 카스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 저기, 아리사... 아직도 많이 화났지...? 그때 일은, 내가 정말로... 읏!? "
카스미도 하려던 말을 마치지 못했다. 아리사가 카스미의 손목을 잡아 채고 끌어 당겼기 때문이었다. 교실에서 나가서 카스미와 둘만 있고 싶었다. 그리고 의문 드는 점을 모두 물어볼 생각이었다. 도저히 자기 머리로는 정리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카스미를 끌고 나가려는 아리사를 누군가 힘으로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 이치가야 씨!! "
카스미 때와 마찬가지로 수도 없이 들은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거기에 맞지 않게 생소한 호칭과 말투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야마부키 사아야가 서 있었다. 아리사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은 채로.
" 사, 사아야...? 이게, 지금 무슨...! 이거 놔!! 아프다고!! "
" 이치가야 씨야말로 카스미를 놔! 왜 이러는 건데 대체!! 이제 와서 또 카스미한테 무슨 할 말이 남아 있어서... 제발 카스미를 가만히 놔 두라고!! "
아리사는 붙잡은 카스미의 손목을 힘없이 툭 떨어트렸다. 너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희 둘 다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카스미에게서 사아야로, 사아야에게도 카스미로 황망하게 시선을 옮기던 아리사는 갑자기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가장 먼저 갤러리에 들어갔다.
사진들이 거의 없었다. 라이브 의상이랑 피아노 악보도, 쇼핑몰에서 같이 찍은 스티커 사진도, 첫 라이브 무대 사진도, 하굣길에 자주 들르던 디저트 카페에서 찍은 사진도 없었다. 아리사가 키우는 분재 몇 장만이 그 많은 사진들의 빈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메신저를 눌렀다. 메신저 란은 아예 비어 있었다. 몇 개월 전 하나여고 중등부 친구들과 졸업식 날 연락한 게 다였다.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부를 눌렀다. 경쾌한 아이콘 터치음이 아리사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는 섬뜩한 빙고 사인인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스크롤을 내려봐도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우시고메 리미가, 하나조노 타에가, 야마부키 사아야가, 토야마 카스미가 없었다. 포핀 파티와 연관된 자료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홀드 버튼을 누른 아리사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년 / 월 / 일을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하는 디지털 시계. 그것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봐도, 맨 앞 숫자가 아리사가 알던 숫자에서 1년 모자라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이치가야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
덩달아 힘이 풀린 사아야의 손을 홱 뿌리치고 아리사는 미친 듯이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교실로 향하는 선생님... 그러니까 1-A 반 담임 선생님과 그대로 부딪혔다.
" 복도에서 그렇게 뛰면 어떡하니!! 아, 이치가야...? 지금 1교시 시작할 시간... "
" 선생님. "
" 으, 응. "
" 보건실에서, 쉬다, 오겠습니다. 몸이... 정말로, 안 좋아서요. "
" 그, 그래. 이치가야가 편한 대로 하렴. 대신 하교 전에는 교무실에 들러서 꼭 괜찮은지 확인 받고. 그 정도는 괜찮지? "
오케이 사인을 받자 마자 아리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내달렸다. 계단을 몇 칸씩 뛰어 내려와서 모퉁이를 돌고 가장 가까이 보이는 화장실로 향했다. 교사 전용 화장실이긴 했지만 그딴 건 아리사에게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두 번째 칸으로 들어간 아리사는 변기 커버를 올리고 머리를 들이밀고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계속하니 신물이 올라와서 정말로 구역질이 났다. 속에 든 걸 모조리 게워낼 뻔 한 것을 몇 번이고 억지로 참았다.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자, 아리사는 힘겹게 몸을 돌려서 변기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할 수 있어... 아리사, 할 수 있어... "
입가에 묻은 신물을 닦아 내면서 아리사는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그래. 오래된 기종이니까, 데이터가 모조리 사라진다거나 날짜가 맞지 않을 수 있다. 카스미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카스미를 보려고 다른 반에서 쉬는 시간 전까지 잠시 들렀거나, 아니면 과학 수업 같은 경우는 다른 반 애들이랑 같이 듣는 경우도 많으니까. 방금 막 일어난 카스미가 나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 있던 것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택시를 탔을 것이다. 카스미는 돈 아깝게 택시를 타느니 차라리 지각을 하고 말 애지만, 가능성이 낮다 뿐이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이대로 가면 너무 늦겠다 싶은 카스미네 엄마가 직접 차로 태워다 주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애처로운 복기가 아까 그 장면에까지 다다르자, 아리사는 화장실 칸막이 문을 냅다 발로 차 버렸다. 딱히 들어올 때 잠금 장치를 해 놓은 것도 아니라서 문은 그대로 휙 열러서 옆 칸에 쾅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그대로 튕겨져 나가 아리사 쪽으로 조금 돌아왔다. 물론 지금은 수업시간이니 이런 소음 정도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아리사는 핸드폰도 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번에는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장면 만큼은 아리사도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사아야의 그 날이 선 말투와 억세게 나를 붙잡던 손아귀. 그리고 카스미의... 나를 무서워 하는 것 같은 태도와 어색한 표정.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아리사는 그대로 한 쪽 팔을 눈 위에 얹은 채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나쁜 꿈을 꾸는 거야. 그렇게 또 몇 분이 흘렀을까, 팔을 내리자 감았던 눈도 서서히 뜨였다. 그러나, 금세 빛에 적응한 눈에 보이는 건 아리사의 방 천장이 아니라 야속하게도 여전히 하나사키가와 여고 교직원 전용 화장실이었다. 딱딱한 화장실 바닥의 감촉과 은은한 방향제 냄새가 아리사를 미치게 했다.
아리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입 안에 돌았다. 그리고 문 밖으로 기어 나와서, 마주보는 벽 근처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주웠다. 운도 없게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키패드를 누르고, 여덟자리 번호를 입력했다.
[ 전화번호 추가 ]
새로 생성된 전화번호부의 이름 란을 한 번 가볍게 터치하고, 이어서 이름을 입력한다.
[ 카스미 ]
이제 아리사의 핸드폰에 확실히 저장된 그 이름 세 글자를 보자마자 아리사는 자기도 이유를 모를 실소를 지었다. 이런 조그만 데이터라도 다시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생겨서일까. 바보같이 이 아이의 이름만 봐도 이렇게 안심이 되는 이유는 뭘까. 아리사는 핸드폰을 든 반대쪽 손의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래. 머리로 안 된다면 내 느낌대로 할 뿐이야. 망할 매듭따위, 그냥 그 아저씨처럼 칼로 잘라 버리면 되지. 그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었다. 별로 쓸 데는 없지만 이제야 그 매듭의 이름이 생각났다. 연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카스미의 이름을 자꾸 읽으니까 이상한 자신감도 들었다. 카스미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무서워할 필요 없어. 괜찮을 거야. 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할 수 있을 거야.
아리사는 다시 핸드폰 위로 엄지를 바쁘게 움직였다.
[ 문자 보내기 ]
[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 줘. 부탁이야. 제발 도와 줘. ]
*
으악 진지한 분위기로 쓰는 거 어색해 ㅠㅠ 좀 괜찮니...? 3인칭으로 서술하는 게 어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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