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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기다린 사람 있다면 미안.
샌즈는 스포이드로 용액을 빨아들여 슬라이드에 한 방울 떨어뜨린 후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며 커버 글라스를 덮었다.
실험대 한 쪽에서는 자욱한 연기가 가득히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꺼운 안경을 낀 채 실험에 몰두해있는 그의 측두골에 땀이 맺혀있었다.
아침 일찍이 소파에 앉아있던 샌즈는 이른 시간부터 집을 나설 채비를 마치고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토리엘의 눈가가 미약하게나마 발갛게 부어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저릿해오는 마음 한 켠과는 상관없이 판에 박힌 미소를 지어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 잠겨있었는지 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뒤늦게 그를 발견한 토리엘은 미세하게 몸을 경직시키더니, 그녀답지 않게 조금 허둥대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 저, 장을 좀 보고 오려고요. 버터도 다 떨어졌고, 음. 우유도 절반만 남아있어서, 세제도요. 그리고... "
티비에서 짜맞추어진듯 터져나온 방청객들의 박수소리가 아무런 감동도 없이 잦아들고 있을 때, 샌즈는 웃음을 띠고 주머니에 있던 차 키를 건내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요?"
".. 아침으로 계란 토스트를 해놓았으니 꼭 따뜻할 때 드세요."
그렇게 말을 끝마친 토리엘은 어딘지 처연한 표정으로 차 키를 받아들고는 집을 나섰고, 문이 닫히자마자 샌즈는 소파 등받이에 힘없이 풀썩 몸을 기대며 텅 빈 눈빛으로 하나의 생각에 잠겨들었다.
토리엘이 돌아왔을 때 건내야 할 이별의 말에 대한.
과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멀쩡한 부분까지 썩어들어가듯이, 순간의 아픔이 두려워 이 시작부터 비틀린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면 늦든 빠르든 위기는 찾아 와 언젠가 둘을 속부터 갉아 먹어치울 것이다.
..이미 그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틀렸어.'
샌즈는 자신의 죄책감만 감당할 수 있다면, 세이브 포인트를 제작하여 이 시간선을 없던일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얼마든지 이 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자만심, 오만에 불과했다.
완성까지의 시일을 4,5년으로 잡았지만 어제 단 하룻밤의 토리엘의 숨죽인 흐느낌만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했는지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헤어짐을 고해야겠다는 생각과 그 결심의 시간을 앞당겨주었다.
그리고 파피루스.
샌즈가 아는 제 동생이라면, 공부를 접고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할 지도 몰랐지만,
팝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유학을 포기하고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지는 않을거라 다짐했다.
그리고 토리엘이 외출한 지금 잠깐동안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궈두었던 창고문을 열고 들어 와 어제 하다 만 실험에 지금 이렇듯 몰두해 있는 것이다.
토리는 울겠지.
샌즈가 탁한 회색빛 용액이 담긴 시험관에 스포이드를 담가 용액을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사려깊고 친절한 그녀지만, 그 이면에는 당황하며 얼굴 붉히고 마음 약하며 눈물 많은 소녀같은 모습이 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샌즈가 쓴 표정을 지으며 붉은 시약이 담긴 시험관에 회색 용액을 두 방울 흘려내고 시험관을 약간 기울인 후 원을 그리듯 흔들어 혼합하는 중,
곧 그의 뻥 뚫려있는 코가 무언가 이상한 냄새를 감지했다.
본래 실험 중에는 온갖 종류의 골 아픈 화학용품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 실험하는 자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는 일이긴 했지만, 그 냄새는 실험 중에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티비를 오래 켜 놓았을 때 나는 플라스틱 타는 냄새같은 것이, 처음 미약한 듯 감지되었다가 곧 참기 어려울 정도로 역해져서 그의 비강을 타고 올라오게 됐다.
대체 뭐지?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그의 눈에 시험관 꽂이의 뿌연 액체가 담긴 한 시험관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스포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샌즈는 그만 뒤통수가 섬찟해지는 싸함을 느꼈다.
....
..내가 스포이드를 저곳에 꽂아두기 전에 생리 식염수로 세정해두었던가?
그러나 샌즈의 그런 돌이킴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에 잡힐 듯이 짙어진 냄새는 이제 그의 뇌를 잡고 뒤흔드는 듯한 역겨움과 정신이 혼미해지는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실험대에 손을 짚은 채 비틀대는 샌즈의 눈이 벌써부터 힘없이 풀려갔다.
샌즈는 실험 중에는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실수라는게 뭔지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그가 실수? 그게 뭐죠. 하며 능청을 떨었어도 그와 과거 연구원 시절을 함께 지냈던 다른 괴물들은 아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뻔뻔한 말에도 충분히 수긍했을 것이다.
그에게 실험이란 단지 소파에 다리뻗고 마음껏 퍼져있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는 귀찮은 일일 뿐이었지, 그게 무엇을 실험하는 일이든 위험과는 영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상념에 빠져 가장 기본적인 과정에서 실수를 맞이해 지금 이 순간 허리를 꺾으며 구역질을 해대고 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무색의 유독가스는 뇌로 운반되는 산소를 방해하여 곧 저산소증을 일으켜 1, 2분 내에 의식을 잃게 된다. 그리고 뇌손상이 빠른 속도로 시작될 거고 그 후에는..
"후욱, 후으..."
샌즈는 지독한 메스꺼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이미 늦었다.
수습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웃을 수 밖에.
그리고는 이 순간 토리엘이 외출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스는 문 틈새로도 빠져나가 충분히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유해하니까. 그래도 그녀가 돌아올 즈음엔 충분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있겠지.
이제 완전히 풀린 눈을 하고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샌즈의 땀에 젖은 얼굴이 이내 쓴 미소를 띄운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프리스크.
좀 더 내가.
눈앞의 흔들리는 바닥이 희뿌옇게 보이다 깜깜해졌다를 반복하며 샌즈의 시야가 점멸하다, 마침내 완전한 암흑으로 회귀했다.
샌즈는 어둠 속에서 미소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프리스크를 보았다.
'오랜만이네.'
샌즈는 슬프게 웃으며 프리스크를 마주 보았다.
꿈에 한동안 찾아오던 프리스크는 어느 순간 발길을 뚝 끊었고 샌즈는 그럴만하다고 어디선가 그 사실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날 데리러 왔다니, 최고의 사신인데.'
샌즈는 팔을 들어 프리스크에게 손 뼈를 내밀었다.
프리스크는 살풋 웃더니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런 프리스크에 샌즈는 한숨섞인 웃음을 지어냈다.
'..Heh, 이봐, 프리스크. 난 너무 지쳤어. 장난은 뒤로 미뤄두고 그냥 이대로 데려가주지 않을래?'
그러나 프리스크는 슬픈 미소만 띤 채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프리스크? 어디 가는거야? 프리스크?'
"...즈, 샌즈.. 으흑.."
샌즈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곁에서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의식을 찾은 머리에 곧 깨져나갈 듯한 통증이 찾아들어 눈쌀을 찌푸리며 샌즈는 눈을 떴다.
....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 살아있어?
샌즈는 손 뼈를 꼭 쥐었다가 다시 펼쳐보았다.
그리고 1부터 10까지 차례대로 세보다가, 다시 거꾸로 세나가보았다. 단어들의 스펠링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동물들의 이미지와 이름을 매칭시켜 보기도 했다.
그렇게 아주 예전 일부터 최근 일주일 간의 기억까지 더듬어보고 나서야 그는 결론 지었다.
.. 다행히 뇌 손상이 온 것 같진 않아.
그리고 지금 자신의 시야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현재 밤이 깊은 시간이거나, 낮이라면 커튼을 쳐서 의도적으로 햇빛을 차단한 것처럼 방 안은 온통 깜깜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낮 시간대 같았다.
방의 커텐이 암막커텐이 아닌 관계로, 천을 뚫고 햇빛이 새어들어와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옆으로 고개를 박고 울고있는 토리엘의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비춰졌기 때문이다.
샌즈는 힘없이 토리엘을 향해 돌아누우며 입을 열었다.
".. 토리."
물기 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목에서 낯설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와락, 하고 토리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빛 속에 잘 드러났다.
".. 샌즈? 샌즈. 으흑.. 당신 살았어요?"
"...보다시피요. 어떻게 된 거죠."
토리엘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무너진 채 목놓아 울었다.
샌즈는 얇은 티셔츠 한 장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곤란하게 웃었다.
우느라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이던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일어난 그녀는 울먹이며 설명했다.
"..가는 길에 차 연료가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길을 틀어 다시 돌아온 거에요."
샌즈는 눈구멍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차를 몰았던 것은 샌즈였다.
그는 연료가 간당간당 할 때까지 차를 몰고 주유도 하지 않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었고, 토리엘이 그 차를 몰고 장을 보러 나갔다가 아슬아슬한 연료의 상태를 뒤늦게 알아채고는 주행 도중 차가 정지할 것을 우려하여 방향을 틀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샌즈는 깨질듯한 두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눈에 손을 짚은 채 큭큭대며 웃었다.
평소 습관처럼 배어있는 그의 나태한 천성과 게으름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는데.
"..웃지마요..!"
...
별안간 터져나온 젖은 목소리에, 샌즈는 눈을 가린 손을 들어 토리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은 알아요? 어떻게 속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내비치는 토리엘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그 물기 어린 눈에는 큰 눈물 방울이 매달려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역한 냄새는 풍기고 집 안에 당신은 없고.. 으흑,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팔이 어둠 속을 헤엄쳐 와 토리엘의 양쪽 어깨를 확 끌어쥐었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토리엘은 눈물젖은 얼굴로 몸을 들썩일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푹 꺼진 눈구멍으로 언뜻 푸른 안광이 비치는 듯 했다.
"..가스를 마셨어요?"
샌즈는 뜻밖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가까이서 토리엘의 상태를 살피는 듯 천천히 시선을 훑어내렸다.
"..나, 난 빨리 손수건을 물에 적셔서 코와 입을 막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토리엘은 간신히 숨소리처럼 가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샌즈는 토리엘을 놓아주곤 다시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덕에 골이 흔들리는 듯한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토리엘은 잠시 한 손을 쥔 채 가슴에 대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싶더니, 곧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조심스레 갖다댔다.
샌즈는 자신의 두개골을 걱정스러운듯 어루만지는 손길을 잡아 내렸다.
".. 그만해요."
그러자 토리엘은 뜨거운 것에라도 닿은 듯 흠칫, 하며 자신의 손을 감싼 채 입가로 가져갔고 그런 그녀를 보는 샌즈의 목구멍을 무언가 치받고 올라왔다.
게워내느라 비어버려 쓰라린 속이 끝도 없이 뒤틀렸다.
....
"..헤, 정말 그만하지 않을래요, 이런 거."
샌즈는 아무렇게나 말했다.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는 토리엘에게 이유모를 분노가, 아니, 목표도 불분명한 어떤 짜증이 그의 두통을 촉진시키듯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서히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엘의 눈이 커졌다.
사고의 후유증 탓인지,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인지, 어쨌든 그는 가라앉은 얼굴을 한 채 그녀에게 차가운 말을 내뱉는다.
"heh.. 봐요, 토리. 지금 극진히 보살피는 뼈다귀 남편이 당신에게 남편으로써 해준 것이 뭐가 있는지 한 번 돌이켜볼 때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 샌..!"
토리엘이 발끈한 듯 그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려할 때, 샌즈는 그를 무시하고 침대에 누운 채 그의 손가락 뼈를 하나씩 꼽아대기 시작했다.
"..두툼한 돈 봉투 갖다주기? 부부간의 속 깊은 이야기? 수양딸에게 따뜻한 아빠 노릇해주기?"
샌즈는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간신히 억눌러놓았던 욕지기가 다시 치밀어 오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잠시 말을 멈췄다.
..Heh, 아빠와 딸이라.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샌즈는 프리스크의 입에서 직접 그 단어를 듣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끝으로 토리엘에게 하기 어렵지만 꼭 해야 할 마지막 말까지 내뱉고 만다.
".. 그도 아니면 새벽에 홀로 숨죽여 흐느끼는 일이 없도록 밤마다 만족시켜주기?
마지막 말은 굳이 잔인하게 말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충격적일 만큼 잔인했다.
토리엘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경악에 물든 눈을 흡 뜬채로 쉴 새없이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샌즈는 눈을 감았다.
".. 참을 만큼 참았잖아요? 이제 됐어요. 난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날 끊어내요."
토리엘이 말없이 눈물만 쏟아내고 있을 때, 샌즈는 우울하게 웃으며 아까보다 누그러진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난 못 해요, 토리. 전 적으로 모든 문제의 책임은 나한테 있으니까. 이 미래없는 쳇바퀴를 먼저 돌리기 시작해서 당신을 끌어들인 것도 나.. 끊어낼 자격조차 상실한지 오래에요. 그러니, 당신이 끊어내요."
토리엘은 말이 없었다.
샌즈는 심해져오는 두통을 느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 심하게 말한건 미안해요. 하지만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란걸 당신도 모른다하진 않겠죠. 전 남편으로서 토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거에요. 오래 된 상처같이 곪아들어간 저를 끌어안고 있다간 토리까지 피해입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 알고 있었어요."
말을 끊고 예고없이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샌즈는 고개를 돌려 토리엘을 바라보았다.
토리엘의 눈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채였지만,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히 인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조차 떨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었을 거에요. 다만 겁이 나버린 거에요, 사실을 인정해버리는게. 믿고싶은 거짓은 받아들여 꿈 속에서 살아왔고, 믿고싶지 않은 진실은 속 깊숙히 묻어둔 거죠. 당신이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토리엘은 말의 끝에 가서는 심정이 괴로웠는지 눈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곧추세우곤 자세를 바르게 하며 꼿꼿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샌즈, 전 당신의 괴로움이 뭔지, 두려움이 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언제나처럼 지친 얼굴로 억지로 미소지어 절 대하죠. 그럼 바보같은 저는 그 미소에 속아 잠깐동안 행복해져요. 그리고 뒤에 가서 자괴감을 느끼고 말죠. 이게 아닌데, 하면서요."
샌즈는 새로운 놀람으로 젖어드는 가슴을 느끼며 토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심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불행만이 세상의 짐 같았고, 그의 절망만이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언제나처럼 바라보았을 그녀는 과연.
"..말한대로 전 아무것도 모르지만, 대충 짐작할 뿐이에요. 그 별 모양의 돌."
샌즈는 날카로운 바늘로 찔린 듯, 자신의 한 쪽 어깨를 자신도 모르게 와락 감싸쥐었고 토리엘은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마 그게 원인이었겠죠, 거짓 사랑을 고백하고 프로포즈를 할 정도의 절박한. 하지만 당신은 찾지 못한 거에요. 이 며칠 전에도 수소문을 하며 찾았다고 할 정도니까."
....
"그래서 당신을 발견한 창고 안의 그 온갖 실험기구들.. 아마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는데...그건 당신만 알겠죠."
.....
"내게 이혼 이야기를 쉽사리 꺼낼 수 없었던 데엔 분명 파피루스의 유학 문제도 있었겠죠.
당신은 동생을 끔찍히 위하니까요.
샌즈. 끊어낼 자격조차 상실했다고 했나요?
그럼 전 끊어내지 않겠어요. 당신이 죄스럽다면 내 곁에 머물면서 갚아나가요. 그게 제 결정이에요."
"..토리."
"하지만 저 역시도 당신에게 이용당해 줄게요. 파피루스는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을거고, 주변에 쓸데없는 논란이나 소문도 일어나지 않게 행복한 신부를 연기할게요. 그리고."
토리엘의 무릎에 모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착한 표정과 목소리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 절 여자로서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에게 남편으로서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지금처럼만."
그냥 지금처럼만.
그게 그녀의 최소한이었다.
여자로서, 아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내놓은 정말 소박하디 소박한. 최소한의 볼품없는 바램.
게다가 그 결심은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하고 또 확신에 차 보였다.
샌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현재 자신이 걷고있는 이 시간선은 자신의 시간선이 아니며, 지금 기숙학교에 머물고 있는 아이는 미래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이었고 토리엘 당신과는 조금 어색해졌지만 여전히 자신의 농담을 가장 잘 이해하고 웃어줄 수 있는 최고의 청중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몰라도 될 너무 큰일에 발을 디디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고, 또 아무리 자신을 다 이해해줄 듯 담담히 말하고 있는 그녀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훨씬 밑지고 들어가는 불공정 거래에 누가 직접 체결하겠다고 나서겠는가.
그런 토리엘에게 프리스크의 이야기며 하는 것은 그녀에게 다시 없을 크나 큰 실례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샌즈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 그나저나 등은 왜 꺼놓고 온통 커텐을 쳐서 밖의 빛을 막아놓은 거죠?"
그 말에 토리엘은 그 무섭도록 침착한 태도에서 순식간에 약간 멍한 표정으로 변하여 입을 열었다.
"..유독가스를 마셨을 때 빛을 차단하는게 응급처치법 아니었어요?"
"..빛의 자극에 의한 공포는 광견병인데요."
그 말에 토리엘은 어머나. 하며 쳐놓았던 커텐들을 모조리 열어젖혔고 방의 스위치를 올려 등을 켰다.
샌즈는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두 눈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창문 좀 열어주겠어요. 유독가스 흡입 시 첫 번째 처치법은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라서요."
이미 한참 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샌즈의 속을 알 리 없는 토리엘은 급히 창을 열어젖혔고 샌즈는 그 허둥대는 뒷모습을 보곤 작게 피식였다.
"..계속 부탁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마지막으로 물 한컵만 좀 갖다주세요. Heh, 목이 텁텁하네요."
토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 다시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독가스를 마셨을 때 갈증이 심하게 나도 물을 안 마시는게 통증이 없을 거라고."
"..심한 갈증과 수분 섭취시 목의 통증도 광견병인데요."
토리엘은 또 다시 어머나, 하며 화들짝 하고는 급히 주방으로 물을 가지러 내려갔고 샌즈는 침대에 누운 채 눈위에 제 손을 짚고선 큭큭대며 웃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고나서, 뒤늦게 구급차가 도착하더라고. 그녀는 이야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911에 전화했다는 사실도 잊은 모양이었어."
샌즈는 어깨를 으쓱였고 잠시 후 그 표정은 조금 이상한 사람을 보는듯한 한심함이 가미된 얼굴이 되어 있었다.
"... 그래서, 토리와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싶은거야? Heh, 미안하지만 그 질문엔 대답하기 싫은데. 했건 하지 않았건, 그녀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엔 변함이 없으니까 말야."
샌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으로 걸어가더니 이제 칠흙같이 어두워진 밖을 뒷짐을 진 자세로 내다보았다.
별도 뜨지 않은 밤을 비춰주는 존재는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아 살풍경까지 한 그 암흑 뿐인 광경을, 샌즈는 익숙한 듯 찬찬히 훑어내리며 감상하는 듯 했고 그 모습은 어딘지 지금의 밤과 닮아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창 밖으로만 시선을 던지던 그의 입이 피로한 듯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만약 정상적인 부부로서의 생활을 해왔다면, 그 기반은 사랑이 아니었을 거야. 단지 서로의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이루어진 없는 자들의 부둥켜안음같은 거였겠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음짓고는 "뭐, 그렇다고 우리가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덧붙이며 이제 창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자리로 돌아 와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샌즈는 허리를 수그려 팔꿈치는 무릎에 의지한 채 두 손뼈를 깍지 껴 턱을 받친 자세로 프리스크를 향해 공허한 미소를 지어냈다.
"..어때? 더 듣고싶어?"
부부관계 이야기x
그 이후 이야기를 이어서 계속 듣고 싶냐는 말임.
이번 이야기는 둘이 시작부터 엇갈린 마음으로 어떻게 7년 간이나 부부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내용임. 다음 편부터는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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