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윽... 슥...
고요한 화실에서, 붓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으음..."
햇빛이 비쳐들어오는 창가에서, 와일드헌트의 시라오 에리는 선생과 캔버스를 번갈아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 이거 언제까지 해야 되니?"
모델을 해주던 선생은 슬슬 좀이 쑤시는지 에리를 보챘지만, 몰두하는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좀 더... 좀 더...!"
에리는 순백의 공터에 선생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떤 구도를 잡든, 어떻게 스케치하든, 자신이 느끼는 그에 대한 감정이 온전히 표현되지 않았다.
"으아~... 안 되겠어요! 좀 쉬었다 다시 하죠!"
"어, 그럴까? 뭐 좀 마실래?"
선생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종이컵에 내용물을 따르니, 아직 온기를 머금은 녹차가 채워졌다.
"오오...! 설마 이거, 직접 준비해오신 건가요?"
"물을 사 마시기엔 돈이 아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차를 좋아해서 한 통씩 챙겨다니거든. 식기 전에 어서 마시자."
"아, 넵!"
녹차를 홀짝이며, 에리는 선생의 표정을 살폈다. 차 한 잔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이, 그녀에겐 왠지 낯설었다.
"응? 에리, 왜 그래? 아, 오늘 면도 안 하고 와서 그런가?"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그거랑 별개로 면도는 꼬박꼬박 하시는 게 좋다고요?"
"그치? 보는 눈이 많으니까."
피로에 지친 낯빛과는 달리 천진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에리에게 한 가지 수수께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마스터..."
샬레의 선생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선생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에리에게는 그것이 고민이었다.
샬레의 선생. 키보토스 저편에서 온, 미숙한 학생들의 지도자.
구세주라고 불릴 자격이 있음에도, 스스로 영웅으로 불리기를 거부한 어른.
그런 선생에게, 시라오 에리 역시 몇 번이나 도움받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학원을 뒤덮는 마법진을 그리는 대사건도 있었고...
일상에서 종종 마주하는, 사소한 일도 있었다.
"에리 쨩! 혹시 오늘 일정 있어?"
"혹시 오컬연 일정이 따로 없으면, 같이 카페 가자!"
"네, 네?! 아, 저, 저는...!"
예를 들면, 여느 때처럼 학우들에게 붙잡혀 쩔쩔매고 있을 때. 호의가 싫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관심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신상 파르페가 나와서, 같이 먹으면 분명 맛있을 거야! 에리 쨩도 좋지?"
"그, 그게 그러니까...!"
"오, 신상 파르페라! 그거 좋은데?"
"어? 이 목소리는..."
안절부절 못하던 자신 뒤에서 들려오는 호쾌한 목소리. 에리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상담 감사했어요!"
"하하, 샬레가 해야할 일이니까. 그보다도... 혹시 선생님도, 같이 파르페 먹으러 가도 되니?"
"네? 선생님도요?"
"그치만, 선생님은 단 걸 안 좋아하신다는 소문이..."
"그치만 신상은 못 참잖아! 내가 사줄테니까, 같이 먹으러 가자. 어때?"
카페에 함께 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선생은 곁눈질로 에리에게 윙크했다. 그제서야 에리는, 선생이 사실 자신을 위해 나선 것임을 눈치챘다.
"아...! 화, 확실히 마스터가 사주는 파르페면 더 맛있을 것 같네요! 같이 가죠!"
"어, 진짜? 나이스! 에리 쨩도 간다면야!"
"그럼 어서 가요! 길 안내는 저희가 할게요!"
에리가 선생의 장단에 맞춰준 덕에, 에리는 학우들과 카페에서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학우들과의 잡담에 어울려주면서, 선생과 착 달라붙어 있던 덕분이었다.
"오늘 즐거웠어, 에리 쨩! 다음에 또 보자!"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나중에 놀러오시면 제대로 대접해드릴게요!"
"네! 다들, 내일 봐요~!"
"슬슬 해가 지니까, 조심히 들어가라!"
학우들을 손 흔들며 배웅한 후, 노을이 지는 와일드헌트의 광장에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조금 쑥쓰러운듯 몸을 배배 꼬던 에리는, 곧 입을 열었다.
"저... 고마워요, 마스터."
최대한 진솔한 마음을 담아 감사를 표하는 에리에게, 선생은 조용히 웃었다.
"곤경에 처한 학생을 두고 갈 정도로, 난 냉정한 사람이 아니거든.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 그건..."
모자를 푹 눌러써 눈을 감춘 에리는, 선생을 힐끔 올려봤다.
언제나 학생들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먼저 움직이는 사람, 그렇지만 그 자신은 기원도 행적도 불분명한 사람.
세대도 과거도 가치관도, 모든 것이 다른데도 학생들을 헤아리는 사람.
그런 선생에게, 에리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나저나 오늘은,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모양이네."
딴 생각을 하던 에리를 현실로 되돌린 것은, 그녀의 스케치를 살펴보던 선생의 한 마디였다.
"네? 아, 그게... 뭐랄까, 마스터를 볼 때의 감정을 그려내는 게 너무 어려워서요..."
"어? 날 볼 때의 감정?"
선생은 조금 놀란듯했다. 학생이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생에겐 꽤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음... 그럼 그 감정에 대해, 선생님에게 얘기해줄 수 있을까? 조금 궁금해져서 말야."
"아, 네. 원하신다면..."
에리는 눈을 감고, 선생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연상했다. 마치 타로 카드의 그림을 떠올리듯이.
"그러니까... 마스터는 마치, 저 먼 별에서 온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별? 뭐야, 외계인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 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엑! 진짜?"
선생은 장난스럽게 반응했지만, 에리의 표정은 진지했다. 외계인, 그것은 확실히 선생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단어였다.
"그야 마스터는 학생들에 대해 뭐든 아시지만... 저희는 마스터의 인생이나 과거, 심지어 취미같은 사소한 것도 모른단 말이죠? 그런 면에서 마스터는, 그야말로 외계인... 아닐까요?"
말하면서도 혹시 선생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신경쓰는 에리였지만, 선생은 묵묵히 그 말을 들어주었다. 아마 에리의 진심을 선생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선생이 생각하기에도, 에리의 평가는 정확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이러니저러니해도... 선생님은 일단 이방인이니까 말야."
선생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는 키보토스에서 무엇일까, 어떤 식으로 비치고 있을까.
어쩌면 학생들에게 있어, 그는 고향을 잃고 키보토스로 넘어온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망토도 초능력도 없지만, 그가 오면서 키보토스의 질서는 눈에 띄게 바뀌었으므로.
언젠가, 그는 모래에 파묻혀가는 과거에서 아이들을 구해냈다.
언젠가, 그는 최고최선의 마왕을 용사의 길로 인도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아이의 증오를 용서했다.
언젠가, 그는 형태를 잃어도 사라지지 않는 불굴의 긍지를 지켜냈다.
언젠가, 그는 이형에 감춰진 아이들의 진심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는 모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구원이라 부를 선생의 행적은, 확실히 학생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질 법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에리, 선생님은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냐."
"네? 그런... 가요?"
그는 영웅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초인이 될 생각은 더더욱.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됐다.
"선생님은 그저 키보토스 바깥에서 왔을 뿐, 너희와 별다를 게 없어. 다른 점이 있다면 너희보다 연약하다는 것과... 더 성장할 여지가 없다는 것 뿐이지."
선생은 고개를 살짝 숙여 에리와 눈을 마주쳤다. 어른에 대한 동경심이 느껴지는 에리의 눈빛은, 그녀에게 성장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음을 암시했다.
선생에게 있어, 성장이란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스스로를 극복하며 성장한다면, 아이들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미 모든 성장이 끝나버린, 자신과는 달리.
그렇기에 그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이 자아와 장래를 고민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그는 큰 감사를 느꼈다.
"헤에... 그랬군요."
에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가치관을, 그녀가 이해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도 언젠가 어른이 된다면, 어른으로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저... 마스터."
"얘기하렴. 언제나 듣고 있단다."
선생의 자상한 미소는, 난롯가의 잔불처럼 에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마스터는 스스로가 나약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그건 기쁘구나."
"그야 당연한걸요. 어른이라고 해서,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같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요."
에리의 말대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은 키보토스에도 많았다. 선생 역시 그런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계약이라는 무기를 아이에게 내세우는 질나쁜 어른.
예를 들면, 자신의 예술품에 도취한 나르시스트.
예를 들면, 아이를 장기말로만 써먹는 거짓된 학생회장.
예를 들면, 이 세계의 구조를 메타포로 해석하는 데에만 급급한 문학가.
예를 들면, 세계라는 게임판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주무르려는 어른이 되다만 아이.
그런 그들에게 분노하고, 또 스스로를 돌아보며 선생은 지금같은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조언해주는 어른.
"그러니까 마스터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주세요. 마스터는 이 키보토스에서..."
"응? 이 키보토스에서?"
"...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에리는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필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은 그녀는, 아무래도 이번 작품의 영감이 떠오른듯했다.
"마스터, 시간이 늦긴 했지만... 모델,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번엔 정말 좋은 작품이 그려질 것 같아요."
"오, 진짜? 에리가 그렇다면야!"
선생은 익숙하게 표시된 자리에 섰다. 에리의 모델역을 종종 맡았던 덕분이었다.
"포즈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음... 가슴을 펼치고, 고개를 살짝 위로 향해주세요."
"이렇게?"
"딱 좋아요, 그리고..."
날이 저물어갔지만 에리의 예술혼은 꺼지지 않았기에, 선생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샬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똑, 똑똑.
다음 날 아침, 화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에리 선배, 있어? 들어간다?"
오컬연의 막내, 키누이 레나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본 것은...
"음냐... 에헤헤..."
화실 한구석의 책상에서 잠든 선배 에리였다.
"나 참, 태평하네. 오늘 부활동은 오전이니까 잊지 말라고 했는데... 어?"
툴툴대며 에리를 깨우려던 레나는, 곧 화실 가운데에 천으로 덮인 캔버스를 발견했다.
"이건... 선배 그림인가? 그럼 설마 그림 그리다가 여기서 잔 거야?"
레나는 궁금했다. 기숙사에 돌아가지도 않고 밤새 열중했을 정도면, 그 그림은 과연 어떤 작품일까.
호기심이 생긴 레나는, 그대로 천을 들쳤고...
"오?"
거기에는, 에리의 역작이 있었다.
"뭐야, 엄청 잘 그렸네... 선생님이 모델인가?"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먹구름을 뚫고 무지개를 향해 날아가는 어느 남성의 모습. 그리고 그 남성은, 다름아닌 선생이었다.
"헤에... 어제 선생님이 왔단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에리 선배랑 같이 있었을 줄은..."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중, 레나는 캔버스 구석의 어떤 쪽지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제목인가? 희한한 이름이네. 아, 그것보다도!"
쪽지를 다시 접고 캔버스에 천을 씌운 후, 레나는 선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에리 선배, 일어나! 부원들 기다린다고!"
"어, 으음...? 아, 레나 쨩? 여긴 왜..."
"여긴 왜, 가 아니라! 오늘 부활동은 아침에 하자고 카노에 선배가 그랬잖아! 특제 포션이 완성됐다나 뭐라나?"
"아, 맞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금방 준비할게요!"
모자를 고쳐쓴 에리는, 외투를 걸치며 나갈 준비를 했다. 레나는 그런 선배를 못 미덥다는 눈으로 째려보았다.
"정말이지... 에리 선배는 특히 문제라니까? 그래서 자기 앞가림은 어떻게 하려고..."
"저, 레나 쨩? 저 혹시 이상하진 않죠?"
"안 이상하거든. 그러니까 빨리 가자! 카노에 선배가 또 뭔 소릴 할지 모른다고!"
투덜대면서도, 레나는 에리를 챙겨 부실로 향했다. 급히 나간 탓에, 캔버스에 있던 쪽지가 바닥에 떨어지긴 했지만.
"아, 맞다! 나 지팡이 안 챙겼는데!"
"아, 그런 건 됐으니까! 빨리 뛰기나 해!"
복도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캔버스 속 선생이 지키고 있는 고요한 화실과는 달리.
- 키보토스 최고의 마법, 내일의 희망에게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쪽지는, 그 그림의 이름이 되는 날을 조용히 기다렸다.
*****

선생을 진지하게 다루는 팬픽을 쓸때는 "초능력 없는 슈퍼맨"의 이미지로 글을 쓰곤 합니다.
이번에 쓴 소설은 이를 더욱 심화시켜서, 소설의 탈을 쓴 선생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고찰이 됐네요.
그래서 좀 지루한 내용이 된것도 같지만, 한번쯤은 쓰고 싶었던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만족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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