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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덕팬픽) vagary 11

늦덕11(183.103) 2021.04.29 22: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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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혼담-현재






“...고타소가 대성통곡을 하지 뭡니까. 정말 저는 그 계집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멀쩡히 잘 자고 일어난 저를 무슨 사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 보듯 하더니 그대로 들러붙어서...”


왕자의 부푼 볼이 언젠가 숲에서 보았던 도토리를 잔뜩 먹은 다람쥐 같다.


귀엽기 그지없어서 질색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비담은 웃음만 나왔다.


들키면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화를 낼 터이니 적당히 감춘 채로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런, 우리 왕자님 아니십니까.”


왕자의 작은 몸이 움찔 떨렸다.


“...형님.”


그 부름대로,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다가오는 것은 신국 여왕의 조카이자 죽은 천명공주의 외아들 춘추였다.


왕자의 얼굴에서 아이의 해맑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나치리만큼 공손한 미소가 가득 흐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몸이 편치 않으셨다 하던데 쾌차하셨습니까?”


여왕의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귀한 신분이나, 모계쪽 항렬로는 아래인지라 가볍게 목례하는 왕자를 따라 비담도 고개를 숙였다. 


춘추 역시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얼마 전 있었던 일로 걱정을 했는데 이리 무탈하신 것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 고타소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예..?”


인사를 하다말고 던져진 춘추의 말에, 이해하지 못한 왕자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뜬다.


“..음?”


눈썹을 살짝 들어올린 춘추의 시선이 비담과 마주하자마자 알아차렸다는 듯, 아, 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고타소가 오늘도 왕자님을 귀찮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아닙니다. 조..카인걸요. 잘 해주어야지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예의 바른 태도로 마주하다가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내공의 부족을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는 모양이다. 


고타소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어딘가 삐걱대고 마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비담이 나섰다.


“춘추공. 쾌차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춘추도 왕자를 더 쫓지 않고 비담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사저에서 쉬었더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랜만에 뵙는데 감축부터 드려야겠지요? 비담공.... 백제와의 전투에서 세우신 공, 아주 잘 전해 들었습니다. 승전 감축드립니다.”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대꾸하는 김춘추는 병을 앓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언제나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저보다는 유신이 치하를 들어야지요. 저야 아주 조금 도움을 준 것 뿐입니다.”


“윤충의 목을 베었는데 조금이라니요. 그야말로 큰 전과가 아닙니까. 겸손이 과하면 기만이 되는 법입니다.”


장난 섞인 조롱마저도 전과 비슷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가다가도 꾹 눌러 참으며 비담은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었다.


“허면 이제 복귀하시는 겁니까.”


병이 다 나아 곧 복귀할 거라는 보고는 이미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이다.


지금 상태를 봐서는 당장 복귀도 가능할 듯 하지만...


“아닙니다. 오늘은 볼 일이 있어 잠깐 들른 겁니다. 쉴 수 있을 때 쉬고, 놀 수 있을 때 노는 것이 승자이지요.”


장난스레 웃으며 비담과 몇 마디를 더 주고 받은 춘추는 마지막으로 다시 왕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예? 아..예.”


무엇을 부탁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은 무탈하게 넘어가기 위해 대답하는 왕자.


그 어설픈 대답에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김춘추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 왕자에게 향한 의미심장한 시선을 놓치지 않은 비담은 춘추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어 춘추가 걸어왔던 방향을 보았다.


...인강전...인가.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바쁘게 오가는 생각을 정리하다가, 비담은 춘추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딱딱하게 서 있는 왕자를 발견했다.


“...왕자님.”


손을 뻗어 경직되어 있는 작은 어깨를 만졌다. 


그제야 왕자의 작은 몸이 움찔 떨리더니 그를 올려다본다.


비담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제야 굳어있던 왕자의 작은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퍼져간다.


춘추와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아이 같은 환한 웃음.


“음,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요? 아, 맞다. 그래서 고타소 그것이, 세희에게....”


다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투덜거리기 시작한 왕자가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비담은 이미 저 만치 멀어져간 춘추의 뒷모습에 한 번 더 시선을 준 후 그대로 왕자를 쫓아갔다.





“이대로 가면 올해 곡식 생산은 목표치를 훨씬 웃돌 것이다.”


“예, 그리 될 겁니다.”


“아직 백제만큼의 생산은 무리겠지만...이대로만 간다면 꿈도 아니야.”


여왕은 설레는 눈으로 장계를 받아 읽었다.


백제는 평야가 많아 곡식 생산량이 신국의 갑절이었고 그만큼 부국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왕은 곡식 생산에 신국의 전력을 쏟아부으면서 백제의 동향에 크게 신경을 썼으며 백제를 넘어서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가득한 그 얼굴을 응시하며 비담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왕자와 똑같은 다갈색 눈으로 똑같이 웃는 저 얼굴을 보면 저도 저절로 웃게 된다.


다음에 보고할 고구려에 대한 장계를 정리하다가, 신녀가 가지고 들어온 탕약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건네 받고서, 조용히 여왕에게 내밀었다.


흐뭇하기 짝이 없던 여왕의 미간이 일순간 확 일그러졌다.


“...아침에 마셨지 않느냐.”


“그건 아침 탕약이고 이것은 또 다른 것이지요. 시진이 지났습니다.”


여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네가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아주 쉽게 말하는구나...! 대체 탕약을 하루에 몇 그릇이나 마시라는 것이냐!”


물론 이미 비담이 사전에 예고를 해놓은 만큼 올려올 탕약의 무시무시한 변화는 충분히 인지 하고 있었다.


여왕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니니, 탕약 먹기 싫다고 떼 쓸 나이는 지났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참으로 너무하지 않는가.


세상에 쓴 탕약을 좋아할 이 누가 있는가.


아이든 노인이든, 여인이든 사내든 쓴 탕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나 그녀는 원래 쓴 탕약을 아주 싫어한다!


헌데, 시간이 갈수록 먹는 탕약은 가짓수를 늘려가고, 쓴 맛도 비례해서 늘어만 가니 이것을 어떻게 참겠는가..!


써도 써도 어찌 이렇게 쓰고 맛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시고 돌아서면 탕약, 또 탕약..!”


참지 못하고 기어이 불평을 토로하는 여왕에게 비담은 부드럽게 답했다.


“겨우 여섯 그릇입니다.”


“겨.우.?”


그 깔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제 일이 아니라고 아주 막 나가는구나..!


내가 요즘 너에게 너무 잘 해줬다, 그렇지?


진짜 해보자는 것이냐, 이를 가는 여왕에게 이번에도 비담은 다과를 준비해놓았습니다, 달래듯 답할 뿐이다.


그 몰골이 너무도 곱고 부드러워 멋 모르는 여인을 듣기 좋은 말로 꾀어내는 난봉꾼 같다.


저리 눈웃음 살살 흘리며 꾀어내면 철 없는 소녀든, 지체 높은 귀부인이든 자신도 모르게 홀라당 넘어가 돈이고 마음이고 다 주고 밤시중까지 기쁘게 들어올릴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가장 많이 당한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왕은, 죽일 듯 노려보다가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먹지 않을 것이다. 들고 나가거라.”


“진정, 드시지 않을 것입니까.”


“진정, 아니 먹을 것이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굳은 의지를 담아 살벌하게 답한 여왕은 곧 장계에 눈을 고정하고 비담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담은, 그럼, 할 수 없지요, 하더니 마침내 탕약이 든 잔을 물렸다.


...웬일이지? 저것이 저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없는데.


이미 여러 번 실랑이를 했던 과거 전적을 떠올리며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기세에서 지면 다 진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여왕은 모르는 척 장계에 집중했다.


장계를 다 읽고 정리 한 후 고구려에서 세작들이 올려온 다음 장계에 손을 뻗는 순간.


깨달았다.


역시나 이 놈은 쉬이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뭐하는 짓이냐.”


“예?”


부드럽게 미소짓는-그러나 여왕의 눈에는 한없이 능글스러운-비담을 노려보며 여왕은 거칠게 쏘아붙였다.


“나는 아직 장계를 다 보지 못했다. 헌데 어찌 치우느냐고 물었다..!”


그 말대로 여왕이 아직 읽지 않은 여러 개의 장계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비담.


공손히 고개 숙이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소신은 폐하의 신하로서, 오직 폐하만을 전심전력으로 보필하고 있으며 그것이 소신의 사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탕약을 마시지 않겠다 하시니, 폐하의 안위에 누가 될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장계를 보는 무거운 일을 하시는 것을 신은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보시지요. 한 일주일 쯤 뒤에 가져오겠습니다.”


“...오늘 꼭 봐야 할 장계만 추려왔다 한 건 너였다, 비담.”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따위 장계와 폐하의 옥체를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 숙이더니 우아하게 정리를 마저 하여 가지고 나가려 한다.


저게...정말.....!


“...네가 지금 나와 해보자는 것이냐.”


짜증을 내며 이를 가는 여왕에게, 비담은 방긋 웃어보였다.


“소신이 어찌 폐하께 대어들겠습니까. 소신은 오직 폐하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을요.”


“그런데 감히 내 말을 거역해? 내, 너를 사량부령 자리에서 당장 내칠 것이다!”


여왕의 고함에도 비담은 한 치의 동요도 없다.


“저 같이 유능한 사량부령을 자리에서 내치시면. 당장 내일 폐하가 보셔야 할 장계가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의 열 배는 넘게 늘 것입니다. 당장 폐하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다 모일지도 알 수가 없구요. 또한...월성의 검귀라 불리는 저 없이, 저 말도 안 듣는 귀족들을 어찌 제압하시렵니까? 유신도, 알천도, 서현공도...불가능하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그 점잖은 인사들이 어떻게 폐하의 입맛에 맞게 일을 딱딱 처리하고, 상황에 맞게 귀족들을 요리해올리겠느냐며, 어깨를 으슥한다.


그 당당한 청산유수에 말문이 딱 막혔다.


항상 그녀의 편만 들어주어서 몰랐는데 막상 적이 되니, 저리도 얄밉게 입을 놀리는구나.


매번 비담에게 당하여 얼굴을 구기는 신료들의 마음이 백분 이해가 되었다.


그 능글스러운 얼굴을 보니 여왕도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사내란 원래 저런 것인지, 아니면 비담 저 이만 저런 것인지.


처음엔 진정 순진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능구렁이 100마리 저리 가라다.


그 얄미운 얼굴을 보니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이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소신은 반역도 할 수 있습니다.”


“반역을 저지르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수 천명의 대병에게 공격 당해 활을 맞고 검이 뚫어 비참하게 흙구덩이에 쓰러져 죽는데도. 폐하를 위해서라면 손톱만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쯤 되니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능글스레 받아치면서도 그의 두 눈은 더없이 깊고 진중했다.


농을 하면서도 진지한 맹세를 늘어놓는 재주는 정말 저 이 만한 사람이 없다.


결국 여왕은 이번에도 져주기로 했다.


저기에 있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정말로 반역을 해서 수천 명의 대병에게 공격 당해 활을 맞고 검이 뚫어 비참하게 흙구덩이에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르는 사내가, 헛짓거리를 저지르기 전에.


“...가지고 오너라.”


한숨을 푹 쉬며 체념하고 손짓하자 비담이 빙긋 웃으며 넙죽 탕약 그릇을 대령했다.


다시 한 번 얄미움이 북받쳐 오르지만, 어쩌겠는가. 


저런 사내를 선택하고 만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우울하게 탕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물론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욱 더 쓰구나.


차마 다 마시지 못하고 중간에 입을 떼어내고 마는 여왕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있다.


그런 여왕의 입가로 다과가 다가왔다. 


여왕이 슬쩍 눈을 돌리자 비담이 웃으며 다시 한 번 다과를 입 가까이 밀었다.


여왕은 가만히 보다가 살짝 입을 열어 다과를 입에 물었다.


짧게 씹은 후 넘기자, 이번에는 하얀 면을 들어 입가를 닦아준다.


...시간이란 신기한 것이다.


한때는 도통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던,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와 같던 남자가 어느새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다.


그녀가 아는 그녀를 알고, 그녀가 모르는 그녀도 아는 채로.


탕약을 다 마신 여왕이 잔을 내려놓고서 쓰게 웃었다.


“..심통의 간격이. 점점 더 짧아지는구나.”


미소짓고 있던 비담의 얼굴이 굳어졌다.


“선황...아버님께서. 무던히도 고생을 하셨지. 후회가 돼. 많이 힘드셨을 텐데..조금 더 오래 곁을 지켜드릴 것을. 조금이라도 더 힘이 되어드릴 것을.”


쓰게 웃는 여왕의 작은 손이 떨리는 것을 비담은 놓치지 않았다.


죄책감, 초조함, 불안함, 두려움, 공포.


최근 들어 더욱 여왕을 흔들어대는 그 감정들이 다시금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하얗고 고운, 작은 손을 그의 검게 탄 큰 손으로 덮었다.


“선황과 폐하는 다릅니다.”


그 확고한 말에 무엇이 다른지 여왕이 시선으로 묻는다. 


비담은 잔잔히 미소지었다.


“폐하 곁에는 이 비담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작은 손을 잡은 큰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꽉 쥐어진 손으로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열기가 전해진다.


그것이...지금 이 순간, 참으로 좋다.


그래, 시간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버림 받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애타게 손을 내밀던 네가 어느새 이렇게 단단한 사내가 되어서...이번에는 나를 지탱하여주는구나.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이 지친 마음을, 지쳐 쓰러지려 하는 몸을 지탱해주는 구나.


그녀는 그의 큰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껴서 마주 잡은 손.


작고 큰 손에 모두 결코 놓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담겨있다.


마침내 여왕은 그녀의 마음 속에 침잠하고 있던 고민 하나를 비담 앞에 꺼내어놓았다.


“실은...방금 춘추가 다녀갔다.”


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아까 왕자님을 뫼시고 가다가 뵈었습니다.”


“묻지 않느냐?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인지.”


여왕의 물음에 비담은 담담하게 웃었다.


“제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폐하께서 말씀해주시겠지요. 말씀하시지 않는다면...제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일 테고요.”


그리 답은 하였으나 짐작은 갔다.


일단은, 드디어 제 놈이 완쾌하였다, 안부 인사를 하러 온 것일 테지.


아아, 진흥대제는 진정 고약하고 차별을 제법 하는 노친네가 틀림없었다.


틀림없이 같은 핏줄인데 아파서 10년을 앓아누워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그 놈은 냉큼 완치시켜놓고선 황금산보다 더 귀한 제 정인은 이리 고생을 시키고 있지 않은가...!


쓸모 없는 노친네.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던지며 비담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여왕이 손을 흔들자 궁인들과 신녀들이 일사분란하게 방을 떠났다.


그들 모두가 나가자마자 여왕이 입을 열었다.


“춘추가...매듭을 짓자고 하더구나.”


역시.


춘추가 왕자에게 던진 말과 시선으로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비담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물었다.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여왕은 한숨을 쉬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어렵게 말했다.


“승낙...해야겠지. 고타소와...인아를 혼인시킬 수밖에....”


이조차도 예측하고 있었던 비담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여왕을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여왕이 힘없이 웃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않는구나. 너는...이 혼사를 싫어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한 마디는, 싫은 소리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폐하께서 심사숙고해서 내리신 결정이시잖습니까. 이것이 최선이라 결정하셨다면, 최선인 거겠지요.”


비담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그 말대로 여왕은 이 일로 몇 년을 고민했다.


심사숙고하고 한 번 또 한 번 고민하며 내린 결론이니 비담은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혼인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은 분명했으니까.


싫고 좋고는, 그 다음 문제다.


“그 말대로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그리 말을 하면서도 여왕의 얼굴에는 근심과 미안함,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인아가 잘 받아들여줄지...아직 아이인데.”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하더라도, 이 길 밖에 없다 결론 내리면 가차없이 밀어붙이는 여왕이다.


그러나 그녀도 어미인지라 자식 문제에서는 망설이고 약해지게 된다.


직전 만나고 왔던 왕자의 모습을 떠올리니 씁쓸하기는 비담도 마찬가지였다.


고타소에 대한 불평 불만을 잔뜩 늘어놓으며 아주 질색 팔색을 했더랬지.


아이들이야 원래 변덕이 죽 끓듯 하니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서 자라나면 마음이 변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스승 문노의 뜻대로 함께 자랐다면 어렸을 때부터 혼인을 노래 불렀을 것이고, 어린 아이일 때 만났어도 틀림없이 여왕에게 한 눈에 반했을 거라 믿는 비담으로서는, 질색하는 소녀와 연을 맺게 된 아들이 안쓰럽기는 했다.


무엇보다.......................춘추.


“..어려도 사리 분별을 하시는 분입니다. 받아들여 주실 겁니다.”


어쨌거나 고타소는 그, 김춘추와 그, 보량의 딸답게 미모만큼은 천하절색이었다.


아직 나이 어린데도 그 정도이니 자라서는 신국 제일미는 따다 놓은 당상이라 소문이 자자했고 화랑들과 낭도들 중에도 따르며 흠모하는 자가 제법 된다 들었다.


물론 미모와 호감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고, 꼭 함께 상승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비담도 모르지는 않았다.


미모와 호감도가 비례한다면, 김춘추, 그 미친 놈에 대한 반감이 수그러들어야 정상이지,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솔직히 고타소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이유가 가장 컸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만 아니라면....김춘추 놈의 딸에게 그의 귀하디 귀한 하나뿐인 아들을 장가 보내는 일 따위는 절대로! 죽어도! 그의 눈에 흙이 들어와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아.


짧은 한숨으로 그 모든 마음을 숨긴 채, 비담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 속이야 어찌되었건 지금은 여왕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염려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다정하면서도 힘 있게 지지해주는 비담을 보니 여왕도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쨌거나 고타소는 활달하고 어여쁜 아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아이인데다 어린 시절부터 인아와 함께 하여 쌓은 정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이 혼인이 가져오는 좋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애써 웃어보이며 여왕은 비담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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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075 비덕 편집했던 장면 중 정말 아까웠던 씬 [7] ㅇㅇ(118.235) 20.09.27 2800 31
384066 마지막(미실×비담) [4] 보름달(119.207) 20.09.25 137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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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023 현대판 비담×춘추 [3] 보름달(119.207) 20.09.23 1508 23
384022 현대판 비담×덕만 [11] 보름달(119.207) 20.09.23 2667 36
384020 유튜브 덕만-비담 장면 모아놓은 편집본 [7] ㅇㅇ(118.235) 20.09.23 1873 23
384011 밤새 울었더니 눈이 잘 안떠져 [9] ㅇㅇ(211.36) 20.09.22 109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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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96 나는 덕만이 왕이 된 이후 에피소드들을 계속 반복해서 봐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9.14 1470 27
383995 본방으로 보던 급식 때와 유튜브로 보는 학식 때랑 느낌이 다르다 [3] ㅇㅇ(211.48) 20.09.13 1123 29
383936 일식은 다시 봐도 명장면이다 [3] ㅇㅇ(1.232) 20.08.22 924 16
383925 선농제(2) [5] ㅇ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10 476 11
383903 아직도 매일 글들이 올라오는 갤이라니 [12] 따사로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27 142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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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00 힐링되는 그림 [4] ㅎㅎ(1.221) 20.07.24 1443 27
383899 비덕 스토리짤 [5] ㅎㅎ(211.246) 20.07.19 2529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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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892 마지막화 후유증 남을 때 보면 좋을 비덕 팬픽 [9] ㅎㅎ(1.251) 20.07.16 5665 67
383889 선덕여왕은 항상 고구마- 사이다 서사가 너무 좋음 [4] ㅇㅇ(39.121) 20.07.14 1247 29
383884 알천덕만 상플) 봄은 다시 오고 1 [6] 절편(211.222) 20.07.13 10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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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877 처음 좋아했던 캐릭터를 안 바꾸고 계속 좋아하는 갤러있나 [16] 비덕비덕(39.7) 20.07.03 1398 28
383876 이제 와서야 느낀건데 미실ㅡ설원 케미도 쩐다 [5] 비덕비덕(39.7) 20.07.03 1527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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