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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나라의 초청장들

운영자 2024.02.13 10:23:38
조회 144 추천 2 댓글 0

고교동기인 친구로부터 이런 카톡 메시지가 왔다.

‘오늘부로 항암 칠주를 마쳤습니다. 항암제 투여 3회. 방사선 34회. 체중 20키로 줄고 이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드립니다.’

나는 그의 카톡 메시지를 보면서 맑은 샘물 같아진 그의 영혼을 느낀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암 때문에 간을 이식하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친구였다. 그의 또렷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가 시키는 대로 수술 전에 시편 23장을 열심히 썼지. 몰입하니까 공포감이 줄어들었어. 전신마취를하고 수술중인데도 어떻게 된 건지 아프더라구. 그래서 속으로 외우게 된 시편23장을 열심히 중얼거렸어. 수술이 끝나고 정신이 들었을 때 의사가 하는 말이 간이식은 혈관 상태가 중요한데 내 혈관이 어떻게나 깨끗한지 놀랐대. 보통 한달은 중환자실에서 관찰을 해야하는데 나보고는 보름정도면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그래. 다시 일어나 나가면 이제 자네가 권하는 좋은 일들을 할 거야.”

그 친구는 부자였다. 나는 가끔 그를 스쿠루지영감이라고 하면서 가끔 좋은 데 돈을 쓰라고 했다. 그는 돈이 너무 아깝다고 하면서도 내가 강권하는 곳에 돈을 내놓았다. 그는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귀도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 오후 바닷가를 걷다가 ‘옥계 신선’을 만났다. 나 혼자 그렇게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그는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옥계의 바닷가 마을로 이주해 와 이십년 가까이 산 사람이었다. 낮에는 바닷가를 거닐고 밤이면 집에서 논어를 읽고 시를 지으며 살았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됐다. 일렁이는 겨울파도가 보이는 찻집의 데크에 앉아 싸아한 겨울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얘기를 나누었다.

“저한테 암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어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을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암은 우리를 오라고 하는 그분이 보낸 초청장이고 노인들의 죽음은 가볍게 취급된다. 그래도 죽음 앞에서 인간은 당당하기 힘들다. 두렵고 힘이 드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는 말이 가장 위로가 될 것 같아 내 경험을 말해주었다.

“이십오년전 봄 날 저도 암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그 시간 엄청난 발견을 했어요. 차창 옆으로 야산 풍경이 흘러가는 데 나뭇가지에서 새로 피어나는 연두색 잎들이 내게는 경이였어요. 수채화처럼 퍼져가는 야산의 연두 물감을 보면서 물결처럼 감동이 흘러왔어요. 파란 하늘에 하얀구름이 떠가는 게 너무 아름다왔어요. 내게 암은 지구가 바로 천국이라는 걸 발견한 순간이었어요.”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폐암으로 죽은 강태기 시인은 혼자 병을 앓고 있던 임대아파트의 어둠침침한 방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보면 이슬이 맺힌 노란 호박꽃이 보입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했는지 몰라요.”

암이 찾아오면 안 보이던 아름다움들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다. 내 앞에 있던 옥계 신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저기 저렇게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스러지는 겨울 파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이 상큼한 공기하며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세요. 이런 천국에서 이십년 가까이 산 저는 인생의 노후에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나 몇 번 보지 않았지만 그는 좋은 영혼의 친구다. 영과 영이 통해야 진짜 친구가 아닐까.

인간이란 그 영혼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변호사를 하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땅바닥의 진창을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작은 철창이지만 그곳을 통해 밤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을 본다.

바닷가에 와서 살아보면 해질녁 바닷물에 스며드는 신비로운 색조의 노을에 취하는 사람도 있고 모래밭에 떨어진 동전이나 누군가 두고간 시계를 줏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있다. 마음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그의 마음으로 순간이동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오면서 나는 옥계 신선이 더 오래살아 노년의 우정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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