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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집짓기

운영자 2024.04.01 12:28:37
조회 129 추천 1 댓글 1

다섯달에 걸친 집짓기가 끝이 났다. 낡은 집을 사서 지붕과 벽체만 남기고 다시 지은 셈이다. 일용잡부와 함께 직접 벽지들을 뜯고 쓰레기를 치웠다. 조적공, 배관공, 타일공, 전기공, 온돌놓는 사람들을 인력센터에서 직접 불러 함께 일을 했다. 시멘트부터 벽돌부터 전등까지 직접 사러 다녔다. 하나하나 유튜브로 배우면서 처음 한 일이라 애를 많이 먹었다. 나이 칠십 가까운 아내도 완전히 속칭 노가다가 됐다. 나는 요즈음 완성된 빈 집에 가서 매일 청소포로 집 전체를 깨끗이 닦는다. 내 손길이 어느 한 부분도 빠진 곳이 없이 닿게 하려고 한다. 소박하게 흰 칠로 마감한 벽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사랑이 스며들게 한다.

정직하고 깨끗한 노동으로 돈을 벌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의 감사한 밥이 되고 노년에 편안히 살 집을 마련하려고 했다. 이 집은 어쩌면 내가 저세상으로 건너가기 전의 마지막 쉼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창문으로 동해항의 푸른 물결에 햇빛이 반짝거린다. 부두의 빨간등대가 있는 방파제 쪽으로 배들이 조용히 들어오고 나가는 게 보인다. 어제는 산책을 마치고 집 앞을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나를 보고 서서 이런 덕담을 해 주었다.

“여기가 참 좋은 집터요. 아침에는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게 게 보이고 하루 종일 맑은 햇빛이 비치는 남향이요. 나도 함경도에서 내려와 자식 낳고 손주까지 키우면서 평생 이 마을에서 잘 살았다오.”

집 앞의 해안로를 건너면 동해안을 종단하는 해파랑길과 철로가 바다를 끼고 나란히 달리고 있다. 그 옆으로 하얀 파도가 몰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드넓은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전쟁 피난민의 아들로 평택의 서정리 시골 초가집에서 세상에 나온 후 참 여러 곳의 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것 같다. 휴전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가 전에 살던 신설동의 작은 일본식 목조주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거기서 서른살 무렵까지 살았다. 가느다란 나무 기둥에 판자가 걸쳐있고 그 위에 오래된 다다미가 있는 낡은 이층집이었다. 도코노마가 있고 오시이레란 벽장이름이 내게는 익숙한 추억이었다. 얇은 유리와 창호지 한장으로 밖과 분리된 그 집은 겨울이면 방안의 물이 얼어붙곤 했다. 기와가 삭고 기울어가는 그 집에서 나는 탈출하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 집은 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피부같기도 하고 익숙한 옷 같기도 한 집이었다.

지금도 가끔 도로가 되어버린 그 집이 있던 자리를 찾아가 한 참 서 있다가 오곤 한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집안의 구조가 머리속에서 생생하게 재생이 된다. 그 집에 고여있던 소리가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잠 못이루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일하는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결혼하고 그 집을 나왔다. 독립해서 처음 얻은 집이 신촌 산자락의 한 지붕 열 가족이 사는 두 평짜리 작은 방이었다. 아래층 시멘트 마당 가운데의 공동수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아침이 되면 석유풍로에 밥을 짓기 위해 양은 찜통을 가지고 물을 받아오곤 했었다.

그 다음 집은 직업장교시절 최전방인 철원의 바라크 관사였다. 눈 덮인 철원 들판의 논 사이에 있던 장교관사는 내게는 화려한 맨션 같은 집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살다가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와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나는 보일러에 매일 연탄을 갈아 넣으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삶을 즐거워 했다.

그 다음은 부천의 전세 아파트였다. 아파트가 그렇게 편리하고 좋은 집인 걸 처음 알았다. 즐겁고 감사했다. 나는 한 단계씩 좋은 집으로 발전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점심값을 아껴서 모은 돈으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었다. 아내가 둘째 아이를 둘러업고 분양추첨하는 장소마다 돌아다녔다. 열 번쯤 떨어진 후에 마침내 행운이 찾아와 마침내 서울에 내 아파트를 마련하게 됐다. 우리 가족은 감격하며 좋아했다. 아파트를 소유한다는 것이 우리 세대에서는 인생 마라톤의 종착점에 다다른 것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쨍쨍 햇빛이 내려 쬐던 인생의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이 물 위에 무늬를 그리던 시절이 가고 소리없이 눈이 내리는 삶의 겨울이 다가왔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살 집을 동해 바닷가에 만들었다. 이곳에서 살다가 조용히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집의 앞마당에 묻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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