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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외양으로 탐험을 떠나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찾아 들어온다는 것은 곧, 진귀한 정보와 물산이 들어온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어떻게 홍보하느냐에 따라 대명에 팔아치워 오랜 확장 정책 끝에 아슬아슬하게 유지중인 국고을 안정화시킬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정화의 원정 당시 사용된 재화의 규모에 질린 대명의 문관들이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항해일지를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벌인 적도 있으므로, 조선이 외양의 정보를 베이징에 풀어놓는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여지도 충분하지만, 돈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제아무리 굳건한 신념과 애국심이 중요하다고 해도 저 만한 인간을 부리면서 뒤탈이 없으려면 결국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가장 속편하고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의 외양에 대한 기록들은 정체되어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중원의 식자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고,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황제 쪽에서는 별 다른 반응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이것으로 조선은 전국에 흙길이 아닌 제대로 된 도로를 깔기 위해 사용했던 국고를 어느 정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고, 국고에 다시 여유가 찾아오자 곧바로 이전에 끝마치지 못했던 일을 끝마치고자 했다.
이번에야 말로 대마도를 조선의 정당한 권역으로 확정지으려는 것이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줄을 갈아타며 상당한 이득과 자치를 얻어온 대마도는 이제 양 측에서 줄이 끊어져 버렸고, 이것이 바로 쓰시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제 한때 쓰시마라 불렸으며 막부와 조선의 조정 양측에게 서로의 신하를 자처하던 해적들의 중간 기지는 조선 명칭인 대마도로 불릴 것이며 해적의 거점에서 조선에서 외양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사용될 것이었다.
제아무리 항해술이 발달 했다고 해도 동아시아의 바다는 거칠었고, 중간 거점은 바다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나 약탈과 같은 불상사에서 조선의 선박들을 보호할 것이었다.
물론 현지의 반발을 와해시키는 것과 근본적으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사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대마도에서 거주하는 이들 중 어느 정도는 섬에서 빠져나와 오우치나 조선으로 이주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북으로는 여진이 조선에 충성하고 남으로는 해적이 삼남 지방을 약탈하고 돌아갈 근거지를 상실하였으니, 농민들은 그 세금의 무거움이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나라가 그들을 제대로 지켜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융의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들끓기 시작한 농민들의 분노는 어느 정도 사그라졌고, 이것으로 인한 대규모 농민 반란은 이제 미연에 조치가 된 것으로 보였다.
지금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조선 탐험대들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양 측의 정부 단계에서의 교류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즉, 조선의 개척자들이 희망봉에서 북상할 수 있는 한계치가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고, 조선의 개척자들은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조정과 백인들의 정부가 적당한 타협을 봐서 더 이상의 북진을 거부할 것이라 판단, 무리하게라도 아프리카의 북쪽으로 뻗어나갔고, 결국에는 말라보에 개척 전진기지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것은 포르투갈의 세력권 한 가운데 조선이 알박기를 시도한 것이었으므로 개척지 주변에서는 불온한-공기가 감돌았지만, 이미 뿌리를 박은 조선 개척자들은 그곳을 사수할 것이라 결의했다.
1513년. 조선에는 또 다른 비극적인 사태가 터졌다. 연회도중 예조판서가 어의에 술을 엎지르는 무례를 범하자 예조판서의 정적들은 이것이 국왕에게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빠르게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사림과 훈구, 모두를 거슬려하는 이융은 이것에 더해 3차 왕자의 난을 비난한 건을 다시 한 번 들추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사림과 훈구 모두를 날려버리는 것으로 급발진을 걸어버린 것이다.
모략을 걸기는 했지만 설마 술을 엎지른 것이 당파 구분 없는 대규모 숙청과 실제적인 사형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기존 관료들은 손을 쓰기도 전에 엄청난 수가 갈려나가버렸다.
조선에서 숙청의 바람이 불고 있을 때, 미주대륙에서는 개척지가 결국에는 충분한 규모의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의 결합으로 제대로 된 마을로 성장하면서 멕시코 원주민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미주대륙에 만연한 식인 풍습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아무리 북과 남으로 여러 오랑캐들과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살면서 토속 신앙에 관대해진 조선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잡아먹는 문제에서 까지 관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문제는 곧장 개척지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고, 관에서는 급히 유혈사태를 대비해 포졸을 모조리 끌어 모아서 통제를 강화한 것에 더하여 최우선 순위의 보고로 장계를 조정에 올리게 되었다.
이 장계의 내용을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놈들 사람 심장을 제단에 바치고 남는 것은 자기들끼리 먹는 식인종인데요-
극심한 가뭄에 어쩔 수 없이 사람 고기를 입에 대는 것도 극심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텐데 단순히 종교적 이유와 기호품의 명목으로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보고는 숙청 도중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는 급발진을 밟기는 했지만 자신이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관료 까지 기겁하며 마비된 조정의 정치를 부활시킬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으니, 이융이 직접 나서서 말하기를 유자의 교화란 바로 이들이 받아야 할 것을 가리킴을 의미하니, 우리는 이제 공자께서 고대의 중원에서 인신공양 풍습에 맞섰듯, 조선의 유자들도 새로운 땅에서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명분은 완벽하니 조정이 돌아가는 꼬라지에 불만을 품을 유자라도 그 주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 유자의 성전을 선언한 것이었다.
뭐. 사실은 과장된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 이해해 줘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어쨌든 잡아먹었잖은가.
식인과 식인하지 않는 것 사이의 도덕적 우월성은 명백하며, 이제 조선은 사람 잡아먹는 야만족에게 문명과 도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꺼이 매를 집어들 것이었다.
철기 무기와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기병까지 보유한 조선의 군대는 흑요석 검이나 창 따위로 무장한 원주민들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분쇄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원래라면 언젠가 제물로 쓰였을 노예 계층이 조선의 진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길잡이까지 자처하자 조선 본토에서 지원군이 왔다고 한들 수적으로는 소수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군은 많은 수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의 풍습에 대해 칼을 드는 것으로 대응한 결과 이제 맥시코 개척지에서는 무수히 많은 급변사태가 발생할 수 있게 되었고, 오가는데 한 세월이 걸리는 이상 조정의 결정에 모든 것을 내맞길 수는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정의 지시를 받는 소수의 한(韓)인들 만으로 저 많은 원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필요는 방법을 만들기 마련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 거리를 제 뜻대로 통제하기는 어렵다는 결론 아래 조선은 멕시코의 개척지와 정복지들을 떼어내 자치적인 정부를 형성하도록 했고, 해당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자치를 허용하도록 했다.
멕시코의 토속 신앙이 때마다 심장을 바치지 않는다면 해가 뜨지 않아 세상이 멸망한다는 등의 어두운 소재로 쓰여 진 것에 착안하여 조정은 이 자치지역의 이름을 불라국이라 지었다.
물론 이 과정은 마치 과거 공자가 인신공양 풍습을 지닌 과거 중원인들을 교화하는 것과 유사하게 꾸미며 최대한 미화한 다음 소설로 쓴 다음 중원에 팔아먹었다.
유자의 취향에 딱 맞는 영웅담이며 실화기반인데 어련하겠는가.
한편 희망봉 항구에 기항을 허락해 주며 포르투갈 상인들과 교류를 하던 조선 상인들은 그들 역시 미주대륙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탐험대와 개척자들을 보내 그 땅을 제 것으로 하기 위해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들이 얻어낸 정보 중 가장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던 것은, 황금의 도시라고 하는 시볼라였다.
무수한 재보가 존재한다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에 처음 상륙한 이후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미주대륙으로 가서 금의환향하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의 기항을 허락하며 정기적인 손님이 생긴 희망봉은 조선이 남아프리카보다는 북미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그와 같은 지원을 하지 않음에도 번영을 이어나갔고, 유럽-아시아의 주요 통로로서 화물이 모이는 곳으로서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알박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의 국가들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의 중재 아래 어디는 누구의 것이고 어디는 누구의 것이라는 식으로 분배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조선은 그 조약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산타 카타리나 지역에 곧바로 개척지를 박았다.
물론 포르투갈은 항의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지역에 알박기가 끝난 지금 조선은 북미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남미에 제한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뭐. 실력행사로 이 알박기된 땅을 먹고자 한다면 마땅한 방법은 없으니. 식민지 전쟁이 안 일어나기를 비어야겠지만.
그리고 태평양 쪽에서는 조선이 갈라파고스를 확보했다.
갈라파고스의 동식물들은 바로 옆의 미주대륙의 동식물들과는 유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탐험대는 아직 잘 몰랐으나, 생김새와 그들이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옮겨 적으니 언젠가 뛰어난 학자가 등장한다면 생명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리라.
아프리카에서는 콩고가 노예무역의 확대를 제안했는데, 당장 조선은 그들의 주력이 태평양 방면이라서 콩고에서 노예를 산다고 해도 보낼 곳이 마땅치 않고 노비제가 아직도 유지되고는 있지만, 오랜 노비종부법의 시행과 미주대륙 및 새로운 개척지로 이주 시 노비 문서를 불태워 주겠다는 정책을 이어온 결과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노예를 데려와서 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별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가 마땅찮으니 콩고의 이런 제안은 조선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르투갈이나 미주대륙-대서양 방면을 개척하는 쪽이면 뭐 받아들이겠지만 그것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닌의 난 이후 오랜 분열을 거듭하는 일본에서는 그들의 천하와 강제적으로 분리되었지만, 그렇기에 다른 곳 보다는 조금 안정되어 있는 오우치로 도주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고, 때때로는 성을 지닌 높은 계층의 이민 또한 관측되었다.
이마가와 요시타네는 그들의 쇼군으로부터 뭔가 미운털이 박혔는지 오우치를 넘어 조선의 보호를 요청해왔고, 만일 받아들여준다면 그가 습득한 막부에 대한 정보를 내어 주겠다고 빌고 있었다.
사화 이후 조정에서 쓸 만한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조선은 막부 따위에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으므로 조정은 기꺼이 이마가와 요시타네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이는 당연하게도 막부의 불만을 불렀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지금 실력 행사로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인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왔는데, 한때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티무르의 군세가 쇠락하여 멸망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인도로 방향을 돌리더니 천축의 여러 국가들을 집어삼키며 세력을 성장시키고 있다고 말이다.
티무르를 무너지면서 페르시아가 오스만과 수니와 시아 가운데 이슬람의 주권을 묻는 대전이 시작하기 직전에 티무르가 기사회생하며 이제 페르시아는 수니파 가운데 끼인 격이 되어 함부로 움직이기 곤란해지게 되었다.
조선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불라국은 그들에게 제공된 조선군을 최대한 활용하며 식인종 부락을 불태우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것은 사후 보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식민 정부의 폭주가 조금 우려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불라국이 제대로 점령지를 간수하며 식인종들을 교화하기 위해 열과 성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치하하는 한편으로는 미주대륙에서의 공자를 위한 성전으로 얻은 성과를 모두 왕의 것으로 하며 이융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건주여진과의 통합에서도 좋은 성과가 나왔는데, 애신각라 칸이 급사하고 후계가 마땅하지 않아 붕 떠버린 칸의 자리를 왕실혼으로 만주로 떠났던 전주 이씨가 먹어치운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유목민들과 친조선계 여진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수가 이 변화에 반발을 품었으나, 이미 조선의 기세가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듯 하고 애신각라 칸의 죽음이 암살이라고는 볼 수도 없는 것이었던 지라 반발은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것은 조선이 칸을 쓱싹한 것이 아니라 칸이 급사한 다음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음모 돌린 것이었으니 조선에 불리한 증거가 나올 리도 없었다.
이혜가 건주 여진을 통치하게 되면서 조선-건주의 통합 논의는 더욱 가속도를 받기 시작했고, 이제 영광스러운 합병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막아야 할 대명은 암군들의 집권으로 사회의 건정성이 크게 하락한 끝에 사방에서 농민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어 장성 너머 유목민들에 간섭할 능력이 크게 떨어져 버렸다.
강남과 화북을 가리지 않고 반란이 터지는데 그거 무시하고 장성 너머서 유목민하고 술래잡기 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베이징 넘어가면 왕조교체가 되는데.
한편 조선은 더욱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융은 결국 적자를 보았고, 이부는 조선의 왕위의 후계자로서 인지되었다.
그나마 불안요소였던 부실한 후계구도마저 안정화되자 이융은 이것을 기회로 완벽하게 조정을 휘어잡고자 했고, 이미 사화로 훈구고 사림이고 갈려나간 지금 그의 독주를 막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사람은 처맞기 전 까지는 항상 멋진 계획을 가지고 사는 법이지.
되도 않는 이유로 사화를 일으키고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조정을 장악한 이융에 대해 결국 반정이 날아왔다.
무수한 허장성세 속에 내금위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동안 반정 세력은 이융을 사로잡는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역은 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융을 몰아내고 왕좌에 앉았고, 이 과정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신권을 얻은 유학자들은 그들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왕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하는 대신 이것을 제대로 된 정치 제도로서 정착시키고자 했다.
다만 처음 신권에 의한 정치를 기획했던 정도전의 시기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확장된 국가의 복잡한 행정은 단순히 왕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는 대응할 수 없었다.
건주 여진과의 통합 문제도 그렇고 바다로 나간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을 여전히 그들의 모국으로 여기기 위해서라도 왕은 존재해야만 했지만, 왕권이 존재한다면 신권은 언젠가는 붕괴될 것이 분명했다.
이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무의 전권을 보유한 왕의 권한 중 일부를 가져와야 활로가 보인다고 판단한 이들에 의해 뛰어난 유학자들이 모여 국무에 대해 논의하는 일종의 의회가 생겨났다.
물론 삼권분립이니 뭐니 하는 개념이 아직 없었던 조선의 배경적 한계로 실제적인 권력의 분화라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지금 만큼은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이역이 이 논의의 맹점을 찌르고 들어가 일부를 매수해 왕권주의자를 후보에 내는데 성공했고, 실제로 당선시켰다는 것이지만.
다만 이들이 없다면 당장 국정이 마비될 사태였기에 이역이 사소한 수단 몇 개로 다시 국정을 가져왔음에도 피의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국 회의 제도는 왕의 말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카리브 제도에까지 알박기를 성공한 조선은 이제 동쪽과 서쪽의 지도를 잇는데 성공했으며 식견 있는 자라면 그것이 누구든 지구가 둥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허나, 지구의 일주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단순무식한 증명임에 더해 해당 국가의 뛰어난 항해술의 증명이기도 한 것. 세계 일주에 성공한다면 세계의 모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조선의 위신이 하늘을 찌를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렇기에 조선 정부는 세계 일주에 포상금을 내걸었고, 이에 유혹된 김갑이라는 자가 이끄는 탐험대가 최초로 세계 일주에 도전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필시 조선 기술의 발달로 더욱 크고 빠른 배가 등장한 것도 한몫 하겠지.
멕시코의 안정화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현지에서 병력을 징발하여 조선이 파병한 군대를 보충하는 등의 능동적인 모습들도 보여주며 멕시코에서의 패권을 위해 전력 전진했다.
물론 소수의 유학자들이 대다수의 원주민들을 교화하는 것에 힘이 부쳐 일단 식인풍습이라도 멈추기 위해 데려온 유목민들의 신앙이 통제를 벗어나 퍼지면서 종교적으로 난장판이 벌어지고는 있으며, 심지어는 관의 일부가 유목민들의 종교를 따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뭐. 불라국이 잡고 있는 주도권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유혈사태는 감내할 수 있는 정도로 억제될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불라국은 동쪽에서도 누군가 배를 타고 찾아와 식인풍습을 근절하겠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들은 하얀 피부를 이용해 원주민들의 신앙에 존재하는 구원자를 사칭하며 조선인들 보다는 손쉽게 멕시코를 장악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발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만큼 불라국은 조심스럽게 사람을 보내 현지의 정보를 습득하고자 했다.
1553년. 모든 혼란과 논쟁 끝에 건주 여진에 굴복했던 모든 부족들이 이탈하지 않고 조선에 통합되는데 동의했다. 물론 이들은 합병의 대가로 현지에서의 자치권과 함께 소문으로 퍼진 전국 회의에 그들의 자리를 약속받는 대가로 말이다.
조정에 야만적인 유목민들을 들여와야 한다는 조건에 기존에 속해 있었던 의원들은 반대했으나 의원의 수가 많아지면 의견의 통일이 어려워지고 이는 곧 전국회의가 약화된다고 생각하여 여진인들과 그 너머의 유목민들의 조선을 수용했고, 왕당파가 찬성으로 돌아서니 이를 막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조선에서 합병에 대해 어떤 의견이 오가고 있던 이것은 곧 조선이 만주를 집어삼킨 것이며 대명의 북방 안보에 크나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허나, 일부 부족의 이탈이라도 있었다면 찌를 틈이라도 보였을 텐데 모든 부족은 조선에 통합되는 것에 동의했고, 내부적으로는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에 조선이 당장 대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하국의 예를 다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안이 터져나가는 지금 위태로운 원정을 계획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명은 오랜 논쟁 끝에 조선의 만주 지배를 잠시간 인정하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하기로 하였고, 조선인들은 이제 그들의 조상의 고토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추운 똥땅에 자발적으로 가서 정착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징성에 목 맨 사람들이 백두산에 오르기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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