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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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중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에는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금처럼 PC통신이나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 관련 잡지도 몇 종류 없던 때였고, 그나마 중학생의 용돈으로는 고가의 잡지는 구입하기에 버거웠다.
컴퓨터 매장에 가서 기웃기웃 거리다가 주워듣는 것이 그나마 가장 큰 정보 입수 방법이었는데 당시에는 세운상가가 국내 컴퓨터계의 메카였기 때문에 필자는 학교가 끝나면 세운상가에서 뺑뺑뺑 도는 것이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세운상가 4층에는 그야말로 번쩍번쩍한 컴퓨터들이 즐비했다. 8비트의 애플 호환 컴퓨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복도 밖에 전시를 해 두어 필자 같은 꼬꼬마들도 만질 수 있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갖고 놀았다.
세운상가에만 가면 머리가 맑아지고 배우는 것도 많아 좋았지만 세운상가가 꼭 신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잇는 2층의 구름다리에 항상 무시무시한 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형들은 동네마다 우글우글 댔던 깡패 형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돈을 빼앗진 않았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성희롱을 해댔다.
돈을 빼앗는 깡패 형들은 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인데 세운상가의 형들은 무서운 목소리로 ‘빨간책’을 보여주며 사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분명히 컴퓨터 구경을 갔는데 이 형들은 도무지 필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야야~ 중삘아! 여기 오는 놈들 다 그렇게 말해. 얼마 갖고 왔어? 가격에 맞춰줄게.”
“센타 까서 돈 나오면 나온 만큼 준다.”
와 같은 식으로 협박했다. 그나마 양심은 있다고나 해야 할까? 공짜로 돈을 빼앗겠다는 말은 안했다.
이 형들은 주로 미국 누드 잡지인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를 팔았는데 한 권에 삼천 원에서 비싸면 만 원까지 했다. 그러나 한달 용돈으로 천 원 남짓 받는 중학생이 그런 거금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몇 번 주머니를 뒤져 보다가 이, 삼백 원밖에 없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내주곤 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겼다. ‘빨간책’ 사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주질 않으니 아예 책 사러 왔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삼백 원만 꺼내 보내주면 됐다. 모두들 그냥 “꺼지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떡볶이 백 원어치 사먹으려고 하던 필자를 또 붙잡은 형이 있었다. 책 사러 온 거 아니라고 말하면 한참 실랑이를 벌일 것 같아서 대뜸 책 사러 왔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삼백 원을 꺼내 보여줬다. 조그만 손바닥 안의 삼백 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쁜 형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제길~ 개시도 못했는데...”
하며 필자의 삼백 원을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를 한 권 집어 들더니 못생긴 흑인 아가씨가 나오는 사진 두 장을 북북 찢어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배가 무지 고파서 최소 백 원은 있어야 떡볶이를 사먹을 수 있는데...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그렁그렁 눈물을 보이니 그 형이 아주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아. 인마. 그 나이 때는 다 보고 싶은 거야. 삼백 원에 이런 걸 어디서 구하니? 이거 형은 이제 팔지도 못해. 이 형이 고맙지? 나도 어릴 적엔 다 그랬다. 나중에 돈 좀 더 들고 오면 이 형이 아주 새끈한 거 준비해 놓을게”
그러면서 필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울면서 집에 돌아온 필자는 그날 저녁 아무 생각 없이 벗어놓았던 바지 안의 사진을 발견하신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두들겨 맞았다. 돈 뜯기고, 배고프고, 매 맞고... 아주 처량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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