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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묘유동해도〉는 그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이 이야기의 테마는 저번의 몽위과학세기와 같습니다. 꿈과 현실, 버추얼과 리얼의 이야기. 지금의 버추얼을 좀 더 머릿속에서 진행해서 상상해주세요. 몽위과학세기보다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CD가 되어있, 죠?
(후기 중에서)
〈묘유동해도〉는 우선 〈몽위과학세기〉와 같은 주제를 갖는다. 〈몽위과학세기〉가 말하는 것의 중요한 톱니 중 하나였던 미래 세계의 속성은 ‘지금의 버추얼을 좀 더 머릿속에서 진행해서 상상해주세요’라는 언급으로 강화된다. 현재의 부정적인 면이 확대되고 ‘진화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래라는 분석은 이와 같이 뒷받침된다.
한편으로 이 정의는 〈몽위과학세기〉와 〈묘유동해도〉의 차이점을 말하기도 한다. ‘몽위과학세기보다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단순히 기능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동방 전체의 흐름을 볼 때 이것은 보다 큰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영총과 문화첩 발매 후의, 동방 초기 신작을 마무리하는 작품으로서 〈묘유동해도〉와 〈대공마술〉은 ZUN이 스스로 시인하는 바와 같이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묘유동해도는 전개도 없고 반전도 없군요. 비봉클럽의 두 사람이 보통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엿듣는 듯한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로 해피 엔드.
(후기 중에서)
이러한 분위기는 이제까지의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풍신록과 그 이후 작품을 예견한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변화의 원인이 된 환경 그 자체이기도 했다.
2.앨범 커버의 두 후지산과 미래 세계
〈묘유동해도〉 커버는 히로시게 열차를 타고 스크린에 비친 풍경을 바라보는 렌코와 메리를 묘사하고 있다. 풍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도카이도 53차의 상징인 후지산이다. 그런데 커버의 후지산은 두 개다. 왼쪽의 후지산은 윤곽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후지산은 보다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흐릿하다.
렌코의 경우 왼쪽에 앉아 오른쪽 풍경을 보며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렌코가 가리키는 것은 오른쪽의 세밀한 후지산이 분명하다. 한편 뒷모습만 그려진 메리의 시선은 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메리의 손에 주목한다면 오른쪽 후지산 방향인 정면의 시야가 손과 팔에 가려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메리가 보고 있는 것은 왼쪽의 윤곽뿐인 후지산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리는 칼레이도 스크린의 풍경에 대해 ‘가짜 풍경’이란 말과 함께 부정적으로 평한다.
「히로시게는 자리도 넓고, 빨리 도착하니 편리하지만… 칼레이도 스크린의 『가짜』 풍경밖에 볼 수 없는 건 지루하구나아.」
(중략) 「지상의 후지산은 이렇게까지 아름답진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진짜 후지산이 보고 싶었어.」
(트랙 2 ‘53분간의 푸른 바다’ 중에서)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하는 건 좋지만, 이런 가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는 렌코는 지루하지 않아? 밤이면 밤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것은 가짜 만월, 이라는 것도 뭔가 말이야.」
(트랙 3 ‘죽취비상 ~ Lunatic Princess’ 중에서)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꿈과 현실은 같은 것이라고 ‘하앙상 하앙상’ 이야기하던 〈몽위과학세기〉의 메리와는 완전히 달라 보인다. 사실 〈묘유동해도〉의 3인칭 화자가 〈몽위과학세기〉의 메리와 비슷한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이 다이나믹 레인지의 영상도, 극히 일본적인 경치도, 진짜 하늘의 색에는 견줄 수 없다.
라는 구시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이제는 없을 것이다. 버추얼의 감각은, 리얼보다 인간의 감각을 자극한다.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과 호접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버추얼과 리얼은 결코 구별할 수 없다, 라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버추얼이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몸은 꽃과 함께 떨어진다 해도
마음은 향기와 표류하듯 날아오른다.
53분간의 시시한 대화를 지상에서 계속하기 위해, 두 사람은 도쿄역을 뒤로 했다.
(트랙 11 ‘가장 맑은 하늘과 바다’)
그러나 〈묘유동해도〉의 칼레이도 스크린에서 마음이 ‘날아오르는’가? 승객들은 묘유신칸센 히로시게 안에 고립되어 있으며, 이것이 제공하는 스크린은 독점적이다. 이것은 히로시게의 버추얼, 스크린 제작자의 버추얼이다. 이것 없이 승객들의 세계는 어둠에 불과하다.
「아, 스탭롤이야. 이런 풍경에까지 작자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창문 밖의 풍경에 문자가 떠오르고 있다. 53분의 칼레이도 스크린의 영상이 마지막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본래, 경치에는 누군가의 저작물이다, 라는 사고방식은 없다. 거듭해서 말하자면, 이 영상은 히로시게가 봤던 도카이도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승객들은 모두 진짜 풍경이 아닐까 생각해 보고 있던 입체적인 풍경에 영상의 제작자의 이름이 떠오르고는 사라지고, 사라지고는 떠오르고 있었다.
풍경의 가운데에 「Designed by Utagawa Hiroshige」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계는 어둠에 갇혔다.
(트랙 10 ‘천년환상향 ~ history of the Moon’ 중에서)
즉 사람들이 자신의 버추얼, 자신의 경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칼레이도 스크린의 제작자의 버추얼, 제작자의 경험인 것이다. 인간과 호접을 구분할 수 없다면, 승객들이라는 호접은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유리 시험관 안에 있다.
즉 신칸센의 벽은 대부분 창문으로, 마치 거대한 유리 시험관이 선로의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물건이다.
(트랙 1 ‘히로시게 36호 ~ Neo Super-Express’ 중에서)
〈몽위과학세기〉에서 제시된 비봉 시대의 버추얼-꿈에 대한 기만적인 인식관은 〈묘유동해도〉에서 이와 같이 구체화된 예시를 보인다. 묘유신칸센과 칼레이도 스크린이라는 이 상징적인 패러다임은 리얼과 구분될 수 없는 버추얼을 독점하고 사람들의 경험을 제한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버추얼과 리얼은 배제된다.
무엇을 해도 현대의 일본은 히로시게를 택한 것이다.
(중략)일본이 히로시게를 선택한 것은 호쿠사이의 기재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광기를 철저하게 싫어한 것이다.
(트랙 7 ‘달까지 닿아라 불사의 연기’ 중에서)
으으음, 그다지 자세히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Ibid.)
이것은 사실 실제의 후지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묘유동해도〉에서 후지산은 세계유산 등재라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후지산 부흥회에 의해 정비되었다.(트랙 1 ‘히로시게 36호 ~ Neo Super-Express’, 트랙 7 ‘달까지 닿아라 불사의 연기’) ‘실제의 후지산’의 이미지조차도 어느 정도는 패러다임의 영향력 아래에서 제공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본래의 후지산의 엄청난 박력’(트랙 7 ‘달까지 닿아라 불사의 연기’)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격한 규칙’으로 인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모습도 적어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며, 후지산과 그것을 둘러싼 일본이 이미 바뀌었음을 부인하려는 기만이기도 하다.
후지산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때에 휴화산에서 사화산이 되었다고 단정했잖아?
(트랙 5 ‘아오키가하라의 전설’ 중에서)
나중의 맹월초에서도 언급되듯이, 영야초의 모티브가 된 타케토리모노가타리는 후지산에서 불사약을 태워 연기가 나게 되었다고 언급하므로, 이것이 후지산의 근본적인 변화의 상징이라고 볼 근거가 있다.
패러다임은 ‘정답’(〈이자나기 물질〉 트랙 9 ‘일본 안의 불가사의를 모아’ 중에서)으로서의 기준을 독점함으로써 경험을 제한하고 배제를 행한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인 영역부터 개재하기 때문에, 눈치채기 어려울 때도 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스크린 제작자의 버추얼을 강요하는 것은 히로시게나 스크린 제작자가 아니라 묘유신칸센이라는 시스템 그 자체이다. 사회는 시간과 효율을 기준으로 해서 묘유신칸센이 헤게모니를 갖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구 도카이도는 격렬하게는 아니지만 분명히 배제된다.
「지상의 후지산은 이렇게까지 아름답진 않을 진 몰라도, 그래도 진짜 후지산이 보고 싶었어. 차라리 구 도카이도 신칸센이 더 좋았을 텐데에」
「무슨 사치스러운 말을. 구 도카이도라니, 이젠 도후쿠 사람과 인도인과 부자(セレブ)들만 이용하고 있잖아. 뭐, 메리는 도후쿠 사람들만큼 한가로울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트랙 2 ‘53분간의 푸른 바다’ 중에서)
묘유동해도는 최고의 효율로 도쿄의 인구를 교토에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트랙 4 ‘피안귀항 ~ Riverside View’ 중에서)
이 효율성을 패러다임은 시간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일하고 통일된 시간이 하나의 근대적 현상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대공마술〉에서 렌코는 시간의 절대성과 객관성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고백할 것이다.
미래 세계의 결과물은 그 자체로는 양면적이고 양가적이다. 향림당 25화 ‘신사의 영험함’에서 설명한 신과 같고, 천공장 오마케에서 말하는 오키나와 같다. 렌코는 묘유신칸센의 장점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그래도 터널에 영상이 나오게 되고 나서, 옛날의 지하철보다는 밝아졌어. 마치 지상 같잖아?」
(트랙 2 ‘53분간의 푸른 바다’ 중에서)
「길이 짧아졌다고 해도 여행은 여행이야. 도쿄 순회 관광은 재밌다구? 교토와 다르게 신주쿠라던가 시부야라던가 그런 곳에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건물도 많고 말이야. 그런 관광 시간이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괜찮잖아.」
(트랙 3 ‘죽취비상 ~ Lunatic Princess’ 중에서)
「확실히 그래. 그래도 도착하기 전에 지치지 않아서 좋잖아.」
(트랙 8 ‘레트로스펙티브 교토’ 중에서)
실제의 후지산 또한 그 정비 노력에 의해 세계유산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 사실이고, 아름다워진 것도 사실이다. 〈묘유동해도〉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날아올라야 할 상상을 하나의 기준에 매몰되게 한다면, 그것이 버추얼 중 하나일 뿐임을 망각하게 하고 기만한다면, 그로 인해 배제되고 버려진 나머지는 분명히 이 미래가 잃은 것이다. 〈묘유동해도〉는 그것을 고발하고 있다. 이것은 동방에서 ‘전통적인 것’의 위치 변화와 맞물린다.
앨범 커버에서 메리가 윤곽뿐인, 완성되지 않은 후지산을 보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규정되지 않은, 상상의 여지가 남아있는 원초의 후지산을 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동방에서 규정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향림당 15화 ‘이름 없는 돌’과 25화 '신사의 영험함‘ 등 여러 편과 순호의 순화하는 정도의 능력과 같이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논의는 이와 같이 연관되어 최종적으로는 대결계 논리와 결을 같이 한다.
3.〈묘유동해도〉에 나타난 ‘전통적인 것’
동방에서 ‘일본적인 것’, 나아가 ‘전통적인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소재이다. 이 소재는 단순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주제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동방의 시작과 함께하며 계속해서 변치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앨범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묘유동해도〉에서 처음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래인형〉 C62판은 자체적인 서사에 집중하고 있고, 위탁판은 카구야와 불사의 약을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전통 자체보다 영야초와 강하게 연관된다. 요요몽과 관련된 트랙 3의 경우 사이교 법사와의 연관성이 개재하지 않는다. 〈렌다이노 야행〉은 렌다이노란 장소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몽위과학세기〉는 메리의 꿈과 리얼과 버추얼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꿈에서의 경험들에 대한 메리의 진술에서도 전통에 대한 인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묘유동해도〉는 주요 소재인 후지산과 도카이도부터 ‘전통적인 것’으로서 기능한다. 에도 시대, 53차의 역참 마을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차를 거쳐 미래의 묘유신칸센까지 이어진다. 또한 그것은 호쿠사이와 비교되기도 한다. 스쳐 지나가는 아오키가하라는 그 비중은 속성이 비슷한 렌다이노보다 떨어지지만, 그 전통적 위치에 대해서는 훨씬 직접적으로 직시된다. 여정의 목적지인 도쿄는 에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도시로 묘사된다.
에도의 피를 확실하게 잇는 도쿄의 거리.
(트랙 9 ‘락드 걸 ~ 소녀밀실’ 중에서)
〈구작과 홍마향에 대한 담론〉에서 지적했듯이, 동방에서 ‘전통적인 것’은 요요몽 대에 도입되었다. 대결계와 같다. 이것은 대결계 논리와 마찬가지로, 그 소재에 수반된 주제 의식이 처음부터 완전하지는 않았을을 암시할 수 있다.
실제로 동방에 나타난 ‘전통적인 것’은 초기와 이후에 궤가 다른 점이 있다. 요요몽에서 전통은 단순한 모티브에 불과하다. 그것은 캐릭터성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어떤 스토리를 갖지는 않는다. 영야초의 경우에는 보다 발전해서, 단편적인 모티베이션이 아닌 복합적인 각색과 그에 걸맞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양쪽 모두 전통에 있어서 (특히 바깥 세계와 환상들이에 관련된) 성찰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극히 오래 전부터, 사실상 ‘원래부터’ (넓은 의미에서) 환상향에 존재해 왔다. 유유코의 사망은 ‘천 년도 더’(요요몽 오마케) 전의 일이며, 영원정은 단지 결계 속에 숨어 있었을 뿐이다. 이들의 행적에는 환상들이가 개입되어 있지 않으며, 잊힘과 배제됨이 개입되어 있지도 않다. 유유코는 죽음을 다루는 정도의 자신의 능력 때문에 자살하였으나, 그것은 스스로 원망한 것이지(요요몽 오마케) 사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영야초의 경우 카구야의 추방에서 과도기적인 명모가 드러나지만, 에이린의 이탈과 정착 등의 과정에서 갈등이 존재한다기보다 영원정 측의 일방적인 주체성이 두드러진다. 명백하게도 영야초 오마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달?
달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는, 지상에 넙죽 엎드리며 살고 있는 백성인 카구야 일행은 알 일이 없었다.
(영야초 오마케 중에서)
모코우의 경우에도 봉래의 약을 획득한 시점에서 ‘이후로 모코우의 모습을 본 자는 없다’고 할 뿐이다. 결국 요요몽과 영야초에 나타난 전통은 그 자체로서의 ‘옛 것’에 가깝다.
그러나 풍신록에서는 다르다. 풍신록은 전통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지 직시한다. 이것은 이중의 예시로써 대답된다. 스와 대전에서 패한 스와코는 내전의 숨겨진 신으로 옮겨진다. 현대에 이르러 이 전통적인 신들은 잊혀지고 결국 기적에 의지해 환상들이 한다. 이렇게 ‘전통적인 것’은 환상들이의 기반이 되는 대결계 논리와 결합하고, 동시에 대결계 논리를 전통으로 대표되는 잊히고 배제된 것에 대한 긍정과 애정으로 돌려놓는다. 이 정서는 지령전과 성련선에서도 유지된다. 지저의 요괴들은 (스스로의 비관이 아니라) 사회와의 갈등으로 옛 지옥에 ‘들이’ 했으며, 명련사는 인간들로부터 배제되었다. 이 두 사태의 내러티브는 그 전통적 모티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홍요영과 풍지선에서 ‘전통적인 것’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다르며, 그것의 잊힘과 배제됨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화영총에서 〈묘유동해도〉를 거쳐 〈대공마술〉로 이어지는 121계(120계)-122계(121계), 즉 2005년에서 2006년에 이 전환이 이루어졌다. 〈묘유동해도〉에서 ‘전통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앨범 가운데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그 표상이다. 트랙 6에서 렌코는 다소 맥락 없이 이렇게 말한다.
「뭐, 그런 이유로 보류되었던 것(お蔵入り) 같지만 말이야.」
(중략)「그러고 보니, ‘お蔵入り의 蔵은, 무슨 蔵인 지 알고 있어?」
(트랙 6 ‘우사신궁의 하얀 깃발’ 중에서)
굳이 물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고, 메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이 물음은 그대로 해석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비로소 성찰되는 ‘잊히고 배제된 것들’로서의, 자체적인 생명력을 잃은 전통과 연관 지으면 ‘물건이 사용되지 않고 광 속에 처박힘’이라는 ‘お蔵入り오쿠라이리’의 직접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앞서 화영총에서는 메디슨 멜랑콜리, 무연총, 이름 없는 언덕 등이 등장해 인연이 끊긴 것, 잊히고 버려진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나도록 했다.
〈묘유동해도〉와 그것을 전후한 시기에 동방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것’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전통에 대한 단순한 애정과 애호가 잊히고 버려진, 배제된 것들에 대한 직시와 결합해 변화하는 과정은 〈몽위과학세기〉가 제기한 ‘그렇다면 바깥 세계는 진실의 세계란 말인가?’에 대한 전통의 방향에서의 대답이다. 〈몽위과학세기〉의 전환으로 마련된 대안적 세계로서의 대결계 논리는 ‘전통적인 것’이라는 소재와 강력히 결합한다. 그 결과로 전통에 대한 애호는 바깥 세계의 한 패러다임에 의해 잊히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배제된, 혹은 박제된 전통의 가치에 대한 긍정으로 변화한다. 이 의식이 앞으로 환상향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 지 규정한 것은 물론이다. 이로 인해 풍신록 이후의, 단순히 전통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부여하고 계승·발전하는 환상향이 탄생했다. 이것은 완성된 대결계 논리의 결과물인 동시에 발전된 ‘전통적인 것’ 소재의 결과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에 위에서 인용한 트랙 9 ‘락드 걸 ~ 소녀밀실’의, 에도를 계승한 동시에 독자의 기준에서 ‘현대적’인 도쿄에 대한 인식은,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관한 맹월초 파츄리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로켓에 한하지 않고 마술은――”
“형식이 중요하다는 존중하고 그것에 더욱 독창성을 더해 남기는 것이 우리 마법사의 긍지거든.”
“로켓도 신사도 존중하기에 거기서 자신들의 의장이 생겨난다는 거로군?”
(맹월초 상권 6화 p.138)
「교토와는 다르게 도쿄는 시골이니까, 옛날 물건이 잔뜩 있어.」
「예를 들면?」
「폐쇄된 느낌이 있는 좁고 높은 빌딩 안에서 노는 테마파크라던가, 초대형 쇼핑몰이라던가.」
도쿄에는 옛날, 음식 테마파크가 유행했던 시대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맛있다는 평판이 있는 가게들을 가져와서 한 곳에 모았을 뿐인 전혀 운치 없는 테마파크였지만, 그래도 도쿄의 인간에게는 대호평이었다.
도쿄에는 에도 시대 시절부터 투식회라고 불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음식 대회가 있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현대의 도쿄에서 음식 테마파크가 유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에도의 피를 확실하게 잇는 도쿄의 거리.
(트랙 9 ‘락드 걸 ~ 소녀밀실’ 중에서)
맹월초에서 이 대사를 하는 것이 파츄리인 것과 〈묘유동해도〉에서 이 트랙의 곡이 파츄리의 테마곡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도 있다.
4.결론 및 제언
〈몽위과학세기〉가 대결계 논리가 중심에 서는 전환을 보여주었다면, 〈묘유동해도〉는 그 전제 위에서 동방이 구체적으로 나아갈 길을 예시하였다. 이 예견의 결과물은 기존의 공포 정서의 완전한 퇴조를 보여주었다. ‘몽위과학세기보다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CD가 되어있, 죠?’라는 ZUN의 말은 이 쇠퇴를 해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대결계 논리에 종속되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공포 논리는 완성된 대결계 논리가 제공하는 정서와 연전히 갈등하고 충돌할 것이다.
한편 트랙 10 ‘천년환상향 ~ History of the Moon’에서 렌코는 메리와 이렇게 대화한다.
「렌코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뭔가 기대되기 시작했어, 도쿄가.」
「그야 내가 해주는 이야기니까. 그래도 말이야, 교토에 비하면 역시, 정신적으로 미숙한 도시란 느낌은 부정할 수 없어.」
「가끔은 바보가 되는 것도 괜찮잖아.」
「경계가 갈라진 곳도 방치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천 년 이상이나 영적 연구를 계속해 온 교토와는 느낌이 다르니까.」
(트랙 10 ‘천년환상향 ~ History of th Moon’ 중에서)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칭해지는 도쿄에 비교되는, 반대로 말하면 ‘정신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이 되는 교토는 분명히 달의 도시에 대한 설정과 유사해 보인다. 달의 도시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높이는 일이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맹월초 소설 p.76 등) 구체적인 미사여구에서도 그렇다.
우리 달의 백성에겐 몇 천 년이나 살아온 지혜와 긍지가 있다.
(영야초 오마케 중에서)
그렇다면 비봉의 미래 세계와 동방 본작에서의 달의 도시가 각각의 서사 구조 아래서 비슷한 속성과 비슷한 위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당 트랙의 곡이 ‘천년환상향 ~ history of the Moon’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몽위과학세기〉에서 제시된 ‘동제 ~ Innocent Treasures’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성숙함’과 대비된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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