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적으로 꾸준히 내가 쓰는 글을 끝까지 정독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글의 첫머리를 시작해볼까 해.
지성적인 느낌의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사실 증명가능한 객관적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지식 위주의 사고 방식과는 상충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그래서 글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에 있어서, 적지 않는 어려움이나 수고로움을 들이는 경우가 있을 거야.
최대한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써보려고 하지만, 깊이적인 측면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어서 조금 난해한 용어나 개념들이 불가피하게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려고 해.
지식의 깊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겸손함을 항상 마음 속에서 되뇌이고, 잊지 않으려고 다분히 노력한 결과에 대한 보답 혹은 상응이라고 생각해.
(사실 글의 깊이를 따지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지만 말이야. 오히려 개성있거나 특색있는 글이라는 점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성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 글은 항상 실제 삶 속에서 즉각적인 피드백을 가져다줄 수 있어야 하며, 그 효용의 증명이 생명의 활기를 복돋아주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 쪽으로 쏠려 있어. 그래서 완전히 남성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보다 양성적인 세계관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용, 둘 다를 포함하는-) 에게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지.
오늘은 천재성과 지능, 그리고 남성성에 관해서 다루려고 해.
인터넷에 떠도는 혹은 유투브나 대중 매체에서 말하는 천재에 관한 글들 혹은 영상들이 생각보다 없더라고..
천재에 대한 정의도 막연하고, 그에 대한 전반적인 맥락 자체가 아예 전무한 실정이지.
물론 나라고 해서 무언가 특별하게 천재와 지능에 대한 사색과 고찰을 한 것은 아니야. 내가 천재성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들을 읽으면서부터 였어. 철학이라는 학문은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매우 필수적인 학문이지만, 그 중요성과 의의가 퇴색되어 가는 작금의 시대적 상황에서 고리타분하고 무언가 안경을 쓴 고지식한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는 하지.
칸트의 저서나 쇼펜하우어, 플라톤, 헤르메스, 등등 수많은 철학을 다 섭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재라는 주제에 관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찾아보았고, 그 결실을 나름대로 여러분들과 공유하려고 해.
익명성이라는 가면 아래에서 자유롭게 글을 기고할 수 있는 갤러리라는 공간은 참으로 뜻깊은 느낌을 전달해주는 것 같아.
물론 그 익명성 때문에 감정의 배설통로가 되기도 하고, 무분방한 자유의 남용 사례도 적지 않게 보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글과 의견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교, 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가 낳은 최대의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천재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느낌 안에는 무언가 대단하고 위대하며, 번뜩이는 영감으로 수 세대를 아우르는 걸작을 탄생시키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남자들이 지니고 있는 인정 욕구에 대한 목마름은 아마 천재가 되고자 하는 막연한 소망과 바램과 비슷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어.
천재에 관한 글이나 영상들이 인터넷에 별로 없다는 점에 근거해서, 이번 글은 조금 긴 템포로 가져가볼까 해. 끝까지 읽고 안읽는 것은 그대의 자유와 선택이니까 알아서 하고. 나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내려볼게.
우선, 천재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천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되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중심점을 잘 잡아놔야 마인드 맵처럼 그 연관성과 맥락을 한 눈에 알아보기 편하니까 말이야.)
천재 :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 혹은 하늘이 내린 사람 .. 뭐 새로운 규칙을 착안해는 사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 등등 무수히 많은 정의가 존재해.
다 맞는 말이고, 그 의미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일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마음에 드는 정의는,
' 하늘의 재주' 라는 정의야. 말 그대로 '하늘 천'에 '재주 재' 라는 한자에서 따온 의미이지.
천재의 천 자가 하늘 천 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아래보다는 위에서 무언가 능력을 하사받는 혹은 인체의 부위 중에서 발이 아닌 머리에 조금은 포커싱이 맞춰져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뇌라는 기관이 수신기이자 발신기라는 것은 저번 글들을 통해서 알테니까 아무래도 천재는 머리 안에 있는 뇌라는 기관을 통해서 무언가 하늘의 뜻을 전달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봐.
천재에 대한 동경은 아무래도 대중적으로 비춰지는 천재의 이미지가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내고,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창작물을 내보임으로써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할거야. 하지만 실상 천재는 그 이미지와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떠안고, 그 고통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사색과 고뇌를 해온 것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봐도 돼.
천재는 스스로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되어지는 게 아니거든.
더 많은 고통을 떠안는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대해서 혹은 내면에 대해서 더 많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감수성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그 격차만큼 괴리감을 자아내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투쟁 안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상상하면, 조금은 천재가 걸어온 길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천재가 지닌 잠재력의 성질은 용수철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용수철을 더 많이 누르고, 더 많이 끌어내리는 만큼 튀어오르잖아. 많이 누르는 행위가 바로 고통의 총량이고, 그 누르는 한계의 강도와 세기가 강한만큼 고통 또한 커지지. 한계점에 대한 임계치가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바로 천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어. 다만 그 한계점을 제대로 알지 못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할 경우, 용수철은 그 탄성을 잃어버리고 용수철로서의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지.
천재는 이 잠재력을 완전히 내보이기 전까지 끝없이 올라오는 충동을 향한 제어와 긴장 상태에 놓여 있어.
긴장 상태가 바로 더 많은 잠재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근원지이기도 해. 그래서 천재는 남들보다 더 많은 정신 질환에 노출되어 있는 거야. 긴장을 끝없이 의식하고, 이를 견뎌내는 일은 의식적이든 간에, 무의식적이든 간에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든.
천재와 바보가 종이 한장 차이라는 말도, 생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서서 오랜 긴장 상태를 해소하고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면 천재가 되는 거고,
그 긴장 상태의 지속이 스스로가 견뎌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면, 정신이 미쳐 버리는 바보가 되는 거지. 천재와 바보 둘 다 생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 놓여 있음으로 동일하게 비춰질 수 있지만, 천재는 바보와 달리 고통을 승화시킬 수 있는 자기 자신만의 무기를 찾은 셈이랄까?
감수성은 아름다움에 관한 심미적 능력인데, 천재는 범인보다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를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보면 돼. 평범한 일상에 숨어있는 찰나의 순간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포착은 미적 감수성의 정도와 비례하고, 범인에게는 똑같고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천재에게는 호기심의 대상, 혹은 영감과 창조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
"그렇다면 천재의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갑작스레 번뜩이는 영감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걸까?"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 혹은 이전과는 판이한 맥락의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자아의 경계가 소실되는 곳이야. 대개 종교나 경전에서 언급하는 공성, 무아, 진공, 등으로 언급하고 있는 지점이지. 이 곳은 완전히 마음의 주의와 시선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자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그 몰입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그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게 돼.
몰입의 강도와 세기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신의 힘이 강해야 하며, 정신의 힘이 강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단련 또한 선행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거라고 봐. 다만 심신의 단련은 몸과 마음이 제 자신의 숭배와 헌신을 받치고 있는 지점에 대한 명확한 앎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말이야.
오히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에 더 많은 비중을 실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천재는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활짝 꽃피우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을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근기를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길고 긴 시간 속에서 고독과의 사투도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요구받게 돼.
의식의 성장과 진화라는 현상은 '계단식 성장'의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맥락과 기존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뒤바뀌기 위해서 임계점을 넘어서려고 할 때,
폭발적인 힘을 필요로 하고, 이 폭발적인 힘의 축적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계단식 성장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짜임새를 지닐 수 밖에 없어.
(임계점에 대한 극복은 더 많은 생명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과 마음을 형성시키기 위해 한계 지점까지 의식의 영역을 내몰아 가거든.)
어찌되었든, 더 많은 생명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충동을 발산하지 않고 안에서 갈무리 해야하고, (정의 보존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그 충동이 낳는 고통을 승화시킬 정도의 힘이 응축되기 위해서는 번뜩이는 영감의 원천이 생성되는 '진공의 상태'에 머물러야 돼.
편의상 진공의 상태라고 명명했지만, 조금은 자세히 이에 대해 설명해보자면, 진공의 상태는 지성이 침묵하는 지점, 혹은 마음이 제 기능을 멈춘 상태 혹은 자아의 해체가 진행되어 자아가 제 스스로의 경계선을 인식할 수 없는 곳 이야.
보통 대자연이 가져다주는 경이로움 앞에서 혹은 유명한 예술 작품의 실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자발적으로 샘솟는 숭고함 앞에서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진공의 상태 (소리의 시작되고 끝나는 곳) 로 빨려들어가게 되는 데, 범인들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금방 이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반면,
천재들은 이 순간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일상 속에서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태를 구현해내는 자기 자신 만의 수단과 방안을 강구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거야. 지속되는 고통과 언제 그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을 감수하면서도 말이지.
밖을 향한 충동이 억제되고, 그 충동의 발현이 진공 상태로 지속적으로 흡입되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감정은 허무와 회의로 뒤덮인 무지의 어둠이야.
고통을 승화시키는 자기 자신 만의 수단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그 잠재력과 폭발력이 너무나도 강한 진공 상태의 에너지는 회피 혹은 저항이라는 방어 기제를 유발해. 그리고 회피 혹은 저항을 반복할 때마다 이는 무의식에 차곡차곡 억압의 잔재들로 쌓이게 돼.
범인과 천재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범인은 이 억압의 잔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뿐더러 이미 집단 무의식 하에서 프로그래밍된 사회적 통념을 고정불현하는 진실로써 받아들여.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 속에서 무언가 고정불현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 착각 속에 빠지는 메커니즘하고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면 쉬울거야.
이와 반대로, 천재는 더이상 회피 혹은 저항으로 귀결되는 방어 기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무의식의 프로그래밍된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해. 이러한 행위와 사고가 가능해진 것은 밖을 향한 충동의 억제를 통한 생명 에너지의 점진적 축적이 선행되었기 때문이야. ( 남성성이 지니고 있는 공경성을 밖을 향해 발산하지 않고 인내함으로써 내면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샘솟는 창조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해낸거지. )
물질적 구현에는 항상 그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천재성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무언가 의식의 수면 위로 솟아나 이 형태가 구체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전까지 천재성의 발현은 의식의 점진적 확장이 불러오는 더 많은 고통에 대한 감내가 필요해. 삶 자체가 '고'의 살아있는 현현임을 알고, 고의 소멸로 나아가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 일이 바로 천재가 영적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진공의 상태에서는 즉각적으로 고통을 승화시키는 방편에 대한 알음알이가 찾아오는데, 이 앎의 파장이 더 높은 파장과 동조될수록 천재가 내면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의 높낮이가 결정돼.
따라서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의 의식 수준이 결정적인 대목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연유에서 기인해. 스승의 가르침이 더 높은 파장과의 동조를 이루고 있을 때, 그 가르침을 전달받는 제자 또한 일시적이지만 그 높은 파장과 일치하는 결이 형성됨을 볼 수 있거든.
파장의 동조, 또는 결의 '일컫음' 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은 순식간에 높은 파장이 낮은 파장을 잡아먹는 '존재의 위계질서' 를 보여주고 있어.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의 격차가 너무 현격하게 나거나 혹은 제자의 에고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을 경우에는, 종종 그 높은 파장은 위압감 혹은 반감을 유발하기도 돼. 분명 그 둘은 물질적 차원에서는 동일한 공간 안에 있지만, 스승이 말을 걸기 전까지 제자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어.
끼리끼리의 법칙, 삼삼오오 모두가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는 대목이야..
아, 높은 파장이라는 것은 진동의 울림이 어느 차원에서 울리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해. 우리 인체로 따지자면, 머리에서 울리느냐 혹은 머리 위에서 울리느냐 혹은 배꼽 밑에서 울리느냐 등으로 나뉠 수 있지.
천재는 지금 이 순간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방편을 강구하고, 그 알음알이가 즉각적인 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진동의 울림이 가져다주는 좋은 느낌) 고통에 대한 감내가 범인보다 높은 수준에서 형성되어 있어. 동기를 유발하는 근원이 실질적인 힘을 자아내는 진공의 상태로부터 유발되기 때문에 천재의 회로는 '자가동력'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면, 알아듣기 쉬울거야.
그래서 남들보다 더 적은 필요로부터 더 큰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왜냐하면 미적 감수성의 뛰어남은 일상의 경이와 기적을 자주 마주치게 함으로써 지속적인 고통에 대한 보상적 역할을 수행해주거든. (쇼펜하우어의 저서에서 나온 말을 쉽게 풀어쓴거야.)
천재가 외부로 그 자기 자신의 개성을 다분히 실현하고,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한 창조물을 만들어냈을 때, 이는 초보적인 수준에서의 영적 지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어. 왜냐하면 아직까지 천재에게는 자아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그 경계선이 남아있거든.
영적 지능이 점차적으로 성숙하면, 천재는 외부를 향한 창조를 실현하기보다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관조하기 시작하는데,
자아의 경계가 완전히 소실되는 곳이 바로 자아의 해체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며, 이는 살아있을 때 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모든 숭배와 경배가 향하는 지점에 안착했음을 의미해. 시공간이 멈춘 진공 상태에서 지성의 쓸모없음을 여지없이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지.
성숙함은 무언가를 더해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필요없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음으로서 얻어지는 거야.
진정한 어른은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수용함으로써 세간적인 것들로 치부되는 일들이 모두 영적으로 승화시키고, 내면으로 되돌리는 방편을 터득한 사람이야.
지성과 영성을 가르는 경계선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냐의 여부 혹은 스스로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자발적으로 겸손함을 내보이느냐의 여부야. 지성의 끝자락에서 삶의 허무를 받아들이고 서도, 꼿꼿하게 삶의 허무함을 직시하게 될 때, 비로소 천재는 성인의 반열에 들어서게 돼.
운명의 여신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을 거부하고, 허무의 세계 깊숙한 곳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용기 앞에서 자연의 순리와 이치가 역행하는 현상은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달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임에 틀림없어. 이상.
FEAT. 아, 참고로 남녀의 성행위 혹은 섹스는 남자에게로 하여금 그 여자와의 감정적 얽힘을 자아내. 성행위는 단순히 쾌락의 해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어. 감정적 얽힘은 그 여자가 지니고 있는 감정의 불순물에 대한 일부 책임을 떠안는 것과 동일하고, 남성은 그 여성에게 유전물질 (정액의 씨앗)을 남기는 대신, 여성이 지니고 있는 저차원적 속성에 대한 욕망 일부를 받아들이는 셈이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야. 다만 쾌락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거지.
성욕이 영적 지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점을 짐작해볼 때, 남녀의 성행위에 따르는 대가는 다른 욕구보다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끌어내리는 힘을 극복한 만큼 더 많은 도약이 가능해지지. 물론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얽힘은 남성을 노화에 따르는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실제적인 만남에 따른 성행위는 자꾸만 남성의 시선과 주의를 내면이 아닌 외부로 쏠리게 만드는 유혹을 견뎌내야 하는 시련을 안겨주지. 자위는 단순히 에너지의 낭비라면, 성행위는 관계적 얽힘에 따른 책임이 가중되는 셈이야.
남녀가 서로 몸을 섞을 때, 체액과 유전 정보의 교환 그리고 에너지 장의 결합은 해당 여성이 지니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 모두를 떠안는 것이라고 보면 돼. 마음의 투영이 고스란히 비춰지는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 간에 장단점이 공존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해.
자위가 성행위보다 더 낫다거나 성행위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종종 보여서 한번 언급해봤어.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