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병자이자 주인인 김상철이 불법 카메라와 녹음기를 설치한 후 작성한 일지에서 비롯됨.
3월 12일
301호는 오늘도 알람이 열네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알람음을 더 시끄러운 걸로 바꿨는데도 이 지경이다.
301호야 달리 하는 일도 없이 고시 공부만 할 뿐이니 괜찮지만, 문제는 그 아래층 201호일 것이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생활을 하는 웹툰작가 지망생 201호는 위층 때문에 오늘도 이사를 고민하고 있다.
402호는 최근 들어 이상하다. 원래도 자위가 잦긴 했지만 요즘은 거의 하루 종일 그러고 있다. 혹시 애인을 구해 몰래 동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02호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어제가 월세를 받는 날이었는데 돈은 도착했다. 걱정된다.......
오늘은 제법 큰 이변이 있었다. 수도관이 누출된 것이다.
누출된 곳은 301호의 현관 앞이었다. 소화전 안 아래쪽에 들어가 있는 이 수도관은 301호가 물새는 소리를 쫓아 열어봤을 때는 소화전 문의 아래로 새어나올 정도로 넘치고 있었다.
그의 항의 전화를 받고 도착해보니 온수가 허연 김을 피어올릴 정도였다. 그는 급하게 집에 있는 휴지나 신문지 따위로 바닥을 닦고 있었지만, 이미 계단으로까지 물은 번져 있었다.
나는 꽤나 빠르게 대처했지만(그도 그럴듯이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301호는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새어나온 물은 자기 수도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고 불평하길래 이번 달은 그냥 면제해주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기분이 풀렸다.
수리기사가 상당히 늦게 도착했다. 그 동안 물이 계단 아래까지 흘러간 탓에 소음을 항의하러 가던 201호가 미끄러질 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둘은 싸움에 집중하느라 수도관 문제에는 관심이 덜했다.
3월 13일
301호는 이제 일찍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알람을 꺼버린 상태다. 오늘은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이전처럼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는 데 보낼 생각인 듯하다.
201호는 덕분에 평안한 잠을 보낼 수 있었다.
402호에서는 하루 종일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후 11시 쯤 잠시 빌라를 나왔는데 십 분만에 돌아왔다.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과할 정도로 살폈다.
102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물이 또 누출됐다. 수리기사가 돌아간 지 하루 만에! 바로 그 위치에서!
301호가 내내 자고 있었기에 굳이 클레임을 받는 일 없이 내가 먼저 다시 기사를 부르고 바닥을 닦았다.
수리를 제대로 하는지 옆에서 감시까지 했다. 이번에야말로 수도관에 생긴 구멍은 확실하게 메워진 것 같다.
또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바닥의 물을 직접 닦아보니 이 날씨에 바닥에 뿌려졌음에도 한참을 식지 않고 따뜻했는데, 막 나온 물은 매우 뜨거울 것이다. 입주민이 맨살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일 테다.
3월 14일
수도관이 또 터졌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기사도 모르겠단다.
물은 어째 처음보다 더 세차게 흘러나오는 것 같다. 양동이에 받아보니 잠깐 사이에 물이 꽉 찼다.
기사는 자신보다 더 전문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여기서 멀고 바쁜 사람이라 하루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세조차 받지 않기로 했으니 새나가는 지출이 엄청날 것이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구멍이 있는 부분을 수건으로 감고 양동이를 아래 쪽에 받쳐 주기적으로 물을 갈았다. 소화전 안은 작으니 소화전의 문을 열고 아래에 양동이를 두어 소화전 바닥에 넘쳐 흐른 물을 받도록 했다.
301호는 어제 친구들을 불러 밤새 술을 마시더니 하루 종일 자고 있다.
201호는 착실하게 일을 일과를 보냈다.
402호에서는 또 그런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방에만 카메라를 설치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만일 혼자서 계속 저러는 거라면 건강에 분명 좋지 않을 텐데......
102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집에 그가 쓰던 물건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내가 무언가 잘못을 한 걸까? 그래서 도망가버린 걸까? 그런데 왜 월세는 꼬박꼬박 주는 걸까.
오늘은 그의 방에서 잘 것이다.
3월 15일
301호가 매우 분노했다. 찝찝한 기분에 일찍 일어나 보니 현관 밖에서부터 들어온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나는 한참 동안 수증기를 날려보내려고 노력했지만 301호가 분노해 나올 때까지 전혀 없애지 못했다. 소화전에서 무슨 불이라도 난 것처럼 솟아올랐다.
게다가 물이 매우 이상했다. 양동이를 보니 물이 지나치게 뿌얘져 있었고, 안에 뭔지 모를 붉은 먼지 같은 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온도는 저번보다 더 강해서 양동이를 손으로 잡았다가 데일 뻔했다.
이런 물을 입주민들이 쓰게 둘 수는 없었다. 새어나오는 속도도 도무지 막을 수 없을 정도고 말이다. 결국 특단의 조치로 나는 빌라 내의 수도를 아예 끊어버렸다.
다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불만이 상당할 것이 틀림없다. 보건소에 연락했지만 언제 올지 모른다. 입주민들은 며칠이고 물을 직접 사서 써야 한다.
이 일로 입주민들이 더 많이 떠나게 되면 어떡하지?
3층 아래로 물로 다 젖어서 도무지 다 닦을 수가 없다. 물은 모두 아직 뜨겁다. 곳곳에 물을 조심하라는 안내문을 붙여놨다.
201호는 편의점을 가는 길에 또 미끄러질 뻔했지만 그 외엔 괜찮게 하루를 보냈다.
402호에서는 밥 먹는 소리나 화장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밤이 좀 더 깊어지고 난 뒤에 문을 따고 들어가봐야겠다.
102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온다던 기사도 오지 않는다.
3월 16일
물에 벌레가 꼬였다.
무슨 벌레인지 모르겠다. 다리가 여덟개고 긴 주둥이에 실같은 혀를 휘날린다.
바닥에 새어나온 물을 핥아 마시고 있다. 혹은 그 안에 있는 붉은 것을 잡아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3층 소화전에 가까워질수록 벌레의 수가 늘어났다. 소화전에는 새까말 정도로 들끓고 있었다.
누출된 구멍에서부터 나온 걸까?
입주민들과 대책 회의를 했다. 빌라 차원에서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그래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들에 계속 도움을 청하고 있지만 어째선지 아무도 오지 않는다.
101호가 무서운 추측을 했다. 어쩌면 지금 이런 현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관에서 하나하나 도울 여유가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혼란을 막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있고 말이다.
무서운 상상이다. 우선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입주민들과 나는 다같이 모여 벌레를 죽였다. 시체가 웬만한 남자 키 절반 정도로 쌓였다. 모두 빌라 앞 맨홀에 버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봤다. 벌레들이 물을 모조리 마신 탓에 바닥은 다시 축축해진 상태다.
301호는 벌레를 핑계로 하루종일 집에서 놀았다.
201호는 충실히 하루를 보낸다.
102호는 아직이다.
3월 17일
301호는 하루 종일 자고 있다. 알람이 몇 번 울리다 꺼진다.
201호는 일 관련 문제로 계속 외출해 있었다.
402호에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새벽 두 시 102호의 집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깨져 있었지만 방 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누가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메라에는 창문이 깨지는 모습이 각도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102호가 왔다 간 걸까.
물이 다시 터져나온다. 벌레가 더욱 찾아왔다. 수증기가 빌라 전체를 가득 채웠다.
소화전 가까이에는 벌레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물에 질식해 죽거나 서로의 압력에 깔려죽은 것들이 뭉쳐진 것 같다. 벌레의 몸이 약간 녹은 후 서로 뭉쳐져서, 바닥에서 떼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3층 바닥은 벌레들의 시체로 거의 완전히 깔렸으며 새어나온 물로 축축하고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밟을 때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3월 18일
301호가 놀랍게도 알람을 한 번 듣고 일어났다. 어차피 수증기 때문에 제대로 잘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덕분에 꼴이 말이 아니지만 일단 공부를 하러 나가겠다는 듯하다.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201호는 일을 쉴 것을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빌라의 일과 비슷한 경우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지만 여의치 않아 보인다.
402호는 드디어 고요하다.
102호는 돌아오지 않는다.
101호가 빌라 곳곳을 영상으로 찍고 있다. 유튜브 같은 곳에 올려서 공론화를 하겠다는 것 같다.
벌레의 시체가 이룬 땅이 2층과 4층까지 퍼져나왔다. 물을 흡수해서 미끄러지지 않는 것은 좋다.
또 한 편 벌레가 싼 것으로 추정되는 녹색 분비물이 땅에 이끼처럼 끼었다. 모두 기묘한 냄새가 난다. 이상하게도 싫은 냄새만은 아니다.
벌레를 무언가가 이빨로 뜯어먹은 듯한 흔적이 있다. 벌레를 먹는 짐승이 들어온 것 같다.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3월 19일
나는 이곳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이쯤되면 운영 자체를 그만둘 생각을 할 법도 하다. 그러지 않은 건 역시 내 머리에 이상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가끔 머릿속에 벌레나 먼지가 낀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데 어쩌면 빌라가 내 정신의 영향을 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301호는 알람에 맞춰 계속 깨어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수증기가 정신을 어지럽힌 듯하다.
201호는 고통에 훌쩍이고 있다. 우리 모두 이 빌라가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짐을 싸고 있다. 근처 모텔에서라도 자려는 듯하다.
402호에서 다시 그런 소리가 들린다. 한 번 더 들어가봐야겠다.
102호는 오지 않는다.
101호가 어제부터 오지 않는다.
오늘 새벽 세 시쯤 벌레를 먹는 동물을 잠깐 봤다. 손전등을 비추자마자 바로 도망졌지만 지하에서 벌레를 먹고 있었다.
온몸에 털이 난 원숭이같다. 눈이 마치 개구리알이 부풀어오른 것처럼 머리를 뒤덮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로 벌레를 먹는다.
3층은 이끼로부터 이상한 식물이 자라났다. 청동색이다. 그 사이로 잘 보이지 않는 날벌레들이 날아다닌다. 덥다.
벌레가 이룬 땅이 빌라 옥상에까지 번졌다.
3월 20일
301호가 수도관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찾아가보니 물을 마시고 있는 거라고 한다. 입가에 붉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벌레들이 달려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듯했다.
201호가 처음 보는 동물을 요리해 먹고 있었다.
402호는 흐느끼고 있다.
102호는 아직이다.
빼곡히 들어찬 식물들이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색의 열매과 꽃을 피워낸다. 방울뱀의 꼬리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열매는 맛이 중독적이다. 손이 멈출 수 없다.
머리가 둘 달린 새가 불쾌하다. 계속 내게 너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
벌레가 들끓고 301호 현관문 앞 소화전에서는 계곡처럼 물이 계속 쏟아나온다. 소화전 문을 열어보니 사지가 달린 작고 큰 두 눈을 가진 생물들이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웃는다. 무어라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새들이 끝없이 노래한다.
3월 21일
102호의 방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작동을 멈춘 지 한참 됐었는데 어떻게?
드디어 102호가 돌아온 걸까?
수증기가 유독 심해 카메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김상철이 휴대폰으로 찍은 녹화 자료
(심하게 흔들리는 화면)
(102호의 문이 보인다)
(김상철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문을 연다)
(수증기가 화면을 가리자 김상철이 바쁘게 닦는다)
(김상철이 묘사한 쥐 같은 생명체와 사지 달린 것들, 온갖 식물들이 자라나 있다)
(김상철은 정글을 해치며 어디론가 계속 걷는다)
(갑자기 식물 없이 이끼만 덮이 방이 나타난다)
(시계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402호 입주자가 등을 돌린 채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앞에 놓인 무언가를 계속 어루만진다)
(김상철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든다)
(화면이 어지러워 식별이 어렵다. 휴대폰으로 402호를 계속 내려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웃는 듯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 소리와 함께 계속 들린다)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얼굴이 뭉개진 402호의 시체와, 그 옆에 누워있는 훨씬 더 오래된 시체의 모습이 보인다)
(오래된 시체는 미소를 짓는 표정이며, 오른쪽 갈비에 뼈의 결을 따라 갈라진 구멍이 있다)
(구멍으로부터 수도관에서 누출되어 나오는 물과 똑같은 모습의 물이 흘러나온다)
(김상철이 흐느낀다)
(높은 목소리로 웃는 것 같기도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온다)
(김상철이 놀라 돌아본다)
(풀숲 사이로 빨간색 눈 두 개가 보인다. 각 눈의 크기는 주먹만하다))
(사지 달린 생명체가 잎사귀들 위에 앉아 뭐라고 계속 말하며 김상철을 보고 웃고 있다)
(빨간색 눈이 서서히 움직인다. 그럴 때마다 식물들이 크게 흔들린다)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봄의 시작이야. 생명들이 깨어날 때가 됐어.
(격렬한 화면 흔들림)
(포효 소리)
(비명 소리)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2024년 3월 22일 거성빌라 전체를 봉쇄하였다.
*2024년 3월 29일 봉쇄 구역을 거성빌라 주변 100미터로 확대하였다.
*2024년 4월 2일 봉쇄 구역을 거성빌라 주변 200미터로 확대하였다.
*2024년 4월 3일 작전 실행, 실패.
*2024년 4월 11일 봉쇄 구역을 거성동 전체로 확대하였다.
*2024년 4월 15일 2차 작전 실행, 목표 감소율의 절반 달성.
*2024년 4월 18일 소규모 봉쇄 실패 발생. 누출 생물 추적 중에 있다.
*조만간 시 전체 봉쇄를 두고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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