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소_K와 C의 방
"언니...?"
C가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언니... 왔어요?"
"아 C. 일어났어? 미안.
신경 쓰지 말고 자."
나는 잠깐 머리를 들었다가 무덤덤한 어조로 대충 둘러대고 다시 고개를 숙여 계속했다.
하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C는 2층 침대 난간 너머로 나를 내려다봤다.
방에는 불빛 하나 없었음에도 눈이 어둠에 적응했는지 C는 순식간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언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짐을 싸세요?"
C의 목소리가 당황스럽게 떨렸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옷가지를 캐리어 안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언니! 지금 뭐 하는 거냐구요!"
완전히 잠기운을 떨친 C는 더 커진 목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을 다 담은 내가 이제 책을 넣으려 할 때, C가 뒤에서 내 오른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다시 물었다.
"언니! 도대체 왜 그래요!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왜 계속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요?!"
충격과 분노, 그리고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계속 짐을 싸고 싶었지만 C가 내 오른팔에 완전히 잡아 매달린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보니 그 얼굴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C 놔줘."
"싫어요! 안 놓을 거예요!
뭐 하는 건지 말해줄 때까지는 안 놓을 거예요!"
나는 한숨을 쉬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아."
C는 손을 풀기는커녕 더 강하게 죄어오며 외쳤다.
"떠나다니 무슨 소리예요? 어디로요?"
"어디긴, 내 집이지.
걱정 마 연락할 테니까. 남겨진 주방 일은... 미안해."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요! 도대체 왜 떠난다는 거예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엘리의 팔에서 손을 빼 계속 짐을 쌌다.
엘리는 돌아오지 않을 내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내 바로 옆으로 무릎을 끌고 다가와 내 옆얼굴을 향해 간절하게 말했다.
"혹시 일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방일이 싫은 거면 그냥 안 해도 괜찮아요. 저 혼자 다 할게요.
아니면 발굴에서 배제된 것 때문이에요? 저 들었는데, 2팀이 뭔가를 찾아냈대요. 무슨 두루마리 같은 유물인데-"
책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에 c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책을 담았고 C도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유물이면 성과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분명 대학 측에서도 지원을 다시 해줄 거고, 언니도 발굴팀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
"응, 안 그래도 어젯밤에 교수님은 나보고 발굴에 다시 참여하라고 했어."
"그럼... 잘 된 거 아니에요? 언니는 항상 발굴에 참여하고 싶어 했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던 C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을 멈췄다.
"...그 아가씨 때문이군요?"
나는 마지막 책을 옮기던 손을 잠깐 멈칫, 했다가 다시 말없이 움직였다.
"그 아가씨 때문에 떠나는 거예요?
이제 발굴팀에 들어가면 못 만나니까, 지금까지 쌓았던 것 전부 내버리고,
앞으로 쌓을 경력도 전부 포기하는 거예요?"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그럼 이제 뭘 어쩌려고요? 사랑의 도피라도 하게요?
그 신원불명의 아가씨랑?"
"일단 신분증은 있-"
"그렇게 쉽게 발굴단을 버리는 거예요? 지금까지 대학에서 같이 일해왔는데?"
"어차피 내가 없어도 다들 잘 할 거야, 지금도-"
"그럼 저는요? 항상 언니만 바라보고 있는 저는요?
제가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결국 C의 입에서 진심이 터져 나왔고 나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커다란 캐리어만 응시하려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c의 눈물이 글썽이는 눈빛이 나의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C가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가... 언니가 제 마음을 받아줄 거라곤 생각 안 해요.
신경 써줄 필요도 없고, 아예 몰라도 괜찮아요..."
어둠을 가득 채운 고요함 한복판에서 C의 눈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적어도... 옆에는 있어 주세요...
언니가 원하는 건 뭐든 해드릴 테니까... 제발..."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한가운데에서 C가 울면서 내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파묻고 말했다.
다시 내 팔을 잡은 C의 두 손은 분명하게 부들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다 싼 짐에서 손을 떼고 C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C... 나도... C에겐 항상 고맙고 나도 같이 있고 싶지만...
정말로, 지금은 여길 떠나야 해. 그러니까-
"그럼,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지금 당장 짐 쌀게요.
1시간도, 아니 5분도 안 걸려요. 아니 여기에 있는 거 다 버리고 몸만 가도 돼요.
두 사람과 떨어져 있어도 괜찮으니까, 제발 따라가게만 해주세요."
C는 고개를 들어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보며 한없이 간절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나는 C의 눈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 지금 당장은 안돼... 하지만 나중에,
그래 나랑 엘리가 무사히 정착하면, 그때 부를게. 약속할게."
그렇게 말하자 C의 축축한 눈이 미간과 함께 질끈 감기더니, 내 팔을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C...?
저... 아파..."
"또... '나중'이에요?"
C는 눈물 젖은 눈을 치켜뜨고 날 째려봤다.
내 팔에서 손을 풀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채 거친 어조로 말했다.
"항상... 항상... 그렇게 나중으로 미루죠.
걱정을 해도 괜찮다고만 하고, 약속을 해도 항상 나중에 하자고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언니는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런 얘기, 더 이상은 듣기 싫어요!"
C의 목소리는 숙소의 모두를 깨울 듯이 커졌고
그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로 가득 채워졌다.
슬픔이 조금 맺혀있는 두 눈은 나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항상 그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고 결국은 아무 말도 안 해주잖아요! 저는 안중에도 없죠?
언니에게 저는 그저 편리한 가구 따위에 불과한 거죠?
저는 항상 기다렸는데, 애초에 그런 건 잘못 생각한 거였나 보네요.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못 견뎌요... 더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C는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C-"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갔다.
C는 분명 교수를 부르러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들키기 전에 나도 떠나야 한다.
아직 싸지 못한 짐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그 정도의 출혈은 감수해야 했기에
나는 묵직한 캐리어의 지퍼를 잠그고 일으켜 세워, 요란한 드르륵 바퀴 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교수의 숙소건물은 여기서 20분 거리, 달린다고 하더라도 교수를 깨우는 것까지 생각하면 30분 남짓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도서관에 도착하는 건 아마 가능하겠지만... 나올 땐 어떡하지?
교수가 모은 사람들이 좁은 협곡 입구를 봉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지금은 그런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이미 C는 뛰쳐나갔고 그 순간부터 엘리는 위험해진 것이다.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서둘러 방을 나왔다.
나는 문득 오른쪽을, 그러니까 교수의 집무실 쪽을 바라봤다.
교수의 숙소는 20분 거리지만 집무실은 같은 건물 안에 있어서 5분 거리도 안 된다.
나는 캐리어를 잠시 문 앞에 두고, 그 오른쪽을 향해 발을 뗐다.
잠시 후, 나는 벌컥 숙소 문을 열었다.
간밤의 차가운 공기가 건조한 피부를 깨트릴 듯이 감싸 안았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태양은 지중해의 수평선 아래서 몸을 숨긴 채 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검푸른 고요함과 쌀쌀한 어스름으로 가득했다.
나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최대한 빨리 협곡으로 향했다.
협곡을 감싼 그 거대한 장벽의 검붉은 빛은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되었고,
나는 그 불길함을 간직한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삼켜져 갔다.
협곡은 여느 때처럼, 비좁았고 그래서 큼지막한 캐리어는 자꾸 돌부리나 벽에 긁히고 걸렸다.
여기에 사람들이 바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에,
나는 나중에 돌아가는 길에 찾으려는 생각으로 캐리어를 협곡 한가운데에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온 데다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니 심장이 갑작스레 쿵쾅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 뜨거운 열기와 땀은 차디찬 새벽 공기에 맞닿자 얼어버릴 듯이 차가워졌다.
그때는 이제 막 날이 밝아오려던 참이었기에,
협곡의 출구는 어둠도 빛도 아닌, 푸른 잿빛을 띠고 있었고
나는 그 속으로 빠져들듯이, 협곡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온 힘을 다해 달린 터라 숨이 목 끝까지 찼고, 심장이 녹아내릴 듯 뜨거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속도를 더욱 높이며 바로 앞의 도서관을 향해 계속 달렸다.
그때의 연보랏빛 하늘은 마치 그림 같아서 마치 현실이 아닌 듯했고
그런 가짜를 배경으로 한 도서관도 하나의 거대한 소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도서관 밑동에서 작은 나무문이 벌컥 열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멈추고 헉헉댄 채, 갑자기 진짜가 되어버린 그 나무문을 주목했다.
빛이 부족했기에, 혹은 땀이 잔뜩 매달린 속눈썹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기에
눈구멍을 찡그린 채 집중해야만 볼 수 있었고,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물 자국으로 붉게 물든 눈을 비비며 도서관에서 나오는, C였다.
# 도서관_도서관 외부
왜 C가...
온갖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의 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C가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곧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내 앞에 와서도 멈추지 않았고
'미안해요.'
라는 말과 함께 눈을 질끈 감은 채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등 뒤를 돌아보니 C는 협곡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나는 다시 도서관을 쳐다봤고, 방금 막 닫히려던 나무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하게
엘리가 나왔다.
나는 여전히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채 그저 본능적으로 엘리를 향해 달렸다.
방금 막 숨을 고른 참이라 얼마 뛰지 않았음에도 엘리의 앞에 멈춰 섰을 때는 다시 숨을 헐떡이는 상태였다.
나는 호흡을 안정시킬 틈도 없이 입을 열었는데,
"하아... 하... 엘리-"
"그 두루마리 어딨어?"
엘리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다시 물었다.
"그 두루마리. 어딨냐고."
사막의 새벽보다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녹아내릴 듯이 뜨거웠던 내 심장이 순간 얼어버릴 듯했다.
"에... 엘리..."
새벽녘의 어스름 한가운데에서 엘리의 잔혹한 눈동자가 나를 찔러 죽일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 내가 설명할게."
"설명은 C가 전부 했어."
엘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에는 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나를 설득하려고 왔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자기 혼자 횡설수설하더니,
내가 팠던 구멍이에서 두루마리가 나왔다고 했어.
그 아이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적어도 네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네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는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어."
엘리는 또 한 걸음 바짝 걸었고 나는 덩달아 물러서느라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다.
"K. 두루마리 어딨어?"
"엘리... 일단 조금 진정해봐.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자."
"난 지금 진정하고 있어.
그리고 저 지긋지긋한 도서관에는 다시는 안 들어갈 거야.
두루마리를 내놔. 지금 당장."
엘리의 목소리는 겨우 침착하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엘리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대답할 때마다 한 걸음, 물러서며 다급히 말했다.
"엘리, 한 번 생각해봐. 정말로 그게 너에게 필요할까?
어쩌면 또 허탕일지도 몰라, 지금까지도-"
"도서관의 최초의 책이야 그럴 가능성은 없어."
"서, 설령 고향을 찾는다고 해도 그 고향에 과연 네 민족이나 부모님이 있을까? 어쩌면 이주-"
"상관없어. 내가 몇십 년 동안 찾았던 곳이야. 적어도 내 뿌리는 증명할 수 있겠지."
"고향이 정말로 네게 필요할까? 지금까지 충분히 과거에 얽매였잖아 이제 앞을-"
"그걸 결정하는 건 나야. 네가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이 너의 고향이라고 했잖아...
내가 너만을 지켜준다고 했잖아. 너도 나를-"
"아니, 네가 있는 곳은 그냥 네가 있는 곳일 뿐이야."
"그럼 나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쓰레기 같은 고고학자들과 다를 바 없이, 어설픈 감정으로 나를 소유하려는 인간일 뿐이야."
짝
이제 막 찾아온 아침에 날카로운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뒷걸음질을 멈춘 채 손바닥을 얼얼하도록 휘둘렀고,
엘리는 붉게 물든 뺨을 내 쪽을 향하며, 그렇게 고개가 돌아간 채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이빨을 꽉 깨문 채 말했다.
"나는, 널 사랑해.
이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사람들과는 달라. 나는 널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지키려는 거야.
저 밖의 세상은 너 혼자선 잠깐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는 거야?"
엘리는 뺨 맞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날 째려보더니 전보다 더 강한 어조로 외쳤다.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어! 나에게 사회가 어떠니 가르치려 들지 마!"
"얼마나 오래 살았건 넌 여전히 여자아이고 외계인일 뿐이야!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몇십 년 동안 찾으려 돌아다니고,
몇 년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았던, 그런 외계인일 뿐이야.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이 현대 사회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거야?
아니, 넌 혼자서 못 살아. 너는, 내가 필요해."
"넌 아직도 이해 못 하는구나,
네가 날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얘기가 아니야.
너도 다른 사람처럼 날 소유하려 든다는 거지."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너를 연구하려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정말로 이 두 개가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나는 널 사랑해.
정말로, 이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나는 다시 간절하게 말해봤지만,
엘리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더니 이빨을 꽉 깨문 채 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없어.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도 네 하잘것없는 마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짝
한 번 더 파열음이 구덩이를 가득 메웠다.
엘리는 이번엔 고개를 꿋꿋이 세운 채 나를 째려봤다.
"한 번 만 더 때리기만 해봐... 그때는-"
"왜 모르는 거야? 내가 아니라면 넌 금방 잡아먹히고 말 거야!"
나는 울분에 차올라 외치며 협곡을 가리켰다.
"저기, 저 빌어먹을 발굴단에! 너를 농락했던 그 남자가 있어!
그 남자가! 교수가 되어! 발굴단을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시야가 눈물로 가득 차 뿌예졌고,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엘리의 표정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얼마 안 있으면 사람들을 이끌고 여기로 쳐들어올 거야!
그럼 그때는 정말로 너도 끝이야!
법도 사회도 없고 오직 고고학자들만 있는 이 황무지에서, 이번엔 어떻게 도망칠 건데?"
내 외침이 허공을 가로질렀다가 암벽에 튕겨 나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고
동시에 각자의 감정은 서로의 목구멍을 틀어막았기에
웅웅대는 침묵이 우리를 삼킬 듯이 차올랐다.
"...지금...
지금 당장 두루마리를 내놔 빨리."
엘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문장 전체에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늦었어, 도망치려면 나랑-"
"지금 당장! 두루마리를 내놔!"
엘리가 나의 두 팔을 강하게 쥐어 잡으며 외쳤다.
분노와 두려움, 증오와 불안이 한 데 뒤섞인 목소리였다.
"이미 늦었다니까...?"
차가운 슬픔에 오들오들 떨듯이, 내 목소리는 부들거렸다.
"내가 불태웠어."
순간 엘리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 그게... 무슨..."
"여기 오기 전에, 교수의 집무실에 몰래 들어가서 그 두루마리를 불태웠어.
그게 있으면 결국 언젠가는 해독이 될 거고, 네 고향도 밝혀질 테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이제 늦었어... 도망치려면... 나와 함께 갈 수밖에 없어..."
낙엽이 떨어지듯, 엘리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옷 소매로 눈물을 닦고 조금 침착해진 호흡으로 엘리를 쳐다봤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는 영혼을 잃은 듯이 그 무엇도 응시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엘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엘리... 미안해... 내가 너무 심한 짓을 했어...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
약속대로 내가 너의 고향이 되어줄 테니까.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걱정하지 마... 나를 믿어줘... "
그러나 여전히, 엘리는 그 무엇도 보지 않은 채,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배에 아주 날카로운 것이 느껴질 뿐.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리들의 그림자 사이를 비춘 햇빛이, 엘리가 쥔 은색 나이프 위에서 반짝였다.
나는 그 가녀린 어깨를 잡은 손을 풀고 천천히 말했다.
"에, 엘리...? 갑자기... 무슨..."
엘리는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칼은 내 배를 뚫기 직전이었기에, 나도 또다시 엉겁결에 뒤로 물러섰다.
"엘리, 일단 진정해. 일단 칼은 놔두자 응?"
익숙한 칼이었다. 엘리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가 나를 오해했었을 때, 나에게 휘둘렀던 그 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허공을 휘두를 뿐이었지만, 지금은 내 뱃속으로 뚫고 들어오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엘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더 걸어갔고, 나는 점점 뒤로 물러섰다.
햇빛은 점점 더 밝아오고 있었다.
"엘리... 내 말을 들어줘..."
그러나 엘리는 멈추지 않았다. 입이 없을 뿐 아닌 귀도 없는 것처럼,
아예 나 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자신은 그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할 뿐이라는 것처럼,
무덤덤하고 아무런 색깔도 지니지 않은 채 걷기만 했다.
나는 다급하고 간절하게 무슨 말이든 해봤지만 결국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머지않아 협곡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제서야, 엘리는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협곡이 만든 완연한 어둠 속에서 나는 서 있었고
엘리가 서 있는 협곡의 밖은 거의 완벽해지려는 아침이 사방을 밝게 비춰서 눈부시기까지 했다.
"엘리, 우리 지금 시간이 없어... 당장..."
나는 한 번 더 목소리를 내봤지만 엘리는 그저 뒤돌아서 도서관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등을 돌리자마자 나는 협곡 밖으로 나와 엘리의 어깨를 잡았고,
그 순간 완전히 밝아진 햇빛이 내 이마를 강타해 지독한 현기증을 느껴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탓에, 그러니까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린 탓에, 머리를 앞으로 숙이게 됐고
그 순간 엘리가 휘두른 나이프가 내 뺨을 깊게 긁고 지나갔다.
피부가 불타는 듯했다. 쓰라린 고통이 내 얼굴 한쪽을 완전히 뒤덮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얼굴을 크게 찡그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고,
그저 공허하고도 차가운 눈의 엘리가 다시 뒤돌아서서 도서관 쪽으로 향하는 것만을 볼 수 있었다.
내 얼굴의 중간쯤에서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비릿한 철 냄새가 바로 옆에 있던 코를 찔렀다.
나는 거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듯이, 방금 막 태어난 햇빛이 무참하게 나의 상처를 휘저었다.
결국 나는 뒷걸음쳐서 차갑고 새카만 협곡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돌아갔고,
내 뺨 위에서는 빛을 알아볼 수 없는 두 개의 액체가 뒤섞이더니 턱 끝에서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하여 무심한 자연은 예정된 시간에 맞게 태양을 수평선 위로 올려보냈고,
이른 새벽의 보랏빛 어스름은 꿈속의 환상이었던 듯 점점 옅어져 가더니 새하얀 햇빛에게 밀려나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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