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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악역 영애로 빙의한 내가 그녀에게 복종할 때까지

ㅇㅇ(116.46) 2020.05.06 19:03:30
조회 1374 추천 45 댓글 9
														

"당신, 누구죠?"


의혹에 찬 눈으로 한 소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금색 명주실을 뽑아낸 듯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푸른 빛 도는 눈동자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얼굴에는 오밀조밀하게 그녀가 청순가련한 스타일의 소녀라는 걸 잘 나타내고 있었다. 흡사 명화 속에서 빠져나와 걸어 나온 듯한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녀의 성품 또한 바르고 성실해 영애들의 귀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칭찬이 자자했다. 또한 뛰어난 머리로 테스트에서 항상 고득점까지 완전무결하다는 말이 무색하지가 않았다.


몇 년 전에 홀연히 나타난 아네모네 백작가의 숨겨진 영애, 릴리에 아네모네 영애. 그런 그녀가 나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쏘아보았다.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언동에 당황한 나는 주눅 들어서 멍청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더욱더 어이없고 기가 찬다는 듯 발을 크게 구르며 다가섰다. 그런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한 걸음씩 나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에반젤린 엘리자베스 영애. 너, 아니지?"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날카롭고 한기진 얼음송곳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 엘리자베스 공작가의 에반젤린의 이제 겨우 낯설지 않게 된 이름과 그녀를 부정하는 듯한 말에 나는 이 육신에 오한이 든 듯 떨려왔다. 떨리는 몸뿐만 아니라 머 속도 마치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가고 있었다.


'들켰어?'


휘몰아치는 머릿속에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게는 아주 큰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에반젤린 엘리자베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내가 누군가의 대역이라거나 그런 뜻 또한 아니다. 육체는 확실하게 에반젤린 엘리자베스였고, 공작가의 영애가 맞았다. 다만 그 속의 내용물이 본인이 아니었다.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흔히 말하는 빙의라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 평범했던 날, 평범하게 일을 하고, 퇴근하면서 오타쿠였던 친구가 내게 실수로 보낸 택배를 주려고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핸드백 안에는 '백합의 아리아'라고 불리는 게임CD가 들어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역하렘계 미연시인 모양이었다. 거기엔 금발의 청순가련한 미소녀가 있었고, 특이하게도 그 대척점에 흑발에 매서운 눈으로 보고 있는 흔히 말하는 악역 영애 같은 미소녀가 있었다.


게임 케이스를 바라보다가 횡단보도의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고, 그리고 그 후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굉장히 화려한 레이스 무늬가 들어간 킹사이즈의 두 배는 됨직한 침대에서 깨어난 나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에반젤린님이라고 부르던 여자만이 있었다. 그것이 학원에 입학하기 3년 전 일이었다.


"내가 아는 에반젤린은 이런 얼빠진 얼굴은 하지 않아."

"예, 옛? 제가 에반젤린이 아니면 누구라는 거……. 읍."


떨리는 몸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숨 대신 내뱉던 말끝에 진짜 얼빠지게도 혀를 씹어버리고 말았다. 장대하게도 콰득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씹어버린 것 같았다. 릴리에 영애는 더욱더 싸해진 눈으로 나를 얼려 죽여버릴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걸음 또 앞으로 다가섰고, 나는 그녀에 맞춰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 했으나 등 뒤가 벽에 막혀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었다.


나는 울 것만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한 점 자비도 없는 목소리로 또 한 번 말했다.


"에반젤린 영애를 어떻게 한거야."


이 게임의 주인공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던 거야? 케이스에서 보던 청순가련해서 새와 토끼가 몰려들 것 같고, 꽃 한 송이를 손에 쥐고 화사하게 미소 지을 것 같은 소녀는 어디로 간 거야? 아니, 사실 이 아이가 악역 영애고 내가 주인공이었었던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케이스에 주인공 릴리에 아네모네라고 쓰여있었던걸.


"제, 제가 에반젤린이에욧…."

"거짓말하지마!"

"히익!"


그녀는 여자주인공 특유의 새들과 함께 지저귈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게 천둥소리보다도 크고 무서운 악마의 소리처럼 들렸다.


"왕국에서 흑마법은 즉각 사형이라는 거 알고는 있죠?"

"네, 넷?!"


무서운 악마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착한 천사의 목소리로 조근조근 내게 설명하는 그녀는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와도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당신, 사형이야?"

"히, 히익…!"


얼굴만큼은 주인공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련하고 아름답게 미소를 지은 채로 있었으나, 그 내용은 터무니 없이도 공포스러워서 그 괴리감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보다도 무서운 건 그녀가 하는 말에 틀린 점이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이미 죽고 없어진 마왕의 마법인 흑마법을 불법으로 여기고, 적발 시 즉시처형이라는 왕국의 법이 너무도 무섭게 다가왔다.


어느 새 눈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양 손으로 내 두 팔을 잡아 벽까지 밀어넣고서 웃고 있었다. 반쯤 주저 앉아서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그녀를 올려다보는 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비밀로 해드릴까요?"

"네, 네엣?"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다 귓가에서 맴돌기만 할 뿐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덕에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밀로 해드릴께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고, 사과는 떠오르고, 내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간 정도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끝까지 미소짓고 있었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악마의 미소.


"제게 복종하세요."


그녀와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잡혀 있는 두 팔은 여전히 아렸고, 자칫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제 노예가 되세요."


그녀는 말돌림 없이 분명하게 선언했다.


"녜에엣."


나도 모르게 흘러버린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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