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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꽃 잎 같이 진 친구

운영자 2024.04.15 10:28:54
조회 72 추천 1 댓글 0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는 스산한 겨울 풍경을 담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산길을 달렸다. 차창으로 햇빛에 반사되는 얼어붙은 강이 보였고 서걱대는 마른 갈대가 지나가기도 했다. 장과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주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마을 입구의 작은 가게의 알전구만이 주변의 어둠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장과 나는 가게에 들어가 양초를 사서 헌 신문지로 똘똘 말았다. 거기에 불을 붙이면 산길을 밝힐 간이횃불이 됐다. 우리는 산 짐승 소리가 멀리 들리는 눈 덮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과 나는 장학재단에서 일 년간 고시공부를 할 수 있는 생활비를 지원받고 그해 겨울을 지낼 절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야, 어째 기분이 으스스하다.”

내가 무서움을 느끼며 앞에 가는 장에게 말했다.

“사나이가 이 정도를 가지고 뭘 그러냐, 덩치값좀 해라”

작달막한 체구의 장이 큰소리를 쳤다. 그는 색다른 인물이었다. 빡빡깍은 머리통에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에서는 야행성 동물 같은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누구에게도 기가 죽지 않았다. 장학금을 심사하는 교수가 갑이라면 우리는 절실한 을의 입장이었다. 교수는 돈을 받으려면 먼저 파란 기운이 비칠 정도로 머리를 빡빡 깍고 와서 사정하라고 했다. 굴욕감이 들었다. 장이 교수를 보면서 내뱉었다.

“머리를 깍고 왔는데 심사에서 나를 떨어뜨리면 교수님 책상을 엎어버리고 갈 거요. 자기 돈 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의 패기는 대단했다. 그렇게 그해 우리들이 생존할 수 있는 비용이 마련됐었다.


책과 이불 보따리를 지고 산길을 올라가는 장과 나는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해 여름 다른 절에서 같이 공부할 때 우리는 둘 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간염을 앓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한시간 쯤 지나면 눕고 싶었다. 어쩌다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면 몸은 파김치같이 지쳐있었다. 장 역시 밥만 먹으면 위가 아프다고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심한 위궤양이라고 했다. 고시낭인에게 훈장같이 달라붙는 병이었다.

얼어붙은 산길을 오르면서 앞에 가는 장의 등을 향해 내가 푸념조로 한마디 던졌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장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면서 밤하늘을 향해 독백을 하듯 소리쳤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밤중에 이 산길을 올라가고 있다. 나는 너보다 더 가난하다. 가난한 선생의 맏아들이다. 어쩌다 서울법대를 가니까 온 집안 식구들이 나 하나만 쳐다보고 있다. 너는 내가 지고 있는 세상 짐의 무게와 고통을 모를 거다.”

그 밤에 우리는 거의 폐허가 된 퇴락한 절에 도착했다. 바깥채는 석가래가 무너져 내리고 풀이 무성한 기와가 대들보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문짝이 떨어지고 찢어진 창호지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귀신이 안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안채에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장과 나는 바닥의 낙엽을 긁어모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다. 다음날 부터 우리는 그 방에서 함께 지냈다. 장은 남포불 아래서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가 책을 볼 때 옆에서 보면 섬뜩했다. 그의 눈빛이 정말 책장을 뚫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말도 안 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독한 놈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공부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누워있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심한 몸살로 끙끙앓았다. 나는 갑자기 회의가 왔다. 내가 그에게 모든 게 싫다고 하면서 공부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안타까운듯 “조금만 더 참지”하고 나를 달랬다. 나는 그를 두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해 사법 시험장에서 나는 정장을 차려입은 그를 보았다. 깨끗한 양복에 와이셔츠를 받쳐 있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의외였다. 고시생들 대부분 시험때가 되면 목욕도 안하고 수염도 안 깍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그래야 합격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장은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미야모도 무사시가 사사끼고찌로를 칠 때 정장을 하고 한방에 끝을 냈다. 그래서 나도 정장을 한 거다.”

그의 신념 체계가 달랐다. 일종의 무사도정신이라고 할까.그는 절 마당에서 가지고 간 목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했다.


그해 그는 합격을 하고 판사가 됐다. 의지가 약한 나는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시험에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해 나는 직업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그가 한방에 자신의 생명을 끝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능히 자신도 태워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 한국의 전형적인 불쌍한 맏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여럿 둔 정직한 교사인 그의 아버지나 청렴한 판사인 그나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슬픔과 눈물이 가득하던 그는 좋은 친구였다. 그와 함께 놀던 한 장면이 기억의 깊은 어둠에서 솟아올랐다. 우리는 마을 장터 뒷골목에 있는 작부집에 갔었다. 그는 항상 ‘백마는 가자울고 날은 저문데’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리고 등어리 속에 벼개를 집어넣고 미친 듯이 곱사춤을 추었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마도 법복을 입고 법정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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