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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안녕 작가지망생 백붕이 버터롤빵이야.
항상 기다려줘서 고마워.
최근에 일이 바쁘고 개인사정이 생겨서 연재가 갑자기 늦어지긴 했지만 잘 보던 소설이 갑자기 끊기고 작가의 소식이 없어지며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의 이야기를 더는 알 수 없음에 상심한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조금 늦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적고 있어.
꼭 이 이야기에 행복한 마침표를 찍고 싶어.
항상 꾸준한 사랑 보내주고 내 글을 읽어주서 고마워.
오탈자 지적이나 궁금한 점, 피드백 등은 댓글로 달아주면 작중 스포일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실히 답변해줄게.
각설하고 이번화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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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은 낙인과 같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 행복해진다 하더라도 지워지지는 않는다 ]
엘은 문고리를 붙잡고 카페를 나설 즈음 우연치 않게 앤을 만나게 되었다.
사전에 넣은 연락이라고는 오늘 카페에서 앤의 친구인 루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엘과 더불어 아이비도 같은 내용을 보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앤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게를 찾아온 듯 했다.
앤은 골목길 모퉁이에서 루시를 끌어안고 있다가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왼손은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입술 위에 올라갔다.
엘은 조용히 카페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뒤 루시는 앤에게 무어라 인사를 하고 골목길 안쪽으로 사라졌고 루시의 발소리가 완전히 멎었을 즈음 골목길 안에서 앤이 다시 나타났다.
마침 엘의 뒤에서도 아이비가 나온 상태였다.
앤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다들 여기 있었네요. "
앤은 아이비와 엘을 보고 말했다.
몇 걸음을 옮겨 앤은 엘과 아이비를 한 번씩 안아주었다.
두 사람이 또 부딪히지는 않을까 했는데 앤이 있어서인지 한 사람의 포옹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한 사람은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 이야기는 끝났어요? "
" 네. 오래 안 걸렸어요. "
엘은 앤의 질문에 간결하게 대답해주었다.
" 그럼 난 이제 가봐야겠네, 아직 결산보고가 안 끝났어. "
문득 시간을 확인한 아이비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고개 방향에는 유리 마트가 있었다.
아무리 퇴근시간이라고는 해도 아이비는 점장으로써 마지막까지 매장을 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의무도 잠시 내려놓고 온 상태였다.
앤은 서둘러서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
지금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트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었다.
" 나 오늘 늦는데..... "
아이비가 말 끝을 흐렸다.
앤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주어야 했다.
" 부점장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어서 가 봐요. "
" 오늘은 꼭 연락 줘야 해? "
" 네 그럴게요. "
이미 선례가 있어서 그런지 아이비는 거듭 앤에게 연락을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앤은 이번에야말로 아이비가 토라지지 않도록 제 때에 연락을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 그럼 나 갈게 여보야. "
" 고생하세요 언니. "
아이비로부터의 귀여운 애칭을 듣고 앤은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었다.
다만 엘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오글거리는 저 호칭을 듣고 몸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나마 아이비나 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표정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아이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고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닌 척 하지만 마음은 많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아이비가 사라지자 엘은 자연스럽게 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잠시 아이비의 눈치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앤이 번쩍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 주자 그녀는 금방 헤실거리면서 사라졌다.
엘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앤을 자신의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 친구는 잘 갔나요? "
엘이 물었다.
" 네, 잘 다독여서 갔어요. "
" 다독이다뇨? "
" 별 거 아니에요. 가끔씩 루시는 옛날 일을 꺼내서 이야기하거든요.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혼자서 축 처지고 말아요. "
앤의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녀의 얼굴 표정에 많은 감정이 담겼음은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엘이 방금 전 루시에게 여러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것이 마냥 좋은 이야기들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그건 즉 앤의 과거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
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은 지금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앤은 동요하지 않았다.
" 아참, 루시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
앤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다소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눈가 옆을 살포시 눌렀다.
" 미안해요. 감추고 싶은 이야기였을 텐데. "
엘은 진심어린 표정으로 사과했다.
" 아니에요. 언젠가는 알게 될 이야기였을 거에요. "
앤은 천천히 손가락을 올려서 어깨를 끌어당긴 엘의 손을 붙잡았다.
" 사실 제가 말하려고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루시가 오히려 팔 걷고 나서준 거라고 생각해요. "
엘은 조기 퇴근, 앤은 집에 있다가 나온 거였으니 두 사람의 행선지는 자연스레 앤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 엘의 거주지 변경은 정해지지 않았다.
집을 옮기는 일은 일단 포기했지만 엘은 앤의 의사에 따라 그녀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것은 허락받았다.
그러니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길고 험준해 보이는 언덕길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 그럼 그 이야기도 진짠가요? 그 언니가 앤의... "
" 네. 아주 잠깐이지만 사귀는 사이였어요, 제가 멋지게 차였지만요. "
앤은 말하는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낭랑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른 사람과의 실연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데 앤은 꿋꿋히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앤은 당당하려고 했다.
최소한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는 하지 않았다.
" 루시가 그런 일도 말해 줬어요?. "
앤이 엘의 말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요 그녀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비 언니가 눈치챈 거죠. 난 무슨 말인지도 몰랐는데 아이비 언니는 단순히 친구 사이에 할 이야기 수준을 넘은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
엘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소 창피하긴 하지만 엘은 루시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었고 아이비가 루시를 불러세울 때만 해도 왜 그러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이비는 엘이 보지 못하던 부분을 보고 있었고 도리어 루시가 어떠한 관계였는가를 추측했다.
루시와 앤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었다는 걸 안 것은 조금 나중이었다.
" 그랬군요. 언니는 역시 눈치가 정말 빠르네요. "
앤이 말했다. 그녀는 엘의 품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좀 의외였죠? 엘을 처음 만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 것 같은데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니요. "
" 앤 나이에 여자 한 둘 바꾸는게 뭐 흠이 될 만한 일인가요? 학교 다니는 애들도 연인이 막 바뀌는데요. "
" 실망했다면 미안해요, 저는 엘이나 언니가 첫사랑도 아니었고 그때 말은 못했지만 사실 키스도, 처음은 아니었어요. "
앤은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다.
엘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확실히 앤은 자기 입으로 키스가 처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닦으면서 무척이나 부끄러운 모습을 할 뿐이었다.
이제사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오만한 엘의 상상이었지만 그것이 앤의 나이에 딱히 흠 잡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엘은 오히려 그만큼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 그렇지만 이 아래를 허락한 것은 언니와 엘뿐이에요... "
앤은 오른손으로 거꾸로 V자를 만들어 아랫배 부근에 손을 대었다.
엘은 살짝 시선을 회피했다.
앤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그녀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하는게 어찌 보면 살짝 야해 보이기도 했다.
" 물론 이 이상 가지고 그 사람이랑 다투긴 했지만 결코 허락하지는 않았어요. "
" 아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었죠...... "
엘은 루시에게 들은 말로 어설프게나마 아는 척을 해 보았다.
" 루시는 정말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모양이네요. 언제 한번 단속을 더 시키던지 해야지, 안그러면 온갖 부끄러운 일이 다 드러나겠어요. "
앤은 살짝 관자놀이를 짚는 시늉을 했다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 물론 지금 상황이 예전을 떠올리게 만들기는 해요.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건 이해해요. 그러나 어느 쪽도 포기하기 싫었다는 욕심이 있었고 두 사람 다 소중히 하려다가 두 사람 모두를 잃은 셈이에요.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요. "
앤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후회하나요? "
엘이 물었다.
" 엘 앞에서 울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한 평생 욕심을 부리지 않던 내가 두 사람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을 또 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 생각했어요. 과거에 그런 일이 있으니 언니나 엘에게 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건 아닌가 했지요. 하지만 엘은 날 이해해 주었고 아이비 언니도 이해해 줄 거라 믿어요. "
엘은 다소 오버스럽게 팔에 힘을 주어 자신쪽으로 앤을 끌어당겼다.
앤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어 그녀의 가슴에 기대었다.
"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저는 앤이 어떤 사람이었다 해도 괜찮아요. 지금 내가 보는 앤이 진짜 모습인 게 틀림없거든요. "
"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의 진짜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를 때가 가끔 있어요. "
"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게 사는 거지. "
엘의 입에서는 짐짓 나이 많은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이 나왔다.
" 아줌마 같아요 엘. "
엘은 앤의 말을 듣고 뜨끔했다.
사실 앤의 마음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여성 잡지에 적혀 있는 말을 기억해내고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엘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에 넘어가던 게 보통이지만 앤은 너무도 정확하게 엘을 잘 알고 있었다.
" 들켰나요? 사실 그냥 어디서 본 말을 인용했어요. "
" 아 티 나요, 아이비 언니도 그런 말은 안하거든요. "
" 그녀랑은 비교되기 싫은데요, 제일 싫어요 그건. "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어찌나 그녀들의 웃음이 화목한지 집으로 가는 좁은 길목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그녀들의 얼굴을 슥 보고 퍽 인지한 모습으로 지켜보다 사라졌다.
그들의 조그마한 보금자리는 이제 오 분도 남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 지금도 첫사랑을 못 잊나요? "
한참을 웃다 짐짓 다시 진지해진 엘이 물었다.
엘은 집으로 가기 전 조그마한 편의점 사거리에서 앤의 두 팔을 잡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앤은 잠시 엘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아주 어렵게 대답했다.
" ...어느 의미로는요. "
홀가분한 표정이지만 씁쓸함이 조금 남아 있는 앤의 대답이었다.
" 아직도 그 첫사랑이 좋은가요? "
엘은 앤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앤은 금방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 그건 아니에요. 단지, 첫사랑은 잊으려고 해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뿐이에요. 제 마음 속에 방이라는 게 있다면 그 방 한 켠에서 먼지덮인 채 쌓여가는 오르골 상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
" 감히 말하지만 앤, 언니의 이야기를 듣자니 그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듣고 듣고싶은 것만 들어서 앤을 내던지고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똑같은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이 앤을 가지지 못할 뿐이라면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마음이 대체 어디에 남아 있죠? "
엘은 자신도 모르게 거센 어조가 나왔다.
그녀였기에 이 정도에서 끝나 망정이지 루시의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비의 상태를 떠올리자면 이 정도는 훨씬 모자랐다.
아이비였다면 그녀들의 소재를 아는 순간 반 죽여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소중히 하는 이 여자를, 그녀들은 마치 헌신짝처럼 상처를 남겨 두고 버린 마당이었다.
앤은 엘의 손을 꼭 붙잡고 조금씩 좌 우로 움직였다.
" 메어리는 학교다닐 때 루시 이외에 나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준 착한 사람이었어요. 힐다는 내가 이미 메어리와 사귀고 있는 걸 알면서도 지극정성으로 날 대했죠. 루시가 질투할 만큼요. 내가 힐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끝은 나지 않았을 거에요. "
메어리, 힐다, 모르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을 말할 때 앤의 표정에 수심이 차는 것을 보고 엘은 그 이름들이 루시가 말했던 앤의 첫 사랑과 앤을 거듭 좋아한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몇 년은 지났을 텐데도 앤은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추억을 느끼는 것 같았고 녹여낸 회한을 마시고 있었다.
" 그 사람들은 지금쯤 앤은 안중에도 없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있을 텐데요? 한 때 속삭인 얄팍한 사랑일랑 까맣게 잊고요. "
엘이 다소 표독스럽게 말했다.
" 맞아요. 아마 지금쯤 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죠, 결혼했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이번 일로 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요. "
앤은 부정하지 않았다.
엘이 생각하기에 버림받은 기억은 그 무엇보다도 두려울 텐데도 첫사랑을 잊을 수 없다는 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앤의 말 때문에 엘은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비록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었다 해도 나는 그 사랑이 정말로 기뻤어요.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었거든요. "
앤의 미소는 달콤했지만 동시에 상처를 애써 집어 삼키려고 했다.
값싼 동정 따위를 기피하던 엘로써는 그녀들을 만나기 전엔 기억 속 얄팍한 거짓 사랑에 행복해야 할 만큼 앤의 처지가 안쓰럽다는 것에 억하심정이 들었다.
엘은 정말 그녀들을 만나면 안면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앤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엘, 걱정하지 말아요. "
앤은 자애로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두 사람과의 기억은 마음 속 오르골에 담아뒀어요. 가끔씩 그리울 때 꺼내듣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작은 상자에 다시 들어갈 기억이에요, 지금 나는 엘을 만났고 아이비 언니를 만났어요. 지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거든요. 아, 루시도 여전히 날 아껴주고 있긴 하지만 그 때랑 지금은 조금 달라요. 나는 루시를 아꼈지만 루시는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그 화풀이를 하고 있어요. 아마 죽을때까지 할 거예요. 루시가 날 찬 데에 대한 소심한 복수에요. "
앤은 잊어버렸다는 듯이 첨언했다.
그만큼 루시는 그녀에게 있어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듯했다.
언제나 폭언을 퍼붓고 정강이를 걷어차도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때의 아픔을 승화하는 앤만의 방식이었다.
" 역시 그 언니도 진심으로 사랑했군요. "
엘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들이 아직 지금 앤의 사랑을 받는다 해도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새로운 추억으로 잊혀져갈 추억을 덧입는 것뿐이었다.
" 네. 정말로 좋아했어요. "
지금도 그런가요? 란 질문이 목 안쪽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앞서 말한 두 사람을 떠올릴 때보다 더 추억에 젖어있는 모양이었다.
엘과 아이비에겐 터무니없는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 옛날 사랑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
앤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나갈 미래까지.
앤은 연약하디 연약한 사람이지만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엘은 그런 그녀의 곁에 언제까지고 남아있으리라 여겼다.
" 그러고보니 언니를 ' 아이비 언니 ' 라고 불러주네요? "
앤은 엘이 말하는 하나하나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엘은 무슨 말인가 싶다가 짧게 웃었다.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달라졌지만 엘은 개의치 않았다.
앤은 분명 지금 이 순간에 다른 여자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어했다.
" 네 뭐...마음에는 안 들지만 일단 언니니까요, 예의는 차려 주려고요. "
" 언니랑 싸웠어요? "
" 싸우다니요, 그런 섭섭한 말 하지 말아요. 내가 언니랑 싸우면 엘이 슬퍼할 거잖아요. 그냥 이야기만 했어요. 서로의 입장을 확실히 하구요. "
엘은 행여나 앤이 오해할까 싶어서 오해하지 말라면서 제대로 두 사람 사이를 짚어주었다.
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을 보았고 아직까지 두 사람이 매장 입구 앞에서 언쟁을 나눈 일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앤의 핸드폰으로 친하지 않던 사람의 알림 메시지가 날아왔고 앤의 학창시절 사람들까지 이거 너 맞냐면서 물어보는 신세였다.
앤은 회피도 해보고 변명도 해봤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통하지 않아 그냥 묵묵히 응대하기로 결정되었다.
조금이나마 잊혀졌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 앤은 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발 나랑 상의 안하고 그런 일좀 벌이지 말아 줄래요? 예를 들면 엊그제 마트에서 일어난 소동 같은... "
" 아 그거요? 정말 장난 아니었죠. 회사에서도 내 이야기 사람들이 많이 하더라구요. 언제 그런 사람이 생겼나면서요. "
말하고 나니 엘은 앤을 뭐라 할 입장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정작 그녀 역시 자신이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이 한 일인 양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엘에게는 꼭 그러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앤에게만 특별한 존재가 된다 해도 좋았다.
그러나 막상 자신을 지지해 주는 앤의 말을 들으니 그것만으로는 만족하기 싫은 마음이 되었다.
최소한 앤에게 그런 인정을 받은 엘 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그 결과는 엘이 생각해도 상당히 과해서 엘과 아이비, 그리고 앤은 전에 아닌 인기인이 되었다.
"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세요. 저도 이제 출근하면 하루에 다섯 번은 점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맞냐면서 계속 물어봐요. "
" 앤 입장에서는 좋은 것 아니에요? 아주 든든한 뒷심이 생겼더구만요 뭘. "
" 엘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마트에서 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는데 눈이 희번뜩하게 바뀌어서는 널 최고의 관리직으로 바꾸어주겠다나 뭐라나. "
엘은 그녀가 몇 번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름이 비올라였나,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마트에서 일하다 온 경력있는 사람이고 원한다면 더 높은 자리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현재 위치에 만족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런 사람이 앤을 부던히 신경써 준다니 엘 입장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그녀의 장래와 직장을 생각한다면 아이비 프로스트란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인복이 정말 좋네요 앤. "
엘이 시선을 약간 밑으로 내려뜨리며 말했다.
" 이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
앤은 깊은 한숨이 나왔다.
" 그러고보니까 할 말이 생겼어요 앤. "
" 네 뭐에요? "
" 왜 나한테는 말투가 계속 점잖아요? "
엘의 말에 앤은 뚱한 표정이 되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는 평소에 보기 힘든 흑색 눈망울을 담고 있었다.
곧 앤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 도대체 루시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거예요? "
약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이상 루시의 이야기를 거론하면 다음에 만날 때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 언니에게는 말 편하게 하면서 나에게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서요. "
엘은 다소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반 쯤은 장난, 반 쯤은 진심이었다.
엘이 아무리 주도권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은 관계라고 해도 엘은 네 살 연상인 그녀가 꼬박꼬박 점잖은 말투로 대하는 게 마음에 남았다.
루시에게서 들은 앤의 모습은 엘이 모르는 모습도 많았다.
엘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조금 앤을 골려 주려는 마음이었지만 약간 당혹스러워 보이는 앤의 입술을 보니 엘은 연하의 장난끼가 다시 발동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 이제 여자친구가 되었으니까 우리 한 계단 정도는 더 넘어도 되지 않을까요? "
앤은 주거단지 입구 담벼락에 앤의 등을 살포시 기댔다.
그리고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겨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앤은 주변 사람들을 신경썼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지나다니긴 했다.
가끔 낮과 밤을 달리 하는 직장인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엘과 입술을 맞추었다.
머뭇거렸던 것과는 다르게 앤은 두 팔로 담벼락을 지지하고 엘의 혀를 탐했다.
엘은 조금 천천히 앤이 시키는 대로 혀를 움직였다.
그리고 나서 혀를 빼들자 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붉어진 모습으로 다급히 중얼거렸다.
" 사람들이 많아요 엘... "
" 그런 것 치고는 정열적이네요, 가끔 난 앤의 색다른 모습에 혀를 내두를 것 같아요. "
앤은 고개를 저으면서 엘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 오늘은 어떻게 할 꺼에요? "
" 그렇네요, 자고 갈까요? "
사실 그럴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그녀의 집에서 일어나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그럴 생각을 못했던 것이 뭇내 아쉬었다.
" 그 전에 한잔 하구요. "
엘은 먼 발치에 있는 술집을 바라보았다.
그리 좋은 가게는 아니지만 적당히 여자 둘이서 술을 넘길 만한 수준은 되는 가게였다.
엘의 입에서 술 이야기가 나오자 앤은 괜스레 손가락으로 엘의 볼을 찔렀다.
엘은 볼이 움푹 들어가면서도 애써 앤이 있는 방향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 엘도 루시처럼 술 좋아하는 거 아니지요? "
" 그녀가 얼마나 술을 마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음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오히려 앤이에요. 듣자하니 술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먹는다면서요? "
" 아니거든요... "
앤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비가 해준 말이 있으니 엘은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중간 정도 언덕길을 걸어 내려왔던 엘은 잠시 동안 생각을 하다 마음 속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앤이 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 어쩔 수 없군요. 바깥에서 술 마신다고 해 봤자 내가 앤을 업고 집에 들어갈 게 뻔하니 오늘은, 그냥 간단하게 집에서 마실까요? "
" 치킨 수프 해주면요! "
엘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최근에는 앤이 그녀의 요리를 그리워할 만큼 요리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 얼마든지요. "
엘은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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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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