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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건전] 죄와 쐐기

세로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2.10 21:42:57
조회 580 추천 22 댓글 5
														

항상 언니가 눈가에 밟힐 때마다 뭐랄까. 초조함 같은 것이 들어서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자기 형제자매끼리 잘만 지내고 너무 친한 나머지 욕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거다 할 것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원인이라도 생각해보면 한없이 상냥하고 끝없이 나를 챙겨준 언니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 감정이라는 데에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어느 한 계기로 바로 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드는 것이 정과도 같은 감정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언니에게 함부로 대할 수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 * *

 

“아린아. 아침이야.”

 

정신이 반 정도 들어와 있었지만 일부러 언니가 깨우러 올까 기대하는 마음에 눈을 감고 있으니 그 바람을 신이 이루어 준 듯 정말로 언니가 방에 왔다. 조그만 소름이 허리춤을 타고 흐르는 느낌에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방금 일어난 척 눈을 서서히 떠보니 하늘색 앞치마를 입고 있는 언니가 시야에 확 들어왔다. 아침 햇살이 밝아서 그런지 홧홧한 느낌이 눈 주변을 감쌌다.

 

“밥 먹자. 얼른 일어나? 응?”

 

어린애를 달래듯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나는 어째서 저 말꼬리를 올리는 음을 의문형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쓸데없는 물음을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언니 혼자서 아침 차렸어?”

 

“별 거 안했어.”

 

“그래도..”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자 언니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뺄 뻔 했지만 다행히도 안 뺀 덕분에 포상이 돌아왔다. 지금 아직 씻지 않아서 냄새나지 않을까 조그마한 걱정이 들었다. 은근 낯간지러운 감각에 애써 눌렀던 소름이 다시 돋았다.

 

“정신 차리고 나와. 아린아.”

 

그 말이 지금 풍경의 끝임을 암시하는 걸 알고 있었다. 언니의 손이 떨어지니 머리카락이 혼자서 살살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불 속에 숨겨둔 손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곧 들려오는 닫히는 문소리가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내 방이 이렇게 적적했던가.

 

일출이 한참 지난 시각에서 방은 드디어 빛을 들이고 있었다.

 

* * *

 

사람과의 어느 관계든 우열관계는 분명히 있었다. 말로는 꺼내지 않는 오묘한 느낌. 그 느낌을 말로 꺼내는 것은 분명 관계의 파탄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언니와의 우열관계를 가리자면 분명 나는 열세에 속해있었다. 딱히 이런 관계가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공부를 잘했고 나이도 많으며 요리도 잘하는 언니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속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그냥.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입안에 맴돌았을 뿐이었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그리 사람이 강할 수가 있어?”

 

아침을 먹은 후 혼자서 무슨 편지를 그렇게 고민 들여 쓰는지 펜을 잡고 신기한 묘기를 보여주던 언니가 우뚝 멈췄다.

 

“응? 강하다니.. 난 무른 사람인 걸.”

 

언니는 조금 쑥스러운 듯 혼자서 손을 매만지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저런 옅은 겸손도 언니의 강한 점 중 하나였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해 만지면 찾아오는 건 따끔거림일 뿐. 장미는 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오는 건 유혹하는 붉은 빛들.

 

“아. 그래도 우리 아린이한테 좋은 팁 하나 알려줘야겠다.”

 

“좋은 팁?”

 

“바로 약한 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 울지도 말고 누구에게 의존하지도 말고 혼자서 참아내는 것. 이것들만 해도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일은 없지.”

 

하. 그렇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감탄을 막을 수 없었다. 몸으로 겪고 있던 것을 말로 재구성하여 들으니 진리라도 깨우친 것처럼 순간 초점이 흐려졌다. 확실히 언니는 약점이랄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흐트러진 모습은 물론이고 눈물 한 방울조차 내비친 적 없으며 자기의 이야기는 대부분 숨기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들었다.

 

어느 날에 반에서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 못할 이야기가 둥둥 흘렀을 때, 고 1 때 복소수랑 한창 싸우고 있었을 때. 언니가 누군가랑 대판 싸워서 곤죽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숱한 호기심으로 간신히 수소문해본 결과 소문의 주인공의 얼굴은 정말 곤죽이었다. 원체 말끔했던 얼굴로 유명했던 반 양아치 언니는 얼굴에 푸르며 검은 먹물들이 펴져있었다.

 

우리 언니는 곤죽을 만든 대가로 배를 흉기로 찔렸다고 했었다. 가위였네, 커터칼이었네, 샤프였네 등 소문을 무성히 들려왔지만 직접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터진 일주일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하나도 안했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된 계기는 평범했다. 그냥 언니가 평소처럼 나를 안고, 내가 언니를 밀어내고 있을 때 얼핏 들춰진 잠옷 때문에 보이는 골반위의 두꺼운 거즈들을 봤었다. 너무 말끔한 피부 위에 하얀 거즈들은 퍽 어울렸다.

 

소문이 사실인 것을 실감하자 물밀 듯 여러 서러운 감정들이 밀려왔었다. 내가 못미더워서? 언니는 안 아팠어? 왜 그걸 혼자 견뎌? 우리 가족 아니야? 혼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언니를 안고 말해도 언니는 그저 침묵한 채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언니 편이야.”

 

“언니 편.. 응. 고마워.”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언니를 안았다. 직접 안아본 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체온이 은근 반가우면서도 아팠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저 안고 있었다. 후회 하나 없는 순간을 꼽으라면 분명 이 순간을 뽑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스스로가 대견해서, 장미를 직접 안았던 내가 대견해서.

 

이렇게 언니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자랑도 일체 안하며 약한 모습도 일체 안보여주는. 무엇을 알아야 서슴없이 대하겠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이상한 거리감을,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할 때처럼 그 미칠 것 같은 어색함을 항상 견뎌내야 했다.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마음 상하지는 않을까. 날 보고 실망할지도 몰라. 같은 생각들이 항상 머릿속 깊숙이 박혀있었다.

 

“흠흠. 어쨌든 아린이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도록. 언니에게는 보여줘도 되지만?”

 

혼자서 침묵한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날 보더니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듯한 언니의 어투에 조바심이 들었다. 얼른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백지가 된 머릿속을 헤집으며 혀로 안쪽 치열을 훑었다. 그다지 효과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모르게 밴 습관이었다.

 

“아린아. 갑자기 해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 들어줄래?”

 

“뭔데?”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줄래?”

 

“무..무슨”

 

살짝 뒤로 물러나자 언니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뜨뜻한 열기에 땀이 나올 것 같아 걱정이 들었다. 아니 사실 이미 축축해진 것 같았다. 언니도 느끼고 있겠지? 근데 아무런 말도 안하네. 날 배려해주는 건가? 모르는 건가? 아니 손이 문제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라고?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 상황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이름을 불러? 언니의 이름? 이서ㅎ... 뒤에 나올 말들을 생각하니 뇌가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냥 정보로써만 담아두었던 단어가 말로 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려하니 뇌가 멈추었다.

 

그 사이에 계속 내 눈을 쳐다보며 양손을 뭉근히 문지르는 언니 때문에 왼쪽 팔부터 오른쪽 팔까지 근육이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에서 홍수가 난 건 오래전 일이었고 이젠 지진이 날 것 같았다. 이미 조금씩 후들거리는 팔이 들킬까 두려웠다.

 

혼자 입을 닫고 덜덜거리는데 언니도 재촉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애써 웃어넘길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났다. 언니의 이름을 말하라니.. 그 상상만 해도 시야가 깜깜해졌다. 희미해져가는 시야 속에서 언니의 하얀 블라우스 왼쪽 손목 단추 하나가 빨간 색으로 물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아니 손목이고 뭐고 언니 이름?

 

“아린아.”

 

“흐앗! 어. 응. 언니...”

 

혼자서 언니 말 듣고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말꼬리가 흐려졌다.

 

“언니 이름 부르기 싫어?”

 

“그..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큭. 언니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지. 어느 정도 말을 잘하는 언니가 모르고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 사람 뚫고 보기를 훤히 하는 언니가 모를 리가 없지.

 

“그냥.. 좀 어색해서.”

 

“한 번만 안 될까?”

 

언니가 이번에는 손을 깍지를 꼈다. 깍지를 끼면서 응? 이라며 말꼬리를 올리며 나를 쳐다보는 건 반칙이었다. 일생 처음 해본 그 행동에 목의 혈관이 쿵쿵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한 번이 뭐가 대수라고. 여전히 홍수와 지진이 나고 있는 몸을 애써 다듬었다.

 

“이서현..”

 

“성 빼고.”

 

간신히 짜낸 단어를 언니가 더욱 난이도 높은 요구로 쳐내자 순간 시야가 흔들리는 듯 했다. 당장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감고 싶었지만 굳게 잡힌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서현아..”

 

언니의 이름을 불러버렸다는 사실에 맥박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슨.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미지의 정글에 한 걸음 들어가 자신의 구역으로 만든 것 같은 감각에 옅은 성취감이 온몸을 돌았다. 조금 가빠지는 숨을 들키지 않으려 배에 힘을 꽉 주었다.

 

“고마워. 아린아.”

 

“응..”

 

언니가 깍지를 꼈던 손을 풀고 손목 아래로 흘러 엄지를 가릴 듯 말 듯한 블라우스를 고쳐 맸다. 축축한 손이 온기를 빼앗기고 공기를 만나자 서늘함이 피부를 반겼다. 다시 온기를 찾기 위해서 내 두 손을 서로 깍지를 꼈다. 아까 같지는 않네.

 

“아린이 착해.”

 

언니는 한 번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고맙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에게는 정말 힘든 선택이었는데. 언니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행동에 살짝은 서운함이 들었다. 난 정말 열세에 속해있구나. 정말로 관계에 있어서 열세에 속해있었다.

 

여전히 어색하게 물들어있는 빨간색 단추는 혼자서 돋보이고 있었다.

 

* * *

 

언니는 약한 점이 없었다. 말 하나 하나 흘리는 법이 없었고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는 건 물론 항상 물어보기가 기본이었다. 상대방의 단어를 똑같이 따라 쓰기라던가, 너, 당신, 네 라는 지칭 말들도 안 썼다. 오로지 이름으로만 불렀다. 언니는 항상 누군가의 존재를 확실시 시켜주었다. 그저 이름만 부를 뿐인데. 복잡한 한국어 속에서 찾은 정감이 있는 말투였다. 상대방을 그 어느 것에 속하게 하지 않고 이름만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많은 것일 지도 몰랐다.

 

단어를 따라하는 것도 참 신기하게도 따라했다. 누군가 속내라고 하면 속내라고 따라 썼고, 의중이라고 하면 의중이라 따라 썼고, 내심이라고 하면 똑같이 썼다. 사람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할 때 단어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언니는 그것을 당연히 따라했다.

 

이런 예쁜 습관 덕에 사랑을 받는 언니. 자랑 따위 안 해도 그 풍채가 슬슬 풍겨오는 언니. 장미 같은 언니.

 

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을 후 부터는 언니의 말투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정말 소름 돋게도 친한 친구한테조차 너가 네가 라는 말을 단 하나도 쓰지 않고 오로지 이름만을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항상 네가 라는 말을 하는데. 배워서 요긴하게 쓸 점이었다.

 

공부는 전교권에 들었고, 연예인 뺨치는 얼굴, 저런 예쁜 말투들, 요리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으며 몸매도.. 좋았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징징거리지도 않으며 샤프에 찔려 배에 구멍이 나도 가족에게 말을 안 하는. 약점이랄 게 잡힐 수가 없었다. 그나마 동생에게 치덕거린다는 점? 1년 전 누군가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점? 오히려 사이좋은 자매와 섣불리 건들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장점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런 풍채를 가진 언니를 따라가다 보니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언니는 무슨 약점을 가지고 있을까? 턱 없이도 강한 사람이었다. 당장 어느 종교에 집어넣어도 꼬투리 하나 잡힐 리 없는 사람이었었다. 아. 불교라면 길고 긴 머리카락이 걸릴지도.

 

하지만 사람이 약점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저 안 보이던 것뿐이었다.

 

* * *

 

발단은 이러했다. 언니에게 집에 일찍 오냐는 문자를 받았고 늦게 갈 것 같다고 말을 남겼다. 야자시간 끝나고 학원까지 가면 10시는 족히 넘을 테니까. 하지만 야자 담당 쌤의 폭탄 발언으로 학생들은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쌤! 오늘 일찍 끝내줘요.”

 

어김없이 찾아온 일찍 끝내달라는 원통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맞아요! 일찍! 학생에게 자유를! 넓고 넓은 교실에서 하나 둘 머리가 올라와 반향을 일으켰다. 30년 동안 이 짓거리를 하는 학생들을 봐온 선생님이 흔들릴 리 없으니 무의미한 시위였다.

 

이젠 합을 맞춰 자유를! 자유를! 하며 70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를 하자 어차피 호통이 들려오고 조용해질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호통이 아닌 목을 가다듬는 헛기침 소리였다. 문득 달라진 선생님의 분위기에 학생들은 실낱같은 희망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해졌다.

 

“오늘 선생님들 다 회식하러 갔고 남은 선생님은 나밖에 없지. 회식도 못가고 이러고 있네.”

 

여전히 들뜬 침묵 속에서 한명이 입을 열었다.

 

“쌤 그렇다 하심은..?”

 

“난 누군가들이 없으면 집에 가서 수행평가 체크를 혼자서 할 수 있지.”

 

머리가 잘 돌아가던 반장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선 두 손을 위로 팍 올렸다. 시끄러우면 안 될 것을 알고 있던 애들은 그런 반장을 보고서 무언의 기쁨을 한 몸으로 표시했다. 책상에 올라가서 방방 뛰던 한명은 결국 넘어져 큰 소음을 만들어냈다. 악! 얘 다친 거 아니야? 야! 조용히! 입 틀어막고 옮겨.

 

들뜬 침묵. 모순적이면서도 지금 상황에 퍽 어울렸다. 입은 여전히 모두 닫고 있지만 분주히 짐을 가방에 넣었다. 이러면서도 들키게 되어 상황이 커지면 어차피 쌤이 뒤집어 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 사랑해요. 이 은혜는 언젠가 꼭! 선생님은 우리 영웅이세요! 조용히 방방 뛰는 애들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직 해가 떠있는데 교문 밖을 나서는 건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고작 빛 하나 있다고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묘한 광경에 턱을 빼고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망할 학원이 떠올랐다. 지금은 6시. 학원은 8시에 시작. 2시간동안 뻐겨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당장 학원에 전화를 때려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쳤다. 평소에 학원을 빼먹지 않았기에 다행히도 흔쾌히 알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하 이제 뭐하지. 언니는 오늘 조퇴를 했다 했으니 저녁 미리 먹었나. 간식이라도 사갈까? 저녁 먹고 들어가야 하나?

 

무수한 고민 끝에 여러 과자 5봉지와 큰 콜라 한 병을 사고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으니 관성력과 중력 같은 힘이 생각이 났다. 중력은 사실 실존하는 힘이 아니라던데. 엘베 떨어질 때 점프하면 안 죽나? 죽겠지? 쓸데없는 의문을 버리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려 앞에 서자 언니가 자기를 보고 놀랄 그림이 그려졌다. 오랜만에 걸즈토크좀 하면서 수다 좀 떨어야겠다. 현관문 번호를 남들이 못 보게 후다닥치고 들어갔다. 볼 사람도 없었지만.

 

현관을 들어서니 앞에 보인 건 언니가 즐겨 신었던 운동화 하나와 처음 보는 컨버스 운동화였다. 언니가 새 운동화를 샀나싶어 요리조리 돌아보니 썩 괜찮았다.

 

집 안에 들어서니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꽤나 어두웠다. 은근히 붉은 빛이 집안을 들어서 밝히고 있었음에도 언젠가부터 구석에 머물고 있던 끌들은 제 몸을 천천히 불리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으니 갑작스럽게 가벼워진 몸에서 위화감이 생겼다. 하도 무겁게 들고 다녔던 걸 깨닫자 어깨가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병 생기는 거 아닌가?

 

교복을 갈아입으려 마이를 벗고 조끼까지 벗으니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의 가벼움이 다시 느껴졌다. 겨우 가방이랑 옷 두벌 벗었다고 몸이 낯설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했다. 다른 친구들도 나랑 똑같은 걸 매일매일 느끼고 있겠지? 언니도? 나이도 많이 안 먹었지만 현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푸념처럼 말하고 싶었다. 이것도 언니가 말한 약한 모습일지도 몰랐다. 입안에 도는 쓴 맛을 애써 혀로 훑어 없앴다.

 

블라우스를 벗으려 가장 위에 있는 단추 한 칸을 풀려고 하자 어디선가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들으나마나 언니가 친구랑 톡하며 웃는 소리인 것 같았다. 아직 자기 여동생이 집에 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따가 문을 확 열면서 큰 소리 내면 언니가 놀랄 것을 상상하니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지금 당장 해보자는 생각에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오니 방금 전보다 더 어두워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난방은 잘 돌아갈 텐데 이유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불을 켜면 분명 눈에 확 띌 정도로 밝아지겠지만 굳이 키진 않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것과 동시에 가라앉는 집이 은근 불편하면서도 보기에는 괜찮았다. 홧홧한 풍경에 잠깐 눈을 느지막이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감기는 사이에도 조금씩 집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잠깐 감은 동안 눈 속에서 현란하게 점멸하는 다채로운 색들이 어지러워 눈을 떴지만 방금 전보다 더욱 어두워진 집이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빛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언니의 방 앞에서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으니 살짝 서늘한 한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게 살며시 손잡이를 돌리자 무언가가 딱 걸리는 느낌과 함께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에 문도 잘 안 닫는 언니가 문을 닫고 잠갔을까 잠깐 서서 고민해보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창 쌩쌩한 고등학생 뇌 속의 음란마귀는 그 뭐 거시기한 거 아니냐고 외치며 자기 존재를 알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니 사실 무시할 수 없었다. 진짜 그렇고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언니가? 지금? 이 방문 건너에서? 혼자서? 사실도 아닌데 혼자서 상상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살짝 조이는 블라우스 덕분에 맥박이 더 짙게 느껴졌다. 자신도 그렇고 그런 것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언니가 그런다고? 살짝 덜덜거리는 손 때문에 손잡이도 같이 조금 떨렸다. 들킬까 손을 떼니 축축해진 손을 공기가 반기니 아까와는 다른 서늘한 한기가 손에 달라붙었다.

 

헛된 상상에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자괴감이 옅게 들었다. 잠깐 뒤로 주춤거리며 몸을 빼니 집안의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수만 번을 넘게 봐왔을 풍경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집 소파가 저렇게 생겼었나. 묘한 위화감 때문에 쿵쾅거리는 심장은 멈추지를 않았다. 잠깐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도리질하니 머리카락이 목을 스치면서 이상한 감각이 허리춤을 타고 올라왔다.

 

한 영화의 장면처럼 언니의 방문 앞에 앉아서 귀를 대보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저게 잘 들릴 리가 있겠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지금은 들리든 말든 호기심은 논리를 무시하고 몸을 조종했다. 딱딱한 문 안에서 정말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흣...”

 

 

미친.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려 몇 초 동안을 굳어버린 채로 있다가 숨을 다시 들이마시었다. 갑작스럽게 받아들인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잠깐 잠잠해졌던 심장은 연료를 받은 듯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바닥에 눌린 손바닥에서는 세차게 동맥이 날뛰었다. 잠깐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니 피부 속에서 동맥이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방문에 귀를 대려고 하자 덜덜거리는 팔 때문에 자세가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럼에도 귀를 대었다.

 

“흐..앗”

 

무언가 들썩이는 소리와 함께 다시 언니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막 몸부림쳐서 침대가 흔들리는 거야? 그 소리를 통해 사실을 유추하자 상반신의 근육들이 전기가 흐르듯 아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아리는 것이 아니라 좀.. 몸을 가누기 힘든 아림이었다. 다시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자 손에 닿는 숨이 너무 뜨거운 탓에 피부가 달아오르는 듯 했다. 습기에 달라붙는 한기들이 다시 찾아왔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손을 덜덜거리며 열을 내었다.

 

언니가 침대에서 몸부림을 쳐..? 하.

 

못된 망상을 하니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그것을 완전히 누를 정도로 다른 열감이 가슴 속부터 피어올라왔다. 그런 자신에 어이가 없어서, 이 상황에 허탈함을 느껴서, 이상한 열감을 내보내기 위해 한숨을 내쉬어도 그대로였다. 귀를 안대도 들썩이는 침대소리가 방 바깥까지 들려왔다. 그 적나라한 소리에 귀를 가까이 하니 얼굴이 너무 뜨거워졌다.

 

“흐.. 자, 잠깐만 은솔아.”

 

“왜?”

 

.

.

 

잠깐 머리가 멈춘 듯 했다. 지금 뭘 들은 거지. 방금 전까지 달아올랐던 몸이 무섭게도 싸늘히 식으면서 생긴 그 스산한 감각에 고통스러운 소름이 끼쳤다. 분명 재빨리 반응해야 할 뇌가 제 일을 하지 못했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상황을 정리를 해야 했다. 방안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언니는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냈다. 언니는 지금 은솔이라는 사람과 같이 뭘 한 거지?

 

남자인가? 아니 하지만 이름이 은솔... 허.

 

그래. 은솔. 언니가 가끔씩 말하던 언니의 친구. 가끔씩 집에 데려와서 놀던 언니의 친구. 단박에 이해해버린 탓에 터져 타오는 탄성이 아까와는 달리 차가웠다. 지금 친구랑 집에서.. 심지어 아는 사람이라니.. 시야가 흔들거리는 탓에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딱히 특별한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부여잡은 손 탓에 제정신을 차리자 지금 자신의 처지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 소리 하나로 일희일비하며 난리치다가 결국 다른 사람 소리 하나로 싸늘하게 식는 것이 너무 비참했다. 하도 비참해서 허탈한 한숨만 나왔다.

 

계속 흔들리는 시야 때문에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서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블라우스를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버리니 묘한 감각에 만족감이 들었다. 팔을 들어 손바닥을 보니 아까부터 여전히 뛰고 있는 동맥이 보였다. 그냥 흥분해서 보인 게 아니라 원래부터 보였구나. 다시 몰려오는 허탈함 때문에 팔로 두 눈을 덮었다. 다시 보이는 점멸하는 색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의식을 해서 쫓아가려하면 금세 도망갔다. 아니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방에서는 언니가 은솔언니랑.. 그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 심장이 뛰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제 한 몸속에 있는 것들 중 하나일 텐데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떼다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죽는 건가. 죽겠지.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하.”

 

나 방금 전까지 뭐한 거야. 언니 방 앞에서 언니 소리 듣고서 흥분.. 하기나 하고 하.. 가만히 몸을 두어 열을 식히니 몰려오는 자괴감이 아까보다 훨씬 거셌다. 두 손으로 골반 뼈에 손을 대고서 그 튀어나온 부분을 문지르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냥 누구나 하나 쯤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습관이었다. 언니도 비슷한 습관을 가지고 있을까? 이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언니 생각이 괴로웠다. 지금 저기서 은솔 언니랑..

 

뒤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에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손을 살짝 움직여 아랫배를 강하게 눌렀다. 애달프게 따가운 고통 때문에 생각이 잠깐 잊혀 졌지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떠올랐다.

 

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와중에 깨달으면 안 될 것을 깨달아버렸다. 이제 이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언니를 보고 있노라면, 습관적으로 골반을 누를 때면 지금 상황이 불현 듯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어릴 때 입었던 옷을 보면 그때가 떠오르듯이, 과학책을 보면서 중학교 때를 떠올리는 것과 똑같았다. 차이점은 불쾌한지 안한지의 차이일 뿐. 지금 방에서 아른거리는 어둠도 하나의 열쇠가 될 터였다. 기억을 나열할 때라면 지금 상황이 쐐기처럼 튀어나와서 가끔씩 걸릴 것이 분명했다.

 

이불을 고개까지 덮으니 살짝 숨이 막히면서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죽으면 생각 못할까. 더 따뜻해지는 이불 속이 은근히 편안했다. 숨이 부족했는지 어지러워지는 머리 때문에 세상이 흔들거렸다. 잠잘 때처럼 세상이 꺼지는 느낌에 이대로 잠들기를 바랐지만 뇌는 그걸 용케 알고서 재워주지 않았다. 그냥 집 오고 나서의 기억만 사라졌으면. 아니 그냥 이런 감정들이 안 들었으면.

 

한창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불 안도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시끄러우면서 조용한 이명소리만이 반겨줬다. 그 이명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곧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기 방문을 닫은 적이 없었으니 언니의 방문소리가 열린 것이 분명했다.

 

“은솔아. 조심히 가.”

 

“응.”

 

“왜 그래? 빤히 쳐다보고.”

 

“가까이 와 봐.”

 

“잠깐!”

 

이명소리는 계속 귀 속을 맴돌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그것조차 인식한지 못한 채 바깥 소리들에 바짝 집중했다. 지금 막 서로 안고 그러는 건가. 아직도 내가 온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신발장에 신발을 안 넣어 놨으니 그걸 보고 온 걸 알게 되겠지. 그 예쁜 컨버스가 은솔언니 것인 모양이었다. 그 신발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살며시 나가야 했었다고 후회가 들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콜라랑 과자도 탁자 위에 놓아두었는데 같이 먹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입안에 쓴맛이 다시 맴돌았다. 이번에는 혀로 훑지 않고 그 쓴맛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같이 안 나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신발도 보았겠지. 뭐라고 말하지? 모른 척을 할까? 난 언니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슴이 살짝 막혀 괴로워졌다. 그 망할 사랑노래들 작작 부르라고 친구에게 소리쳤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100퍼 공감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계속 들리던 소리가 방 앞에서 끊겼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였으니 이불을 뒤집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냥 폰이나 만지작거렸으면 얼버무렸을 텐데 이불을 이렇게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 소리들을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후회가 들었다. 정말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아린아.”

 

숨 막히면서 뜨뜻한 이불 속에서 나른해졌던 몸이 그 단어 하나에 다시 긴장되었다. 아까부터 자꾸 저 목소리 하나에 몸 상태가 하늘을 뚫었다가 땅바닥을 뚫기를 반복하니 분했다. 자는 척을 하려 했으나 이미 방 안에 들어온 언니 때문에 자는 척을 하는 것은 힘들었다. 혼자서 얼굴을 이상하게 굳히고 있을 테니까. 아니면 이미 내가 일어난 걸 간파하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자꾸 죄이는 가슴 때문에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엄청 신 것을 먹었을 때 떨어대는 것처럼 멈추고 싶었지만 계속 떨렸다. 죄이는 가슴 때문에 팔이 덜덜 떨릴 일은 없을 테지. 그저 내가 이유를 대고 있을 뿐. 그냥 무서웠다.

 

“응.”

 

심호흡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불을 들추니 떨리던 몸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곧 시야에서 보이는 건 하늘색 맨투맨을 입은 언니였다. 평소의 언니답지 않게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정말 방안에 있었던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 같아 다시 시야가 흔들렸다.

 

“언제 왔었어?”

 

“6시 반 쯤.”

 

지금 시간은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내가 느끼는 건 정상이어야 할 테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끓는 것 같은 소리로 들렸다. 단 답도 하지 말 걸. 말 좀 길게 하지 하.

 

“그.. 들었어?”

 

드물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언니가 낯설었다. 평소라면 주도권을 잡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겼을 텐데. 나에게 주도권을 물려주는 것이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왕에 넘겨준 대화의 주도를 한 번 휘어잡았다.

 

“뭘 들었을 거 같아?”

 

살짝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한 쪽을 올리며 비죽이 웃었다. 그러자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언니. 평소라면 날 휘어잡았잖아. 내가 열세였잖아. 빨리 말 좀 해봐. 언니의 묘한 태도에 이불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내가...”

 

언니는 말하기가 힘든지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가 정말 방 안에서 들키면 안 될 것을 했다는 증거이었기에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그래도 내가 혼자서 망상한 거라고 실낱같은 생각이 저편에 있었는데 무참히 끊기니 가라앉는 기분을 올리기가 힘들었다.

 

“내가?”

 

언니의 말을 따라 다시 질문을 되던졌다. 확고한 우열관계가 있을 때 하는 뒤집을 수 없도록 못을 박는 말이었다. 언니가 나한테 했던 것들이잖아. 나한테 알려준 것들이잖아. 언니는 이런 함정 바로 깨버리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붉어진 언니의 얼굴이 참 지독하게도 매력적이었다. 저 얼굴로 침대에서 몸부림친 걸 생각하니 다시 저릿거리는 감각들이 상반신을 돌았다. 손바닥의 살짝 보이는 동맥은 아까와 달리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살짝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언니의 얼굴이 혼란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은솔이랑 방에서..”

 

던진 질문을 그대로 물고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는 언니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되었다. 자기에게는 불리한 말은 자기 입으로 꺼내면 끝이었다. 끝내 묻어가고 잊히게 하는 것이 모든 관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정치인들이 사과를 안 하는 이유도 이런 것에 있었다. 약한 모습 보여주지 말라고 말했잖아 언니. 여전히 손이 덜덜 떨렸지만 이불 속으로 감추고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몸을 겹치는 거..”

 

붉어진 얼굴로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가 정신을 강타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결국 잠에 들어서 듣고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자신의 약한 점을 혼자서 드러내는 언니,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붉어진 얼굴조차. 절대로 보이지 않았으며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던 언니가. 자신의 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꼴이었다.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사무치는 소름 때문에 몸을 가만두기가 힘들었다. 비죽이 올라가는 입꼬리도 힘을 주어야 했다.

 

“허.”

 

지금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허탈감에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그저 이상한 상황에 한숨을 내쉰 것뿐인데 언니는 내가 화난 줄 알고서 더욱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날 보더니 놀라고서 자기 두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동물은 우두머리를 꺾을 때 이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그 쾌감은 곧 자신감으로 변했다. 우두머리라는 것은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끼리도 적용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언니가 우두머리였다.

 

“언니.”

 

“응..”

 

그게 아니야 언니 왜 그러는 거야. 말을 바꾸고 집에 빨리 온 날 책해야지.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아무 잘못 없다는 듯 나를 용서해야지.

 

“내가 늦게 온다고 집에서 그래도 되는 거야?”

 

날 죄인으로 안 만든다면 언니가 죄인이 되어야겠네.

 

“학교 사람을.. 심지어 여자랑 그래도 되는 거야?”

 

언니는 죄인이야.

 

“이거 부모님한테 말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럼 벌을 받아야지.

 

“아린아.. 그건..”

 

언니가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면서 눈이 흔들렸다. 물기를 머금은 눈가가 살짝 붉어지자 다시 목을 긁으며 나오려 하는 한숨을 막아야했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 언니가 소중한 것 같아서. 우물거리는 분홍색 입술이 어지러울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잠깐 숨을 고르며 눈을 깜빡거리니 붉은 색들이 점멸하며 나의 상태를 알렸다. 그것을 깨달으니 배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이 되었다.

 

침대에 일어나 언니에게 다가가니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듯이 조금 떨며 뒤로 물러나자 그대로 언니를 따라갔다. 맞아. 언니가 나보다 작았었지. 항상 당당한 품위를 갖추던 언니가 작아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움츠려드는 언니는 한 없이 작아 보였다. 내가 한걸음 다가가니 언니는 한걸음 물러나는 것을 반복하니 결국 언니는 구석에 몰렸다. 압도하는 지금 상황에서 올라오는 성취감 때문에 표정이 바뀌려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언니.”

 

“응..”

 

“내가 조용히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

 

자기의 속내를 들추면 안 되잖아. 언니. 제발 여기까지 말 안하면 나도 조용히 하고 평소의 동생으로 돌아갈게. 정말로.

 

“... 비밀로 해줘..”

 

하. 이젠 부탁까지 하는구나? 입꼬리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비죽이 튀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참느라 가슴께가 들썩거리니 언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덕에 음습한 욕망과 악의로 발려있는 웃음을 숨길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들썩이는 건 화나서 그런 게 아니야 언니. 즐거워서.

 

나보다 작은 언니가 더욱 더 작아졌다. 그렇네. 언니가 말한 약한 모습은 정말로 보여주면 안 되는 거였어.

 

“뭐 해줄 거야?”

 

함정과 욕망이 끈적이게 묻어있는 질문. 언니는 이미 죄인이라는, 속죄를 해야 한다는 가정이 들어있는 질문. 귓가에 가까이 입을 대고 속삭이니 언니는 덜덜 떨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무참히 망가트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눈이 뻑뻑해졌다.

 

“모르겠어..”

 

계속 말꼬리를 흐리며 주도권을 내게 쥐어지는 언니 때문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은 나에게 그 속죄를 정하라는 말. 내가 재판관이라는 의미. 이참에 숨기지 않고 오히려 내 얼굴을 보여주어 우열관계를 다지는 것이 좋았다.

 

“언니 내 얼굴을 봐.”

 

언니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더니 내 표정을 보고서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커진 동공이 썩 맘에 들었다. 속에서 들끓는 거무튀튀한 감정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제 존재를 알렸다. 당장 손에 쥐라고. 뒤집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자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언니를 더욱 몰아가야 했다. 벌을 주는 건 언니를 풀어주는 것과 똑같았다. 헤어 나올 수 없도록 그 속을 긁어서 피를 내고 그 피가 언니의 족쇄가 되어야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인간관계를 생각한 것들을 언니에게 쓰니 이상야릇한 감각에 허리춤이 간지러웠다.

 

이런 걸 잘 알고 있는 언니가 이런 태도를 취할 리가 없었다. 당장 배에 구멍이 나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던 언니가 동생의 협박에 굴할 리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석에 몰린 언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 생각하고 있으니 언니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더 이상 빠질 곳은 없었다. 올려다보는 눈이 너무 가여워 보이면서 약해보였다. 부숴 트리고 싶을 만큼.

 

역시 은솔언니인 건가. 은솔언니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겠지. 자기는 구렁텅이에 빠져도 싸울 수 있지만 역시 애인만큼은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은솔언니를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언니를 사로잡아야했다. 족쇄를. 구석에 몰려있는 언니의 허리춤을 어루만졌다. 맨투맨 위에서 느껴지는 잘록한 라인이 돋보였다.

 

“앗.. 아린아..”

 

거부하지도 않네. 아니 못하지. 주무르듯 쓰다듬는 듯 한참동안 매만지다 옷 속으로 집어넣으니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감에 손을 땔 뻔했다. 너무 부드러운 피부를 살짝 꼬집기도, 주무르면서 다른 곳의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손으로 어루만졌다. 결국 언니는 흐느끼는 건지 앓는 건지 옅은 소리를 뱉었다. 언니는 자기가 뱉은 소리에 자기가 놀라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눈을 감았다. 결국 죄가 하나 더 생겼네. 언니.

 

“언니. 지금 무슨 소리를 낸 거야?”

 

“싫, 싫어.. 그만.. 흣..”

 

“여친 납두고 친동생한테 느끼는 거야?”

 

“그런 게 아니... 흐, 그쪽은..”

 

언니가 부정의 말을 하려하자 대뜸 손을 위로 올려 브라라인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곳은 아까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살짝만 손가락을 올리면 언니의 가슴에 닿을 터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고인 침을 넘기니 뜨거운 목이 느껴졌다. 이 조마조마함을 들키면 안 되었다. 곧이어 목에 있는 동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바로 가슴 밑 부분을 엄지로 뭉근하게 문지르니 언니는 아까보다 더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래. 나보다 조마조마한 건 언니겠지. 숨을 내쉴 때마다 아려지는 온 몸의 근육이 애달팠다. 당장 언니를 껴안아서 애달픔을 없애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었다. 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가슴을 슬쩍 건드렸다.

 

“아린아. 자, 잠깐만 우리 자매인데.. 하앗... 아, 아린아아..”

 

걸렸다. 또 함정에 걸리는 언니가 너무 대견했다. 결국 자기 죄목에 친동생과 몸을 주물럭거렸다는 죄까지 추가시켜버렸다.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었다. 그저 언니의 사랑을 응원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건 언니 잘못이었다. 언니의 가슴 밑 부분을 주물럭거리면서 축축해지는 건 내 손인지 언니의 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언니가 땀을 냈다고 몰아가야겠지.

 

“언니. 난 그저 배 마사지를 해준 건데 왜 그렇게 애달픈 소리를 내?”

 

“마사지라니..”

 

“이렇게 땀까지..”

 

축축해진 손을 보여주자 언니는 다시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땀이 잘 안나는 언니 특성상 긴장한 내가 난 것이 분명했지만 언니를 탓했다. 거부할 생각도 안하고 고개를 다시 숙이는 모습에 몸에 열이 더 오르면서 들떴다. 눈물로 살짝 젖은 볼을 핥고 싶었지만 참았다.

 

“야하네. 언니.”

 

“그런..”

 

“약한 모습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언니는 나 를보다가 다시 몸을 떨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붉은 귀가 너무 선정적이었다. 자기가 한 말일 테니 더 없이 부끄럽겠지. 자꾸만 자기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언니 때문에 성취감과 묘한 갈증 같은 것들이 동시에 온몸을 맴돌았다. 아까 언니의 방은 다가갈 수 없는 씁쓸한 철창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자신의 방에 차오르는 언니의 묘한 향기가 더 없이 자극적이었다.

 

“언니.”

 

“...”

 

언니의 귀에 대고 말을 하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풍겨오는 샴푸냄새가 방을 가득 채우는 듯 했다. 아직도 떠는 언니를 꽉 안아서 떨림을 없애주고 싶었다. 아니 그냥 내 가슴의 아린 떨림을 지우고 싶었다. 언니. 난 아까 그 상황을 잊을 수가 없어. 천장을 보아도 그 생각이 나고 언니를 보아도 그 생각이 나.

 

그래. 쐐기처럼.

 

그러면 언니도 기억 속에 쐐기가 있어야지.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해줄게.

 

“서현아.”

 

서현의 이름을 부르면서 귀를 핥았다. 동생한테 귀를 핥아지면서 이름을 듣는 건 무슨 기분이야? 나라면 절대 못 잊을 것 같은데.

 

“하으.. 흣..”

 

서현아. 이름을 들을 때라면 날 떠올리고 지금을 떠올리는 거야.

 

쐐기처럼.







고닉으로 쓰는 것도 까먹고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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