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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서로의 왼쪽에서

Ly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3.13 09: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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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이 기분 좋게 차오른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 신발이 땅을 박차는 소리,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바람 소리. 그리고 눈앞에 쭉 뻗은 길. 새벽 어스름이 내 몸을 감싼다. 깨어난 세상, 잠든 사람. 그 고요한 생동감. 세상을 독차지해야 느낄 수 있는 고양감.


  요 며칠은 그렇지도 못하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저 여자. 그냥 달리는 것도 아니고, 계속 내 옆을 스쳐서 앞서간다. 왼쪽!이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지만, 별다를 것도 없다. 저 여자야 신경을 쓰지도 않겠지만. 차라리 확 달려서 제쳐놓고 뛸까 싶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냥, 포기한 거다. 내가 뛰어나가도 페이스가 흔들리지도 않고, 무리해서 지치면 그사이에 똑같은 속도로 지나치는데 별수가 없었다. 저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났는지. 나 혼자만 신경 쓰느라 페이스가 곧잘 무너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빨리 달리면서도 나랑 돌아가는 시간이 같다는 걸, 억지로 의식하지 않으려는 뿐이다.


  발자국을, 보폭을, 호흡을 흉내 내도 차이는 똑같고. 앞서 나가면서도 호흡은 나보다 고르다. 한 손에 물병을 들고 다니면서도 마시지 않기에, 그걸 따라 했다가 탈수로 아찔해지기도 했다. 그 날은 아예, 벤치에서 한참 쉬기만 하다 돌아가야 했다.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 걸까.


  너무 신경을 쏟았는지, 도리어 안 오는 게 신경 쓰인다. 하기야, 몇 주씩이나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같이 달렸으니까. 어디가 아픈지,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탓인지 페이스가 잡히지 않는다.


  “하, 가야겠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가는 길이 낯설다. 땀 한 방울 없이 뛰는 심장이 낯설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도리어 짜증이나 내야 정상일 텐데,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지.


  하루, 이틀, 사흘.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 여자는 다시 나타났다. 뭔가에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머리끈을 씹어먹으며 머리칼을 추어올리는 모습이, 왠지 반가웠다. 저 가늘고 하얀 목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오는 걸까.


  오랜만이어서일까. 숨 하나 차지 않던 사람이, 무릎을 짚고 멈춰 헐떡였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던 사람이 빈 물병을 털었다. 지나가려면, 얼마든 옆으로 지나쳐 달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왁!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긴, 나도 얼굴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면 놀랄 거다.


  “저는 좀 남았는데, 드실래요?”


  “진짜요? 고마워요!”


  그것도 잠깐인지, 금방 반색하고 물통을 건네받는다. 입술이 닿지 않게 물을 몇 번 입에 흘려 넣더니, 물통은 금방 내 손으로 돌아온다.


  “푸하. 진짜 오랜만에 뛰었더니 말이 아니네요.”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마구 저으니 꽉 묶은 머리가 꼬리처럼 찰랑인다. 한번 쥐어보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무리하면 안 좋다잖아요.”


  “그쵸그쵸.”


  작은 끄덕임, 그리고 짧은 침묵. 우리는 다시 뛰었다. 뭔가 더 얘기를 하려 해도, 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열심이시네요?”


  다만, 새벽 어스름이 완전히 두 사람의 시간이 되었다. 며칠 만에 다시 나를 쭉 쭉 앞질러 갔지만, 그래도 같이 뛰는 사람이 되었다.


  “으아,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뛰어요?”


  “그래도 옛날에 육상 꿈나무였어요? 지금이야 그냥 회사원이긴 한데.”


  “진짜요?”


  못 이기는 게 당연한가 싶다. 그냥 취미로 설렁설렁 달린 사람이랑, 죽도록 뛰어본 사람은 다를 테니까. 괜히 질투할 이유도 없었다. 그만큼 노력한 건 걸.


  “이젠 그냥 취미밖에 안 돼요.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어요.”


  “그래도요. 뭐 하나에 그렇게 미쳐보는 게 힘들더라고요.”


  “에이, 옛날 일이에요, 옛날 일. 게다가 지금 열심히 뛰시면서.”


  그래도,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던 사람인 나와는.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웃으면서. 스마일? 알겠죠?”


  “네, 웃을게요.”


  가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건 문제지만. 왜 꼭 그런 쪽으로 가버리는지. 그냥 웃기만 해도 훨씬 나을 텐데, 자꾸 한탄을 하고 만다. 출근하려 몸을 씻으면서도 그 찝찝함이 가시질 않는다. 즐거운 얘깃거리를 미리 준비해야 하나.


  다시 한 번, 같이 돌아가는 횡단보도 앞.


  “그런데 얼마 전에 이사라도 오신 거예요?”


  “맞아요. 그 시간에 달리는 사람이 있어서 엄청 놀랐다니까요? 거기서도 새벽엔 혼자였거든요.”


  “전 어땠겠어요. 맨날 혼자 달리다 누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달리는데.”


  “무슨 유령 같았겠네요.”


  킥킥 웃는 소리. 처음 들은 웃음. 장난스러워서 나쁘지 않다.


  “그렇다니까요.”


  “아, 녹색불이다. 잘 가요!”


  “그러게요. 잘 가요.”


  하얀 간극을 건너기 전의 짧은 잡담. 오늘은 잘한 걸까.


  “지현 씨! 메일로 보낸 것 좀 해줘요!”


  “네, 확인했어요!”


  이놈의 일은, 왜 끝나기 직전이 되면 더 쏟아붓는지. 이렇게 밤늦게 들어가면, 할 수 있는 건 이른 아침의 조깅 뿐이다. 처음엔 혼자인 게 나았지만, 이젠 둘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즐거워서 더 그랬다. 가끔 말이 꼬여도, 취미도 같고 예쁜 사람이랑 있는 게 훨씬 좋으니까. 이 힘들기만 한 회사에서 나오는 거라곤 쥐꼬리만 한 월급이 끝인걸. 보람이라곤 없다. 아침에 달리면, 얘기도 즐겁고 건강도 챙기니까 일석이조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나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이 짜증을 털어내려면 지치도록 달려야 할 것 같아서.


  “어라? 웬일이에요? 오늘은 되게 일찍 나오셨네요?”


  “좀 찌뿌드드해서요. 전 그거보다 평소에 이렇게 일찍 나오셨다는 게 더 충격인데요. 역시 육상부.”


  “저야 남은 취미가 이거라서요. 뛰면 잡생각도 안 들고 좋잖아요.”


  생글생글 웃는 표정. 피로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만큼은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확실히 그렇죠. 게다가 밤엔 퇴근하면 지쳐서 뭘 할 수가 없다니까요.”


  “아침이 제일 기운차긴 하죠? 게다가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잖아요.”


  나도 저렇게 시원하게 웃을 수 있을까.


  “무슨 입꼬리를 그렇게 만져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쁘게 웃어지나 해서요.”


  “거울도 없이요?”


  “그럼 봐줘요. 어떻게 웃으면 예쁜가.”


  이리저리 얼굴로 장난을 치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났다.


  “우와, 시간 좀 봐. 우리 얼른 안 뛰면 시간도 없겠어요!”


  순식간에 반 시간이 사라져서, 우리는 급하게 뛰었다. 운동량을 채운다고 너무 격하게 뛰었더니 페이스는 페이스대로 망가져서, 끝날 때 즈음에는 둘 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하하, 다음엔 절대 이러면 안 되겠네요.”


  동감이다.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후아, 근데, 그 쪼… 아니 이름, 후, 이 어떻게 돼요?”


  “이렇게 새삼스럽게요? 하긴 벌써 만난 게 얼만데 아직까지 모르는 것도 이상하네요. 맨날 저기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김유진이에요, 김유진. 번호도 교환할까요?”


  “좋아요!”


  얼굴이 빨개진다. 갑자기 들떠서 소리를 질러서, 아니 너무 무리해서 달려서 그렇다. 연락처에 등록된 김유진을 보며, 연락처에 새겨졌을 한지현이라는 세 글자를 생각하며, 나는 기분 좋게 출근할 수 있었다.


  “에헤이, 뭘 그렇게 빼! 한 잔 쭉 들어, 쭉!”


  이런 구시대적 회식만 아니라면, 그걸로 좋은 하루가 되었을 텐데. 알코올이 다 운동의 적이고 군살인데, 왜 이놈의 회사는 힘들게 일한 사람을 불러다 못 먹여서 안달인지. 체력만 된다면, 종일 미친 척하고 뛰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은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미친 인간들이 죽자고 퍼붓잖아요.”


  “살살 뛰어야겠네요.”


  “맘 같아선 땀으로 알코올 다 빠지라고 뛰고 싶어요.”


  “그러면 더 안 좋대요. 페이스 조절 해 드릴 테니까 천천히 뛰어요. 무리하다 쓰러지면 그게 더 나빠요.”


  “괜찮아요. 하루 이틀 뛴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말을 했어도, 앞서 나가지는 않았다. 자기가 말한 대로 옆에서 딱 붙어서, 흔들림 없이 속도를 조절했다. 그것도, 내 체력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회복되면 회복되는 대로. 육상이 헛말이 아니라는 게 또 한 번 느껴진다. 적당히 헉헉대도록 옆에서 끊임없이 잡고 있으니.


  “진짜, 후, 그냥 빠른, 건! 하, 아니네요.”


  “고등학교 때까진 뛰었거든요. 아아, 진짜 근데 그래도 무슨 괴물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니까요.”


  “하, 후아, 하하, 흐.”


  “웃지 말고 숨이나 골라요. 한참은 더 뛰겠는데요. 아직.”


  이상한 데 불을 붙인 걸까. 유진 씨가 아주 미친 듯이 몰아친다. 둘, 넷, 여섯…… 도대체 몇 바퀴를……


  “언제ㄲ……”


  “쉿, 마시고, 내쉬고 그것만 집중해요. 지치도록 달려보고 싶다면서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뛰어지기는 하지만, 뛰어지기만 한다. 심장이 고동치지만, 그렇다고 터질 정도도 아닌데, 그게 너무 오래되니 살짝 가쁜 숨마저도 괴롭다. 다리는 확실히 땅을 박차고, 가슴은 크게 부풀지만, 그걸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멍해서, 멍하고, 멍하다.


  “한 모금 마시고 쉴까요?”


  이렇게 날 쥐고 흔들면서, 땀 한 방울, 숨 한 모금 떨림 없이 멀쩡한 건……


  “하, 무슨, 비법이라도, 후, 있어요?”


  “알려드려요?”


  저 생기 넘치는 웃음이 왜 무서울까. 그래도 난 끄덕일 수밖에 없다. 취미라도 더 잘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고. 이왕 맞출 거면 빠른 사람한테 맞추는 게 더 좋은 목표도 되니까. 또 이 사람한테… 여러 가지로 뒤처지고만 있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하니, 시간은 미친 듯이 흘렀다. 서로 연락도 해 가면서 주말에도 빽빽하게 운동 스케쥴을 잡았다. 그렇게 해도, 자세, 호흡, 페이스 같은 걸 하나하나 배우다 보면 시간이 모자랐다. 덕분에 연락도, 만나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달리기가 아니라,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김유진, 나보다 한 살 어리고, 육상은 초등학교부터. 지금은 평범한 사무직. 이직하면서 이 동네로 이사했고, 좋아하는 건 조깅이랑 매운 거. 그쪽도 스트레스 하나는 장난 아니게 받는 모양이었다. 나도 가끔은 그냥 엄청 매운 거 욱여넣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이번 주말엔 뛰고 나서 밥이나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좋죠! 안 그래도 뛰고 나면 배고픈데. 사 주는 거면 당연히 먹죠! 이왕이면 매운 거!]


  약속을 잡으면,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얘기는 즐겁고, 취미도 잘 맞는다. 그저 횡단보도 앞에서 별 영양가 없는 얘기를 해도 좋았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쉽다. 언젠가 마트에서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워 꽉 끌어안은 건 지금도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덕분에 서로 당황했으니까.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문제일 거다. 유진 씨는 어떨지.


  “그래서 어디로 갈 거예요?”


  저 반짝반짝한 눈. 실망하게 하면 큰일 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매운 갈빗집 맛있는 데 있거든요.”


  “오오, 매운 갈비. 좋죠! 빨리 가요!”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그쪽 아니에요!”


  잔뜩 뛰고서, 체력이 어디 남았는지. 아니 그 전에 위치도 모르면서 말이다. 운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저기 맞추려면 엄청 더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내 페이스에 맞추니 저렇게 쌩쌩한 걸 테니.


  “매운 갈비, 제일 맵게 2인분 주세요.”


  나름대로 자주 오다 보니, 확인도 없이 그냥 가버린다.


  “여기 보기엔 그런데 되게 맛있나 봐요?”


  목소리를 낮춘다. 가게 안이고, 확실히 허름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그렇지만 사람만큼은 바글바글했다. 예약을 잡지 않았으면 우리도 저 바깥의 줄에 서 있어야 했을 거다.


  “아는 사람은 다 알거든요.”


  “오오, 그럼 맛없으면 책임지기? 한 10바퀴 더 뛸래요?”


  “진짜 맛있거든요?”


  다만, 자리만 잡았지 사람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어서,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었다. 별거 아닌 상사 욕, 어디 음식점이 맛있는지, 어떻게 뛰기 시작했는지, 애인은 어땠는지. 아니, 거기선 끊겨버렸다.


  “매운 갈비, 제일 맵게 2인분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오, 진짜 맛있어 보이네요.”


  음식이 나와서도 같고, 말을 돌리는 것도 같았다.


  “일단 먹어 봐요.”


  그래도, 주면 주는 대로 잘 먹었다. 먹여주는 걸 피하지도 않고,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분홍빛 입술이, 금세 부어 새빨개지는 모습에 자꾸 눈길이 쏠렸다.


  “뭐 묻었어요?”


  “아뇨, 아뇨. 하나도, 하나도 안 묻었으니까요. 예뻐요, 아직.”


  “아직?”


  슬쩍 올라간 입꼬리는 그냥 즐거운 걸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걸까. 뭐라 말하고 싶어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네? 네? 아뇨, 없어요! 괜찮아요!”


  티가 많이 난 걸까. 아니면 초조해 보이는 걸까.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아서요.”


  허둥지둥 말을 주워섬긴다.


  “엄청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시고, 취미도 잘 맞고, 예쁘시고, 또…”


  엉망진창, 두서없이.


  “그리고 또?”


  히죽 하고 올라온 입꼬리. 저것 때문이다. 저 입술에 홀려서 나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좋다는 말에 잠시 흔들렸을 뿐, 계속 나를 바라보는 저 미소에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갈비는 졸아가며 국물 타는 냄새를 풍기는데도, 나는 한참을 칭찬하고 추켜세웠다. 마음이란 담아둘 수 없는 것일까.


  “아, 갈비 탄다. 얼른 먹어요.”


  갑자기 내 입술로 향한 젓가락에, 더 어지러웠다. 한참 달릴 때보다도 더 크게, 심장이 미친 듯 뛰어서.


  “매워요? 얼굴 엄청 빨간데~.”


  “아뇨, 저도, 엄청 잘 먹거든요! 더워서 그래요! 더워서!”


  식탁마다 타오르는 불길, 뜨거운 국물. 그래 덥다. 더워서, 고기가, 볶음밥이 코로 가는지 입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모습 탓인지, 먹던 숟가락으로 챙겨주어서 더 더웠다.


  “아, 맛있었다. 덕분에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미안해요, 아니 그러니까…”


  “됐어요, 다음에도 이런 집이나 잔뜩 알려줘요.”


  헤어질 때도, 제대로 답을 하질 못했다. 덕분에 주말 내내 내 침대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아주 부서져라 두들겼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런 짓을 한 건지. 고백하려고 데려간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좋아서,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서였는데. 여자끼리, 그래 여자끼리라 다행이다. 그 쪽팔린 게, 그런 사랑이라고 생각은 안 할 테니까. 안심되고, 두려웠다. 감정이 휘몰아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렇게 며칠, 집 안에만 박혀있으니 도어벨이 울린다. 유진 씨다.


  “무슨 일 있어요?”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없이 문을 열어주니 자기 집인 것처럼 집 안으로 폴짝 뛰어든다.


  “몸살이에요? 보기엔 멀쩡한데.”


  스스럼없이 이마에 손이 얹힌다.


  “열은 없는데.”


  생각이 있기에 다가오는 걸까. 아니면 친하기에 다가오는 걸까.


  “만약에 이상한 생각 하는 거면,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그냥 나와요. 알았죠?”


  다 아는 걸까.


  “유진 씨.”


  조잘거리던 입술이 멈춘다. 시선이 나를 꿰뚫는다. 심호흡 한번.


  “이번 주말에 술이라도 마실래요? 안주 맛있는 데 알아요.”


  갸우뚱거리던 고개가 똑바로 선다. 입꼬리가 진득하게 올라간다.


  “운동한 거 다 날아간다고 싫어하지 않았어요?”


  “아니 뭐… 가끔은…”


  “좋아요. 진짜 맛있는 데로 가요, 대신.”


  어차피 이런 감정을 담아둬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뛸 수도, 일할 수도 없다. 덕분에 회사에서도 며칠째 대판 깨졌다. 그럴 바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대로 끝은 내는 게 낫겠지. 저 미소를 보면, 틀린 선택은 아닐 거다. 그래야만 한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날은 둘 다 운동도 하지 않고 내 집에서 밥을 차려 먹었다. 내가 한 밥이 맛있다는 말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건배!”


  그렇게 편안하게 주말을 맞았다. 만날 시간이 될수록,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이건 각오한 거니까.


  한 잔, 두 잔. 술이 넘어가며 점점 머리가 멍해졌다. 비싼 안주도 내버려두고 술만 마시자니, 금방 머리가 흔들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죠? 억지로 마시지만 말고 말해봐요.”


  “그래요! 있어요!”


  술 때문인지, 어차피 더 빨개질 얼굴도 없다는 자신감이었는지. 생각보다 목소리가 커졌다. 괜찮다. 여긴 술집이다. 원래 시끄러우니까, 아무도 여길 보진 않을 거다.


  “좋아해요. 좋아해서, 사랑해요. 기분 나쁘면 당장 나가도 되는데, 그래도 이 말은 할거에요. 진짜로 사랑해요. 무슨 말인지 알죠? 친구끼리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요!”


  혀가 꼬여서, 말도 비틀거린다. 제멋대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울긴 왜 울어요.”


  그런데도, 자리를 박차지 않는다. 거친 술집 휴지가, 내 눈가를 닦아준다.


  “안 나가요?”


  “다 안다고 했잖아요.”


  “진짜요? 진짜로?”


  울음이 터져 나온다. 어차피 술도 잔뜩 마셨는데 누가 좀 보는 게 대수일까. 겨우 얘기했는데. 내치지 않는데.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 싸구려 휴지가 찢어진들 뭐가 어때서.


  “저도 그렇거든요.”


  이마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닿는다. 요란하게 취한 공간에서, 가장 고요한 품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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