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295416&_rk=96k&exception_mode=recommend&page=1
2편: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295516&_rk=96k&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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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https://www.marines.mil/Portals/1/Publications/The%20Sea%20Services%20in%20the%20Korean%20War%201950-1953%20%20PCN%2019000412100_1.pdf?ver=2012-10-11-164123-027
원산 만에 있던 많은 섬들 중에, 유엔군은 결국 7개를 점거하고 사용했다: 여도, 모도, 사도, 신도, 대도, 웅도, 그리고 황토도.

섬들 위치를 대강 표시함. 영어 명칭을 다시 번역한거라 좀 헷갈려서 틀릴 수도 있음
처음으로 점령한 섬은 신도였다. 적군과 그들의 총기가 있음이 보고되었다. 따라서 섬의 점령을 위해, 두 척의 구축함과 두 척의 호위함이 제 112 지휘 구축함 division(해군 division은 뭘로 번역해야 하나?)(B.F. Roeder 중령)의 지휘하에, 2월 24일 아침 0700시부터 2시간동안 맨체스터함의 헬기의 유도에 따라 포격을 가했다. 0900시까지 총 358발의 5인치탄과 259발의 3인치탄이 섬을 타격했다. 이 포격 이후, 210명의 한국 해병대원들이 상륙했다. 상륙 과정에서 저항은 없었으며 1018시에 섬의 점령이 보고됐다. 갈마각에서 고작 3.66km 떨어진 신도는 해군의 함포사격을 위한 관측과 원산의 기차 및 트럭의 움직임 관측에 유리할 것이었다.
다음으로 점령한 섬은 가장 큰 여도였다.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에 맞닥드리지 않고, 210명의 한국 해병대원들에 의해 아무런 사고 없이 점령됐다.
여도는 대략 2.29km 길이에 1.37km 폭이었고, 해발고도 약 113미터였다. 상륙에 적합한 한 절벽과 해안가가 섬 서쪽에 위치했다. 근처엔 약 70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살고있는 여도리라는 어촌이 있었다. 마을은 몇개의 오두막과 학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도의 크기, 위치, 그리고 지형은 포위전을 구현하기 위한 기지로 이상적인 입지였다.
3월 중반에, 공산군은 목선으로 대도 상륙을 시도했으나 구축함의 함포사격으로 격퇴당했다.
1951년 3월 24일, 이 시도로부터 3일 뒤에, 미군 구축함 잉글리쉬(R.J. 토너 중령)가 shore fire control party(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략 해안 화력통제... 음.)를 대도에 상륙시켰다. 150명의 한센병 환자 수용마을을 빼고는 대도는 점유되지 않았었다. 이 섬은 전에 일본군의 요새이기도 했으며, 원산에 더 가까웠다. 다음날, 순양함 세인트 폴과 잉글리쉬함을 포함한 4척의 구축함이 원산의 표적들에 포격을 가해 좋은 명중률을 냈다. 대도의 관측반의 유도 덕분이었다.
여도에서 작전하던 한국 해병대는 점진적으로 만의 다른 몇개 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갔다: 모도, 소도, 그리고 황토도. 이 섬들은 최고의 관측소였다.
원산항의 항구들에 최초로 배치된 해군 장교는 제임스 S. 램프 2세 대위였는데, 그는 제 95 사령관임무부대에서 파견된 정보장교였고,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이었으며, 한국에서 태어나 18년을 살아 한국어가 유창했다.
"저는 95.2 사령관임무부대의 명령에 따라 1951년 6월 13일에 조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여도, 황토도, 사도, 모도, 신도 5개의 섬들을 점유하고 사용하고 있었죠. 이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기지가 있던 여도와 해군 함포 사격 관측반이 있는 황토도였습니다."
"저는 여도에서 살았습니다. 기지로써 최적의 섬이었고 적들의 포로부터 안전할 정도로 충분히 항구에서 멀었으며 역공이 있을 때 우리 함선들이 지원해주기 적합한 위치였죠."
"제가 도착하기 전에, 한국 해병대원들이 1951년 3월이나 4월쯤에 큰 4피트(약 1.2미터)짜리 탐조등을 마을 바로 위 여도 북쪽의 언덕 위에 설치했습니다. 전력은 가스 엔진에서 얻었고 해병대원들이 운용했죠. 적들이 공격할 때 이 탐조등이 마을 앞 해변을 비췄습니다. 다른 때에 우리는 이 탐조등을 우리 항공기들의 체크포인트로 사용했습니다.(우연하게도, 이 탐조등 때문에 원산 쪽의 적 포대에서 포격이 날아왔죠-매일 밤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1952년 8월에 떠날 때까지 한번도 직격은 없었습니다. 지근탄은 몇 번 있었지만요.)"
"몇달 동안, 저는 여도리 근처의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1951년 7월 14일에, 여도는 D.P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제41 해병독립특공대의 본부가 되었습니다.(MBE가 뭔지 몰라서 번역 안함) 다음날에 원산 섬 전체를 지휘하는 리처드 G. 워가 미 해병대 중령은 여도에 새 사령임무부대(CTE 95.23)을 설립했습니다.
" 95.23 캠프에는 다수의 텐트가 있었습니다- 4개는 막사, 하나는 식당, 하나는 화장실. 이들은 마을 근처의 작은 언덕과 나무들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제 여도에서의 14개월 동안 구축함들에서 우리 화장실로 변기를 좀 옮기려고 시도했는데 큰 소득은 없었죠; 변기를 좀 편하게 만들어보려고 갈고닦았는데 제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우리 텐트들은 적들한테 좋은 표적이었습니다. 호도반도의 포대들이 여도 근처의 함선들에 포격하는 많은 경우에, 일부 탄은 우리 텐트 근처까지 떨어졌습니다. 지근탄과 파편이 좀 있었지만 그 포격으로 전사자가 발생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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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은근 길어서 번역 힘들었다...
일단 본문에 따르면 원산의 적 포병을 무력화시키고 상륙지점을 마련한 건 미국 해군이지만, 정작 처음 상륙해서 기지를 마련한 건 한국 해병대였음. 그 이후 재차 미군과 영국군 해병대가 배치돼서 일종의 독립적인 연합부대가 창설된 거 같음
한편으로, 본토 쪽 적 포병과 달리 섬들 자체에는 별다른 전력이 없어서인지 섬들에 상륙할 때 큰 저항은 받지 않았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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