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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안녕 작가지망생 백붕이 버터롤빵이야.
이번화는 좀 오래 걸렸네.
이번 화가 좀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이번주는 다소 시간이 안 나서 작문에 어려움을 겪었어
항상 꾸준한 사랑 보내주고 내 글을 읽어주서 고마워.
오탈자 지적이나 궁금한 점, 피드백 등은 댓글로 달아주면 작중 스포일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실히 답변해줄게.
각설하고 이번화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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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그것은 소중한 사람의 치부마저도 감싸안아야 하는 것. 당신은 애인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습니까. ]
 ' 할 이야기가 있다 ' 라는 문자를 받고 엘 퀸은 업무가 끝나자마자 앤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를 방문했다.
최근에 엘을 미친듯이 굴려먹었고, 회사가 안정화가 된 뒤로 한창을 초과근무 시킨 화려한 전과가 있는지라 과장은 요즘 유독 엘을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엘은 며칠 째 정시퇴근이라는 호사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카페의 문을 열자 이전에 만난 적 있던 앤의 연인, 아이비 프로스트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아이비는 엘을 보자 짧게 눈인사하였을 뿐 그 이상 밝은 인사는 하지 않았다. 
엘은 아이비의 맞은편에 앉았고 들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내렸다.
아이비는 단정한 여성용 정장을 입고 다소 차가워 보이는 네모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엘이 직장이 끝나고 바로 온 것처럼 아이비 프로스트 역시 직장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카페를 찾아온 듯 싶었다. 
 " 지난번에 종종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죠?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언니. "  
 엘은 카페 주인에게 부탁해 커피 하나를 더 주문하며 말했다.
아이비는 슬쩍 엘의 얼굴을 내다보더니 곧바로 다시 휴대폰에 몰두하면서 다소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 글쎄요, 내가 굳이 업무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당신을 마주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데요. "
 대화하는 상대방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단어 선택이었다.
그러나 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오른손을 풀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오늘 뉴스를 확인했다. 
 " 나도 굳이 언니를 만나러 일부러 시간을 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난번에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요. "
 " 선전포고 말인가요? 덕분에 마트 매출에는 이득이 되긴 했어요. 점장으로써는 홍보 효과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 드네요. "
 " 네 이해해요, 애초에 언니 마음에 들려고 한 행동이 아니거든요. " 
 엘은 선전포고라는 단어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전략이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자칫 잘못하면 무수히 많은 손님들 중 한 명에 불과한 엘을 그녀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다르게 투박한 어조는 애지간해서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아이비에게 짧은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다. 
 " 보이는 것과 상당히 다르네요. 여보는 당신의 이런 모습 알고 있어요? "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그 여보라는 호칭, 너무 거북하지 않을까요? "
 "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해요. 이야긴 끝난 거죠. " 
 " 앤은 사랑을 속삭이는 말에 약해요, 단순히 언니가 좋아하니까 내버려 두는 건 아니고요? "
 두 사람의 창과 방패가 한 번씩 부딪혔다. 
 " 안그래도 과음했다면서요? " 
 엘이 물었다. 
어쩐지 연락이 많이 없던데다 그나마 도착한 문자도 오타투성이에 이모티콘이 가득해서 당최 무슨 일인가 궁금하던 차였다. 
앤이 과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오늘 출근하기 전 숙취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였다. 
 " 네. 우리 여보는 진탕 술 마시고 내 방에서 잤어요. 어지간히 속상했나 보죠. "
 아이비가 기운빠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제는 앤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의 신경을 긁어보기 위한 한 말이겠지만 엘은 이 정도로 흔들릴 만큼 약한 여자는 아니었다. 
 " 고맙네요. 하지만 앤이 앞으로 그런 일 있으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겠어요? ' 우리 ' 집으로요, " 
 엘은 ' 우리 ' 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우리 ' 집이요? 미안하지만 거긴 여보의 집이에요. 같이 사는 건 보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 
 아이비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 어차피 언니도 저랑 입지는 비슷할 텐데요. 언니가 어쩌시든 간에 집에는 앤과 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요. "
 "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집도 엄연히 계신다면서요, 너무 자주 들어오시는 건 여보가 불편할 수 있어요. "
 " 내 사랑은 아무 말도 없던데요? "
 " 그거야 여보가 착하니까요. 직접적으로 나가라고는 말 못하겠죠. "
 두 사람의 얼굴은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아무도 이들이 화기애애한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메뉴판을 회수하러 왔던 직원은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신경전에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빠져나와야 했고 커피를 전해 주러 왔던 직원도 오들오들 떨면서 커피잔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이상 지속될까 두려웠던 가게의 주인은 서로의 얼굴에 물컵이라도 쏟아질까 봐 주의를 기울이며 두 사람의 테이블을 보았다.
간혹가다 가게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여자가 나타났고 주인은 그럴 때마다 가게의 분위기가 몹시 소란스러워지는 걸 봐야만 했다. 
 다행히 이 무거운 분위기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을 불러낸 루시 데자이어에 의해 해결되었다.
루시는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 어느 한 사람의 옆이 아니라 두 사람의 얼굴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도록 식탁의 가장자리 부분으로 가 앉았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교태로움, 그리고 소악마보다 더 다분한 장난끼를 가진 여자, 그리고 단 하나의 공통분모로 두 사람의 여자와 이어질 여자였다.
그녀는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고 두 사람 사이를 슬쩍 쳐다보더니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모습으로 결론을 내렸다. 
 " 제가 없는 사이에 두 분 꽤나 친해지신 모양이네요? "
 물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한 마디로 아이비와 엘의 주의를 돌리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비와 엘은 모두 왜 자신들을 이 시간에, 이 곳으로 불러내었는지 궁금해했다. 
 " 두분 다 굉장히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간은 길어야 30분 정도일 테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
 루시는 시계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비는 어제 저녁 앤과 같이 갔던 술집에서, 엘은 오늘 아침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이 루시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은 완전히 일치했다.
앤에 대해서 그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 그들이 앤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장난이 가득한 어조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밀크티 한 잔을 더 시켜 목으로 넘긴 루시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중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떤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몇 번 오물거렸다.
이따금씩 애꿎은 빨때를 치아로 물어뜯기도 했다.
 " 염치없긴 하지만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가슴에 묻어두실 수 있으신가요? " 
 어려운 고민 끝에 가장 처음 나온 말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이었다.
엘, 그리고 아이비는 그녀가 그토록 조심하는 이유가, 앞서 자신들을 일찌기 불러낸 이유와 상관있을거라고 여겼다.
 " 앤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
 눈치를 챈 엘이 물었다.
 " 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요. "
 " 그렇게 할게요, 언니도 그렇죠? "
 아이비도 동의했다. 두 사람은 무엇이 나오든 이 일을 묻어줄 것임을 망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선언을 받아내자 루시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보다가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내렸다.
 " 저를 제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저는 루시 데자이어이고 앤 하우스의 20년지기 친구이자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 온 사람이에요. " 
 루시는 자기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그간 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 이 두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직접 알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장난끼 가득한 친구일 뿐이지만 엘과 아이비는 그녀에게 받은 도움이 정말 많았다.
 " 그리고 오늘 두 분을 이 자리로 부른 것은 두 분께서 앤에게 정말 큰 애정을 보내 주시고 있는 것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 그리고 충고를 하기 위해서에요. "
 루시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든 루시의 얼굴에서 슬며시 두려움 비슷한 것이 비춰졌다.
혹은 그것은 노파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루시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두 손을 모았다. 
 " 두 분은 앤의 특징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요. "
 루시는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아이비와 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상태이다 보니 자연스레 두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 헌신적이에요, 마음이 너무 여려서 다칠 만큼. "
 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하죠. 자신이 끊임없이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요. " 
 아이비가 그 뒤를 이어 따라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루시는 조그맣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두 손을 활짝 펴서 그녀를 포함한 세 사람을 전부 아울렀다. 
 " 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죠. 앤 하우스는 그런 사람이에요. 약하고 소심한 주제에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해요, 그리고 그 사랑을 잃을까봐 매번 무서워하고 있어요 "
 루시는 정론을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앤이라는 여자를 알게 된 시간은 아이비도, 엘도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 작고 가녀린 소녀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여도 성실하게 해내려고 노력하고 계속해서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멀어질세라 두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지는 않지만 앤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 앤이 왜 이렇게까지 두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지, 그리고 두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왜 이토록 자신을 돌보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루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엘과 아이비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 누구나 당연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 앤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이비도 엘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들을 만나기 전의 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대답을 곁에 앉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가지고 있었다. 
 " 당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
 아이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알다마다요......저도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니까요. " 
 루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건이라는 불분명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 단어는 보통 좋지 않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잔이 움직이고 루시의 얼굴이 조금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왔다. 
 " 이런 말씀 드리면 두분이 조금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요. 사실 앤은 두 분이 첫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첫사랑은 따로 있었어요. "
 루시는 이번에도 정말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비는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중에서 제일 어린 엘이라면 모를까 아이비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따라서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일회일비할 순간은 이미 지났었다. 
하지만 앞서 루시가 한 말이 너무나도 신경쓰여 다소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놓여 있는 물수건을 쥘 수밖에 없었다. 
과연 첫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아이비는 차가운 안경을 추켜올렸다. 
 " 그 첫사랑과 앤은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했어요.그 전에는 단순한 친구 사이였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앤은 그 사람과 부던히도 친해졌어요.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법이 없었고 오랜 친구인 제가 질투가 날 정도로 다정한 사이었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두 사람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가 되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도는 나가지 않았지요.그냥 흔한 친구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문제가 하나 생겼죠. " 
 루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애꿎은 티스푼을 오른손으로 돌렸다. 
자꾸만 불안에 보이는 손동작에 엘의 마음까지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엘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어서 루시가 이야기를 계속했으면 했다.
첫사랑이란 단어는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꽤나 크게 다가왔어도 그녀 역시 성인이니 이해하지 못할 범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단어가 몹시나 강력하게만 느껴졌다.
 " 앤을 좋아한다는 다른 사람이 생긴 거예요.대학교에서 만난 그 사람은 앤 못지 않게 소심한 사람이었는데 도서실에서 같이 장서를 관리하면서 친해졌어요.
머지 않아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어요.그렇지만 두 사람의 가치관이 충돌이 난 모양이에요.앤은 그 사람을 단순히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보다 적극적으로 관계의 향상을 요구해왔지요.
결국, 어느 날 그녀는 선을 넘으려고 했죠.앤은 몇 번이나 자신이 첫사랑이 있다고 했는데도 이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을 밀어붙이려고 했어요, 다소 일방적인 관계였지요.그러나 위험한 사이가 되지는 않았어요.앤은 첫사랑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에요.앤은 정중하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거절했고 다소 매몰찼지만 결국 그걸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어요.이걸로 다 해결되나 싶었죠. 그러나 이번에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어요. "
 루시는 티스푼을 돌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티 세트 옆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루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혹은 붉어진 얼굴이 당장이라도 분노를 발산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투는 툭 툭 던지는 식이었지만 그 안에 서린 단어는 가볍지 않았다. 
 " 앤의 첫사랑이 앤이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걸 알고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앤에게 소리지른 거에요, 자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서요. 골치아프게도 그걸 누가 전해줬는데 이 사람은 앤과 첫사랑이 같이 지내는 모습이 너무나 싫었는지 그만 악의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했어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일부는 빼거나 과장하는 식으로요. 앤은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결국 첫사랑과 앤의 관계는 그대로 끝났어요. 앤은 자신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매몰차지 못했어요. "
 아이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살짝 벌어진 입가 사이로 치아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금 아이비의 손에 쥐어진 물수건이 없었다면 그녀의 손톱은 진작에 피부를 파고 들어가고도 남았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물수건이 좌우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푸른빛 안광이 루시의 기억 속 누군가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 웃긴 거 하나 알려줄까요? 그 첫사랑, 금방 다른 사람을 사귀더라고요, "
 루시는 무척이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옛날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 네 이해할 수 있어요, 어디 뭐 사랑이 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던가요? 그런데 그 사람, 앤을 금방 잊어 버렸어요. 앤보다 더 어리고 귀여운 여자아이에게 금방 마음이 갔죠. 그러면서도 앤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속삭여 줬어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결국 그년은 앤을 딱 거기까지만 놓고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앤이 거절했던 그 사람, 그 사람도 결국 다른 사람을 찾아갔지만 깔끔하지 못했죠, 온갖 악담을 퍼부은 거예요. 자기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앤을 신 포도라고 생각했던 셈이죠. 어이없게도 앤은 혼자가 되었어요, 버려져 버렸죠. " 
 엘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악의가 느껴졌다.
한 사람은 앤을 사랑하는 것처럼 속삭이다 매몰차게 앤을 버렸고
한 사람은 앤을 좋아했지만 결국 자신의 것이 되자 않자 온갖 악담을 퍼붓고 떠나 버렸다. 
어차피 먹지 못할 음식이라면 내던져 버릴 것처럼.
 루시의 얼굴 표정은 분노의 극의에 달하다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이성을 찾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루시의 얼굴은 빠르게 식어가면서 착잡함으로 변했다.
창문을 내다 본 루시는 줄곧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 그 뒤로 앤은 학교도 잘 나오지 못했어요. 한동안은 폐인처럼 지냈죠, 대학교 졸업이 아슬아슬할 정도로요. 그 뒤부터였을까요, 앤이 자기를 점점 안 꾸미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최소한 단장이라도 했는데 머리는 산발에 화장도 대충 했죠, 그 때 앤에게 아주 오래되고 가까운 사람이 앤을 보듬어 줬어요. 진짜 웃긴 게......여자는 마음이 약해지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앤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의지했고 돈이든 시간이든 뭐든 다 가져다 줬어요. 상처투성이가 된 앤은 그 사람 말에 무조건 순종했어요. 아마 그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앤의 모든걸 가지는 것도 일은 아니었을 걸요? 앤의 소중한 것까지 전부 다......하지만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더라고요. "
 " 그 사람은 왜 그런 거죠? "
 엘의 물음에 루시는 붉은 머리칼을 강하게 눌렀다가 떼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정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깊은 심호흡이 지나갔다.
그리고 흐릿한 기억은 점점 살을 붙여갔다. 
 " 글쎄요...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그 사람은 이런 식으로는 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첫사랑만큼이나 앤과 오랜 시간을 지낸 그 사람으로써는 앤에게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상처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는 관계로는 있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앤의 마음이 값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싫었겠죠. 이대로 그녀를 취하면 될 일이지만 그건 아주...너저분한 년일 뿐이니까요.
 앤은 그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했지만 그 가까운 사람은 앤과 연인 관계가 되기를 거부했어요. 뭐 이런 저런 말은 길게 했대요. 건방지게도......하지만 아무리 말을 이쁘게 포장해도 난 지금의 너를 이성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로 결론이 났죠. 앤은 상처를 입은 셈이에요, 두 번의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사랑도요, 앤의 상태는 급속도로 더 나빠졌어요. " 
 루시는 웃었다.
아이비와 엘, 두 사람 중 누구도 루시가 웃는다 해서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루시의 웃음은 지금껏 그녀들이 살면서 보아 온 그 어떤 웃음보다 서글프고 허탈했기 때문이었다.
루시의 눈은 안쓰러운 친구의 기억을 쫒고 있었다.
 "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동안 지냈던 앤은 몹시 좋지 못한 이유를 만들어 자기 자신을 보호했어요. 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첫사랑이 자신을 떠난 것도, 자신이 새로운 사랑을 온존히 보존하지 못했던 것도 마지막으로 남았던 사람 마저 자신을 떠난 것도 이런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자기 자신이 주제넘게 누군가를 함부로 사랑하려고 한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여러 개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 자신이 못된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면서요.
 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이제 가슴 뛰게 해주는 무언가가 아니라 비참함을 알게 해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어요. 앤은 가슴 깊숙히 박힌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그대로 실연의 아픔을 지닌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려 했지만 몇 번이나 고배를 마셨죠. 수도 없이 직장을 옮겼어요 그러다가 결국 지금 있는 마트의 시간제 근무로 취직했죠. 앤은 이제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의지하려고만 하니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면서요. 그래서 결국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했어요. 그러다......여러분을 만나기 전의 앤이 된 거죠. "
 실성에 가까운 웃음이 끝나고 루시는 앤 하우스라는 사람에 대해 마지막까지 정의했다.
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혐오의 방향을 돌려 버린 것이었다.
타인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았던 어린 소녀는 상처투성이인 여자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모든 걸 해내려고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이비는 이제사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린 팔, 그리고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던 앤의 모습을.
큰 상처를 입어 괴로워하는데도 결코 다른 누군가를 탓하지 않던 작고 여린 그녀의 마음을.
그것을 아는 댓가는 아이비가 예상하던 그 무엇보다 거대했다. 
 "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무거운 이야기가 끝나고 먼 기억을 바라보던 루시는 이제 눈 앞에 있는 엘과 아이비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슬퍼했고, 한 사람은 씁쓸해했다. 
 " 저는 앤을 통해 두 분을 지켜봤어요.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지금의 앤이 있게 두 분이 도와주셨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두 분께는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드려도 모자라요, 하지만 앤과 정사를 나누고 앤과 사랑을 속삭이고 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자 한다면 저로써는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
 루시는 어제 들었던 일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을 대강적으로 모두 이해했다. 
그러나 루시 데자이어는 알아야만 했다.
과연 이 두 명의 여자가 어떤 마음으로 앤을 대하고 있을까
그 질문의 해답을 듣고 싶었다. 
 "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앤은 순수하지 않아요. 첫사랑도 따로 있고 실연의 상처도 여러 번 겪었죠. 그런데다가 사랑을 얻어도 이 사랑이 언제 떠나갈까 두려워서 매번 무서워하고 있죠. 여러분이 앤을 만났을 때 앤이 계속해서 다른 이에게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속앓이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요. 어차피 말해봤자 알아줄 사람 없고 그게 결국 또 새로운 아픔을 불러올 게 뻔하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두려워진 거예요. 그렇지만 여러분 덕에 소중한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버렸고 앤의 식은 마음에 다시금 불이 지펴진 거예요. 앤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어요. 앤의 마음 전체를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겠죠. "
 루시는 구태여 앤의 장점을 말하기보다는 앤의 단점을 먼저 말했다.
장점은 두 사람이 어찌 보면 루시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다만 단점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장점은 당연해지고 단점은 부각되기 마련이었다.
루시는 그 부분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 가까스로 얻은 사랑이에요. 엘, 당신 앞에서 두 명을 사랑할 수 없다고 울었죠, 아이비, 당신에게는 몇 번이고 사랑을 확인했죠...그건 다 앤이 사랑을 잃기 싫은 행동 때문이었어요. 지금의 자신을 만들 수 있게 해 준 엘에게는 무한히 감사를 느끼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변화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주는 아이비 언니의 마음에도 큰 흔들림을 받은 거예요. 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게 이 길뿐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
 두 명의 여자가 루시의 저울대에 올라왔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동안 그녀들이 앤을 만나고 보고 들었던 것, 그것들 전부에 해답이 있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고 실망했나요? "
 루시가 물었다.
사실 이것이 진짜 목적 중 하나이기도 했다.
친구의 가장 나쁜 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을 말해준 것은 정을 떼라는 의미라기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을 사랑할 수 있느냐를 묻고 싶었다.
엘은 입가에서 손을 때어냈다. 
그리고 배에 힘을 주고 망설임없이 입을 움직였다. 
 " 천만에요, 저는 제 자신이 어떻게 되든 앤이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앤이 다른 사람을 만나든, 저는 그저 놀잇감에 지나지 않더라도 괜찮았어요. 저는 그 모든 걸 각오하고 내 사랑에게 다가간 거예요. 그러나 그런 저를 품겠다고 한 건 앤이었어요. 앤은 그런 저도 소중하다고 말해줬어요. 그리고 여자친구가 되도록 허락해 줬죠. 결국 앤은 자기 자신만 변한 게 아니라 저까지 변화시킨 거에요. "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 때문에 시작한 일이 지금 여기까지 왔다.
단순한 애정이 아닌 좀 더 복잡한 감정, 그리고 소중함과 사랑.
 엘은 비로소 자기 자신도 변화하였음을 깨달았다.
 " 우리 여보는 장차 우리 마트의 부점장이 될 사람이에요. 그 정도 인생경험이 없으면 진상들 상대로 일하기 힘들죠, 그리고 끊임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것, 그것이 뭐가 나쁘죠? 사람은 누구든 애정을 쏟을 상대가 필요하죠. 그 경중만 다를 뿐이에요, 지금까지 여보가 그딴 년들 때문에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면 내가 그만큼의 사랑을 주겠어요. 열 명 분이든 백 명 분이든 얼마든지 주겠다고요. 난 절대 그녀를 버리지 않을 거니까. "
 아이비 역시 루시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40년이 조금 안 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 많은 상처와 인간관계를 맺어온 아이비는 그 끝에 여린 소녀를 찾았다. 
이곳이 그녀가 다리를 멈추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비는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아이비는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걸을 생각이었다. 
앤이라는 이름의 작고 어린 소녀와 함께.
 " 한결같으시네요 두 분은. 앞으로도 앤을 사랑할 마음이 있나요? 이 모든 사실을 안고서도? "
 루시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깊은 심호흡에 의해 루시의 가슴이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창문을 보던 루시는 두 사람에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 그렇다면 딱 한가지만 더 말씀드릴게요. 두 분이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 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관계보다 더 나아간 관계를 얻고 싶으시다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절대 그녀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요. "
 앤과 아이비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과도한 말이나 증거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짧고 간결하게, 그러겠다고만 말했다.
루시는 그 어떤 증거보다 그 말들이 신빙성있게 들렸다. 
 " 감사합니다 정말로... "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90도가 되도록 허리를 숙였다. 
어찌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는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엘과 아이비가 루시의 허리를 펴도록 만들었다.
루시는 몇 초나 더 허리를 숙인 다음 남은 커피를 한 달음에 마셨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시작했다. 
 " 저에게 안어울리게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했나요? 호호호~시간을 너무 오래 뺏어서 죄송해요. 제가 할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그럼 이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게요. " 
 루시는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다시 원래대로의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장난끼 많고 밝은, 그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루시 데자이어는 그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값을 먼저 치루고 카페의 문고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아이비의 목소리가 들려 그녀를 붙잡았다.
 " 데자이어 양,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
 " 네. "
 루시는 제 자리에 멈춰 서서 아이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비는 잠시 동안 뜸을 들이다 질문을 시작했다. 
 "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궁금증이 하나 생기네요. 당신이 앤의 오랜 친구인 건 알겠어요. 그리고 우리 둘이 끼어들지 못할 만큼 각별한 시간이 있다는 것도 알겠네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까지 우리에게 해주는 이유가 뭐죠? 제아무리 친구라도 친구의 연애사 때문에 이렇게 생판 남에게까지 고개를 숙이고 부탁한다는 건 단순히 친구가 연인을 잘 부탁한다는 수준이 아니에요. 혹시 앤에게 부탁받았나요? 아니면...... "
 "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래요!......친구가 답답하게 연애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여러분은 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 
 아이비는 루시의 등밖에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루시가 무척이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팔이 누가 보아도 크게 떨리는데다가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비의 푸른빛 눈은 조용히 그녀의 등을 주시했다.
엘은 무슨 말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아이비의 팔을 잡았지만 정작 아이비의 눈을 보고 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앤에겐 상처가 많다고 했죠, 저도 그 상처를 입힌 사람들 중 하나에요. 그것도 앤이 힘들 시기에 가장 잔인하고 애달픈 상처를 남겨 버렸죠. "
 루시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대로 카페 문을 활짝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는 낭패를 보았다.
최대한 억누르고 억눌렀던 목소리가 결국 마지막에는 가늘게 새어 나왔다.
루시는 카페 문에서 벗어나 벽에 몸을 기댔다.
그녀답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실패했다.
영업인으로써는 훌륭하게 마이너스인 모양새였다.
아이비가 말한 그 한 마디 때문에 잊고 지냈던 루시의 마음까지 크게 흔들린 모양이었다.
루시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금방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퉁이를 돌려고 했다.
그러나 루시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모퉁이 쪽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 앤. "
 양반은 못 되는지 가벼운 활동복 차림의 앤이 루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앤은 루시가 그녀가 사는 동네까지 왔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앤의 얼굴은 매우 차분해 보였다. 
 " 여긴 어쩐 일로 왔어? "
 앤은 대답 대신에 그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평소와 같은 타격음, 그리고 정강이를 붙잡는 루시까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앤은 퍽 부드럽게 정강이를 걷어찼고 그 다음 루시를 꼭 껴안아 주었다.
 " 바보. " 
 퉁명스러운 앤의 목소리가 루시에게 들렸다. 
 " 아파... "
 루시는 아픈 곳이 다리인지, 아니면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 엘이랑 언니가 똑같은 내용으로 문자 보냈길래 이상해서 와 봤어. " 
 앤은 자신이 이곳까지 온 목적을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간이 비지 않고 같은 곳에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앤의 집에서 그렇게 먼 곳도 아니었다. 
 " 어디까지 말했어. "
 앤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루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털어놓았다. 
 " 필요한 내용은 다. "
 
 " 네가 날 찬 것도? " 
 젖어있는 루시의 눈가에 눈물이 새어 나왔다.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녀 자신이 해 놓고,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눈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시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루시를 다독였다. 
 " 왜 그랬어...그런 걸 말하면 너만 욕먹잖아. "
 " 널 위해서였어. "
 " 알아. " 
 앤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 앤. "
 " 응? "
 " 지금도 내가 싫어? " 
 루시는 앤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물었다. 
앤은 발꿈치를 살짝 들어 루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쪽 소리나게 붙였다.
그런 다음 다시 발꿈치를 내렸다. 
 " 난 지난 20년동안 네가 싫은 적 한 번도 없었어. 내 소중한 친구, 내가 힘들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 그리고 나를 사랑하기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날 차 준 유일한 사람. " 
 루시는 앤을 꽉 껴안았다.
앤은 그녀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모퉁이 한복판에 서서 그녀의 등을 계속해서 두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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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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