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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운영자 2024.04.15 10:25:58
조회 56 추천 1 댓글 0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났을 때였다. 초등학교 육학년 일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될 거다”

가볍게 칭찬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판결을 선고하는 법관같이 진지해 보였다. 그 말씀이 나의 영혼에 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씨가 내 마음 밭에서 싹이 되어 나오면서 나의 용기와 믿음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사법고시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한 해에 다섯 명을 뽑은 적도 있고 보통은 삼십명 정도가 합격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했다.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산을 오른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 시험에 도전하고 싶은 치기가 솟았다. 합격하면 부자나 권력가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서울법대에 들어갈 성적이 되지 않았지만 고시에 합격하면 그 이상의 실력을 인정받을 것 같았다. 서울법대 출신의 고시낭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대학입시에서 벌써 밀렸는데 무모한 도전을 하지 말라고 했다. 집안 친척들은 그게 되는 집안이 따로 있지 우리같이 상놈 출신 집안이 되겠느냐고 말렸다. 그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나의 영혼에 마법을 걸어둔 선생님의 말씀 쪽을 더 믿고 싶었다. 나는 뭘 해도 될 사람이었다.

스무 살부터 고시에 도전했다. 당시 고시 준비생은 별별 사람이 많았다. 산속의 암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집안에 토굴을 파놓고 법서를 보기도 했다. 생활비가 없는 사람들은 일하면서 공부했다. 학원강사를 하기도 하고 공사장 일용잡부를 하면서 공부했다. 넝마주이를 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이도 있고 늙은이도 있었다. 이십대 중반무렵부터 나는 직업장교를 하면서 공부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사법시험장을 가보면 과연 내가 될까? 하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온 사람들이 모두 수재같고 시험에 목숨을 건 듯한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 모두가 어려서부터 공부선수였다. 풍선에 공기가 빠지듯 기가 죽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십 대가 끝날 무렵 나는 간신히 지옥 같던 그 턴널을 통과했다. 간절한 기도까지 보탰다. 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도 중 어떤 게 더 효력이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실력만 있다고 되는 시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하늘의 그분 덕이 더 큰 것 같다.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에 다시 도전하고 싶었다. 공직자로서의 성공이나 변호사로서의 돈과 명예와는 다른 걸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게 독서와 글쓰기라는 높은 산으로 오르는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산봉우리에는 깨달음이라는 게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올라가는 길은 여럿 있겠지만 봉우리 위에서 보는 달은 똑같을 것 같기도 했다. 평생 기도하고 명상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사서삼경을 끊임없이 읽었다. 성경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그분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게 수행인지도 모른다.


토스토엡스키, 톨스토이부터 시작해서 고시공부하듯 고전을 읽고 중요 부분을 공책에 메모했다. 한국 최고 수준의 독서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배경에는 반복되는 단순한 일을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바보도 같은 일을 삼십분은 한다. 보통 사람들도 사흘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이루는 사람은 삼 십년을 인내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십대는 직업장교를 하면서 고시 공부를 했고 삼십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대략 삼십년간은 밥벌이를 하면서 남는 시간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의 두번째 목표였던 독서와 글쓰기가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일까 아니면 아직 먼 길을 남겨놓고 아픈 발을 만지고 있는 나그네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머리가 백발이 되어 침침한 눈으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무엇이 되고 안되고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성공과 실패, 유명과 무명을 넘어서서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의미를 생각하면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이 진정한 실체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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