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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선혈 같은 붉은색이라면 차라리 강렬한 인상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애매하게 탁한 검은색과 주황색이 섞여 마치 오래된 팔레트에서 색깔을 잘못 골라 만들어진 그런 빛깔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희는 탁한 색 세상 속에서 애타게 은혜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울려서 화자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빙글빙글 맴돌며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민희는 현기증을 느꼈다. 코를 찌르는 타는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는 토하지도 못하고 애매한 구역감만 머금은 채 헛구역질만 해댔다.
더 고통받으라는 듯이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멀미하지 않는 체질인데도 멀미가 났다. 은혜를 부르고 싶었지만, 이제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탁한 공기가 목구멍으로 자꾸만 침입해 성대를 망가뜨려 버렸다. 매캐한 냄새가 이제는 목구멍에서 나기 시작했다. 숨을 참아도 올라오는 매캐함에 입만 벙긋거리면서 은혜만을 찾았다. 열대어가 수조에서 먹이를 먹듯이 뻐끔거리는 민희의 입은 은혜를 갈망했지만, 주홍빛 세상에는 민희말고는 없었다.
기도를 막아버린 주황색 공기가 격하게 흔들리면서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꽉 잡으세요!"
악몽에서 깨어난 민희를 반긴 것은 은혜가 아니라 또 다른 생생한 악몽이었다. 다른 점은 토할 것 같은 주황색이 아니라 회색이라는 점.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다는 점. 꽉 잡으라고 했지만, 수송기에 딱히 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육중한 군용 수송기가 찢어질 기세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혜성 파편이 비행기 근처를 지나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비행장에서 보고 들었던 소란과 아우성이 비행기 안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잡을 게 없었기에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있던 민희의 손을 억센 손아귀가 낚아채듯이 잡았다. 뜨겁지만 아픈 감촉이었다. 은혜의 감촉과는 정반대인 느낌에 민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옆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민희는 곧 얼굴 근육에 힘을 풀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손을 잡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세미롱 갈색 헤어가 흔들리는 진동수는 명백히 비행기의 요동보다 빨랐다.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든 민희는 힘이 잔뜩 들어간 여자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덮어주었다. 그 손가락은 은혜의 것보다 조금 더 가늘었고 조금 더 뜨거웠다.
비행기를 흔들던 요동이 잦아들었다. 무사히 고비를 넘긴 듯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여자아이만 빼고.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왼편에 같이 앉은 어머니도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아이의 등을 조심스레 쓸면서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여자아이의 오른편에 앉은 민희도 맞잡은 손을 살며시 고쳐 잡으면서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고맙다는 말을 속삭이자 민희는 얼굴에 갑자기 열이 올랐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대체 왜 한 건지 자괴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조금 매몰차게 잡았던 손을 놓았다. 여자아이는 다독여준 보람도 없이 제 엄마 곁에 붙어버렸다.
민희는 아이가 엄마에게 바짝 붙으면서 생긴 왼편의 작은 공간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은혜의 부재를 다시 실감하게 되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무사할까. 강도들에게 살해당했을까. 험한 짓을 당한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생각이 불길처럼 휘몰아쳤다. 차라리 거대한 파편에 맞아 고통 없이 가는 게 나을까. 그러면 시체도 찾지 못하고 흉한 꼴이 되는 걸까. 부정적인 생각들에 민희는 블랙홀처럼 빠져들었다.
슬쩍 뜨는 것만 부유감이 민희의 몸을 감쌌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착륙을 준비하면서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도가 낮아지며 생긴 둥실거리는 느낌에 사람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덕분일까. 삭막하던 기내에 조금 활기가 돌았다.
물론 그런 분위기에서 민희는 동떨어져 있었다. 둥실거리는 기분이 이제 곧 죽게 될 은혜를 놀리는 것만 같아서 짜증 났다. 마음만 같아서는 수송기의 램프를 열어버리고 밖으로 뛰어내려 은혜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단단히 메여진 벨트는 그런 환상마저도 방해했다. 기압이 올라감에 따라 민희의 귀가 점점 아파졌다. 군용 비행장이라 꽤 험한 코스로 진입하는 모양이었다.
민희는 푹푹 한숨을 내쉬며 귀를 때리는 따가운 기압을 버텨내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과호흡이 올 것만 같았다. 은혜가 보이지 않는 선명한 풍경보다는 은혜를 상상할 수 있는 뿌연 세상이 더 좋았다. 뿌연 세상에서 민희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천천히 그려내며 물거품 같은 행복을 쌓아 올렸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런 물거품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듯 가혹했다.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집중 감시 대상이 된 민희가 계속 숨을 가쁘게 쉬자 군인이 달려왔다. 민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또 난동을 피울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피곤함에 찌든 병사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눈치를 보며 가쁜 숨을 진정시킨 민희는 잠시 고민하듯 눈을 감더니 군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 여기 어떻게 탄 거죠?"
"어떤 여자분이 데려왔습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눈앞의 건장한 남자는 즉답했다.
"그 여자분은 괜찮아요?"
"파편을 맞지 않으셨으면 괜찮으실 겁니다. 마지막까지 무사히 떠났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걸까. 은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가슴 속의 떨림이 아주 조금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수 시간 전의 일. 은혜가 지금도 살아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잦아들었던 떨림이 다시 조금씩 타올랐다.
체념하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병사는 수 초간 그녀를 지켜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은혜가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민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아예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확신을 주려고 강하게 말했는데도 이런 꼴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는 꽤 멀어져 있었나 보다. 민희는 귀의 통증을 꾹 눌러 참으며 은혜와의 추억을 떠올리려고 했다. 혜성이 떨어지기 전만 해도 오랜만의 휴가를 함께 보낼 생각으로 들떠있었다. 방에서 올려다본 달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둘 다 요리를 못해서 레시피를 그대로 보고 만든 로스트비프가 엉망이 된 탓에 뒤늦게 피자를 시켜서 나눠 먹었다. 함께 보내는 밤이 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1달? 3달? 6달?
그때서야 민희는 깨달았다. 둘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을. 바쁘다. 할 일이 많다. 곧 논문 제출일이다. 중요한 프로젝트 마감일이다. 갖은 사정, 아니 핑계를 대며 은혜와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시간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틈은 어느새 거대한 해구가 되어 있었다. 시뻘건 용암을 잔뜩 드러낼 만큼 깊게.
'좀 더 만나고 좀 더 이야기하고 좀 더 손잡아 줄걸.'
은혜가 자기비하가 심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은혜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작고 가녀린 몸으로 뭐든지 할 거란 것도 어렴풋이 알았다. 은혜를 충분히 다독여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금은 의미없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민희가 바라본 세상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견고했다. 냉혹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강하게 이어져 있는 네트워크들과 조직들. 따라서 지금 힘들더라도 조금만 달린다면 두 사람만의 따뜻한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를 위해 자신의 응석을 숨기고 강한 척 해왔다.
그러나 지금 와서 논문과 프로젝트, 기계들을 모두 버리고 생각해보니 은혜의 세상은 자신과 너무나 달랐다. 은혜를 둘러싼 세상은 굉장히 불안정했다. 은혜는 항상 죽음 근처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은혜가 입사한 지 수개월째 담당 환자가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서 임종을 맞은 날 그녀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걸려왔던 게 떠올랐다. 철야 작업 중이었기에 받지 못했던 그 전화에 답을 하려고 생각하다가 확인한 것이 새벽이었기에 다음에 전화하기로 마음 먹고는 바빠서 결국 잊어버렸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1달 뒤 오랜만에 함께 했던 저녁 식사에서 들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은혜의 눈에는 잔뜩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 눈물은 끝내 눈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두 사람의 세계는 시나브로 어긋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제야 후회해 봤자 늦었다는 것을 책망하듯 비행기가 흔들렸다. 곧 착륙한다는 군인들의 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홀로 허공에서 흔들리던 요동은 대지를 밟으며 맹렬히 떨리는 진동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딱딱함이 느껴지던 진동은 얼마 동안 가다가 사그라졌고 곧이어 램프가 열리며 붉은 대지가 비행기 밖으로 펼쳐졌다.
내리라는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걸어갔다. 비행장에서 보이던 무질서함은 사라졌다. 아마 도착했다는 안정감이 그들의 마음에 여유를 준 것이리라.
"저기……"
멍하니 벨트를 맨 채 상념에 잠겨있던 민희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군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녀린 목소리가 민희의 고막을 간질였다.
"아까 손잡아주셔서, 고마웠어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아이였다. 야속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얼굴은 엄청 붉었다. 대지에 덧칠한 짙은 붉은색이 아니라 풋풋함이 묻어나는 옅은 빨간색이었다. 약간 정신이 돌아온 민희는 여학생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민희는 힘없이 군인들의 안내를 따라 미끄러운 군용기의 램프를 지나쳐 딱딱하고 거친 아스팔트 위에 섰다. 여기가 어딜까. 비밀 기지 같은 곳일까. 트럭에 올라탄 민희는 여전히 주홍빛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딘가에 살아있을 은혜를 그렸다.
10분 정도 달리자 육중한 회색 벙커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도 굉장히 튼튼해 보이는 그 벙커는 핵무기라도 직격하지 않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방폭 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열리며 시꺼먼 지하 시설의 입이 드러났다. 새하얀 불빛만 몇 개 붙어있는 진정한 암흑이었다. 저런 암흑 속에서 살아남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황색 모노톤이라도 바깥세상이, 은혜가 있는, 은혜가 있던 바깥세상이 낫지 않을까.
"안 내리십니까? 충돌이 임박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중후한 저음에 민희의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녹회색의 군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민희는 천천히 트럭에서 내렸다. 군인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짐을 줄이기 위해서였는지 무기가 없었다. 민희 왼편에 선 기지 인원인 듯한 병사만이 권총 하나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그들은 벙커로 향했다. 함께 걷는 군인은 멍한 표정을 했다. 안전지대가 코앞이라 해도 멸망을 앞두고 그는 생각이 많았다. 충격파가 예상보다 강해 벙커가 쓸모없을 수도 있다. 지진이나 해일이 추가로 발생해 지각을 뒤엎어버릴 수도 있다. 사실 10km짜리 얼음과 바윗덩어리가 베링해가 아닌 이곳에 떨어질 수도 있다. 시설의 설비가 고장 나서 안에서 비참하게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런 잡념들이 그의 주의를 혼란스럽게 했고 옆에서 걷던 민희의 돌발행동에 대응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희는 재빨리 곁에 있던 군인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홀스터를 풀고 그 안에 담긴 권총을 빼냈다. 권총의 주인이 이변을 알아채기도 전에 민희의 발길질이 군인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민희는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권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미국에서 지냈던 경험이 뜻밖에 도움이 되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벙커로 들어가! 빨리!"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몇몇 군인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이쪽을 봤지만, 무기들은 모두 공군기지에 놓고 온 뒤였다. 다들 손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권총을 빼앗긴 군인은 양손을 든 채로 뒷걸음질 쳤다.
"곧 운석이 떨어지면 다 죽습니다! 괜한 짓 마시고..."
"그래, 죽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은 들어가세요."
민희가 소름 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뒷걸음질 치던 군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민희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벙커로 달렸다. 두어 번 뒤돌아 민희에게 눈길을 주던 그의 얼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마지막 인원까지 삼켜버린 시꺼먼 벙커가 입을 닫았다. 워낙 거대한 입이라 닫히는데도 1분이나 걸렸다.
이제 저 두꺼운 안전지대로 들어갈 길은 없었다.
이제는 은혜와 민희 사이를 막는 두꺼운 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거리가 있지만, 은혜와 민희는 어쨌든 같은 공간에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허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나 은혜만 보고 달렸는데 마지막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민희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뭔가 생각하던 그녀는 곧 실성한 듯 웃어제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권총을 하늘로 겨누고 묵직한 방아쇠를 미친 듯이 당겨댔다. 둔중한 격발의 충격이 손목과 어깨를 때렸다. 폭발음이 고막을 찢어놓았다. 둔한 이명이 뇌를 휘저었다.
십여 발을 발사하자 틱틱거리는 금속음이 탄창의 소모를 알렸다. 이명으로 아직 멍한 상태에서 민희는 권총을 슬쩍 바라본 뒤 바닥에 던져버렸다. 권총은 아스팔트 연못 위를 물수제비처럼 튕기며 몇 미터를 나아갔다.
권총이 튕긴 방향을 나침반 삼아 민희는 정처 없이 걸어갔다. 비행장은 온통 회색이었다. 인간이 대지를 불순물로 덮어 만든 흉물스러운 광야는 흙과 달리 딱딱하고 차가웠다. 아파져 오는 발바닥을 질질 끌며 한 걸음씩 민희는 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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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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