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옛날컬럼] 세운상가.

김유식 2010.11.19 19:06:22
조회 16392 추천 22 댓글 49


  2004년 컬럼입니다.

  ----------------


  필자가 중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에는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금처럼 PC통신이나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 관련 잡지도 몇 종류 없던 때였고, 그나마 중학생의 용돈으로는 고가의 잡지는 구입하기에 버거웠다.


  컴퓨터 매장에 가서 기웃기웃 거리다가 주워듣는 것이 그나마 가장 큰 정보 입수 방법이었는데 당시에는 세운상가가 국내 컴퓨터계의 메카였기 때문에 필자는 학교가 끝나면 세운상가에서 뺑뺑뺑 도는 것이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세운상가 4층에는 그야말로 번쩍번쩍한 컴퓨터들이 즐비했다. 8비트의 애플 호환 컴퓨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복도 밖에 전시를 해 두어 필자 같은 꼬꼬마들도 만질 수 있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갖고 놀았다.


  세운상가에만 가면 머리가 맑아지고 배우는 것도 많아 좋았지만 세운상가가 꼭 신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잇는 2층의 구름다리에 항상 무시무시한 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형들은 동네마다 우글우글 댔던 깡패 형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돈을 빼앗진 않았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성희롱을 해댔다.


  돈을 빼앗는 깡패 형들은 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인데 세운상가의 형들은 무서운 목소리로 ‘빨간책’을 보여주며 사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분명히 컴퓨터 구경을 갔는데 이 형들은 도무지 필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야야~ 중삘아! 여기 오는 놈들 다 그렇게 말해. 얼마 갖고 왔어? 가격에 맞춰줄게.”


   “센타 까서 돈 나오면 나온 만큼 준다.”


와 같은 식으로 협박했다. 그나마 양심은 있다고나 해야 할까? 공짜로 돈을 빼앗겠다는 말은 안했다.


  이 형들은 주로 미국 누드 잡지인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를 팔았는데 한 권에 삼천 원에서 비싸면 만 원까지 했다. 그러나 한달 용돈으로 천 원 남짓 받는 중학생이 그런 거금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몇 번 주머니를 뒤져 보다가 이, 삼백 원밖에 없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내주곤 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겼다. ‘빨간책’ 사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주질 않으니 아예 책 사러 왔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삼백 원만 꺼내 보내주면 됐다. 모두들 그냥 “꺼지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떡볶이 백 원어치 사먹으려고 하던 필자를 또 붙잡은 형이 있었다. 책 사러 온 거 아니라고 말하면 한참 실랑이를 벌일 것 같아서 대뜸 책 사러 왔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삼백 원을 꺼내 보여줬다. 조그만 손바닥 안의 삼백 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쁜 형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제길~ 개시도 못했는데...”


하며 필자의 삼백 원을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를 한 권 집어 들더니 못생긴 흑인 아가씨가 나오는 사진 두 장을 북북 찢어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배가 무지 고파서 최소 백 원은 있어야 떡볶이를 사먹을 수 있는데...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그렁그렁 눈물을 보이니 그 형이 아주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아. 인마. 그 나이 때는 다 보고 싶은 거야. 삼백 원에 이런 걸 어디서 구하니? 이거 형은 이제 팔지도 못해. 이 형이 고맙지? 나도 어릴 적엔 다 그랬다. 나중에 돈 좀 더 들고 오면 이 형이 아주 새끈한 거 준비해 놓을게”


그러면서 필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울면서 집에 돌아온 필자는 그날 저녁 아무 생각 없이 벗어놓았던 바지 안의 사진을 발견하신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두들겨 맞았다. 돈 뜯기고, 배고프고, 매 맞고... 아주 처량했던 하루였다.

추천 비추천

22

고정닉 3

1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인과 헤어지고 뒤끝 작렬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2 - -
268 제가 떼돈 벌던 시절의 게임기. [1183] 김유식 18.07.30 109442 604
231 [컬럼] 인터넷에 부는 홍어(洪魚) 매카시즘 [869] 김유식 14.05.15 274419 922
228 [횡설수설] 태국 방콕 카오산 동대문식당 짬뽕 [312/2] 김유식 13.06.16 36746 80
227 [횡설수설] 디시인사이드의 야후코리아 인수설. 그 내막. [200] 김유식 12.10.21 35535 158
226 [횡설수설] 2CH의 니시무라 히로유키. [152] 김유식 12.05.09 61001 241
224 [횡설수설] 강의석 씨의 절박한 옥중 단식 투쟁. [369] 김유식 11.09.21 26038 48
223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의정부 교도소에서 온 편지. [83] 김유식 11.09.12 28714 34
222 네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898] 김유식 11.07.25 227711 175
219 [횡설수설] 출간. [683] 김유식 11.06.28 40306 21
218 [컬럼] 신보수 네티즌의 등장. [399] 김유식 11.03.14 41412 66
217 [횡설수설] 여행. [474] 김유식 10.12.22 42085 23
216 [옛날컬럼] 화가 나는 경영지침서. [136] 김유식 10.12.15 34782 36
215 [옛날컬럼] 커뮤니티 사이트 운영. [97] 김유식 10.12.10 21706 35
214 [옛날컬럼] 기업 메일 브랜드화? [157] 김유식 10.12.07 14355 14
213 [컬럼] 종북주의자들의 어불성설. [425] 김유식 10.12.03 29046 113
212 [옛날컬럼] 삶의 가치. [71] 김유식 10.11.30 17812 29
211 [옛날컬럼] 온라인 사기. [97] 김유식 10.11.26 23336 46
210 [옛날컬럼] 술버릇. [77] 김유식 10.11.23 17255 18
209 [옛날컬럼] 싱하형. [87] 김유식 10.11.22 162384 75
[옛날컬럼] 세운상가. [49] 김유식 10.11.19 16392 22
207 [옛날컬럼] 국가보안법. [57] 김유식 10.11.17 22490 78
206 [옛날컬럼] 500원. [53] 김유식 10.11.16 18396 29
205 [옛날컬럼] 펀딩 브로커. [42] 김유식 10.11.15 11435 13
204 [옛날컬럼] 초심. [84] 김유식 10.11.12 11822 10
203 [옛날컬럼] 채용. [46] 김유식 10.11.11 13919 22
202 [옛날컬럼] 러시아 아가씨 술집. [77] 김유식 10.11.10 50870 92
201 [옛날컬럼] 그들이 온다. [45] 김유식 10.11.09 10895 7
200 [옛날컬럼] 용팔이. [45] 김유식 10.11.08 17890 18
199 [옛날컬럼] 가격표기 오류 2. [43] 김유식 10.11.05 11753 6
198 [옛날컬럼] 가격표기 오류. [54] 김유식 10.11.03 13775 12
197 [옛날컬럼] DDR [90] 김유식 10.11.01 31113 46
196 [옛날컬럼] 악플러. [84] 김유식 10.10.29 16760 21
195 [옛날컬럼] 유두의 균열. [51] 김유식 10.10.28 22221 67
194 [옛날컬럼] 박살난 휴대폰. [36] 김유식 10.10.27 11486 11
193 [옛날컬럼] 게임머니. [41] 김유식 10.10.26 10435 8
192 [횡설수설] 최악의 크리스마스. [122] 김유식 10.10.12 15746 9
191 [횡설수설] 궁금한 거. [60] 김유식 10.10.07 12292 10
190 [횡설수설] 여자 교생선생님. [104] 김유식 10.10.04 34092 45
189 [횡설수설] 가끔씩 생각 나는 돼지. [81] 김유식 10.10.02 16446 8
188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출소 후 이야기. [175] 김유식 10.09.16 31127 31
187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6 "출소" 끝. [142] 김유식 10.09.09 28579 22
186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5 "항소심 선고공판" [69] 김유식 10.09.08 15258 10
185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4 [25] 김유식 10.09.07 10091 3
184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3 "탄원서" [34] 김유식 10.09.07 11200 6
183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2 "항소이유서" [49] 김유식 10.09.07 12024 4
182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1 "공판 하루 전" [62] 김유식 10.09.06 11090 3
181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20 "교화지원금" [70] 김유식 10.09.03 13405 4
180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19 "박도사의 예언" [44] 김유식 10.09.02 11285 4
179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18 "장오의 취직" [33] 김유식 10.09.01 10852 6
178 [영구네집 이야기 시즌 2] 서울구치소 117 "목포 김 회장" [34] 김유식 10.08.31 11013 6
12345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