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의 내용은 기존의 검은색 폰트로 진행될 것이고, 융의 해설에 대한 나의 부차적이고 주관적인 번역은 파란색 폰트로 진행함)

(융 특유의 난해한 표현과 문장은 내 나름 현대식으로 다듬었음)

다섯살 소녀의 꿈의 내용:

정원에 지하 통로가 나 있다. 나는 그 지하 통로 입구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땅 아래에(지하 통로 안쪽에) 악마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친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으면서 나를 아래로 밀어버린다.

지하 통로 아래로 밀려진 나는 선반 위에 묘목이 가득한 연장 창고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꿈은 어린 시절의 전형적인 '어떠한 충격적인' 느낌의 꿈이다.

여러분들도 어린시절 별안간 가족 중 한명이 나타나서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는 바람에 난데없이 놀라거나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꿈의 기본적인 심상은 그러한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꿈엔 또한 '악마' 의 존재가 드러난다.

소녀는 악마를 직접 보지 않았지만 땅이 흔들리는 순간 그 원인이 내부 어딘가의 악마에 있음을 그저 느낀다.

우리는 종종 꿈속에서 괴물을 조우하지 않았음에도 괴물이 나타났음을 그저 깨닫곤 한다, 즉 괴물은 '알 수 없는 것', '미지의 존재',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위와 같은 간략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꿈에 어떠한 '의미' 나 '해석' 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저러한 꿈에 그럴싸한 창조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저 꿈의 진정한 의미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꿈의 해석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정신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꿈을 꾼 소녀는 아직 다섯살이다.

다섯살 난 소녀는 어떠한 존재인가?

융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아마 아니마 유형이 발달할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팔을 활짝 벌리면서 어린 영혼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아버지를 자기 마음대로 갖고 놀 줄 아는 그런 여자 말이다.

당연히 어머니와의 관계도 복잡해질 것이다."

어린 소녀들을 보라.

어떤 소녀들은 지극히 순진하고 때로는 멍청하다,

그러나 어떤 소녀들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고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법을 일찍 터득하거나 또는 그러한 소질의 기미를 어린 나이에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엔 그러한 태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지속될 수도 있고 때로는 남성들을 당혹케 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니마 여성들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겠다.

자신의 여성성을 남자들을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법을 잘 아는 그러한 여성들 말이다.

때로는 동성 여성들의 질투를 사거나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스스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그런 여성들 말이다.

같은 여자들의 시야에선 휘둘리는 남성들이 참 어리석고 답답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자들은 남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법을 아주 잘 안다.

이러한 아니마 유형의 여성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내가 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융의 세계관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영혼'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여긴다, 단지 자신의 생물학적 특성, 사회의 풍조에 맞춰 '여성성' 또는 '남성성' 을 획득해가며 세상에 적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니마 유형에 빠진 여성들은 분명 요령있는 여성들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본질이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이며, 그 남성도 여성도 초월한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 정신적 삶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가정한다면, 아니마 유형의 여성들은 평생 '여성으로 밖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정신적으로는 지독하게 일방향적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마 여성들의 첫번째 먹잇감은 어떤 남성들일까?

어린시절 그녀와 어울리게 될 소년들일까?

혹은 그녀가 장차 만나게 될 남성들일까? 예를 들어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남성이라든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이다.

아니마 유형의 여성들의 삶은 내 추측에 의하면, 아버지가 그녀의 아니마의 첫번째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여성들이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남성이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이쁘기만 한 딸에 꿈뻑 죽는 아버지들은 소녀가 아니마 유형으로 자라기 쉬운 조건을 제공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소녀들이 전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융은 이와 같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무엇보다 먼저, 이 꿈을 꾼 소녀는 실재로 그렇게 순진하지 않으며 이미 5년의 세월을 통해 꽤 많은 것을 느꼈다.

어리석은 아이가 아닌 소녀인 것이다.

그녀는 세상사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벌써 다소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소녀가 어떠한 정신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를 다소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 소녀의 애교에 꿈뻑 죽고 그녀의 요정같은 모습에 눈이 멀어 남성성을 상실하는 아버지가 그녀의 곁에 있다면, 그녀는 장차 어떤 사람으로 자라게 될까?

신기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은 인간이 의식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모든 미래와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왜 꿈속에서 아버지는 소녀를 돕기는 커녕 지하 통로로 밀어넣었을까?

소녀는 지하에 악마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소녀를 지켜주기는 커녕 소녀를 공포의 존재에게 던져버리고 있다.

이 꿈은 분명 어떠한 정신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두번째로 악마가 진짜 악마인지가 의심스럽다.

소녀는 지하에 악마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막상 들어간 지하에 악마는 없었으며, 그곳에 있던 것은 지옥의 불길도 사탄의 도구도 아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만약 정말 악마가 그곳에 있었다면 이것은 정말로 엉뚱한 악마이다,

이 악마는 초목의 악마이며 그의 지옥은 생명이 자라나는 정원이다.

세번째로 지하의 장소가 '연장 창고' 였다는 사실이다.

연장 창고는 문명과 기술의 장소이다.

이곳에는 질서와 도구가 존재한다, 이곳에선 이성적인 문화가 자라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이 장소가 너무도 낯설고 두렵다, 따라서 그것이 통째로 악마나 괴물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어째서 이 장소에 와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상(아니무스)가 그녀가 이곳에 도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정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어떠한 발달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섯살의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호소하기를 원한다, 소녀의 호소는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대신 어떠한 장소에 밀어넣는다.

이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일까?

원문에서나 꿈의 내용에서나 현실의 아버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정확하게 짚을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가 매우 잘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아버지일 것이다.

꿈의 내용은 소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소녀에게는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해도 좋다.

융은 이 꿈의 해설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 한다.

"꿈속의 이미지가 너무나 간결하고 선명하기 때문에, 이 꿈을 더 이상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꿈을 꾸던 시기에 아이에게 나쁜 일은 전혀 없었다, 이 꿈 뒤에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