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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종말과 죽음 3부] 10:xviii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5)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3.15 1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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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xviii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5)



“기다려 주게.”


파프니르 란이 입을 연다. 제폰은 그를 힐끗 바라본다. 란은 그 표정을 안다.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란 역시 그렇게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멈췄다간, 둘 다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둘 다, 지금껏 생긴 상처 때문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굳건한 결심 뿐이니까.


그럼에도, 란이 말한다.


“잠시만.”


반역자들의 군세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하스가르드의 참화에서 후퇴한 놈들은 팔라틴 도로(Palatine Way)의 락크리트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중이다.


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란과 제폰, 그리고 하스가르드에서 항전을 벌였던 소수는 지금 피비린내를 풍기는 잔해로부터 기어나와 추격을 이어가는 중이다.


웃기는 일이다. 중상을 입은 소수의 병사들이, 심지어 그 중 몇은 거의 치명상으로 일어서기조차 어려운 판인데, 수천의 적군을 비틀거리며 추격하고 있다니.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의 추격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의미 없는 무언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멈추는 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들과 함께 움직이던 전사들 모두가 멈춘다. 제폰이 그렇듯이,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선 채 란이 잔해의 능선 위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이 볼 수 있는 풍광의 태반은 시체들이다. 아스타르테스들의 갑주가 뒤엉켜 진흙 위로 솟은 모습뿐이다. 란이 그 시체 더미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그 뒤에 레오드 볼드윈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얼굴의 반이 날아간 채라, 말을 할 수 없다.


“뭘 하려는 거요, 돈 전하의 아들 나으리?”


나마히가 외친다.


란은 능선을 따라 오르며, 힐끗 일행을 바라본다.


“기다려라!”


그가 소리친다. 잠시 란의 시선이 모두를 향한다. 제국의 자부심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화이트 스카 군단병 몇 명,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병 몇 명. 조각나고 찢긴 그들의 갑주는 이제 제폰처럼 붉게 물든 채다. 저기 블러드 엔젤 군단병도 몇 명 있다. 핏기를 찾을 수 없는 고뇌 어린 표정이다. 반역자들이 무너진 순간, 그들의 분노 역시 무너졌다. 또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다. 모두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란이 잠시 기다리라 외친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밤이 드리운다.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 밤이다. 이곳, 하스가르드는 본래 그들이 죽을 곳이었다. 어쩌면, 여기서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의미한 추격은 충분치 않다. 그들 모두는 지치고, 망가졌으며, 비유적으로나 말 그대로나 피를 흘리고 있다. 적을 따라잡건 못 따라잡건, 그들의 대부분은 다음 시간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란은 상처의 고통을 틀어막는다. 란은 그들이 전진하던 동안 저 아래에서 힐끗 봤던 것을 찾아낸다. 손을 뻗은 란은 그것을 뽑아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러는 동안, 거기 방해를 받은 시체들이 미끄러지며 나뒹군다.


망가진 시체의 손아귀에서 마침내 그것이 뽑혀 나온다. 몸을 똑바로 곧추세운 란은 능선 아래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똑똑히 그것을 들어올린다.


제국의 깃발이요, 황제의 군기다. 깃대는 구부러졌고, 깃발의 천은 찢겼다. 아퀼라 문양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깃발 자체도 피에 흠뻑 젖어 거기 새겨진 상징과 문장을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란은 깃발 자락에서 그의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무시하고, 그리고 어깨와 목의 상처에서 새어 나와 등과 가슴에 흘러내리는 피도 무시한다. 그대로 그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린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란이 외친다.






이것이 종말과 죽음이다. 복수하는 영혼, 강대한 요새나 다름없는 전함이, 워프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황궁의 구조를 찢어내며 현실계로 밀려난다. 심하게 손상된 상태다. 시간이, 그리고 거기 모순된 일곱 개의 다른 차원이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긴 끝에, 파편의 구름이 함체 측면에서 솟구친다. 함체의 장갑판이 뱀의 껍질처럼 벗겨지고, 천공의 압착 속에서 발려진다. 극심한 압박 속에 함체의 골조가 비틀리면서 상부 구조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신음한다. 함체는 서서히, 그리고 잔인하게, 진정 떠난 바 없는 본래의 궤도 위치로 다시 정렬한다.


함선 스스로가 재구성을 위해 애쓴다. 그 과정에서 모든 리벳과 지주가 비명을 지른다. 옛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그리고 다시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이 거듭된다. 하지만 그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기억의 상실과 광기 속에, 그 감각도 얼룩져 있다. 고통은 너무도 거대하다. 함선은 스스로가 도시라 생각했다. 함선은 스스로가 궁전이자 궁정이라 생각했다. 함선은 스스로가 신들의 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중 그 어느 것도 함선의 실체가 아니다.


더 이상, 함선은 자신이 있다 여겼던 곳에 있지도 않다. 심지어, 함선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흔들리고 전율하는 함체 깊은 곳의 어딘가, 돈과 발도르는 계속 걸음을 옮기려 사투를 벌인다. 고기로 빚어졌던 갑판은 갑작스레 다시 플라스틸로 변한다. 연골과 뼈로 이루어졌던 벽과 격벽은 다시 아다안티움과 세라마이트다. 천정에서 비처럼 액체가 쏟아져 내린다. 파열된 수조와 터진 유압 장치에서 흐르는 물과 기름이다. 그 비가 워프의 흐름과 비물질적 잔여물이 검게 그을려 붙은 벽을 씻어내고, 발치에 악취가 나는 거품을 일으킨다.


경적이 몇 번씩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울리다 마침내 고장을 일으킨다. 단락된 시스템에서 불꽃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둠 속에서 수천의 악마를 죽였음에도, 악마들은 이제 모조리 사라진 뒤다. 돈과 발도르는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다. 심지어 불생자들이 갑자기 함선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순간에도, 갑판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에도 말이다. 둘 다,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지금껏 수천의 악마를 죽이며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마 너무 늦었을 것임도 알고 있다.


한번에 한 걸음씩, 둘은 폭우를 헤치며 나아간다. 갑판이 기울어 흔들릴 때마다 둘은 물이 흐르는 벽에 기대어 발을 디딘다. 파편이 날아다니고, 고정되지 않은 장비가 바닥을 가로질러 구르기도 한다. 파열된 천장에서 튀어나와 흔들리는 케이블을 피한다. 잘려 나간 끄트머리가 쉿쉿대며 약한 불꽃을 토한다.  함선의 하부 골조가 뒤틀리고 변형되면서 내지르는 거친 금속성의 비명이 들린다. 부서진 격실 사이로 불길이 멈추는 바 없이 치솟고, 연기가 뿜는 뜨거운 악취가 느껴진다. 쏟아지는 물길과 노호하는 불길이 마주한 격실에서 수증기가 소용돌이친다.


“죽었습니다.”


마침내, 돈의 부축을 받던 콘스탄틴이 입을 연다.


“누구 말인가?”


돈이 묻는다.


발도르는 답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해골 무더기가 보인다. 아니면, 차라리, 해골 무더기가 그들을 찾아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 개씩, 금이 가고 턱뼈가 보이지 않는 불타버린 사람의 해골이 부서진 갑판을 따라 굴러내린다. 마치 산사태 속에서 구르는 돌멩이 같다. 그대로 튕긴 해골은 거품이 일렁이는 물살 위로 흘러간다. 그리고 홍수에 휩쓸린 두개골과 더러운 뼈들이 흘러나와 그들의 발목 언저리에서 부딪히며 빙빙 돈다. 너무도 많다. 수를 헤아릴 수도, 어디서 왔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여길세!”


돈이 소리치며 앞으로 물살을 헤치며 나아간다. 돈이 갑판을 관통하는 플라스틸 사다리를 붙잡는다. 벽에 볼트로 고정된 상태다. 사다리 위로, 어둑어둑한 빛이 비친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콘스탄틴이 경고를 발한다. 몸을 돌린 캡틴 제너럴은 창을 든 채, 그들 뒤의 어둠을 응시한다. 돈은 옆으로 다가가 검을 겨눈다. 빗방울이 갑주 위로 흘러내린다. 아마도, 악마들이 전부 도망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둠 속을 노려보던 콘스탄틴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의 창이 낮게 들린다.


“코로스?”


콘스탄틴이 외친다.


돈에게도 그들이 이제 보인다. 디오클레티안 코로스, 그리고 발도르의 중대에 속한 세 명의 다른 파수대원들이 비에 휩싸인 복도를 따라 그들의 뒤를 좇고 있었다.


“명령대로, 폭풍을 따라왔습니다.”


두 사람을 따라잡은 코로스가 보고한다. 발도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옆의 돈은 지친 듯 고개를 내젓는다. 저들이 나누는 대화는 오직 사실뿐이다. 재회에 대한 진정한 인정도, 안도감도 없다. 이들이 만약 그의 수하들이었다면, 돈은 모두를 포옹했을 것이다. 이것이 디아만티스와-


돈은 생각을 지운다. 허스칼의 검을 엉덩이에 고정한 돈은 다시 사다리로 몸을 돌린다.


돈이 선두에 선다. 일행은 떨어지는 물을 헤치며 위의 갑판으로 올라간다. 이곳의 벽도 흘러내린 액체 속에 젖어 있다. 전선 보관함 내부의 비상용 조명이 강렬한 푸른 빛으로 타오르는 중이다. 


자외선 조명이다. 비상 조명인 동시에, 제독 시스템이다. 하지만 전력 공급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이미 필요한 전력의 반도 되지 못하는 지경인지, 조명이 떨리고 희미해지는 중이다.


그들 앞에, 거대한 해치가 열려 있다. 돈은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손에는 검이 뽑힌 채다.


그리고, 돈은 자신의 눈앞의 모습을 보며 멈춘다.


거대한 공간은 완전히 황폐하고 유기된 채다. 어디 하나 손상과 상처를 찾을 수 없는 곳이 없다. 금이 간 갑판 위로 잔해와 파편이 널려 있다. 그리고 한때 사람이었을지 모르는 살점 조각과 피가 곳곳에 범벅이다.


저기, 녹아내려 엉겨붙은 채, 불타버린 커스토디안 프로콘술의 잔해가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그의 형제, 생귀니우스다. 돈은 천사가 죽엇음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그 여성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돈은 자신이 준비되어 있노라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저 잔혹하게 으깨지다시피 하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을 보는 것은…


공간의 중앙에, 호루스 루퍼칼이 있다. 옆으로 쓰러진, 뒤틀린 몰골이다. 시신과 맞닿은 갑주의 부분들이 검게 그을려 있다. 불에 그을린 해골의 텅 빈 눈구멍이 돈을 응시하고 있다. 살점이 사라진 그의 턱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린 채 열려 있다.


그리고, 바로 옆, 다른 시신 옆에, 아스타르테스 하나가 홀로 무릎을 꿇은 채 경계하고 있다.


콘스탄틴이 옳았다. 무슨 의미였건 간에. 죽었다.


둘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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