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향붕쿤의 요청으로 쓰는 베티버 추천 시리즈.
국내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프레데릭 말,
크리드, 톰 포드 등의 베티버는 따로 얘기 안 한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향수도 얘기 안 함.


1. 엘리 사브 노육 Elie Saab No. 6

남의 브랜드에서 향수를 더 잘 만들기로 유명한
프란시스 귀정이 영혼을 갈아넣어 만든 향수.
여러분이 알 만한 베티버 향수 중에선
샤넬 시코모르에 가까운 녀석이다.
시코모르의 어둡고 고요한 냄새와 얼추 비슷.

그런데 시코모르가 드라이하고 얇게 착 붙는다면,
엘리 사브 노육은 레이어가 여러 겹인 느낌이다.
시코모르가 심플한 목재 가구와 꽃다발 같은 냄새라면,
엘리 사브 노육은 그 배경에 울창한 숲이 있다.
어둡지만 그린그린 야채인간을 위한 작품.

어떤 면에선 그레이 베티버와도 닮았는데
노육은 시트러스 부분이 허벌창 허브와 엮여 있고
상대적으로 더 젊고 활력적이며 유니섹스 면모가 적다.

이거 프래그런섹스에 60달러에 올라왔을 때
좋다고 댓글로 몇 번 썼는데 산 사람 있나 모르겠다.
지금은 80달러대로 올랐다. 그래도 여전히 혜자다.

이걸 첫 번째로 추천하는 이유는 반나절 가량 지속되는
엄청난 성능, 그러면서도 죽이는 품질 때문이다.
베티버+숲향 좋아하는 사람은 이걸로 해라.
200달러대 향수들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개혜자템임.
귀정 브랜드에서 나온 향수도 이런 레벨은 흔치 않다.


2 힐리 베티버 베리타스 Heeley Vetiver Veritas

힐리를 향수 잘 모르는 어린노무쉐키들이나 쓰는
븅신 브랜드라고 판단해버리면 곤란하다.
허섭한 쓰레기 작품도 종종 있지만 의외로
몸쪽 꽉 찬 직구를 꽂는 정통파 작품도 많다.

베티버 베리타스는 흙 냄새, 땅 냄새에 치중했다.
거기에 매캐한 느낌이 아닌 깊은 느낌의 스모키향.
봄비 내린 안개 낀 대지, 풍요와 은혜로움이 느껴진다.
2010년대 작품임에도 새로운 시도는 0이지만
사실 이런 향이야말로 베티버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사내다운 진짜 베티버를 찾는다면 이걸로 해라.
나는 겔랑 베티버 예전 버전이 그리울 때 힐리를 찾는다.
그만큼 만듦새가 좋고 진국이다.


3. 디올 베티베 Dior Vetiver

메종 디올 초기작 중 하나로,
아직 시중에 재고는 남아있지만 단종된 게 확실하다.
40ml짜리만 사둔 걸 후회하고 있다.

힐리 같은 베티버가 정통이라면 디올 베티버는
갓 볶은 커피향(!)을 띄운 특이한 작품이다.
여기 쓰인 베티버도 신선함보다 기름진 쪽인데
거기에 커피를 섞으니 고소하고 그윽한 냄새가 난다.

베티버의 장점을 잘 드러낸 향수는 아니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독특한 베티버를 찾는다면 이걸로 해라.
길어도 한두 달 안에 시중에서 사라질 거라 생각함.


4. 프라다 앵퓨지옹 드 베티베 Prada Infusion de Vetiver

프라다 앵퓨지옹 시리즈가 모두 그렇듯이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깨끗함이 장점.
여러분이 알 만한 베티버 향수 중에서는
크리드 오리지날 베티베에 가까운 편이다.
시작부터 네롤리+시트러스를 앞세운 투명감.

크리드와 다른 점은 앵퓨지옹 시리즈 특유의
아기 궁뎅이 같은 폭신폭신한 질감이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크리드와 달리
프라다는 항상 일관된 품질을 보여준다.
오리지날 베티베 꽝 뽑느니 프라다를 사라.
솔직히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5. 지방시 베티베 Givenchy Vetyver

탑부터 베이스까지 모두 베티버로 달린다.
시작 부분의 베티버는 싱싱한 수분감이 많은 베티버,
점차 향긋하고 드라이한 베티버가 되었다가
마지막엔 샌달우드와 결합된 기름진 베티버가 된다.

단 한 작품 만으로 베티버의 많은 성격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코펙트럼 늘리기에 좋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잘 알려진
다른 베티버 향수들과 비슷한 데가 많다.
이건 지방시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쓸 데 없는 다른 재료가 적게 들어있어서
베티버 특유의 나른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거 뿌리고 누우면 10초 안에 잠들 수 있다.
가격은 50달러대로 무척이나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