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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다시 맑음 소녀가 돼야 하는 거야?#4

ㅇㅇ(211.200) 2019.11.06 23:52:19
조회 2649 추천 51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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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카.


호다카는 내게 어떤 존재일까?


이 의문에 대해 새삼스레 깊이 생각해본 것은 그날이었다.




“조, 좋아합니다! 선배!”


“…….”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멍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얼떨떨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딱히 싫은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호오 중엔 호에 가까운 사람이다.


발군의 운동 신경과 훤칠한 이목구비로 2학년 중에서도 제법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마에다 군.


고백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에게 할 이미지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입학한지 삼 년이 다 되도록 인간관계가 다른 반까지 닿지도 않는 나한테 먼저 고백이라니.


뺨을 톡톡 두드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에다 군의 얼굴이 상기돼있었다. 기대에 찬 모습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새삼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여학생들이 부러움과 질투가 반반 섞인 시선으로 여길 쏘아보는 중이다.


나는 대답 대신 얕은 신음만 흘리다가,


“미안해, 마에다 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받아줄 수는 없어.”


급격히 그늘이 지는 마에다 군의 얼굴,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여학생들이 대조를 이룬다.


“선배, 제가 마음이 안 드시나요?”


“그렇다기보다는…….”


말끝을 흐리면서 뇌리에 깊이 박힌 그 얼굴을 선명히 떠올렸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네?”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하고 의지가 되는 사람.”


“남자친구인가요?”


“남자친구?”


그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호다카와 나는 애인 관계? 그러고 보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호다카가 좋다.


구름 밑으로 떨어지면서 손을 내밀 때, 마치 신님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보는 듯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흉물스럽게 손목에 채운 수갑도 그 후광을 가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다카는 그만큼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어쩌면 단순히 햄버거의 은혜, 함께 도망 다니며 쌓은 정을 잊지 못해 달려와 준 것은 아닐까?


그날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그저 동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들어 나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비슷하긴 한데 약간 달라. 지금은 연락을 잘 못하고 있거든. 삼 년 정도.”


“삼 년이요?”


마에다가 놀라서 말끝을 높였다.


“그 사람도 선배를 알고 있나요?”


“응, 아주 잘.”


“선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요?”


“……아마도?”


“그런데 삼 년이나 전화 한 통 없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거나,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다가 싫증나면 찾아오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을 듣자 내 머릿속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호다카를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뒤 홱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목이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이런 느낌은 살면서 처음이다.





“찼다고?”


“응.”


집에 돌아오자, 나기가 여전히 담요를 둘둘 마른 번데기 상태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어제보다 열이 더 오른 것 같다.


“나기, 나 잘못한 걸까? 고백 거절.”


“뭐 어때? 남녀 사이에서 차고 차이는 건 흔한 일인데.”


“그, 그렇지?”


“나도 오늘 세 번이나 찼거든.”


“…….”


매번 느끼지만 나기는 나랑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


“굳이 누나 잘못을 하나만 꼽자면, 호다카 형에 대해 똑 부러지게 말을 안 한 거야.”


“똑 부러지게?”


“그래,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하면서 선을 그었어야지. 누나는 남자들이 고백해오면 기분이 어때? 솔직하게.”


“솔직하게…….”


나는 마에다 군이나 그 전의 남학생들이 고백해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함께 밀려왔지만, 느낀 그대로 털어놓았다.


“나쁘지는 않았어.”


“그래? 그럼 왜 안 받아줬어?”


“호다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겐 호다카뿐인 걸.”


“간단한 일이잖아, 그럼.”


나기는 휴지로 코를 세게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호다카 형도 누나를 좋아해.”


“그럴까?”


“아니, 좋아한다? 이것도 애매한 단어겠지. 사랑해.”


“사, 사랑?”


“그래, Like가 아니라 Love라고. 어설프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분명히 내 앞에서 말했어.”


귀에 열이 확 올랐다. 눈앞의 감기 환자보다 더 새빨개진 얼굴을 손등으로 허겁지겁 식히고 있는데,


“누나가 놀 줄 아는 성격이었으면 호다카 형이랑 밀고 당기면서 심리전하는 팁을 가르쳐줬을 텐데, 형이든 누나든 둘 다 그런 성격은 아닌 거 같고.”


“나기, 사람의 마음을 갖고 놀면 못 써.”


“지금 누나가 그러고 있잖아. 호다카 형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못 정하니까 자꾸 남자들이 꼬이는 거야.”


“그, 그런가?”


그럴 악의는 없었는데.


나 그새 나쁜 여자가 된 거야?


“이참에 딱 정해. 호다카 형이랑 이어지고 싶어?”


“……응.”


“그럼 코칭 들어갑니다~”


나기가 양손바닥을 맞비비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일단 포지션 선점이 중요해.”


“포지션 선점?”


“어려운 단어인가? 그러니까, 호다카 형이랑 누나가 다시 만날 만한 장소 정해놨어?”


“아니, 연락도 안 닿는걸.”


“대충 그럴 만한 장소는?”


“음…… 있긴 있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그곳.


호다카와 단둘이서 걷다가 정체불명의 강풍 때문에 비밀이 들통 난 오르막길.


만약 우연히 재회한다면 거기일 것 같았다. 근거는 딱히 없지만.


“그럼 호다카 형이 나올 만한 날을 잡아서 미리 거기에 서 있어. 기다리는 거야.”


“뭐, 뭐하면서?”


“형이 가장 설렐 만한 구도로.”


“설렐 만한 구도…….”


“그리고 제일 중요한 포인트!”


나기가 억양을 강조하며 검지를 치켜들었다.


“절대로 누나가 먼저 달려들어선 안 돼! 호다카 형이 감격에 겨워서 달려올 때까지 기다려, 알겠지?”


“왜?”


“먼저 안달 난 쪽이 지는 거거든.”


“……어렵다.”


나는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을 참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호다카에게 할 짓이 아니다.


“됐어, 나기. 나는 진심으로 승부할래.”


“진심? 누나, 답답하게 좀 굴지 마.”


나기가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면서 혀를 찼다.


“본래 연애란 진심이 반, 요령이 반이야. 요령만 피우면 서로 간만 보다가 헤어지지만, 진심으로만 다가가도 결과가 좋은 경우는 잘 없어. 금방 싫증난다니까.”


“내가 호다카한테 싫증?”


상상이 안 가는 미래다. 호다카를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눈이 돌아간다고?


“그럴 리 없어. 나는 끝까지 호다카만 보고 살 거야.”


“하아,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네. 졌다, 졌어. 이왕 그 길을 가기로 했으면 잘 되길 빌게.”


나기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완강하게 밀고 나간 내 마음도 마냥 상쾌하진 않았다.


그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언제 읽은 거야.





호다카와 어떻게 다시 만날까?


그런 배부른 고민을 할 때가 그리웠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호다카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자, 다시금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을 강하게 조여 왔다.


먹구름의 그림자로 뒤덮인 지상 곳곳을 강하게 내리쬐는 빛줄기의 비.


멀리서 감상하면 절경이지만, 실상은 파리지옥처럼 인간 제물을 기다리는 덫.


추억의 물결이 잔잔하게 지나가자 다시금 냉혹한 현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


매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예쁜 갈색 눈에 보브 컷, 우리 학교 교복 차림의 소녀.


소심한 나한테 먼저 다가와서 자주 말동무가 돼주는 친구, 나나세 짱이다.


“히나 짱?”


나나세 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먼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평소라면 덩달아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했겠지만,


“어?”


나나세 짱이 무얼 하려는지 깨닫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나나세 짱! 물러서!”


“응?”


“얼른!”


나나세 짱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보려던 빛줄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아슬아슬했다.


나는 쿵쿵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안도도 잠시였다.


무대 조명처럼 줄곧 한 곳만을 비추던 빛줄기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나나세 짱을 뒤덮고 말았다.


그러자 나나세 짱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싫어―!!!!!”


오늘 본 것만 해도 벌써 여덟 명.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그저 호기심 때문에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너무 잔인한 하굣길이다.


“아흑, 아흐흐흐흑…….”


나나세 짱을 먹어치운 빛줄기가 사라진 장소에서 무릎을 꿇고, 나는 손톱으로 미친 듯이 땅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만약 내가 5분만 일찍 맑음 소녀로 돌아갔다면, 적어도 나나세 짱만큼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마미야 나나세?”


다음날 학교에서 내 말을 들은 학생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애가 있었나?”


“있었어, 있었어!”


나는 조바심을 내며 눈에 보이는 친구마다 붙잡고 물었다.


“기억 안 나? 어제 역사 시간에 몰래 만화 그리다가 걸려서 화장실 청소한 애!”


“그래? 화장실 청소는 나가토가 했는데?”


“아니야! 그럼 이건 어때? 운동회 달리기 트랙 치장할 색지 가져온 것도 나나세 짱인데! 모르겠어?”


“그건 토모에야.”


“아니야, 나나세 짱인데…….”


나는 포기하지 않고 교무실로 달려갔다. 담임이신 사쿠라 선생님이 때마침 자료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선생님!”


“아마노?”


선생님은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니? 뭐 큰일이라도?”


“나나세가 등교를 안 했어요!”


“나나세?”


“네, 기억하시죠? 마미야 나나세!”


“몇 반 학생이니? 우리 반은 아닌 거 같은데?”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 와중에 선생님이 들고 있던 물건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출석부.


“실례합니다!”


“아, 아마노!”


나는 선생님의 손에서 출석부를 가로채서 복도를 달렸다. 그리고 재빨리 페이지를 넘겨 우리 반 학생들의 명단을 확인했다.


“마미야 나나세, 마미야 나나세…….”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짚어가며 이름을 찾았지만, 나나세 짱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사람처럼.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나나세 짱의 흔적과 기록들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져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


요요기 회관 옥상의 토리이.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과 선물을 동시에 안겨준 장소다.


여기 때문에 나는 인간 제물이 돼서 저 구름 위의 세상으로 끌려가야만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덕분에 호다카와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의 크기가 곧 선물의 크기를 넘어설 것 같다.


“미안해, 호다카…….”


낡은 토리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야 도저히 고개를 든 채로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혼잣말이라도.


“기껏 그 고생 끝에 나를 구해줬는데, 아무래도 난 저주를 받은 운명 같아.”


나기, 스가 씨, 나츠미 씨, 그리고 호다카. 너무 미안해.


엄마, 이제 정말 곁으로 갈게요. 그때처럼 기사회생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토리이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제 한 발짝만 더 가면 토리이를 완전히 통과한다.


그러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물고기들이 곡예를 부리는, 낙원 모습을 한 감옥으로.




그때였다.


“어딜 가려고 해요,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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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관객 3만 넘기면 연이어 올림.


념글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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