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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스압주의] 몰살을 시작하는 이유 - 下

미카엘대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3.23 12:38:27
조회 4956 추천 99 댓글 44
														

 1화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undertale&no=23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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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8. 


 그 사건 뒤로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웬 병신같은 뚱땡이 오덕 공룡을 만난 거라든가, 사람을 죽이려 드는 살인 로봇에게 쫓겨서 추격전을 벌인 거라든가, 중간에 웬 이상한 거미 여자애한테 걸려서 50번쯤 죽다가 가방에 챙겨뒀던 거미 도넛이 발견되어 살아나간 점이라든가.

 하지만 뭐,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녀석의 변함없는 호구 노릇에 질린 나는 개입을 포기했고, 녀석이 무슨 위기에 처하든 그저 심드렁하게만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후엔 언다인처럼 무조건 물리쳐야 하는 유형의 적은 나오지 않아서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이건 여담이지만, 로봇을 상대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하는 행동이 포즈잡기라는 건 대체 뭔가 싶긴 했다. 슬슬 착한 게 아니라 정신병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었다. 놀라운 건 그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는 게 나뿐이었다는 거다. 정신나간 세계다.

 그리고, 지금 이곳.


 "자, 이제 심판을 받을 시간이야."


 눈앞에 있는 것은 예전에 봤던 그 뚱땡이 해골, 샌즈였다.

 ...여기서도 알바뛰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분위기가 꽤나 진지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게 그의 진짜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어쩐지 초월자적인 분위기가 있었지.

 그는 EXP와 LV에 대해서 설명했다. 처형 점수와 폭력 수치. 타인을 상처입힌 정도에 따라 상승하는 숫자.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을 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만큼 남을 상처입히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프리스크 본인은 내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샌즈가 탐색하는 눈빛으로 프리스크를 살펴보았다. 그의 왼쪽 눈이 파랗게 빛났다.


 "흠... LV 2라."


 2? 1이 아니라?

 잠깐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언다인을 죽인 것으로 LV이 올랐던 모양이다. 프리스크가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해보였던 것도 그래서인가. 내가 죽인 건데 간도 참 작다.

 그치만 뭐, 나로서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축에 속하지. 사방 만물 모두가 녀석을 죽이려 들었는데, 거기서 LV 2면 싸게 먹힌 거 아닌가? 특히나 그 길을 걷기 위해 녀석이 겪어야 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더더욱.


 "...실수라도 한 모양이군, 그렇지?"


 샌즈도 그 사실을 이해하는 듯, 동정하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아마 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너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몰랐을 거야.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늦은 뒤였겠지. 그럴 수 있어."


 프리스크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뭐, 샌즈 입장에서는 한 몸을 둘이 공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테니, 저런 식으로 추측하는 게 보통이겠지.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늦은 뒤였다' 라는 설명은 묘하게 사실에 들어맞기도 하고.

 그러나 다음 순간.


 "...라는 건 농담이고."


 분위기가 변했다. 


 "누가 실수로 LV 2가 된다는 거야? 꺼져."


 ...

 .......

 .......뭐?


 "...방금 너 씨발 뭐라고 했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입을 벌렸다.

 누가 실수로 LV 2가 되냐고?

 그럼 너희들은?

 처음 만난 인간한테 탄막을 뿌려대며 태연히 상처입히는 너희들은?

 자유를 되찾겠답시고 무고한 인간을 창으로 꿰뚫어 죽이는 너희들은?

 그게 지금, 그런 너희들을 어떻게든 살려준답시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죽고죽고죽고죽은 녀석에게 할 말이-


 "야, 프리스크! 꺼져봐! 저새끼한테는 내가 직접 말을... 그새 또 어디갔어?!"


 잠시 한눈을 뗀 사이, 샌즈는 어딘가로 증발해 있었다. 홀 안에는 나와 녀석만이 남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넘쳐흐르는 증오. 타오르는 분노. 단순히 나랑 관계없다고 해서 넘길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부당하다.

 불합리하다.

 녀석은, 프리스크는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프리스크는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대체 거기서 어떻게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대체 거기서 얼마나 더 죽다 살아나야 만족할 거냐고!


 "프리스크, 저딴 개소리는 듣지 마. 저새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고, 저딴 헛소리에 귀기울일 필요 전혀 없어. 그냥 무시해버려. 아니지, 원한다면 내가 지금이라도 가서..."

 "차라."


 프리스크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녀석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등 뒤로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인다. 설마, 아니 진짜 설마.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넌 저딴 소리 들어놓고서 화도 안 나냐?! 대체 니가 왜 이딴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해골도 개새끼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이 녀석에게 화가 났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노력, 헌신, 기타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을 죽이려 든 년에게 반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부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샌즈 말이 맞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난 시간을 돌릴 수 있어. 몇 번이고. 그러니까 옳은 길로 가야할 의무가 있는 거야. 아무도 죽지 않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야 해. 어차피 나는 죽어도 살아나니까."

 "지랄, 개소리 집어쳐! 그래서 되살아나면 네 기억이 사라져? 되살아나면 니가 겪었던 그게 전부 없었던 일이 돼? 웃기시네! 당장 여관에서 잘 때만 해도 몇 번이나-"

 "그만!"


 프리스크가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할거야."

 "뭐?! 여기까지 와서?!"


 결계가 바로 눈앞인 시점이다. 이제 그 아스고어 아저씨만 어떻게든 설득하거나 물리치면 빠져나갈 수 있는데...


 "신경써줘서 고마워, 차라."


 프리스크가 엷게 웃었다. 순간 차오르는 오싹한 기분. 나는 황급히 녀석을 말렸다.


 "웃지 마. 하지 마.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몰라도 절대-"

 ".......다시 한 번."

 "이런 멍청한- 하지 마! 프리스크!! 야!!"


 주변 시공간이 뒤틀리고 시야가 좁아진다. 익숙한 감각. 시간이 되돌아갈 때의 바로 그 감각.

 내 외침을 뒤로 하고 프리스크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세계를 리셋햇다.




 313.


 좋은 소식 하나.

 프리스크는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언다인의 투창 공격이 느슨해진 틈을 타 포위를 풀고 도망쳐, 그녀를 핫랜드까지 유인한 것이다. 언다인은 작열하는 갑옷의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대로 무력화되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녀석은 쓰러진 언다인에게 물 한 컵을 뿌려 일부러 부활시켰다. 언다인이 그 뒤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또 한 번 처참하게 살해당할 수도 있었을 대목이었다. 물론 녀석은 그러면 그냥 또 다시 시간을 되돌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어쨌든, 녀석은 그렇게 유일하게 해치우고 넘어가야만 했던 언다인마저도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뿐인가? 나중에는 파피루스의 중개로 서로 친구를 맺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아예 태연히 서로 전화 통화까지.


 "......"


 그리고 이 시점에서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녀석과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어졌다는 점이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내 말은 녀석에게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씹는 건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녀석의 이름을 부르고 화를 내도, 녀석은 마치 그게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일까. 실로 뜬금없는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어쩐지 나는 그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짐작이지만,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 건 두 영혼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는 녀석과 제대로 공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그저 구경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따, 딱히 너가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


 츤데레플레인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그렇게 외치며 불덩이 형태의 폭탄을 떨궜다. 핫랜드의 용암보다도 뜨거운 고온의 화염이 작렬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프리스크의 좌반신이 휘말린다.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몸.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부분에도 츤데레플레인의 동체가 돌진해와 부딪힌다. 남은 몸 절반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반으로 접혀 꺾였다.

 ...야, 프리스크. 넌 알고 있어? 네 현재 몰골이 얼마나 끔찍한지. 설령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었어도 너는 영원히 몰랐을 거야. 귀고 눈이고 전부 폭발에 휘말려 녹아내렸으니까.

 알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314." 


 나는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올렸다. 사실 숫자가 정확한지 확신은 없다. 빼먹은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어쩌면 큰 차이로 벗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나만이 기억하니까.

 나밖에 기억할 수 없으니까.

 딱히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에, 그래야만 할 듯한 의무감이 들었기에, 나는 또다시 기억 속에 착실히 숫자를 새겼다.




 420.


 "드라마! 로맨스! 피바다! 전 모두가 원하는 아이돌입니다!"


 메타톤이 몸체에 내장된 폭탄들을 무더기로 던진다. 칼날이 달린 날카로운 발굽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조명 비슷한 기구로부터 레이저빔도 쏘아보낸다. 그리고 프리스크는 이 모든 것을 익숙한 듯이 피한다.

 ...처음엔 프로깃한테도 쩔쩔매던 한심한 꼬맹이였지만, 이젠 몸놀림이 제법 능숙해졌다. 예전에 한번 물리쳤던 전적도 있고,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메타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여기서 '어렵지 않게' 라는 말은 10회 정도의 죽음은 감수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금도 다섯 번 죽었다.


 "......"


 녀석과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되면서, 혹은 녀석의 전투를 그저 손 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역으로 내 시야는 예전보다 넓어졌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프리스크가 공격을 맞거나 피할 때마다, 무대 너머의 어둠에서 간간히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는 누군가 있는 것이다. 처음엔 알피스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한 명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마 조명담당이나 카메라담당 뭐 그런 거겠지.

 그들은 메타톤이 프리스크를 죽이려 하는 것을 보고 있다.

 보고 있지만 말리지 않는다.

 시청률을 올려야 하니까.


 "......."


 시청률. 그래, 시청률이다.

 프리스크가 피격당할 때마다, 녀석이 기괴한 행동을 취할 때마다, 메타톤이 보다 과격하고 위험한 공격을 펼칠 때마다, 시청률은 올라간다. 이 피의 잔치가 계속될수록, 보다 많은 지하세계 사람들이 이 "쇼"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들 중 프리스크가 살려준 괴물들이 있을까?

 없지 않겠지.

 

 "하아... 하윽...!"


 프리스크가 괴로운 듯이 숨을 헐떡인다. 휴대해온 음식과 비상약으로 어떻게든 체력을 보충하고 있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다. 폭탄의 파편에 얻어맞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와 녀석의 왼쪽을 가득 적신다.

 그나마 다행히, 예정된 끝은 곧 찾아왔다.


 "오우, 시청률 좀 보세요!! 역대 최고의 시청률이에요!! 드디어 목표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렇게 외치자, 메타톤의 팔다리가 떨어져나갔다. 꽤나 쇼킹한 광경이었지만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기에 놀라진 않았다.


 "그 기념으로, 시청자 한명에게 저와의 대화 기회를 주도록 하죠! 제가 이 지하를 영원히 떠나기 전에 말이에요!"


 알고 있다. 이 뒤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처음엔 냅스터블룩이 전화를 걸겠지. 그리고 메타톤의 쇼가 자신의 삶에 빛이 되어주었다며 감동적인 대사를 할 테고. 그럼 메타톤은 그걸 들은 뒤 한 명 더 받겠다며 다시 전화연결을 시도할 것이다. 그럼 그 뒤로 수많은 전화들이 걸려오고...


 "메타톤, 당신의 쇼가 저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줬어요!"

 "메타톤, 당신 말고 뭘 봐야할지 모르겠어요."

 "메타톤, 제 메타톤 모양 마음속엔 항상 메타톤 모양 구멍이 있을거에요."

 "이게 끝이라고 하지 말아줘요, 메타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줘요!"


 애정어린 말들이 쏟아지고, 메타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전투를 포기하고 녀석을 내보내겠지.

 이미 한 번 봤던 전개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 없지만...


 "......"


 때때로... 차라리 깨닫지 말았으면, 싶은 사실들이 있다. 눈치채지 않았으면 괴로울 일도 없을 그런 사실들.


 "...프리스크."


 나는 상처입어 헐떡이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메타톤을 향해 쏟아지는 감동적인 말의 홍수.

 아마도 지금까지 프리스크와 만나고, 이야기하고, 함께 웃고 떠들었을 괴물들이 거는 응원의 전화.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프리스크의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487.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내 실력의 일부만 보여줬을 뿐이야! 이게 내 진짜 본모습이다!!"


 57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더더욱 이상한 모습으로 변했다. 다리가 사라지고, 날개가 돋아나며, 전신이 마치 뾰족한 촉수와도 같은 형태로 변한다. 슬슬 저게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울보 녀석과 동일인물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뒤에서 그와 프리스크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괴물과 인간의 영혼을 흡수해 전능해졌다는 57도 내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한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와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방이 죄다 검은색이라 달리 놀거리도 없고.

 덕분에 최근엔, 숫자를 세는 게 내 일과가 되었다.


 "0, 2, 1, 2, 3, 1, 0, 5, 0, 0, 128..."


 왼쪽에서부터 숫자를 차례대로 연호했다. 아니 잠깐만. 내가 세 번 죽은 것도 있으니까 128이 아니라 131인가? 판단 기준이 애매하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128로 두기로 했다.

 몇 번 그렇게 반복하자, 어느새 57과의 전투도 최종 국면에 돌입해 있었다. 저항조차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하던 프리스크가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57의 뒤에 있던 128, 0, 0, 1, 86, 77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일제히 프리스크를 향해 공격해온다. 눈에 익숙한, 어디서 많이 본 적이 있는 공격. 프리스크는 그것들을 피하며 예전에 그들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점차, 그들의 기억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뭐, 몇몇 인간은 괜찮은 것 같아. 아마도!"


 128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감동적인 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128이었기에 그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니! 잠깐!! 넌 내 친구잖아! 절대로 너는 못 잡지!!"

 "야, 널 항상 응원할게. 꼬맹아."


 다음으로 기억이 돌아온 것은 0과 0이었다. 다만 두 0은 모양이 다르다. 같은 0이라도 한쪽은 보다 일그러져 있으니까. 물론 어느 쪽이 누구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네 운명은 네게 달렸단다!"

 "자넨 우리의 미래야!"


 1과 86. 그들은 한때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던 기분이 들지만, 숫자가 된 지금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아냐. 틀렸어! 친구들은 날 좋아해! 또, 난 너도 좋아!"


 그리고 77까지.

 프리스크는 모든 숫자를 불러냈다. 그리고 이내 57을 향해서도 그 손을 뻗기 시작했다. 57이 슬픈 표정을 짓더니 발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리스크는 버텨내고, 57은 무너져내린다.


 "난 언제나 울보였지, 그렇지. 차라?"


 57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내 이름을 부른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57은 여전히 57이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프리스크와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다 말했다.


 "모두의 힘... 모두의 의지로... 이제는 괴물들이 진정 자유로워질 때야."


 그렇게 말하며 57은 양 팔을 벌렸다. 수많은 숫자들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1, 3, 4, 0, 1, 2, 1, 0, 5, 1, 3, 7... 수많은 숫자들이 일제히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결계를 두드린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물량에 결계는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힘을 다 소진해버린 57이 슬프게 웃었다.


 "프리스크... 부디 나 대신 우리 엄마랑 아빠를 잘 보살펴 줘..."


 프리스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둘은 조용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프리스크가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57을 토닥였다. 57이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보며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감동적인 광경이네, 그렇지?"


 그럴 리가.

 그들은 숫자에 불과했기에,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487.


 "잘 자렴, 아가야."


 1이 나지막히 속삭이며, 불이 꺼진 방 안에 파이를 내려놓았다. 시나몬과 버터스카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프리스크의 얼굴을 웃으면서 쓰다듬더니, 그대로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다시금 나와 녀석만이 남았다.


 "...자냐?"


 녀석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녀석이 자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내 말은 이제 녀석에게 전해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겉치레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멍청하고 의미없는 겉치레. 녀석하고 같이 있다보니 멍청함이 옮았나 보다.

 그럼에도, 나는 녀석을 향해 말을 걸었다.


 "지하세계에서 보여줬던 네 행동 말인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어."


 다른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평범한 숫자들이 프리스크를 살해한 건, 그저 그게 그놈들의 세계에선 평범한 인사치레였기 때문이다. 1이 덤벼온 건 폐허를 나가려는 프리스크의 의지를 무력으로라도 찍어누르기 위해서였고, 128에게는 모든 괴물들의 자유라는 대의가 있었다. 77은 그저 프리스크의 이야기에 자신을 끼워넣고 싶었을 뿐이다. 86은 128이랑 같은 이유였고.

 이해할 수 있다.

 전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녀석의 행동만큼은, 전혀 요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가설을 하나 세워봤거든."


 모든 것이 끝나고 인간과 숫자들이 섞인 평화로운 삶이 시작된 뒤에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 녀석을 이해하기 위해.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그러다 며칠 전 떠오른 생각이 이거다.

 이 녀석은... 어쩌면 화를 내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지하에 녀석이 떨어진 이후, 그 영혼의 힘에 반응해 내가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녀석에게 빙의한 채 함께 움직였다. 녀석이 잠들었을 때면 녀석의 몸을 빼앗아 쓸 수도 있었고, 심지어 녀석의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마저도 사용할 수 있었다. 서로 정신이 혼선되었다는 증거다.

 또 다른 힌트도 있다. 난 비록 생전에 성격 더럽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거리낌없이 살해를 행하는 막장 종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내가, 최근에는 마주치는 모두에게 살의와 분노를 느낀다. 실제로 - 리셋당하긴 했지만 - 128을 내가 죽이기도 했다.

 대체 왜? 엄밀히 따지면 내 문제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넌 느끼지 못하는 거야. 살해당했을 때의 분노도, 너를 죽이는 적에 대한 증오도,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의 절망도... 왜냐면 내가 빼앗았으니까."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느끼지 못한다'.

 분노, 증오, 절망.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들을 누릴 권리를, 녀석은 박탈당했다. 사람으로서 응당 느껴야 할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부 내 쪽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녀석은 쭉 마음 한구석이 결여된 채 살아왔다.

 맞으면 화를 낸다.

 상처입으면 맞서 싸운다.

 그런 당연한 것들을, 녀석은 할 수 없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다.


 "하, 웃기지 않냐? 밖에서는 널 '성녀'라고 불러.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만 보여줬으니까. 그 결과 지하세계의 모두를 구원했으니까."


 기가 찬다.

 이 녀석은 성녀 같은 게 아니다. 애초에 성녀가 되고 싶어한 적도 없다. 지하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 프리스크는 그저 평범한 한명의 인간 소녀였을 것이다. 맞으면 화내고, 상처입으면 맞서 싸우는 평범한 여자아이.

 그러나 이곳에 온 후, 녀석은 성녀란 이름의 피해자가 되었다.

 ...나 때문에.


 "......"


 난 녀석을 잠시 내려다본 뒤, 눈을 감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검은 감정이 꿈틀댄다. 생전에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부(腐)의 감정. 487번의 죽음을 반복하며 쌓인 녀석의 아픔, 고통, 절망, 절규.

 이게 바로 내가 프리스크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그러니... 책임도 내가 져야겠지.

 나는 지금까지 억눌러온 그 감정들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제발 그냥 놔 줘. 프리스크가 행복하도록. 프리스크가 자신의 삶을 살도록.'


 다시 꽃으로 변한 57이 언젠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모를 거야.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 프리스크가 어째서 걸을 때마다 다리를 비틀거리는지. 어째서 조금 뜨거운 물을 접하면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지. 어째서 이 녀석이 잘 때마다 심장을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내는지. 어째서 이 녀석이 '친구'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몸을 미세하게 떨어대는지.

 너희들은 몰라.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기에, 더는 외면할 수 없어.


 "......."


 잠든 프리스크를 보며,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는 의지를 다졌다.




 0.


 노란 꽃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 즉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다 해진 낡은 반창고. 촌스러운 파란색 줄무늬 티셔츠. 몸은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프리스크는 없나."


 잠든 상태라서 없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하는 말을 내가 듣지 못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유령이던 시절 잠을 잘 필요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후자일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마 내가 하려는 걸 끝마치고 나면, 몸을 되찾은 그녀는 당연히 이 세계를 리셋하겠지. 내가 한 행동들, 내가 그들에게 준 교훈들도 전부 제로로 돌아가게 될 거야. 모두가 자신이 당한 일들을 잊어버릴 거고.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설령 내가 프리스크가 받은 고통의 백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밖에 그들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해야만 한다. 그게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빼앗은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지켜보고 있어."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그녀의 자비다.

 내가 그녀의 복수다.

 내가 바로 의지다.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해주지.


 "이곳이 우리가 살 집이란다, 아가야. 부디 네 집처럼 편하게 지내려무나."


 나는 칼을 치켜들었다.


 ========================================================================================================


 거슨, 버거팬츠가 죽지 않는 이유 = 0이라서

 그럼 파피루스는? = 연대책임 + 어쨌든 프리스크를 뚜까팸 + 길막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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