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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의 연기가 뭉게뭉게 공기중으로 퍼져간다.
담뱃갑처럼 작은 사무실의 공기는 불청객의 난입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어차피 그 안에는 자신밖에 없었기에 상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무실도 담배 연기가 조금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늘 우울하고 좋지 않은 장면을 그와 함께 보며 지냈기에 아마 그의 마음도 담배를 입에 문 그녀처럼 울적하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바닥의 칠이 살짝 벗겨진 곳에서는 우울을 상징하는 것만 같은 회색 시멘트가 가루진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어두운 오후를 밝히는 형광등은 그녀의 얼굴처럼 창백하기까지 했다.
아차, 이래서는 안 된다.
프리스크는 이제 익숙하게 피우게 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당기고 내쉬었다.
마시는 것 만으로도 사람에게 온갖 해악을 끼치는 오염물질들이 그녀의 폐를 가득 메워온다.
아마 그녀의 어머니인 토리엘이 이 모습을 보았으면 '사랑스러운 아이의 타락'에 경악하여 불 붙은 꽁초를 맨손으로 쥐어 뺏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프리스크의 사정을 알고 그저 가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그녀를 꼬옥 끌어안을지도 모른다.
비록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프리스크는 배 아파 낳은 자식만큼 소중한 아이였으니까.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프리스크는 한 손에 꽁초를 든 채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좋은 가죽을 마구 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사용자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목적에 충실한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였다.
가끔 자신보다 커다란 검정색 의자의 모습은 마치 자신을 짓누르는 검정색 팔자 같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친구들 하니 괴물 친구들도 하나하나 떠오른다. 결계가 깨지고, 각자의 목표를 향해 세계로 뿔뿔히 흩어진 친구들.
파피루스, 샌즈, 언다인, 알피스, 메타톤.. 그들 말고도 수많은 괴물 친구들이 답답한 산 감옥 아래에서 벗어나
붉고 반질반질한 꿈과 같은 반구를 따라 떠나갔다.
그녀 또한 결계가 부숴지고 난 뒤의 얼마일지 모르는 시간 동안은 머릿 속에 아름다운 청사진을 그렸던 터였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지상낙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끼는 것은 조금 어려울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 사이에 선다면 한 삽 정도의 행복은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프리스크는 자신을 비웃으며 다시 한 모금을 빨아당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
괴물들이 겪은 차별과 슬픔의 성토를 처음 들을 때의 충격은 차라리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파피루스가 식당을 찾아가서 면상에 스파게티가 부어졌을 때,
방송 중인 메타톤에게 더러운 물이 한 바가지 뿌려졌을 때..
그녀의 동족은 다른 종족에 비해 아주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죽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개체들도 있다.
그들은 마치 잘 갈려진 칼처럼 괴물들의 마음을 헤집고 찌르고 긁어놓았다.
의도적인 차별대우, 마치 근세의 인종차별처럼 이루어지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차별.
같은 인격끼리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는 말에도 그저 허수아비처럼 감정 없이 끄덕거리기만 할 뿐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한 번은 그녀가 괴물 꼬마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붙잡고 혼낸 적이 있었다.
팔이 없는 꼬마를 밀쳐 넘어뜨리고 침을 뱉고 비하하는 소악마들의 무리에서 괴물 꼬마는 고깃덩어리처럼 다뤄졌었다.
말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마 그 때 처음으로 벽을 느낀 것 같다고 프리스크는 생각했다.
'그만둬! 왜 아무 잘못도 안 한 아이를 괴롭히는 거야?'
'그치만 저 녀석 괴물이잖아요?'
'괴물이라고 마음대로 괴롭혀도 되니?'
옛 사상가 중에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한 성정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사람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사람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은 그 후에도 끊임 없이 떠올라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을 자아냈다.
담배는 곧 몸뚱이를 붙잡힌 채로 다 타버린 머리를 톡톡 재떨이에 떨어 댔다.
재떨이 옆에는 '괴물 인권 위원회' 라는 큰 글자가 박힌 종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잔뜩 누워 있었다.
흰 색에 검은 글씨로 새겨진 보고서이자 그들의 슬픔을 잉크로 사용한 절절한 상소문이었다.
프린트조차 담배가 필요할 정도로 매일 안 좋은 소식들만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천사같은 인간들에 의해 좋은 일도 찍어내고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가 곱절은 많았다.
괴물을 성적인 배출구로 사용한 인간 하며..
그녀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지끈해왔다.
이건 분명 담배 연기 탓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가끔은 자신의 몸에 붙어 있었던 원령 친구가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쁜 상황 탓이었다.
사람이라는 사람은 모조리 미워하던 그 친구.
묘까지 다시 만들어서 묻고 어느 나라의 풍습을 따라 삼일장에 사십구재까지 치르고 종교인들을 불러 위로했으니
그로써도 딱히 남아서 골치아프게 할 마음도 안 들 것이었다.
지옥이라던가, 그런 좋은 곳에 갔으면 갔지.
"앗, 뜨거."
'그' 에 대하여 너무 오래 생각했는지 꽁초를 태우고도 모자란 불조각이 프리스크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펜촉의 잉크로 지저분하고 험한 일도 불사해야 했기에 굳은 살도 박혔으며 흉터도 늘어난 그녀의 손바닥은 일견 남자 손바닥 같았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다면 몇 놈은 실컷 두들겨 줬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몸으로 대표로 나서고 이야기를 강변하고..
그들 중에서는 이종족 말고도 같은 종족의 암컷에게도 차별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많았다.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의 위아래를 훝어보며 소곤소곤 무슨 말을 귓가로 나누고 낄낄대는 이상한 인간들은 더 많았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에 가득 찬 삶을 살겠다는 청사진은 이미 그녀 스스로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삶에 치여 거칠어진 손바닥 안에서 개인적인 이상 같은 건 그저 방해되는 종이쪼가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재떨이에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괴물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그녀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금속제 라이터가 빛을 뿌렸다.
딱히 가스가 필요한 것은 아니고 토리엘의 화염 마법으로 굴러가는 물건이었다.
이런 물건이 왜 필요하냐며 의심하던 어머니의 표정을 떠올리니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이미 그녀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아.."
다시 한 번 꽁초의 끝에서 유해 물질이 솟아올랐다.
한숨을 내쉬며 끝을 입에 물려는 순간,
"헤, 꼬마야. 아니 이제 꼬마가 아닌가? 정정하지. '골' 때리게 빨리 자라난 친구. 잘 지냈어?'
작달만하고 옆으로 퍼진, 일견 뚱뚱하다는 말이 어울리지만 살이 없어서 결코 뚱뚱하다고 말 할 수 없는 해골이 눈 앞에 번쩍 하고 나타났다.
꼬질꼬질한 후드티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끄는 옷차림에
아주 약간 푸른 안광을 흘리고 있었기에 프리스크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프리스크는 놀라 담배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샌즈!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친구, 네가 그릴비처럼 불을 들이마셔도 괜찮은 건 알겠는데.."
"응?"
해골의 너스레에 프리스크는 자신이 불씨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발바닥으로 아직 숨이 죽지 않은 담배를 마구 짓이기며 그녀는 살짝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 나는 것보다 나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급여도 상당히 박봉이었기에 이런 꽁초 하나하나가 아쉬웠다.
애초에 많이 받을 수가 없는 조건이기는 했지만.
"에이... 쩝."
"뭔가 유감스러운 모양이군."
"그렇지 뭐."
샌즈는 자연스럽게 사무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손님 접대용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등받이가 달린 철제 접의식 의자는 구식이었고 몹시 삐그덕거렸지만 샌즈의 몸 정도는 너끈하게 지탱했다.
애초에 뼈만 남아서 제대로 된 몸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
뼈만 남았다는 점에서 의자와 샌즈는 비슷할지도 몰랐다.
다리를 꼰 채 샌즈는 프리스크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지금 스스로 짓밟은 것 말고도 유감스러운 게 아주 많은 표정인데.."
"음, 들켰나?"
프리스크는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미소에도 가볍게 그림자가 지는 것만 같았다.
샌즈는 꼬마가 자신과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과 닮아가는 것 같아 가슴과 배 사이가 살짝 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결코 닮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늘 의지에 충만하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일도 기어코 해내고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미소짓던 꼬맹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상처를 끌어안고도 아스고어의 궁전에 피어오른 황금꽃처럼 아름답던 그 미소.
프리스크를 감싸고 있던 그런 '분위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가볍게 두개골을 긁은 후 샌즈는 갈비뼈 사이에 숨겨온 담뱃갑을 내밀었다.
이 근처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포장지와 알 수 없는 언어로 도배되어 있는 종이 상자는
그녀에겐 받을 기회조차 없는 종이돈 뭉치가 담긴 뇌물 상자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조심스레 담뱃갑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샌즈가 말했다.
"요즘 니가 이 과자에 맛을 들인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을 들어서 말이야."
"뭐? 누가 그랬는데?
"토리엘."
"끙.."
역시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마음으로 이해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잔소리 할 기회를 찾지 못 한 것인가..
왠지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프리스크는 마치 그녀가 지켜보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 담뱃갑을 슬쩍 서랍 속으로 숨겼다.
그녀가 준 라이터도 숨겼다.
샌즈는 그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다.
"뭐, 내 앞에서 피우는 건 상관없어. 내가 고자질할 것도 아니고 말이지. 폐에 안 좋긴 하지만.."
"샌즈는 폐가 없잖아."
"맞아, 난 '해골'이니까."
평소라면 정색할 뼈 개그에도 프리스크는 가슴을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리액션이었지만 샌즈는 부담스러워하거나 곤혹스러워 하지 않고 마주보고 웃어 주었다.
그녀는 정말 드물어질 웃을 기회를 놓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웃을 수 있을 때 가슴이 찢어지도록 웃고 행복한 감정이 아직 자신에게 남아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아직 자신의 가슴에 신앙심이 남아 있음에 당혹하는 배교자처럼.
서로 폐와 뼈에 남은 먼지까지 떨어낼 정도로 웃고 난 뒤에 샌즈는 말을 꺼냈다.
"뭐, 내가 온 이유는, 너도 알고 있겠지만.."
"놀러 왔다고?"
"놀러 왔다기보다는 지친 친구를 위로해주기 위한 업무차.."
"땡땡이 쳤다고?"
"친구, 자꾸 말 끊으면 널 파란색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래."
프리스크는 잠시 벙 찐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이 해골에게는 그런 능력도 있었지.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쥐어박는 데에는 참으로 특화된 능력이 아닌가,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하루에 대여섯 놈은 하늘과 땅을 왕복하며 딱딱한 자갈돌 맛을 보게 해 줬을 텐데.
프리스크가 머릿 속으로 열받는 인간들에게 신나는 복수극을 찍고 있으니 샌즈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프리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준 담뱃갑, 열어봐."
"응?"
그녀는 끼익 소리를 내는 철체 서랍을 열고 샌즈가 준 담뱃갑을 뜯었다.
"어, 이건.."
담뱃갑 안에는 돈 말고도 꼬불꼬불 말아놓은 종이돈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통용되는 지폐 중 최고가권으로 이루어져 그녀 월급 만큼은 될 것 같았다.
프리스크는 그 물건을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샌즈는 좋은 친구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맨날 옷도 입은 것만 입고 다니고.. 아, 스노우딘에 있는 집의 집세는 샌즈가 내긴 했지만.
"이걸..왜?"
"친구에게 내가 주는 용돈이야. 요즘 많이 고생한다며. 옷도 한 벌 사 입고, 식당도 가고. 인간 남자 친구도 만나라고. 남으면 회원들 밥도 좀 사고."
"고.. 고마워.. 어디서 난 거야?"
"핫도그 팔았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샌즈의 모습을 보니 진짜인 것 같아 프리스크는 가슴이 찡해졌다.
그런 돈을 자신에게 용돈으로 주다니..
서랍을 열어봐도 답례로 줄 것은 종이와 자신의 담뱃갑밖에 없는 현실에 그녀는 가볍게 좌절했다.
샌즈는 손을 흔들며 그녀를 저지했다.
"됐어 친구, 여기 사정 어려운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친구끼리 그러지 말자구. 뭐.. 예전처럼 많은 친구들이 힘을 모아 '사랑과 우정의 결계 부수기' 같은 일은 할 수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도울 수는 있으니 다행이지."
"샌즈.."
"너희가 하는 일이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주 헛된 건 아니니까 말이지.. 이런 건 마치 씨앗을 심는 것 같은 일이니까.
이런, 너무 안 어울리는 말을 많이 했나. 어.. 지금 감동한 거야 친구?"
"정말.. 아저씨 같아.."
"그것 참, 신선한 농담이군. 음, 농담이지?"
프리스크의 감동한 표정을 본 샌즈는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샌즈는 멋쩍은 표정으로 품에서 케첩을 꺼냈다.
"이것 참, 어쨌든 오늘은 좀 같이 쉬자구. 그동안 있었던 일의 이야기도 좀 해 보고. 편하게 넌 연기를 뿜고 난 이걸 들이키면서 말이지."
"아, 응."
그녀는 친구가 준 담배갑의 진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자신이 피우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독한 향기가 주변 공기를 후끈 덥혔다.
폐에 침입하는 진한 연기에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평소에 피우는 것보다 세 배는 더 독한 것 같았다.
"쿨럭, 쿨럭."
"괜찮아 친구?"
"아아. 괜찮아. 조금 독하네.."
프리스크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피루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름을 셀 수 없는 괴물들의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
적은 성공보다 훨씬 많은 실패의 이야기와 어려운 자금 사정.
그나마 선한 인간들이 의기투합하여 시민단체 비슷한 것을 세웠지만 동감해주는 이조차 얼마 없는 힘없는 집단이라는 이야기.
현실이라는 철골 시멘트 벽 앞에 의지를 가진 한 인간이 맨주먹으로 벽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한 편의 잔혹사.
그녀의 손은 이미 장미처럼 터져있었고 벽에는 피가 뿌려져 마치 붓그림이 그려진 도화지처럼 보였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포기할 수도 없고 넘어갈 수도 없고 못 본 체는 더더욱 할 수 없는 벽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녀는 차차 빛을 잃어갔다.
그나마 충만한 의지만이 그녀를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을 뿐.
그 의지마저 소멸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어쩌면 그녀의 몸에 깃들었던 망령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성격상 세계를 향한 복수보다는 미련한 자신에 대한 복수겠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 '원 우먼 쇼'를 지켜보는 인간들의 대부분은 무관심했고, 대부분의 나머지는 비웃었으며, 아주 조금의 인간들이 그녀와 동조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심지어 제대로 된 이야기도 한 번 안 한 인간 새끼들이 점심시간인 것처럼 배고픈 표정으로 날 쳐다보잖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오, 이런."
"그런 새끼들이 줄을 세우고 총으로 쏴갈기고 싶을 정도로 많았어. 정말... 총이 있었으면 걔들을 쏘던지 내가 편해졌을 것 같아."
"진정해, 친구."
샌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세상에 구르며 성질도 조금 더러워지고 언어 사용 습관도 나빠진 것 같지만 속은 그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민을 거쳤을지 그도 알았기에 말리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 리셋 한 방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심적 고통을 느껴 보았던 샌즈였기에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커다랄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처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마치 독처럼 품고 있으면 끝없이 고통스럽고 토해내면 편해지는 그런 부류였다.
프리스크도 그것을 알았고 샌즈가 받아주는 역할을 자처한 것을 알았기에 안심하고 모든 내용물을 쏟아내었다.
샌즈가 선물한 담뱃갑의 바닥이 드러나고 돗대의 뿌리까지 태우고 나서야 이야기는 끝이 났다.
재떨이에는 타 죽은 담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마치 회색 산처럼 보였다.
듬성듬성 보이는 끈적끈적한 침은 그녀의 몸에서 새어나온 독이리라. 마음의 독이든 몸의 독이든..
그 재떨이도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의 내용물을 버려야 할 것이었다.
다 타버린 담뱃재들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프리스크는 샌즈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뿌연 연기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푸른 안광은 연기에도 흐려지지 않았기에 그의 얼굴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지. 들어줘서 고마워."
"헤.. 넌 지하에서도 고생고생하더니 나와서도 고생이구나.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같군."
"뭐 그렇지, 동화라고 부르기엔 좀 잔혹하고.. 투쟁기 쯤 되나?"
"아래투쟁? 이라고 해야 하나.."
샌즈와 프리스크는 서로 낄낄댔다.
그녀는 오랜만에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해골 또한 흡족한 표정이었다.
"익숙한 기분이군."
"그러게."
"친구."
잠시 고개를 젖혔던 샌즈는 프리스크의 손을 쥐고 눈을 바라보았다.
딱히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프리스크는 가볍게 움찔했다.
푸른 안광은 몇 번 보더라도 잘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는 안광을 가볍게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몇 번째인지는 잘 모르겠고. 뭐.. 과거의 내가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나는 네가 모두의 행복을 위해 네 능력을 사용한다고 믿어.
그게 몇 번이 되더라도 넌 우리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몇 번이 되더라도."
"샌즈.."
그녀는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샌즈는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었다.
"헤, 어차피 네가 우리를 구하는 데에도 네 능력이 수십번은 사용되었지. 우리들의 실수 때문에.. 몇 번쯤 더 쓴다고 티도 안 날 거고. 난 이미 그런 것에 익숙하거든.
그러니까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답을 찾을 때까지 그 능력을 몇 번을 사용해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
"너의 답을, 꼭 찾아줘. 알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샌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애초에 온 적도 없다는 듯, 그의 발걸음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창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 담배연기만이 그가 있던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
"고마워."
그녀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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