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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운영자 2024.04.01 12:28:59
조회 132 추천 2 댓글 1

나는 서울 아파트의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동해 바닷가에 마련한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서다. 책장에는 내가 읽고 언젠가 또 읽으려고 선정해서 보물같이 보관한 책들이 들어차 있다. 그 책들을 읽고 진한 감동을 받고 인생의 궤도를 바꾼 것 들이다. 이미 몇 차례 가진 책들을 기부하고 그중 중요한 것들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문득 저 책들을 다시 읽기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미 한쪽 눈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다른 쪽 눈은 노안으로 침침하다. 내 눈은 더 이상 독서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밧데리의 한 눈금 같은 내 삶의 남은 에너지도 그 책들을 읽을 용량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책들을 하나하나 포기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옆에 놓아둘 책이 어떤 것일까 고민한다. 문득 책을 많이 가졌던 몇 사람이 기억의 오지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흔 살의 김일두 변호사가 살아 있을 때였다. 하루는 퇴계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갔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난민같이 수북이 쌓인 책들이 나를 맞이했다. 책장을 꽉 채우고 남은 책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그 뒤에 커다란 나무 책상이 보이고 그 뒤로 김일두 변호사의 작은 얼굴이 숨은그림같이 보였다. 그가 책 무덤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책들은 다시 어디로 흘러갔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살아있을 때였다. 그는 혜화동 관사의 자기 서재를 구경시켜 주었다. 책이 워낙 많아 대부분을 수원의 도서관에 맡겨두고 자기는 일부만 골라서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일부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천정까지 닿는 여러 개의 서가에 책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분야별로 그가 수집한 자료들도  많았다. 그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그 자료들을 이용해서 책을 쓰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죽었다.

그의 채권자가 소송을 제기했다. 시장의 생전에 돈을 꾸어줬다는 것이다. 나는 유족의 대리인이 되어 소송을 맡았다. 그가 소유한 재산은 책밖에 없었다. 주인을 잃은 많은 책들이 빚에 팔려 갈 것 같았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서재에 여러 번 갔었다. 사방 벽의 책장에 그와 세월을 같이한 듯한 오래된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가 애독한 친구 같은 책들도 있고 그가 쓴 자식 같은 책들도 보였다. 실내 사다리를 타고 서가 위로 올라갈 정도로 책들은 높게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식 같은 그의 책들이 그가 보는 앞에서 화형식을 당하는 쓰린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쓴 컬럼에 대해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쓴 책들을 관속에 넣어와 그의 집 대문 앞에서 화형식을 거행하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큰 상처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 자기 책들의 묘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보니까 문득 죽은 강태기 시인이 내게 유언같이 남겨준 말이 떠올랐다. 자동차 수리공 출신으로 소년 시절 두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천재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독서와 인도 순례로 보냈다. 시를 쓰는 일이 본업이고 밥을 위해 더러더러 다른 일을 한 것 같았다. 가난하던 그는 마지막에 폐암에 걸린 채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죽었다. 그를 찾아간 내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엄형, 내가 젊어서부터 본 책들이 꽤 많아요. 그걸 도저히 좁은 임대아파트로 다 가지고 올 수 없었죠. 그리고 몸도 쇠약해져서 그 책들을 다시 읽을 기운도 없었죠.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죽는 순간까지 옆에 두고 읽을 책만 골라야겠다고 말이죠. 두 책이 선정됐는데 뭔지 알아요? 저의 경우는 신약전서와 논어 두 권이었어요.”

나는 그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내 경우는 독서를 할 때 나를 감동시킨 진리나 좋은 문장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밑줄을 치고 공책에 기록했다. 나는 내 전용 공책을 만들었다. 을지로 뒷골목의 인쇄소에 의뢰해서 주머니에 들어갈 작은 원고지 공책을 천권 만들었다. 책을 읽다가 정말 뼈 속까지 스며들게 해야겠다는 부분을 발견하면 원고지 칸에 또박또박 천천히 썼다.

그 안에는 철학도 역사도 문학도 정신세계나 경전들도 들어있었다. 그 작은 공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여갔다. 나는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짜투리 시간이 나면 읽고 또 읽는다. 그것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두고 볼 ‘내가 복음’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동안의 친구들인 책중 특히 일부분만 선택하고 나머지와는 헤어지는 날인 것 같다.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다. 나의 영혼과 인생관 그리고 삶을 바꾸어 준 좋은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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